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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27화 (3/280)

27화 또 다른 선임

“전쟁은 결국 승리했지만… 주인님은 모든 걸 잃었죠.”

그 시점에서, 레이라의 표정은 극적으로 어두워졌다.

나는 분위기 맞춰주기 위해 세상에서 제일 슬픈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전쟁에 휘말린 주인님 휘하의 병사들이나 기사들이 죽어나갔고. 그나마 남아있던 영지민도 전쟁통에 몰살당했어요. 성은 폐허가 됐고 바람에선 피냄새가 묻어났어요.”

“상처뿐인 승리라 이거군.”

“네. 그리고 그윈도… 모든 걸 잃었어요. 친구. 동료. 그리고 위명까지. 얻은 거라곤 죽어가는 용사들에게 들은 배신자라는 오명뿐이었죠.”

“…….”

“그리고 그 뒤로 그윈은 이상해졌어요. 네. 이상해졌죠.”

레이라는 먼곳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를 상기하는 듯했다.

그녀의 표정에는 일견 두려움이 비쳤다.

“어느 날부터인가. 주기적으로 일어나던 용사의 소환이 거짓말 같이 뚝 끊겼어요.”

레이라가 건조하게 내뱉는 그 말로 나는 전후사정을 대충 파악했다.

다음 내용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레이라는 내가 예상한 그대로의 시나리오를 내뱉었다.

“소환주기가 될 때마다 그윈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나중에야 나타나곤 했어요. 그리고 언제나 혼자 미친 사람처럼 벽을 보고 중얼거리더군요. 가끔은 자해를 하거나… 저를 못 알아보고 괴성을 지르기도 했어요.”

레이라의 말에 따르면, 감옥 속 괴한… 그윈이 광증을 보이기 시작한 건 전쟁이 벌어진 직후가 아니다. 그 뒤로 서서히 미쳐갔다.

그 사이 서서히 미쳐갈만한 어떤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 그래서. 그 양반의 여자친구 씩이나 되는 당신은 무얼 했고?”

“그게 반복되니, 저는 그의 뒤를 밟았어요. 걱정됐으니까요. 그리고 목격했죠.”

“소환된 용사들을 학살하고 있디?”

내 입에서 정답이 튀어나와서인지 레이라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나를 크게 뜬 눈으로 쳐다보던 레이라가 이내 피식, 병든 웃음을 흘렸다.

“네. 맞아요. 한 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이고 있었어요. 그리고 하수도 남쪽 수로 끝자락에 쌓아놓더군요.”

“오우야.”

“그래요. 지금 제가 하는 것처럼.”

레이라는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아마 딴에 위협한다고 그런 듯한데. 나 이미 전생에서 그거 다 봤다. 안 쫀다. 어딜 야려 야리긴.

내가 별 반응이 없자 레이라는 흥미가 식었는지 피,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한다.

“그윈은 서서히, 하지만 착실히 미쳐갔어요. 점점 자신도 통제할 수 없게 되었죠. 결국 그는 스스로를 감금했어요. 그리고 그윈의 유지는… 제가 이었죠.”

그 말을 끝으로 레이라는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야기가 끝났다. 그것이 이 성에 얽힌 용사들의 내막이었다.

'그래. 아주 자아알 알았다.'

그윈에게 처형자니 배신자니 하는 이명이 붙은 이유.

산 사람이 세 명뿐인 이 성의 꼬라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왜 이 여자는 갓 소환된 내게 그리 적대적이었는지.

전부 이해됐다.

다만,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오히려 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하나 생겼다.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용사들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변경백 본인이잖아.’

한 줌 남았던 영지민들을 잃고.

자신에게 목숨을 바쳐줬던 결사대원들을 잃고.

목숨보다도 소중히 했다는 아내를 잃었다.

나는 썩어 문드러지고 벌레가 기어가는 부인의 손조차 소중하게 어루만지던 변경백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아마 레이라의 말은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용사인 나한테…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이건 뭔가 있다.

이 내막을 듣고도 변경백의 호의가 순수한 의도라고 생각하기엔, 거기까지 호구는 아니다.

새삼 변경백에게서 느껴지던 압도적인 기백이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내일부터 있을 마족사냥도 방심할 수 없겠구만. 나는 침음을 흘렸다. 고생길이 너무 훤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창 걷고 있을 때였다.

“… 세요.”

나는 문득 그런 목소리를 들었다. 멍하니 걷던 나는 순간 심장이 요동치는 걸 느꼈다.

그 목소리가, 들려오면 안 될 곳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 * *

“…… 세요.”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지상으로 가는 계단까지 얼마 남지 않은 곳이었다.

'착각인가?'

퍼뜩 고개를 돌려봤지만 거기엔 어둠에 잠긴 감옥 창살만이 있을 뿐이었다.

기분 탓이겠지. 스스로 되뇌인 나는 멀어지기 시작한 레이라를 쫓아갔다.

아니. 쫓아가려 했다.

하지만 왜,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호기심이 사람 죽인다고.

장담하는데, 난 언젠가 이 호기심 때문에 호되게 당할 거 같다.

신빙성 꽤 높은 예언이다.

“야. 레이라.”

나는 문제의 창살 앞에서 레이라를 불렀다.

레이라는 나를 돌아봤다. 내가 선 곳을 눈에 담더니 유난히 표정이 굳었다. 나는 그 반응으로 확신했다.

무언가 있다. 여기에는 내게 말하지 못할 무언가가 있다.

나는 바로 옆에 있는 감옥 창살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들어있는 건 누구야?”

레이라는 굳은 표정을 풀고 피식 웃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잖게 대꾸한다.

“똑같죠 뭐. 그냥 언데드예요. 왜요?”

“똑같은 언데드인데, 얘는 우릴 보고도 발광을 안 하길래.”

“…….”

내가 가장 먼저 위화감을 느낀 건 바로 그거였다.

다른 창살에는 지금도 언데드들이 달라붙어 우리를 잡아 잡수려고 발광을 하고 있다. 뒤에서 나무 긁는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하지만 내 옆에 있는 창살은 너무 조용하다.

심지어 그 흔한 신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레이라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이 사라졌다. 그 급격한 표정변화가 유난히 섬짓했다.

“… 다리가 잘린 언데드인가 보죠.”

그녀는 일말의 어조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일종의 강요였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라고 내게 종용하는 것이다.

제길. 나의 든든한 빽 변경백님. 내게 용기와 힘을 주십쇼.

나는 지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잠깐 랜턴 좀 줘봐. 확인하게.”

“이봐요. 후배님.”

“왜.”

“눈치도 적당히 없으셔야죠. 몰라도 되는 걸 굳이 알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시나요.”

이젠 대놓고 협박을 한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녀에게서 압박감이 짙어진다. 적어도 하나는 확실해졌다. 이 안에는 진짜 언데드가 아닌 무언가가 있다.

천천히 다가오는 레이라와 내 사이가 점점 가까워지던 그 무렵.

“살… 주… 세요.”

들었다.

똑똑히 들었다.

심하게 갈라졌지만, 분명히 여자의 목소리였다.

나무 긁는 언데드 소리가 아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퍼뜩 레이라를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은 창살 너머 어둠으로 향해 있었다. 칫, 하고 그녀가 짧게 혀를 찼다.

“정말 더럽게도 질기네. 3년이나 아무것도 안 먹은 채로 살아있다니. 저게 무슨 용사야. 그냥 괴물새끼잖아.”

나는 그 반응에 아연실색해졌다. 저 안에 들어있을 법한 사람의 정체가 뇌리를 스쳤기 떄문이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물었다.

“설마해서 묻는데 말이야.”

“예.”

“저 안에 들어있는 거. 전에 소환됐던 용사냐?”

레이라는 특유의 반쯤 뜬 눈으로 나를 스윽 쳐다본다. 그러더니 방금 전처럼 가볍게 고개를 끄덕, 주억거렸다.

“네. 왜요. 문제라도?”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녀의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뭐라 반박해야 할지, 머리가 새하얘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에 들어있는 게 정말 용사라면. 내가 해야될 일은 자명하다.

나는 그녀에게 퍼뜩 손을 내밀었다.

“랜턴. 그리고 열쇠.”

“제가 왜요?”

“랜턴. 열쇠. 빨리.”

“착각하지 말아요 후배님.”

레이라가 하, 하고 코웃음 치는 게 들렸다.

다음 순간, 순식간에 레이라가 가까워졌다. 정신차렸을 땐 이미 레이라가 내 목을 틀어쥐고 있는 상태였다.

꾸드득. 내 목이 아작나는 소리가 서라운드로 들려온다.

“크… 헉!”

그런 와중에 그녀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뇌리로 쑤셔박혔다.

“내가 당신 종년인가요? 왜 내가 따를 거라고 생각하죠? 죽이고 싶은 것도 주인님 때문에 간신히 참고 있는 마당인데.”

“…… 컥. 크… 크학.”

“아니지. 이참에 죽여 드릴까요? 쓰레기 같은 용사 나부랭이 주제에… 감히 날 속이고 이 성에 발을 들이밀다니. 솔직히 괘씸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잘 거 같거든요.”

나는 힘이 좀처럼 들어가지 않는 손을 허겁지겁 움직여 주머니를 뒤졌다. 곧장 잡히는 것을 레이라의 앞에 들이밀었다.

“이건….”

레이라가 놀란 듯 탄성을 내지른다. 그녀의 손아귀에서 힘이 실시간으로 빠져나갔다.

“이… 손, 놔!”

내가 내민 건, 다름 아닌 이 할센베르크 요새의 엠블럼이었다.

변경백이 내게 직접 건네준 물건이다. 자신과 함께 마족을 사냥할 사람이라는 표식이라고 했다. 그 의미를 레이라도 알 것이다.

나를 죽이면 주인의 사냥 동료를 죽이는 셈이다.

그녀는 나를 죽일 수 없다.

“… 재수 없는 용사 같으니.”

레이라가 대놓고 경멸에 찬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바닥에 나를 내팽개쳤다.

우당탕. 수없이 구른 뒤에야 나는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삭신이 욱신욱신 쑤신다.

“크으으….”

철그렁. 간신히 몸을 추스르는 내 앞에 열쇠와 함께 랜턴이 굴러왔다.

내가 얼떨떨하게 레이라를 쳐다보자, 그녀는 인상을 팍 찡그리더니 곧장 계단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후배님 실력이면 어차피 내일 사냥에서 죽을 게 뻔하니까. 그 때까진 어디 마음대로 해보세요.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레이라는 계단을 오르기 직전, 간신히 랜턴과 열쇠를 주워드는 나를 보더니 한 마디 던졌다.

“어쩌면 주인님도 그걸 노리고 당신을 사냥에 데려가는 건지도 모르죠. 후후후.”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는 말투다.

내가 아니꼽게 쳐다보니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곤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레이라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진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열쇠를 짤랑거리며 신중하게 철창에 하나씩 갖다 대보기 시작했다.

“… 후우. 내가 옳은짓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제발, 레이라와 대놓고 적대한 값어치를 하는 사람이 나오길 바란다.

속으로 간절히 바라던 찰나. 철컥, 격철음과 함께 열쇠가 맞물려 돌아갔다.

나는 천천히 창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을 한 번 삼킨 뒤, 랜턴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음습한 내부가 밝혀진다. 감옥 중앙에, 누군가 쓰러져 있다.

반라의 여성이었다.

“살… 려… 주세… 요….”

창살 밖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 내게 손을 뻗는 여자가 하나 있다.

푸석거리는 검은 장발에 초점이 혼탁한 검은 눈. 굉장히 동양적인 얼굴이 인상적이었는데, 너무 말라서 해골에 살가죽만 붙여놓은 것 같았다.

“이, 이런 미친!”

그 몰골을 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떠돌던 이성적 저울질은 모두 날아가 버렸다.

아니 앵간히 불쌍해 보여야 말이지. 나는 곧장 여자에게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 들었다.

“야, 야! 괜찮아? 정신 들어? 나 알아보겠어?”

“…… 아.”

여자는 랜턴에 비친 내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이내 푹, 정신을 놓어버렸다. 안도한 것일까.

나는 곧장 그녀를 업어들었다. 몸무게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가벼웠다.

“좀만 기다려요! 용한 의사 내가 알아!!”

나는 행여 부서질까 조심스럽게 그녀를 받쳐들고, 전속력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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