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용사 넘버 ― 163417413
자살할 때는 꼭 바다에 뛰어들 거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왜냐고?
제일 남들한테 피해 덜 주잖아. 처리도 깔끔하고. 다른 자살들 봐라. 터진 토마토 꼴 난 시체를 봐야 하는 주위 사람들은 무슨 죄이며. 방구석에 묵은지처럼 잘 익은 시체 처리할 소방관들은 무슨 죄인가.
“…으으.”
그런 의미에서 내가 극혐하다 못해, 일말의 동정도 주지 않는 자살 방법이 있다. 바로 달리는 차량 앞으로 뛰어드는 교통사고 자살이다.
이건 좀 단적으로 말하면 그야말로 사회악이다. 운전하던 사람이 무슨 죄를 졌다고 졸지에 살인자로 만드는가. 운전이 생업인 사람들은 특히나 일자리를 잃을 위험까지 있다.
한술 더 떠서 도로가 통제되고 교통도 마비된다. 제 한 몸 뒈지겠다고 여러 사람 골치 아프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불쌍한 인생이라도, 최소한 남들의 동정을 바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조롱과 비난을 받아도 모자란다. 암.
“아… 으… 커…억.”
그러니 내가 죽을 땐 아무도 모르게 바다로 몸을 던질 것이다. 인생사 어차피 공수래공수거다. 나란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았는지도 모르게 홀연히 떠나면 얼마나 깔끔한가.
나는 언제나 다짐했다. 나는 꼭 그렇게 죽을 것이라고.
“너…어……!”
그런데.
그런 내가.
설마 차에 치여 죽게 될 줄이야.
“…이, 런… 개…썅…녀…언…….”
핏빛으로 붉게 물든 시야 너머로 흐릿한 여인의 형상이 비친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한 어두운 금발에 순백의 원피스를 입은 여자였다.
그녀는 횡단보도에 누워 죽어가는 나를 내려다보며,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모두가 분주한 가운데 홀로 유유자적한 모습은 숨 막히는 이질감을 선사했다. 그녀 혼자 다른 세상에 떨어져 있는 듯했다.
“그럼 지금부터 열심히 일해주세요, 163417413번째 용사님.”
그렇게 말하며 손을 휘적휘적 흔든다. 나는 뭐라 반박이라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틀렸다.
목소리는커녕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죽는다. 이게 죽는다는 거구나. 그것을 온몸으로 뼈저리게 실감했다.
나, 박정용. 향년 24세. 이곳에 잠든다.
“이, 이봐요! 괜찮아요?! 정신 좀 차려봐요!”
“구급차 불러!”
“심폐소생술 할 줄 아는 사람 없어요?!”
“꺄아악! 이게 뭐야!”
주변이 술렁이는 소리가 지면을 타고 전해졌다. 머리가 깨질 듯이 웅웅 울린다. 제발 아가리 좀 닥치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한편으론 둘러싼 사람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한가득하다.
평소와 같은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을 여러분, 길 가다 못 볼 꼴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교통도 마비시켜서 죄송합니다. 회사 지각하면, 웬 미친놈이 빨간불에 뛰어들었다고 사실대로 말씀하시고 같이 저를 씹으십쇼. 다들 사람 사는 세상인데 너그러이 봐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누구보다도 날 쳐버린 운전자분. 당신 잘못 없습니다. 블박 까보면 보험사도 제가 개새끼라고 쌍욕 박을 겁니다. 혹시 모르니 정신과 상담 꼭 받으십쇼.
귀하의 안녕과 행복을 빕니다. 그렇게 내가 사망하며 생긴 죄목들을 낱낱이 떠올리고 있던 어느 순간.
사고가 점점 끈적해졌다. 떨어진다. 빨려 들어갔다.
시커멓다.
2. 아무도 관심 없는 자초지종
내 이름은 박정용. 향년 24세. 직업은 굳이 꼽자면 노가다꾼. 모솔이다. 내가 죽기까지의 과정은 아무도 관심 없을 테니 짧게 요약하겠다.
나는 소위 말하는 노답 인생이다. 고졸이고, 막노동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산다. 모아놓은 돈도 딱히 없고, 요즘 같은 헬조선 시대에 결혼할 생각도 딱히 없고. 그냥 이대로 살다 죽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 어두운 금발의 미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시급 개쩌는 알바 있는데 해보지 않을래요?”
한다고 했다. 결정까지 3초도 걸리지 않았는데, 판단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여자가 이쁘다.
둘째로 여자가 이쁘다.
그리고 셋째로는…….
“당신의 인생을 모두 바쳐야 하는 알바인데… 대신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도 있는 알바랍니다. 어때요?”
그녀의 아리송한 말이 기묘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면 좀 지랄이고. 다시 생각해 봐도 그냥 예뻐서 그랬던 것 같다.
똑같이 미친 소릴 내뱉어도 예쁜 입술이 내뱉으니 설득력이 엄청나더라.
속물이라고 욕해라. 나 속물 맞다. 호구라고 욕해라. 호구도 맞다.
“그럼, 계약서 작성할까요?”
그 자리에서 작성하고 피로 지장까지 찍었다. 일단 표면적으론 정상적인 계약서였다. 지장을 찍은 순간 계약서가 불길하게 빛난 것 같다고 느꼈는데, 당시엔 착각인 줄 알았다. 지금은 착각이었으면 차라리 다행이었겠다고 생각한다.
“아! 드디어 할당량 다 채웠네. 길었다 정말.”
하얀 얼굴에 미소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어두운 금발의 여인.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티 없이 밝은 얼굴로 계속 말했다.
“이 거지발싸개 같은 헬조선에서 드디어 탈출할 수 있겠네요. 덕분이에요, 용사 후보생님.”
걸쭉한 언사에 순간 흠칫했지만. 털털한 성격인 걸로 쳤다. 원래 예쁘면 저 정도는 용서된다.
하지만 아무리 예뻐도 다음 행동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됐다. 성인군자 데려와도 그녀의 뺨을 후려쳤으리라.
“일하러 가볼까요, 후보생님?”
여전히 티 없는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그대로 툭, 나를 도로 한복판으로 밀어버렸다.
“…얼씨구?”
그 짤막한 탄성이 내 유언이 되었다. 왜냐하면 곧장 반대편에서 5톤짜리 덤프트럭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장창, 퍼거걱. 덤프트럭인지 나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거하게 박살 나는 소리가 났고.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난 바닥에 엎어져 죽어가는 중이었다.
“오예! 스트라이크!”
금발의 미녀… 아니, 똥털의 개년이 주먹을 불끈 쥐며 내뱉은 그 말이 아직도 무럭무럭 기억 속에서 샘솟는다.
…근데, 당신.
주둥이는 실실 쪼개고 있으면서.
왜 우냐?
* * *
“응컥?!”
정신을 차려보니 어두운 광장이었다.
월드컵 경기장은 명함도 못 내밀 광활한 광장. 하늘은 차단막을 덮어씌운 듯 시커멓고, 그 아래 동력을 알 수 없는 광원들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사물을 간신히 분간할 수 있을 정도의 광량이었다.
“여긴……?”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보니 드럼통 안에 피운 모닥불 빛들이 눈에 띄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그걸 중심으로 삼삼오오 모여있었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나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가 하면, 좀 멀찍이 떨어진 곳에는 풀린 눈으로 멍하니 모닥불을 쬐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나는 어느새 벌벌 떨리고 있는 손을 내려다봤다.
“나. 주, 죽지… 않았나?”
그게 꿈이라고? 그럴 리가.
그 실감 나는 죽음의 감각이 꿈일 리가 없다. 꿈은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거잖아.
내 상상을 까마득하게 초월하는, 그런 끔찍하고 시커먼 감각이 꿈일 수 있을 리가.
“정신이 들었나요?”
“어?!”
그런 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거는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똥털의 개×이었다. 기억상 나를 죽인 장본인. 그녀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너, 이 똥털 새끼……! 네가 감히 날……!”
무슨 낯짝으로 얼굴을 들이밀었지? 현 상황에 대한 의문은 그녀의 면상 앞에서 눈 녹듯이 사라졌다.
대신 차오르는 것은 끝없는 분노였다. 안 그래도 들끓던 분노가 그녀의 태연한 얼굴을 보자 활화산처럼 치솟았다. 나는 곧장 주먹을 틀어쥐고 그녀의 안면에 꽂아 넣었다.
난 못 배워 처먹어서 여자라고 안 봐준다.
“남녀평등 펀치!!”
진심을 담아 후려친 주먹이 곧장 그녀의 안면을 강타했다. 퍼어억, 하는 둔중한 파육음이 울렸고.
“아오, 쓰읍!”
나는 작살난 손을 붙잡고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손가락 마디가 까져서 피가 줄줄 나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얼떨떨한 눈으로 똥털의 개년을 쳐다봤다.
방글방글 웃는 그녀의 앞에는 투명한 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보고서도 믿기지 않아 나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허?”
“너무 화내지 마세요. 본인이 계약하셨잖아요. 인생을 전부 걸겠다고.”
똥털이 손사래 치며 대수롭잖게 말했다. 갑자기 비명횡사 당한 사람 입장에선 그야말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반응이다.
그러든 말든, 그녀는 내 손을 흘깃 쳐다보더니 손을 슬쩍 뻗었다.
“리스토레이션.”
똥털의 손에서 청명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내 손을 감싼 빛이 그대로 스며들더니, 상처가 놀라운 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이, 이런 미친 ×발?!”
슈바이처가 관짝 뚜껑 박차고 나올 상황에 반사적으로 욕을 때려 박았다.
눈 깜짝할 사이 재생된 손에 멍하니 시선을 박았다. 상처 따윈 있지도 않았다는 듯 말끔하다.
곧 부릅뜬 두 눈은 히죽거리는 똥털에게 박혔다.
“야, 똥털. 너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나름대로 심각하게 질문했건만, 그녀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똥털? 왜 제가 똥털이에요?”
“똥색 머리니까 똥털이지.”
굳이 따지자면 똥색은 아니고 어두운 금발에 가깝다. 그러니까 사실 똥색보단 설사색……. 음, 여기까지.
그녀도 단호한 내 얼굴을 보고 호칭을 바꾸긴 체념한 건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제 이름은 미네르바. 파라이소 대륙을 관장하는 7대 위상 여신의 종복 중 하나예요.”
“이름은 됐으니까 지금 뭔 상황인지나 말하라고 똥털.”
“…아, 예. 멋대로 부르세요, 흥.”
내가 서슬 퍼렇게 중얼거리자 똥털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더니 내 앞에서 천천히 신형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좀 식힐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진정됐다 싶으면 다시 부르든지 하세요. 그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미네르바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나는 흐지부지 끝나버린 상황에 황당한 탄성을 흘려야 했다.
“…대체 뭐야. 진짜…….”
분노를 표출할 데가 없어진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망연하게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둡고 음습하고, 끝이 어딘지도 모를 정도로 광활한 흑색 공간. 불을 땐 드럼통이 광장 곳곳에 산발적으로 놓여있다. 천차만별에 개성 만점인 남녀들이 땔감들을 때우며 멍하니 불을 주시하고 있었다.
잠깐 눈 돌리면 장기 털릴 것 같은 분위기다.
“…워우.”
그것뿐이면 괜찮은데. 면면을 자세히 보니, 인간보다는 괴물에 가까워 보이는 존재들도 꽤 많았다. 그 판타지 만만세 한 광경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
“…….”
다들 하나같이 죽은 눈동자. 그 어두운 눈에선 생기 대신 드럼통 불빛의 잔상만이 일렁거렸다.
나는 저 눈빛을 안다. 내가 거울 보면 딱 저런 면상을 하고 있다. 세상 다 산 듯한 폐품 인생의 눈빛. 너무 익숙해서 토가 쏠릴 정도다.
그렇게 시간이 멈춘 듯한 적막 속에서 어느 순간.
“운터란트 미개척 불모지! 모집 용사 스무 명이오!”
드드드드. 땅이 용트림하며 누군가 광장 중앙에 솟아나 외친다. 건장한 남자의 형상을 가진 흙 인형이었다. 게임에 자주 등장하는 ‘골렘’과 유사한 놈이다.
그리고 골렘과 함께 솟아난 거대한 대문이 활짝 열렸다. 안에서는 형형색색의 빛무리가 우리를 유혹하듯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음?”
순간, 나는 칼날보다도 날카롭게 빛나는 사람들의 전의를 감지했다. 사방에서 찔러 들어오는 숨죽인 분위기에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감지했을 땐 이미 늦은 상태였다.
“이번에 들어갈 사람은 나야 나! 제발!”
“내가 먼저야, 이 새끼야!”
“저리 꺼져!”
“으아아아아!”
우르르르! 사람들이 일거에 자리를 박차고 게이트를 향해 뛰기 시작한 것이다.
흡사 분쇄기에 빨려드는 병아리 떼를 보는 듯했다. 그로테스크한 뭔가까지 느껴지는 광경.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무슨……!”
필사적이다 싶을 정도로 허겁지겁 달려가는 수백 명의 사람들. 부딪치고 깨지고 밟히고 때리고 부수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리고 깨지고 밟히고 부서지는 사람 중에는 나도 있었다.
엄청난 인파에 휩쓸려 쓰러져버린 나는, 그대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짓밟혔다.
“끄아악! 잠깐 타임! 그, 그만! 사람! 사람 있어요! 살려줘!!”
시야가 아득해지며 트럭에 치였을 때의 감각이 재현된다. 퍼뜩 공포가 밀려왔다.
그 순간, 시커먼 그림자가 내 위로 드리웠다. 멍하니 올려다보자 크기가 집채만 한 거북이 인간이 내 쪽을 향해 발을 놀리고 있었다. 순간 아찔해졌다.
‘주, 죽는다.’
거북 인간의 널찍한 발바닥이 시시각각 가까워진다. 안 돼.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도와줘. 누군가 제발……!
나는 허우적거리며 손을 뻗었고.
“오우 이런. 자네 괜찮나?”
그런 내 손을 덥석, 잡고 끌어당겨 주는 이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죽은 눈을 한 중년의 남자였는데, 반바지 밑으로 드러난 다리에서 개구리처럼 미끈하게 윤기가 돌았다. 게다가 노란색 눈동자의 동공은 양서류의 그것처럼 가로로 찢어져 있었다.
거북 인간에 이어서 개구리 인간이냐. 순간 식겁했지만, 지금까지 워낙 충격적인 일이 많이 일어나서 저 정도는 금세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행색을 보니 신입인가? 오자마자 욕봤구먼, 자네도. 미안허이.”
남자는 내 옷을 몇 번 털어주는가 싶더니, 앞서 달려 나가던 문제의 거북 인간에게 퍼뜩 목청을 높였다.
“크라네이드! 자네 지금 사람 하나 잡을 뻔했어! 이리 와서 어여 사과하게나!”
그러자 뒤뚱뒤뚱 부리나케 달려가던 거북 인간이 우뚝 멈췄다.
그 태산 같은 거구가 일순 나를 돌아본다. 몸은 거북이와 비슷한데 이족 보행을 해서 일단 놀랍고. 머리는 거북이보단 용을 닮아서 위압감이 엄청난 점이 또 놀랍다.
“아앙? 뭐냐. 이 몸은 바쁘다, 개구리 양반.”
“자네는 자기 몸집을 좀 생각하고 움직일 필요가 있어. 자네 때문에 이 친구 죽을 뻔했네.”
“뭐냐, 그 비실이는. 죽으면 약한 자기 탓이지 그게 왜 내 탓인가.”
거북 인간은 적반하장으로 나오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찌푸린 얼굴로 솟아났던 게이트 쪽을 쳐다봤다.
“잠깐! 줄 서십쇼, 용사님들, 줄! 한 분씩 천천히 들어가십쇼! 야! 천천히 들어가라고!”
게이트 앞을 지키던 골렘이 허겁지겁 통제를 시도했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이미 블랙홀처럼 수십 명의 사람을 빨아들인 게이트가, 만족스럽게 빛을 한번 뿜더니 스르륵 닫혀버렸다. 정원이 초과된 것이다.
그 광경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던 골렘이 매끄러운 뒷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와 씨… 경쟁률 장난 아니네 진짜. 전생하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심히 동감이다.
나와 개구리 인간, 그리고 거북 인간은 잠시 할 말을 잃고 게이트가 사라진 장소를 멍하니 쳐다봤다. 게이트의 앞에선 간발의 차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허탈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아이고오! 이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내가 들어갈 수 있었는데! 한 발짝만 빨랐어도!”
그중에서도 유난히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땅을 치며 오열하는 곡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우리의 시선은 자연히 그쪽으로 향했다.
소년이었다. 키가 내 하반신에도 채 못 미칠 정도로 작고 왜소하다. 귀여운 인상의 얼굴과 매치 안 되게 온몸이 터질 듯한 근육질인 것이 인상적이다.
문득 개구리 인간과 거북 인간이 동시에 탄성을 흘렸다.
“이번에도 셋 다 실패구먼…….”
“나는 네 방해만 없었어도 이번에야말로 나갈 수 있었다, 개구리 양반.”
“헛소리 마시게나. 자네보다 빨리 간 똥자루 친구도 저리 꺼이꺼이 울고 있잖나.”
“크흠…….”
나는 그렇게 소강상태가 된 광장의 침묵 속에서, 가만히 헛웃음을 흘렸다.
시선은 연신 주변의 유사 인간들을 향해있었다.
“하, 하하하…….”
보면 볼수록 현실감은 사라져갔고, 대신 뼈저린 실감은 들어찼다.
‘내가 진짜… × 돼도 단단히 × 됐구나.’
잘은 몰라도 뭔가 엄청난 일에 휘말렸다는 실감 말이다.
* * *
내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그래도 좀 살아보자는 생각이 든 건 그로부터 꼬박 일주일 후의 일이었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식사를 신청하는 것이었다.
―163417413번째 용사 후보생 박정용 님, 주문하신 식사가 도착했습니다. 즐거운 식사 되십시오.
그런 패널이 공중에 뜨더니 곧 연녹색 섬광이 허공에서 터져 나왔다. 거기서 등장한 식판 하나가 내 앞으로 하늘하늘 날아온다. 멍한 와중에도 탄성을 흘렸다.
‘봐도 봐도 신기하네, 저건.’
여기는 하루 한 번, 식사 신청을 하면 식사를 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 사람이면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음.”
나는 식판을 멀거니 쳐다봤다. 비주얼은 완전히 짬밥이다. 메뉴도 거의 짬밥이다. 알 수 없는 고기볶음을 한 젓가락 집어 먹어봤다.
맛도 짬밥이다.
“…후, ×발…….”
지금 내가 직면한 현실을 버티느라 입맛이 없는 마당에 짬밥을 눈앞에 두니 식욕이 급감한다. 나는 한숨과 함께 수저를 팽개치고 대충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기.”
드럼통 주변에 쭈그리고 음식을 돌 보듯 쳐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내 앞으로 짙은 음영이 일렁거렸다. 나를 부르는 미성에 슬쩍 고개를 들었다.
물색 머리에 은빛 눈동자를 한 신비로운 여자가 서있었다.
“그거, 안 먹을 건가요?”
그렇게 말하며 빤히 음식을 쳐다보는 여자. 첫 대면의 인사치고는 뜬금없었다.
“그거. 안 먹을 건가요?”
내가 아무 대답도 못 하자 못 들은 걸로 생각했나 보다. 여자는 기계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리바이벌을 했다.
뭐 어쩌겠는가. 나는 안 먹을 거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말했다.
“나도 밥 먹을 줄 아는데.”
“엉?”
“나도, 밥 맛있게 먹을 줄 아는데.”
“…….”
“기계는 사식 신청을 못 한다고 해요. 알고 계셨어요?”
“…엉?”
여자는 연신 영문 모를 소리를 주워섬겼다. 나는 여자를 유심히 살펴보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요컨대, 내 밥에 관심 있다 이 소리 아니냐. 무표정한 눈매 속에서 식판을 향해 반짝이는 눈빛을 보니 확실히 알겠다.
나는 흔쾌히 식판째로 그녀에게 내밀었다.
“가져가.”
“넷?”
여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생겼다. 그녀는 식판을 얼떨떨하게 받아 들며 나를 쳐다봤다. 놀랍다는 얼굴이었다.
표정이 풍부해지니 훨씬 미모가 살아나는 느낌이다.
“괜찮으세요? 저 같은 수상한 사람에게 이렇게 선뜻…….”
본인 수상한 줄은 알고 있었네.
나는 시종일관 이상한 그녀의 행색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갑자기 웃자 여자는 눈을 끔벅거렸고. 나는 손사래를 쳤다.
“됐으니까 가져가. 나 웃겨준 보상이다.”
실제로 그녀와 대화하고 나니 천근만근 같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어쩌면 나는 나답지 않게 상황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식사보다 중요한 무언가를 되찾은 느낌이다.
물색 머리 여자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식판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저, 그럼 감사하게 가져가겠지만… 왜 웃으시는 건가요? 제가 뭔가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요?”
“궁금하면 나중에 또 와. 밥 줄 테니까.”
“어, 정말인가요?!”
여자는 내 말에 대번 화색이 되었다. 특유의 신비한 분위기가 어우러져서 웃는 얼굴이 아주 잘 어울렸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보고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연신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총총걸음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문득 중간에 우뚝 멈춰서서 나를 쳐다봤다.
“제 이름은 세스나예요. 당신은요?”
이제 와서 통성명이라니. 시종일관 갈피를 못 잡겠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박정용. 정용이라고 불러.”
“그럼 정용 님!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요!”
“뭘 고작 음식 가지고 평생 은혜까지야…….”
“다음에 또 봬요! 그럼!”
내가 맞인사를 해주기 직전. 시기적절하게 열린 게이트 때문에 엄청난 인파가 쏠렸다. 나는 채 인식도 못 한순간에 사람들을 빨아들인 게이트가 다시 닫혔고.
인간의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물색 머리 여자… 세스나의 모습은 없었다.
“…진짜 별 이상한 놈들이 다 있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제야 진짜로, 좀 살아보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나는 가장 먼저 개구리 인간을 찾아갔다.
“오, 그때 그 신입 친구 아닌가. 어쩐 일인가?”
“…실은…….”
개구리 인간은 다행히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현재 아무것도 모르는 내 상황을 토로했다. 다행히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얘기를 들어줬다.
물론 그것도 내가 똥털과 나눴던 대화를 들려주기 전까지의 얘기다.
“펀치를 날려? 똥털이라고? 하하핫. 그 여자가 질리고 도망갈 법도 하구먼!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건가?”
“딱히 생각은 없었구요. 당하면 갚아줘야 하는 게 제 승질머리라요.”
“크허허! 자네 진짜 물건이구먼!”
이내 우리는 통성명까지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스칼로. 내가 예상한 대로 개구리 인간이 맞았다. 나와는 또 다른 세상에서 이곳으로 끌려온 사람이라고 했다. 그 역시 미네르바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 스칼로. 사실 질문할 게 좀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흐흠, 그래. 하긴 궁금할 게 많을 테지. 그 여자는 설명이 무척 불친절하니.”
그는 알 만하다는 양 침음을 흘리더니.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얼마든지 하게. 내 알고 있는 한에선 모두 대답해 주지.”
“감사합니다. 그럼…….”
나는 딱 봐도 짬이 좀 있어 보이는 그에게 이곳에 대한 것들을 이것저것 질문했다.
그는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친절하게도 나의 질문에 대답해 줬다.
“전말이 알고 싶은 겐가?”
“네, 뭐. 그렇죠.”
“짧고 간단하게? 아님 길고 상세한 게 좋나?”
“짧고 간단하게요.”
“알겠네.”
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나는 그의 입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자세히 보니 입도 좀 개구리를 닮은 것 같다.
“친구, 자네는 수많은 차원에서 이 세계에 용사로 소환된 무수한 사람 중 하나일세.”
“…허?”
“자네는 이곳 가이알란트 차원의 제1계, 파라이소 대륙에서 실시한 제9999기 용사 소환식의 계약에 응했고. 이곳 시험의 장막에 소환됐네.”
“어허허?”
“이곳에서 파라이소 대륙으로 소환된 뒤에 적성 시험을 통과하고 나면, 우리는 정식 용사로서 파라이소 대륙에 창궐하는 마왕과 그 하수인인 마족들에게 맞서 싸워야 한다는군.”
“잠깐만요, 교수님. 진도가 너무 빠른데…….”
나는 못 알아들을 소리의 연속에 탄성만 연신 흘렸다. 하지만 개구리 인간… 스칼로는 용무 끝났다는 양 입을 꾹 닫고 나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다.
내가 머리를 긁적이자 스칼로는 히죽 웃으며 한마디 추가했다.
“짧고 간단하게 하라지 않았나? 거짓말은 내 이름에 걸고 하나도 안 했으니 알아서 해석하게나.”
그랬지. 내가 한 말이니 할 말은 없군. 의외로 장난기가 있는 양반이네.
“으음… 용사… 마왕… 시험……?”
나는 스칼로가 내뱉은 믿지 못할 말들을 하나씩 머릿속에 강제로 주입하기 시작했다. 스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뇌에 과부하가 이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계약서에서 마왕이 어쩌고 하는 내용을 본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런 비상식을 눈앞에 덩그러니 던져놓고 다짜고짜 믿으라니.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대충 정리는 됐나?”
수 분이 지나고 스칼로가 내게 넌지시 물어 왔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뭐, 대충은요.”
“좋군. 그럼 이제 현 상황을 좀 알려드리지.”
스칼로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주변을 가리켰다. 나는 삿대질에 따라 시선을 옮겼다.
“말했다시피 지금 이곳의 명칭은 시험의 장막. 자네… 박정용이라 했나? 자네가 살던 차원과 가이알란트 차원의 경계이자, 이쪽 세계 곳곳에 산재한 용사 시험장으로 안내해 줄 중간 단계라고 하더군.”
“잠깐.”
나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이해가 안 돼서 재차 질문했다.
“좀 쉽게 부탁해요. 비유하자면?”
“입국심사대?”
“…아하.”
명쾌한 비유에 나는 곧장 수긍했다. 그리고 새삼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근데… 이건 입국심사대라기보다는…….”
“부랑자 촌락 같지 않나?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듣자니 관리자가 부재중이라 하더군.”
“으음, 그렇구만요.”
말 그대로였다. 여긴 입국심사대처럼 깔끔한 이미지가 아니다. 전에도 한번 말한 적 있지만 잠깐 눈 돌리면 장기 털릴 분위기다.
그리고 그 순간. 우르릉 소리와 함께 게이트가 열렸다. 우리의 시선은 동시에 돌아갔다.
“끼에에에엑!”
“이번, 이번에야말로오오오!!”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게이트로 돌진한다.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요. 대체 저건 뭔 상황이죠?”
“뭔 상황이긴. 방금 생성된 그 게이트를 통과해야 여기서 탈출할 수 있네. 정원이 한정돼 있으니 순발력이 생명이지.”
“아하…….”
가만히 수긍하던 나는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그 정체를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출? 단어 선택이 좀 거시기 한데요?”
“탈출 맞네.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 수가 대충 몇이나 돼 보이나?”
“…못해도 수천 명은 돼 보이네요.”
“근데 게이트 한 번 열릴 때마다 정원은 50명을 넘어가는 법이 없다네.”
“…게이트가 열리는 주기는?”
“짧으면 한 시간. 길면 한나절?”
“…….”
“이제 감이 좀 오나?”
온다. 심각하게 온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내 앞에서, 한숨을 패액 내쉰 스칼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게서 무거운 한탄이 쏟아져 나왔다.
“자네, 내가 여기 얼마나 있었는지 아나?”
“…얼마나 있었는데요.”
“1년 3개월.”
“……!”
“나는 이번 9999기 소환식에서 거의 초창기에 소환된 후보생이었네. 보다시피 양서류 수인이라 평지 기동력이 안 좋아서 말이야. 덕분에 뒤늦게 소환된 사람들한테까지 밀리고 밀리다, 하염없이 불만 쬐고 있는 신세라네.”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스칼로가 흐음, 하고 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뭐… 나는 좀 비정상적으로 길게 머문 케이스긴 하지만. 비교적 평범한 자네가, 비범한 사람들투성이인 이곳에서 경쟁에 승리할 수 있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그 살벌한 기세는 자네도 봤잖나?”
“그, 그거야 뭐…….”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 이 장소만큼이나 캄캄하고 암울한 내 처지를 실감했다.
뭐랄까… 한창 돈 벌려고 용역 뛸 때가 생각난다. 그때 다른 일꾼들이랑 경쟁하면서 용달차에 몸 욱여넣을 때도 참 치열했다고 생각하는데. 어째 용역보다도 용사 되기가 더 치열하냐.
“먹고살기 힘든 건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똑같군, ×벌.”
내가 혼자 중얼거리자 동감한다는 양 스칼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칼로, 저건 뭐죠?”
나는 광장의 중앙에 둥둥 떠있는 지도 패널을 가리키며 물었다. 게이트마다 솟을 때마다 지도에는 특정 좌표가 표시되어 있었다. 표시되는 위치는 게이트마다 천차만별했다.
스칼로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거북 인간과 난쟁이 소년 쪽을 흘겨보다가 입을 열었다.
“보는 대로 지도일세. 우리가 갈 곳의 대륙 전도라고 하더군.”
“표시된 좌표는 그럼……?”
“아마 저 게이트가 우리를 소환할 위치겠지.”
“근데 저렇게 표시해 줘도, 우리가 저 세상에 대해 뭘 아는 것도 아니잖아요. 뭐 하러 표시를 해주죠?”
“음, 그건…….”
나와 스칼로가 동시에 지도로 고개를 돌렸다.
지도 위에는 네 개의 패널이 떠있다. 각각 미텔란트, 운터란트, 마르크트레스, 용제국 케나인. 그렇게 쓰여있다.
대륙의 동서남북을 차지하고 있는데, 정황상 나라 이름들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정원 수를 표시해 주는 패널이 깜빡인다.
“들은 바로는 시험장의 난이도와 관련이 있다…라고 하더군.”
“난이도?”
“먼저 들어가는 건 무조건 이득이다. 그 아신은 그렇게 말했네.”
스칼로의 한마디와 동시에 게이트가 솟아났다. 지도에 표시된 곳은 미텔란트의 ‘혁명도시 알레크’라는 장소. 처음 보는 문자인데도 자연스럽게 읽혔다. 신기한 감각이다.
이름과 장소야 어쨌든. 이번에도 수많은 사람이 몰린다.
“미텔란트의 혁명도시 알레크! 용사 정원 35요!”
“으아아아악! 나다! 이번엔 나다아아!”
게이트는 수많은 사람을 후루룩 짭짭 빨아 먹고 순식간에 닫혔다.
가만히 지켜보던 스칼로가 내 쪽으로 흘깃 시선을 던졌다.
“방금 그 혁명도시의 위치 기억나나?”
“북서쪽으로 좀 치우쳐 있었죠.”
“맞네. 계속 한번 보도록 하지.”
나는 스칼로의 말대로 나타나는 게이트의 소환 위치를 계속 쳐다봤다. 스칼로도 치킨 레이스에 참여하지 않고 나와 함께 게이트만 쳐다봤다.
특유의 느긋한 분위기가 있어서 그런지 우리 둘만 다른 세상에 떨어진 듯했다.
“마르크트레스의 단장의 능선! 정원 30명입니다!”
“운터란트의 기계 팔 전장! 용사 정원 40명!”
“용제국 케나인! 항구도시 소황! 정원은……!”
나는 어느 순간 눈을 크게 떴다. 한 열 번… 꼬박 수십 시간을 모닥불 쬐면서 구경하다 보니 가까스로 법칙을 깨달은 것이다.
북쪽의 미텔란트, 서쪽의 마르크트레스, 남쪽의 운터란트, 그리고 동쪽의 용제국 케나인.
게이트는 정확히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각 나라에 사람들을 떨구고 있었다.
그리고…….
“소환 위치가 나선 모양으로… 점점 바깥으로 나가는데요?”
“정답일세. 눈썰미는 좀 있구먼.”
고개를 끄덕인 스칼로가 나를 지그시 쳐다본다. 그러더니 피식, 김빠지는 미소를 머금었다. 길가에 버려진 개새끼를 동정하는 듯한 눈빛이다.
“자네 말대로 장소는 아무래도 상관없네. 이렇게 아는 척하는 나만 해도 아신에게 들었던 걸 그대로 말해줄 뿐이니. 저쪽 세상 어디에 떨어지든 알 게 뭔가.”
“…아신? 아신이 뭡니까?”
“자네를 이곳으로 부른 그 여자 같은 이들. 신에 버금가는 종복이라 하여 아신(亞神)이라 하더군.”
“아, 똥털…….”
스칼로가 게이트를 쫓아 우르르 몰려다니는 사람들을 흘깃 쳐다보며 말을 맺었다.
“어쨌든 빨리 들어가는 건 무조건 이득일세. 바깥으로 갈수록 시험의 장 난이도가 천문학적으로 어려워진다 하더이. 게다가 시험의 통과 보상도 심하게 차이가 난다 하던데.”
“…아.”
그제야 깨달았다. 왜 사람들이 저렇게 눈에 불을 켜고 게이트를 쫓아 먼저 못 들어가 안달이었는지. 그리고 내가 깨달음에 멍해있는 와중에도 게이트는 끊임없이 생성되었다.
“미텔란트, 아르곤 지하 수로! 용사 40명 정원!”
“우와아아아!”
“마르크트레스, 약속의 평원! 용사 35명 정원입니다!”
“오와아아아악!”
수 시간마다 곳곳에서 솟아나는 게이트에 따라 부나방 떼처럼 몰려다니는 인파들. 멍하니 있던 내 등을 툭, 치는 손길이 있다. 당연히 스칼로였다.
“그럼 그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겠나?”
그리고 스칼로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의 전방에는 어느새 새롭게 솟아난 게이트가 눈부신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운터란트의 칼테루스 선상 감옥! 정원 15명입니다!”
나는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스칼로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롸아아아악!”
나는 이미 한 마리의 부나방이 되어있었다.
* * *
…뭐, 그리고.
그렇게 3개월 정도가 지났다.
처음 여기 왔을 땐 수천 명에 가까운 무수한 인파가 있었지만, 게이트를 통해 사람이 빠지는 속도에 비해 충원되는 사람은 기하급수적으로 적어졌다. 이윽고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더 이상 사람이 전혀 충원되지 않았다. 필연적으로 이곳의 인원수는 점점 줄어들어 갔다.
이젠 눈대중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만이 이곳에 남았다. 약 16명. 최후의 최후까지 낙오된 사람들. 패배자 오브 패배자.
물론 그중에 나도 있다. 하하하. ×발.
“하하, 친구. 오늘은 좋은 꿈 꿨나?”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는 내게 말을 거는 이가 있었다. 미역같이 길게 늘어진 짙은 초록색 머리칼에 느긋한 인상의 중년. 2미터는 돼 보이는 장신. 그리고 가로로 찢어진 동공과 하반신이 개구리처럼 매끈한 남자.
이름은 스칼로. 나이는 본인피셜로 무려 320살.
그와는 3개월이나 이 거지 같은 곳에서 부대끼다 보니, 어느새 친구 비슷한 사이였다. 스칼로가 맞춰주는 건지 모르겠는데, 생각보다 320살이랑 죽이 잘 맞아서 나도 놀랐다.
기뻐해야 하나.
아니, 이런 인연은 슬프기 짝이 없다. 저 양반도 그렇게 생각할걸, 아마?
“이젠 16명일세. 고작 16명. 오늘이야말로 모두가 이 지긋지긋한 곳을 졸업할 수 있겠지. 너무 그렇게 처져있지 말게나, 친구. 즐거운 날이 될 테니까!”
졸린 눈을 비비던 내게 격려의 말을 쏟아놓는 스칼로. 그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짐짓 태연한 척을 했다.
그래, 어디까지나 척이다. 스칼로의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내 어깨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내 어깨로 격파 시범 하는 스칼로의 손을 덥석 낚아챘다.
“아오씨, 댁이나 긴장 좀 풀고 있으슈. 전쟁 나갑니까?”
“전쟁이지. 전쟁이야! 자네는 몰라도 난 여기 1년 6개월째란 말이야.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자네가 아나! 정말 서럽고도 서러웠다네!”
“…….”
잘 걸렸다는 듯이 내게 호소하는 스칼로.
그렇게 말하면 할 말 없지. 저 양반이 여기서 보낸 시간은 군복무 뺨을 후려갈기는데.
3개월만 한 나도 미치겠는데, 무려 1년 반이다, 1년 반. 저 양반이 아직 미치지 않고 버젓이 대화하는 것 자체가 나는 기적이라고 본다.
“사식이오! 신청자 두 분! 와서 배급받아 가십쇼!”
스칼로를 한창 안타까워하고 있자니. 또 어디선가 솟아 나온 골렘이 그렇게 외치며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하루에 한 번 있는 식사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나와 스칼로는 익숙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 메뉴 뭔지 아십니까, 행님.”
“모른다네.”
“뭘까요, 행님.”
“해물비빔 소스? 그것만 아니었음 좋겠군. 내 320년 인생 중 최악의 맛이었어.”
“아,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메뉴는 대개 군대 짬밥 같은 메뉴가 나온다. 아니, 그냥 짬밥이다.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짬밥은 처먹어도 처먹어도 배가 고프지만 여기 식사는 한 끼만 먹으면 사실상 일주일은 굶어도 거뜬하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하루 한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나와 스칼로는 이곳에서도 꽤 별종 취급을 받는다.
“그나저나 이런 배식 형태는 그립군. 옛날 용병 시절을 떠올리게 한단 말이야. 크허허!”
“그래요? 전 군대랑 급식 시절 생각나서 극혐인데…….”
“흐음, 그런가? 한솥밥을 먹으면서도 이렇게 감상이 다르니 신기하구먼.”
“신기할 것도 없수다.”
“크허허! 참 담백한 친구야, 자넨.”
다 좋은데 복잡하기 짝이 없는 식사 신청 절차는 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 무슨 밥 처먹기가 군대 휴가 나가기보다 절차가 빡세니 원.
“식사 맛있게 하십쇼, 후보생님들.”
“어, 고생이 많아.”
골렘이 정중한 말투로 말하며 식판을 건넨다. 얘도 오래 봤더니 정들겠다. 나는 습관적으로 대답을 해준 뒤 식판을 물끄러미 내려봤다.
오늘은 서양식에 가까웠다. 생전 처음 보는 고기볶음과 익숙한 형태의 밀빵. 그리고 수프와 우유. 디저트로 젤리까지 나왔다.
“너희들은 무슨 돼지 새끼들이냐? 밥을 왜 날이면 날마다 처먹어 대고 지랄이야 대체.”
식사를 가지고 모닥불로 돌아왔더니, 어김없이 반대편에서 시비가 걸려왔다.
나는 이제 익숙해져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스칼로는 식판을 바닥에 내려놓고 곧장 시비를 건 남자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는 똥자루 노친네야, 자네도 질리지도 않는구먼. 무에가 그리 불만인가.”
아니꼬운 표정의 스칼로 앞에는 신장이 채 1미터도 안 되는 왜소한 소년이 있었다.
이름은 알드콘 그로워즈. 외모는 소년이지만 실제 알맹이는 무려 49세에 달하는 할배다. 소위 말하는 난쟁이족. 드워프다.
저 종족의 평균 수명을 들었는데, 50살 전후라고 한다. 그러니까 볼 장 다 본 할배 맞다.
그것도 진성 꼰대 할배.
“아앙? 뭐가 불만인지 모르냐, 이 늙은 개구리야?”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구먼, 똥자루 노친네.”
“뭐, 인마?!”
“헹.”
식판과 모닥불을 사이에 놓고, 꼰대 드워프 할배와 동네 양서류 아저씨(?)의 불꽃 튀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식전 행사 같은 거라 놀랍지도 않다. 난 먼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아주 그냥 놀러 왔지? 캠핑 왔냐? 너희들이 그러니까 아직도 여기 남아있는 거 아냐, 븅신들아.”
“그러는 자네는 1일 1식도 안 했으면서 왜 아직도 여기에 있나?”
“나, 나는 난쟁이잖아, 난쟁이! 체격적으로 너무 불리하다, 이 말이야! 도시락 까 처먹으며 노닥거리는 너희들이랑은 다르다고!”
나는 그쯤에서 식판 언저리를 수프 수저로 몇 번 내리쳤다.
탕탕, 청명한 소리가 나며 두 사람의 시선이 내 쪽으로 꽂힌다. 나는 스칼로의 빵을 들이밀었다.
“거 쓸데없이 싸움 그만하고 밥이나 자십시다. 우리끼리 주둥이 비벼봐야 누가 내보내 준답니까.”
“…쳇.”
“크흠, 그래. 항상 자네에게 가르침을 받는구먼그려.”
여전히 아니꼬운 얼굴로 혀를 차는 알드콘과, 부끄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으며 식판 앞으로 다가오는 스칼로. 나는 피식 웃은 뒤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참고로 저 드워프 할배도 여기에 체류한 지 곧 1년이 되어가는 묵은지 중의 묵은지다.
스칼로와 유난히 티격태격하는 것도 그냥 너무 오래 봐서 그렇다. 미운 정 따지면 나보다도 친할걸?
그 증거로, 씨불씨불 입으로는 욕을 하면서도 알드콘은 스칼로 옆을 항상 기웃거린다.
몸은 솔직하다던가. 한마디로 외로운 거지. 저 똥자루 할배도 말벗이 필요한 거다.
‘뭐 최선책은 당연히 말벗 필요 없게 당장 여기서 나가는 거지만.’
그게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공생관계라고 할까.
우리는 내막을 보면 참 서글픈 관계다.
“와아, 역시 오늘도 식사하고 계시네요.”
그리고 차가웠던 분위기를 단박에 화사하게 물들이는 미성이 들려왔다. 우리 세 명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물색 머리칼에 은색 눈동자를 지닌 묘령의 여인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3. 평화의 끝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인사를 했다.
“안녕, 세스나.”
“뺀질나게도 찾아오는구나, 전자 계집.”
“좋은 꿈 꿨는가, 하녀 친구.”
세스나. 전자 계집. 그리고 하녀 친구. 우리 셋은 모두 다른 호칭으로 그녀를 불렀고. 세 호칭은 모두 틀린 호칭이 아니었다.
우리 앞에 찾아온 이 여자는 전기와 하이테크놀로지로 움직이는 기계 인간이다.
이세계 어딘가의 기계 제국에서 소환되었다는 세스나의 정체는 와우! 무려 가정용 메이드 로봇인 것이다.
‘실망스럽게도 메이드복 대신 일반 원피스를 입고 있다만.’
대신 몸에서 무기 같은 게 막 나온다고 한다.
메이드가 무기 나와서 뭐 하냐고? 그런 질문은 이쪽 업계에선 금기다. 그냥 그런갑다 하는 거지.
“네, 모두들 안녕하세요. 그런데 항상 같이 계시던 한 분이 안 보이네요? 용 머리의 남성분은요?”
해맑게 웃으며 받아넘긴 세스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로봇이라면서, 가만 보면 감정 표현은 나보다 더 풍부한 것 같다. 진짜 로봇 맞나?
속으로 의구심을 갖는 한편, 나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 줬다.
“크라네이드 말하는 거냐?”
“아, 네. 분명 그런 이름이었지요.”
“그 사람 어제 졸업했어. 용제국의 칼날 바람 골짜기라는 곳으로.”
“아아, 그렇군요.”
세스나는 낮은 탄성을 흘리더니 곧 방긋 웃었다. 그리고 “그건 축하드릴 일이네요.”라며 사심 하나 없이 내뱉었다. 듣던 우리는 동시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딱히 누굴 비웃은 건 아니고. 그냥 셋 다 자기 처지가 한심해서 그랬다.
“솔직히 그 아저씨보단 내가 빨리 나갈 줄 알았어요.”
“뭐, 부끄럽지만 동감일세.”
“씨불… 그 거북이 새끼보다 늦다니… 내 종족이 그렇게 저주스러웠던 건 처음이다.”
원래 우리 ‘개노답 4형제’의 한 축이었던 남자가 어제까진 있었다.
이름은 크라네이드. 집채만 한 거북이를 사람과 섞어놓은 모양새의 인간이다.
그 사람은 거북 인간이라는 성질답게 무척 느렸다. 정말 보다 보면 하품 나올 정도로 행동이 느리다. 뭐 본인 말로는 무력으론 이곳에서 자길 당해낼 자가 없다는데, 그럼 뭐 하냐. 여기서 나가지도 못하는데.
그런데 왜 그런 크라네이드가 우리보다 먼저 이곳을 나갔느냐?
“설마 게이트가 크라네이드 코앞에서 생성될 줄이야…….”
“될 놈은 패 죽여도 된다고, 세상사 졸라 불공평하다니까 진짜로, 우라질.”
“이번만큼은 자네에게 동감할 수밖에 없군… 후우.”
우리는 한마디씩 꿍얼거리며 우울한 오라를 무럭무럭 피웠다. ‘쟤보단 그래도 내가 낫지…….’ 하는 안식처가 무너진 남정네들의 추한 궁상이었다.
“아하하, 괜한 소리를 했네요, 제가……. 아, 맛있는 냄새.”
곤란하게 웃던 세스나가 문득 내 식판 쪽으로 물끄러미 시선을 던졌다. 코를 킁킁거리는 게, 음식의 냄새에 이끌린 듯했다.
나는 덥석, 빵을 수프에 찍어 그녀에게 건넸다. 익숙한 몸놀림이었다.
“자.”
선뜻 건네진 빵을 집어 든 세스나가 얼떨떨하게 나를 쳐다봤다.
“어, 제가 먹어도 될까요? 이건 정용 님이 발품 팔아서 신청하신 건데…….”
“어차피 난 어제도 처먹었고 그제도 처먹었어. 배 안 고파.”
“그,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그리고 지금 네가 노골적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어서, 안 주는 게 무안할 지경이니까. 그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덥석. 세스나가 곧장 빵을 크게 한입 베어 문다. 그녀의 표정이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하아! 역시 맛있네요. 여기 음식은 뭐든지 정말 맛있어요. 기계 제국의 양산형 보존식과는 차원이 달라요!”
“그러냐?”
“네네, 정말 정말이에요. 너무 고마워요, 정용 님. 저는 지금 행복해요!”
“그래… 행복의 기준치가 낮아서 부럽구나.”
빵을 연신 수프에 찍어 먹던 세스나가 몸을 배배 꼬았다. 뺨을 발그레하게 붉힌 채로 어깨를 움찔거리는데, 좀 애먼 생각이 들 정도로 격하게 좋아한다.
행복해하는 세스나를 쳐다보던 나는, 문득 툭 내뱉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말이야.”
“네, 뭔가요? 정용 님께는 저를 생산했던 공장 업체의 기업 비밀이라도 기꺼이 말씀드리죠! 후후후.”
…그건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애초에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나는 헛웃음을 흘리고는 세스나에게 질문했다.
“기계인데 음식은 어떻게 먹냐?”
내 질문에 세스나는 잠시 입을 오물거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대수롭잖게 입을 열었다.
“음, 저희는 이미 한번 멸망한 인간 문명의 시스템을, 완벽하게 재구현할 목적으로 생산된 마더 컴퓨터의 실험체라서요. 소화기관도 달려있고 생식기관도 달려있답니다. 그저 뇌 대신 CPU가, 실제 장기 대신 인공 장기 제품이, 세포 대신 피코머신이 들어있을 뿐이지요.”
“…아, 그래. 알겠으니까 밥 계속 먹어.”
“음? 네. 헤헤.”
복잡하고 골치 아픈 저쪽 세상 사정이 튀어나오길래 곧장 말을 끊었다. 그냥 세스나가 행복하게 식사하는 모습이나 감상하기로 했다.
이쁘니까 됐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아, 정말 제 몸이 원망스럽네요. 이렇게 맛있는 밥을 제힘으로 받질 못하다니…….”
“그러게나 말이다.”
참고로 세스나는 사식 신청을 할 수가 없다.
일단 기계라서. 시스템상 생물체가 아니면 거부된다는 모양이다. 이곳 골렘들의 공무원식 일 처리 때문에 그녀는 피치 못하게 한입충이 된 것이다.
내 식사 시간만 되면 세스나가 이 개노답 남탕에 기웃거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
“아우, 정말 너무 맛있다. 저쪽 세상에 소환되고 나면 본격적으로 요리나 배워볼까 봐요!”
“그래 뭐… 명색이 메이드 로봇이니까 요리할 줄 알면 좋긴 하겠네.”
식판을 사이에 놓고 밥을 나눠 먹자니, 가만히 지켜보던 스칼로와 알드콘이 한마디씩 한다.
“크허허. 두 사람은 보는 내가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사이가 좋군!”
“신혼집 차릴 거면 졸업하고 해라. 나 없는 데서.”
나는 겉으로만 극구 부인했다. 속으론 좀 기분 좋았다, 솔직히.
어쨌든 이 거지발싸개 같은 공간치곤 따듯한 분위기의 식사 시간. 죽은 눈으로 멍하니 화톳불이나 응시하는 다른 후보생들보다는 인간적인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 찰나의 화기애애함을 음미했다.
뭐, 물론.
“운터란트 망자의 계곡! 정원은 15명입니다!”
그런 화기애애함도, 골렘의 외침이 들린 순간 거짓말처럼 박살 났지만 말이다.
* * *
“…….”
“…….”
장내엔 약속처럼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비단 이쪽 모닥불의 넷뿐 아니라 다른 모닥불 그룹들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누구도 평소처럼 게이트로 달려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유는 자명하다. 저 외침이 들리기 전까지, 아마 모두들 이런 예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게이트 정원 법칙상 15명 이하로 부르는 경우는 없었다.’
‘또한 대부분 5단위로 끊어진다.’
‘게이트의 정원 평균은 30~35명.’
‘지지리 운 없어서 15명을 부르지 않는 이상, 여기 있는 모두가 같은 게이트를 탈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스칼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오늘따라 이 광장에 유난히 온건한 분위기가 흐른 것도 있다. 이 멤버들이 사실상 저쪽 세상에 가서도 한솥밥 먹을 멤버일 확률이 높으니까.
그런데 까보니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15명. 가장 최악의 경우가 발생했다. 예상대로 모두가 게이트를 이용하게 되긴 한다.
단 하나!
눈물의 혼밥맨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폭풍 전야. 일촉즉발. 시선 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날 선 침묵이 강림했다. 누구 하나 몸도 제대로 까딱하지 못했다. 행동 하나가 불러올 스노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앗! 이 고기볶음도 정말 맛있어요, 정용 님! 드셔보세요!”
…정정한다. 세스나는 예외다. 그녀는 여전히 먹자 삼매경이었다.
로봇이니까 봐주자.
“자요, 정용 님. 아 해보세요. 아아~”
“아니, 지금은 좀…….”
“어, 왜요? 입맛이 없으세요?”
“그른 게 으니그…….”
생각해 보니 이 여자는 지난 3개월간 항상 이런 식이었다.
좋게 말하면 군중심리에 전혀 말려들지 않고, 나쁘게 말하면 주변머리가 없다. 그야말로 기계처럼 이성적이면서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다.
그 때문에 세스나는 다른 이들처럼 게이트에 대한 설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나가는 것에 딱히 열을 올리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가 아직까지 여기에 남아있는 이유다.
“…후우, 맥 빠지네.”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쪽과 가까운 모닥불 쪽에서 나온 말이었다.
아무래도 무사태평한 세스나의 행색을 보고, 잔뜩 긴장한 채 눈치만 살살 보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나 보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눈깔만 굴린다고 뭐가 달라져? 난 나갈 거야. 여기 남아서 혼밥 하는 찐따 되긴 싫단 말이야.”
입을 연 사람은 나처럼 평범한 남자였다. 20대 중반쯤에 멀끔한 인상. 나랑 비슷한 또래로 보인다.
게다가 방금 중얼거린 말은 자동 번역되는 이국의 말이 아닌, 명명백백한 한국어다.
한국인. 한국인이었다.
“나, 나도…….”
“같이 가!”
눈치만 보던 모닥불의 다른 일행들이 헐레벌떡 남자의 뒤를 쫓아갔다. 그들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언제나처럼 전속력으로 게이트를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익숙한 광경이라 왠지 안심이 될 정도였다.
“제나, 우리도 가자!”
“…응.”
또 다른 모닥불에서 엘프처럼 긴 귀를 가진 적발의 남녀도 달려갔다. 똑 닮은 외모나 남자가 여자를 챙기는 모양새를 보아 남매인 듯싶었다.
“…흥.”
“가, 같이 가요!”
터번과 마스크를 두른 일련의 무리들이 작게 탄성을 흘리더니 그대로 달려 나갔다. 그들의 뒤로, 손에 족쇄를 찬 누더기 차림의 여자가 어기적어기적 따라붙었다.
한번 반전된 분위기는 그렇게 어제와 같은 오늘을 만들어냈다.
“이런, 제길! 늦었다! 뛰어, 이 늙은 개구리야!”
“이이, 결국 이렇게 되는구먼!”
먼저 들어간 한국인과 일행 셋을 필두로 사람들은 득달같이 게이트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멍하니 넋 놓고 있던 알드콘과 스칼로가 발을 놀렸을 땐 이미, 장내 모든 인원들이 게이트로 전력 질주를 하는 상태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 한 명. 세스나만 빼고.
“이런 미친……!”
세스나를 시야 끝에 담은 찰나의 순간, 수없이 고민했다. 무수한 질문과 문답이 스친다. 이성과 감성이 총력전을 벌인다.
그러나 나 같은 호구가 언제나 그렇듯. 팽팽 도는 대가리와 별개로 몸이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야, 야! 세스나! 뭐 해? 안 가고!”
나는 달리다 말고 급하게 제동을 걸었다. 그리고 여전히 모닥불 앞에 쭈그려 앉아있는 세스나에게 되돌아갔다. 그녀는 세상 행복한 얼굴로 젤리를 호로록 빨아 먹는 중이었다.
덥석. 내가 세스나의 팔뚝을 움켜쥐자 그녀가 퍼뜩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런 세스나를 데리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어… 정용 님?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에요?”
“왜냐니 지금……!”
울컥 소리를 지르려던 나였지만, 그녀의 끔뻑이는 백금색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쑥 들어가 버렸다. 결국 나는 질주를 멈췄다. 고함 대신 나온 것은 한숨이었다.
“으아아아! 드디어 탈출이다아아!”
“1년 6개월의 고행이여! 이제는 안녕!”
한 맺힌 절규가 들려와 시선을 돌려보니, 마침 알드콘과 스칼로가 게이트 안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하얗게 명멸하다가 이내 입자처럼 곱게 흩어지는 그들의 신형.
나를 아랑곳도 않는 모습에 야속한 마음이 잠깐 들었지만, 관뒀다. 그들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는 나도 잘 아니까.
그 와중에도 둘이 사이좋게 꼴찌로 통과하는 모습이 코미디라면 코미디군.
“응?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나요?”
당연히 질주하던 사람이 전부 사라진 이곳엔 나와 세스나, 두 사람이 덩그러니 남았다.
…그리고 게이트의 제한 인원은 한 명이 남았고 말이다.
“어라, 그사이 게이트가 열렸군요? 벌써 다들 나가셨나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는 세스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 처자는 아무래도 밥 먹는 데 열중해서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그래, 이미 다 나갔고. 앞으로 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는 건 한 명뿐이야.”
“어머, 그렇다면… 저희 중 누군가는 여기 남아야겠네요?”
“그렇지.”
세스나는 곧잘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주변머리가 없어서 그렇지 이해력은 좋은 여자다. 그러니 지금 상황의 난감함도 아마 잘 이해할 것이다.
세스나가 이내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즐거웠는데 아쉽게 됐네요, 정용 님. 저쪽 세상에서도 저를 기억해 주시면 좋겠어요.”
“그래, 나도 덕분에 심심하지 않아서 좋았… 응?”
“다음에 또 만나요. 꼭이에요. 그럼 살펴 가시길.”
그렇게 말하며 꾸벅 고개를 숙이는 세스나. 가만히 서서 잔잔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 말은… 네가 남겠다는 소리야?”
“네.”
“여기… 너 혼자 남아야 된다고. 저쪽 세상에서 시험도 혼자 치러야 할 텐데?”
“네, 저도 제 담당한테 들어서 알고 있답니다.”
세스나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내가 가는 게 당연하다는 행색이었다.
나는 이해가 안 된 나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아는데 왜?”
“정용 님이 여기서 제게 호의를 베풀어준 유일한 사람이라서요.”
“…….”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해요. 정용 님이 제게 처음으로 음식을 나눠주셨던 때를요.”
그 말에 나는 세스나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나도 모르게 침음을 삼켰다.
“으음, 그건 말이다, 세스나…….”
여기가 아무리 경쟁에 찌든 약육강식의 세계라지만. 지금 생각해도 세스나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이 나밖에 없었던 건 그녀 본인의 문제지 않았나 싶다.
아니, 생각을 해봐라. 처음 보는 사람이 대뜸 와서 그렇게 들이대면 당연히 이건 뭔 미친년인가 싶지. 그런 상황에 그녀가 하는 말이 밥 나눠달라는 소리라는 걸 알아채는 것도 이상하고.
난 어쩌다 보니 순순히 밥을 넘겨줬다. 딱히 내가 착해서라기보다는, 그냥 당시 내가 자포자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쓰읍.”
그래서일 것이다. 내가 지금 세스나의 행동에 죄책감을 가지는 것은.
“…나 원래 이렇게까지 호구는 아니다.”
“어, 네?”
어느덧 우리는 게이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내 뜬금없는 발언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스나를 그대로 툭, 밀었다.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 그대로 게이트에 빨려 들어갔다.
“저, 정용 님?”
“요리 배워둬.”
혼란스러운 얼굴로 내게 손을 뻗는 세스나. 그러나 내게 다가오던 손은 점차 입자처럼 잘게 바스러지며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그녀의 의문에 찬 얼굴도 천천히 사라져간다.
나는 그런 세스나에게 히죽 웃으며 작별을 고했다.
“다음에 만나면 밥 만들어줘라. 여기서 받은 만큼 푸짐하게.”
“아……!”
짧은 탄성을 끝으로 세스나는 사라져 버렸다. 이제 이 어둡고 음습한 광장에 홀로 남은 건 나뿐이었다. 주변이 조용하니 모닥불 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듯했다.
파아앙! 게이트가 정원을 충족하자 강렬한 빛을 한번 뿜고는 다시 사그라들었다. 유리처럼 투명한 벽에 막혀버린 게이트.
벽에 비친 내 얼굴에는, 애써 폼을 잡느라 일그러진 웃음이 걸려있었다.
“…그냥 내가 갔어야 됐는데…….”
나는 한참 뒤에야 씹어뱉었다.
원래 호구들 특징이 1절, 2절, 3절, 4절은 물론이고 뇌절에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까지 일을 벌여놓고 나중에 후회한다는 것이다. 소위 허세가 뇌를 지배한다고 하지. 그게 방금의 나였다.
“뭐, 그래도. 호의엔 호의로 보답하는 게 당연한 이치지. 그래, 그런 걸로 하자.”
하지만 호구들의 두 번째 특징은 쉽게 자기합리화하고 후회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덕분에 실패하거나 배신당한 후에도 발전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내 얘기다.
‘하지만 뭐.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이 세상에서 눈 뜨고 나서 저 정도로 헌신적인 호의를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니 후회가 적은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적어도 내가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호구 짓 한 건 팩트지만.
“이제 그럼… 뭘 한다?”
나는 모닥불 앞으로 돌아와 자리에 주저앉았다. 불규칙한 게이트의 다음 생성 시기까지 무얼 하며 시간을 죽여야 되나 고민했다. 유난히 적적하다.
든 자리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옆에서 땍땍거리는 이종족 늙은이 둘이 없으니 꽤 적적하게 느껴졌다.
“잠이나 잘까…….”
나는 그냥 자리에 엎어졌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은 언제나 그렇듯 암막을 친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시커멓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사물이나 사람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또렷하게 보이는 걸까. 내 눈이 좋아진 건가 아님 이 장소가 특별한 건가? 그런 아무래도 좋을 생각들을 떠올리다 보니 서서히 눈이 감겼다.
“다들… 무사해야… 할 텐데…….”
여기는 밤낮이 없다 보니 수면 리듬도 애매해진다. 그 때문에 나는 언제 어디서든 머리만 기대면 잘 수 있는 경지가 된 지 오래였다.
몽롱해지는 머릿속으로 잠깐이었지만 지긋지긋했던 인연들이 스쳐 간다.
“저기, 후보생님.”
“어엉?”
선잠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퍼뜩 상체를 일으키고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육중한 발걸음을 옮겨 내 머리맡에 선 이는 게이트의 문지기 골렘이었다. 게다가 항상 배식을 담당한 그 개체였다.
나는 졸음을 어떻게든 떨쳐내고 반가운 기색으로 손을 휘저었다.
“무슨 일이야. 식사 시간은 이미 끝났는데?”
“예, 찾아뵌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골렘은 말끝을 흐리며 곧장 허공에 손을 뻗었다. 골렘이 휘저은 손의 궤적에 따라 마법진이 발생하고, 찬란한 녹색광과 함께 여느 때처럼 게이트가 우르릉 솟아났다.
골렘은 무감각한 보석 눈을 번쩍 빛내며 말했다.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최후의 용사 후보생님.”
“…응?”
예상외의 제안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렇잖아. 아직 직전 게이트가 닫힌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돌연 골렘 쪽에서 찾아와 직접 게이트를 열고, 마지막까지 낙오된 떨거지 용사 후보생을 이렇게 정중히 모셔 간다고?
“저 안으로 가면, 뭐가 있는데?”
“…….”
골렘이 입을 다물었다. ‘안알랴줌’을 시전했다.
자연히 꺼림칙 수위가 떡상했다. 내 머릿속에는 이미 진돗개 하나가 발령된 상태였다.
‘위험한데… 이거 뭔가 진짜로 위험한데?’
오랜 호구 생활로 단련된 호구 센서(?)가 머리맡에서 사이렌을 힘차게 울려대고 있었다.
뭔가 있다. 그것도 굉장히 꺼림칙한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었다.
쉽게 말해 개고생의 냄새가 진동을 한다.
“자, 어서 가시지요.”
“…….”
하지만 골렘의 눈빛에는 거절할 수 없는 단호함이 서려있었다. 내가 거부하면 어떤 짓이라도 벌일 법한 완강한 기색이 느껴졌다.
애초에 나 역시도 빨리 여기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악마와 계약이라도 하고픈 심경이었다.
처음부터 내게 선택권 같은 건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될 대로 돼라. 이제 모르겠다.’
결국 나는 위태롭게 웃으며 서서히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른침을 한번 삼킨 뒤, 골렘의 손짓에 따라 게이트 안으로 발을 한 발짝 들이밀었다.
순간 발끝에 찌릿, 하고 전율이 올랐다. 직후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질적인 감각이 신체 내부를 훑어 올라가길 잠시.
“으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어 버렸다.
마지막 시야 너머로 보이는 건, 골렘이 정중한 인사를 올리며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기분 탓인가. 무척이나 동정하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익숙한 여인의 얼굴이었다.
좀 상술하자면 익숙해서 더 꼴도 보기 싫은 얼굴이다.
“표정이 가관이네요, 당신. 오랜만에 만났는데 예의를 갖추진 못할망정.”
“내 입장이 돼봐라, 똥털. 이런 표정 안 짓게 생겼나.”
그렇다.
내 앞에 고고하게 서있는 것은 어두운 금색 머리칼에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묘령의 여인. 똥털…이 아니라 미네르바였다.
예의 별명으로 부르자 그녀는 불쾌한 표정으로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여긴 어디야?”
난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내가 3개월이나 눌러살았던 시험의 장막과는 정반대로 온통 새하얗게 물든 곳이었다. 상하좌우의 경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오직 순백의 공간. 바닥이 존재한다는 것도 내가 서있어서 간신히 깨달을 수 있는, 꽤 섬뜩한 곳이다.
“아까 거기와 성질상으론 비슷한 공간이에요. 시험의 장막은 제3계와 제4계 사이. 이곳은 제4계와 제1계 사이의 공간이죠.”
“제4계? 1계?”
생소한 단어들의 향연에 나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미네르바는 그런 나를 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한 발짝 내게 다가온다.
“천천히 설명해 드리죠. 이제 당신은 전부 알아야 하는 처지니까. 이번엔 짧고 간단한 설명 같은 선택지는 없어요.”
그러더니 내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손을 허공에 흔들었다.
스스스스. 아무것도 없던 백색의 공간이 뒤집히듯 모습을 변형시켜 갔다. 허상처럼 일렁이다 이내 선명한 현실감을 가지고 주위를 메우는 풍경은, 내게 경악을 선사했다.
너무나 익숙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앉지 그래요? 집주인이 서있으면 그림이 이상하니까.”
먼저 터덜터덜 걸어가 침대에 걸터앉은 미네르바가 의자를 가리키며 권했다. 나는 얼떨떨한 상태로 비척비척 걸어가 의자를 빼고, 그녀와 마주 보게 앉았다.
“…….”
앉은 채로 멍하니 주변을 둘러본다. 10평 남짓의 원룸. 후줄근하고 더러운 생활감이 느껴지는 공간. 천장에는 말라비틀어진 곤충의 사체가 익숙한 구도로 붙어있었다. 틀림없다.
여긴 내가 죽기 전, 대한민국에서 살았던 원룸 그 자체였다.
“당신 기억을 토대로 재구성해 봤어요. 어떻게, 좀 편한가요?”
“…아까 거기보단 낫네.”
나는 가까스로 웃으며 대답했다. 손가락을 움직여 책상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소복이 쌓인 먼지가 묻어 나온다. 그런 점까지 우리 집과 판박이였다.
이런 엄청난 짓거리를 손 하나 까딱여서 벌일 수 있다니. 똥털이니 뭐니 막 대하고 있지만, 새삼 이 여자가 내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걸 깨닫고 말았다.
미네르바는 장난기 어린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제일 궁금해요? 당신 원하는 대로 들려드리죠.”
“…뭐든 다 대답해 주나?”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이다.
동의도 얻었겠다, 나는 해볼 만큼 해보기로 했다.
“나는 왜 여기로 불려 왔지?”
“까놓고 말하면 당신이 마지막까지 낙오된 구제 불능 용사 후보생이기 때문이죠. 설마 그게 당신일 거라곤 저도 상상도 못 했어요.”
“…….”
제길, 뭐 잘해서 불려 온 거면 모르겠는데, 못해서 불려 온 게 맞다는군.
학창 시절 교무실 불려 갈 때만 해도 켕기는 게 있으면 불안한 법. 나는 가슴께를 쿡쿡 쑤시는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했다.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건들거리던 미네르바를, 나는 물끄러미 쳐다보기 시작했다.
“…벌이라도 줄 거냐?”
“설마요.”
“그러면, 나한테 뭘 시킬 생각이지?”
“별건 아니고, 물건을 좀 맡길 생각이에요.”
툭 던지는 미네르바. 나는 곧장 눈썹을 튕겼다.
“물건?”
“네, 바로 이 물건.”
미네르바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재차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파아앙, 하고 특유의 녹색광이 터지며 마법진에 둘러싸인 구체가 생성되었다. 손바닥 크기보다 조금 큰 타원형 물체였다. 그것이 천천히 낙하하여 미네르바의 손에 안착했다.
미네르바는 그것을 선뜻 내게 건넸다. 나는 얼떨결에 받아 들고는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알이잖아.”
“네, 알이에요. 정확히는 마왕의 알이죠.”
“마……?!”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부릅뜬 눈으로 미네르바를 흘겨봤다. 하지만 미네르바는 여전히 무심한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연신 물었다.
“마왕의 알이면… 당연히 내용물은?”
“마왕이겠죠. 달걀에서 공룡 나오는 거 봤어요?”
“마왕이라면… 우리가 소환되면 때려잡아야 한다는 그……?”
하지만 거기서 미네르바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머리칼 아래로 유난히 그녀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 알에서 잠자는 건 그런 보통 마왕이 아니에요, 용사 후보생 박정용 씨.”
“보통 마왕이 아니면 뭐 티라노사우르스 마왕인가?”
대놓고 조롱했음에도 미네르바는 표정에 미동도 없었다.
그저 고요하게 잠긴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세상 심각한 표정이다. 무안해지는 건 개드립 친 내 쪽이 되었다.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이자니, 미네르바가 침잠된 목소리로 읊조렸다.
“먼 과거. 당신이 소환될 대륙을 한번 멸망시켰던 최후의 네크로맨서. 마녀 디아나 에스파다가 남긴 유일한 혈육이죠.”
미네르바는 거기서 말을 멈추고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으므로 여전히 입맛만 다셨고. 아쉬운 김에 생각나는 대로 씨불였다.
“그 디아나 뭐시기는 난생동물인가 보지? 파충류냐?”
“…….”
“알았어. 아가리 다물게. 그렇게 환멸스럽게 쳐다보진 말자고.”
내가 연신 장난스럽게 받아들이니 우리 똥털 여사께서 좀 화났나 보다. 눈빛이 많이 날카로운 게 온몸이 찌릿찌릿하다.
근데 내 입장에서도 지금 미치고 환장 팔짝 뛰겠다고. 뭘 알아야 맞장구도 치고 쿵짝이라도 해주지. 다짜고짜 불려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니 리액션도 빈약할 수밖에.
“…후우,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죠. 제1계니 제4계니.”
“그랬지.”
미네르바도 그런 내 상황을 인지한 건지, 낮은 한숨과 함께 서두를 끊었다. 나는 그제야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그녀가 드디어 이 촌극에 얽힌 내막을 밝히려는 대목이었으니까.
“이 가이알란트 차원에는요. 총 네 개로 분할된 세계가 공존해요.”
“네 개?”
“예, 제1계부터 4계까지. 제1계는 당신들이 소환될 중간계. 제2계는 소위 말하는 천계. 제3계는 지옥. 그리고 제4계는 흔히들 마계라고 부르는 무(無)의 땅이지요.”
미네르바가 손가락 네 개를 폈다 접으며 설명한다.
여기까진 나도 쉽게 이해가 간다. 나는 계속하란 의미로 턱짓을 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 말했다.
“벌써 수백 년도 전에, 지옥에 숨어 살던 네크로맨서 ‘디아나 에스파다’가 파라이소 대륙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녀는 예언에서 언급된 세상을 멸망시킬 존재였죠.”
“흐음, 그런데?”
“제가 속해있는 천계는 당시 중간계에 간섭하지 못한다는 금율에 속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을 통해 인간들에게 디아나를 저지할 용사를 소환했고, 이계의 존재를 이 땅 위에 처음으로 소환하는 데 성공했어요. 그가 최초의 용사입니다.”
일단 여기까지는 성공했단다. 하지만 아까 ‘세상을 한번 멸망시킨 디아나 에스파다’라고 했지, 아마?
아니나 다를까. 입을 놀릴수록 미네르바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마치 당시의 상황을 곱씹기라도 하듯이.
“하지만 저희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왜. 용사가 파업이라도 했냐?”
나는 장난스럽게 물었고. 미네르바는 골치 아픈 듯이 이마를 짚으며 대꾸했다.
“파업이면 다행이게요. 그는 인류를 헌신짝처럼 배신하고, 디아나의 수족이 되어 대륙의 멸망에 지대한 공을 세웠어요.”
“…….”
“용사의 이름은 ‘한’. 배신 후에는 마녀 디아나의 두뇌이자 기사이자 부모가 되어, ‘마녀의 기사 한’이라는 이름으로 악명을 떨치게 됩니다.”
내 상상을 뛰어넘다니. 너도 한 인물 하는구나, 최초의 용사. 탄복하고 말았다.
“뭐 어쨌든. 그렇게 세상이 대충 한번 망하고, 온갖 마물들이 인간들을 대신해 대륙을 뒤덮었는데…….”
그 뒤로도 그녀의 세계관 설명이 장황하게 이어졌는데, 더럽게 장황해서 금방 지루해졌다. 대부분은 흘려들었다.
내가 이해한 대로 대충 요약하자면 이렇다.
중간계가 멸망해서 천계의 신과 따까리들이 받던 제약이 비교적 느슨해졌고. 그래서 제1계를 뒤덮은 나쁜 놈의 새끼들을 척결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그 구제 사업이 바로 지금 벌이고 있는 용사 소환 의식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종적을 감춘 디아나 역시 그에 따른 대응을 시작했다.
특이적 존재인 용사의 소환에 맞춰 특이적 마물인 ‘마왕’이 탄생하도록 저주를 내린 것이다.
그래서 천계의 신들은 용사 시험과 여러 특전들을 통해 용사들을 육성해서, 마왕과의 싸움에서 최대한 많은 용사가 살아남도록 조력한다.
그렇게 질적 열세를 수적 우세로 압도하여(다구리라고도 한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마족과 인간 진영 간 전세를 백중세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 마녀 디아나의 유일한 혈육이라 일컬어지는 불사의 마왕이 잠든 알이 발견됐어요.”
그렇다. 바로 그런 상황인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마족보다 용사 측이 먼저 발견해 회수했다고는 하는데. 이걸 어찌 다루면 좋을지 이쪽에서도 그야말로 처치가 난감하다.
이 알은 좀처럼 부서지지도 않는다. 좀처럼 부화하지도 않는다. 그런가 하면, 죽은 것도 아니다. 분명히 살아서 맥동하고 있다.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그들은 이 알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그래서 천계에서는 특단의 조치를 했다. 일단 대기. 최대한 별 볼 일 없는 용사에게 맡겨서 이목을 피한 다음, 천천히 알의 동태를 살펴보려는 심산인 것이다.
여기까지 듣고 나니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그런 어썸한 시한폭탄을 나한테 짬 때리겠다?”
“…짬 때려? 그게 뭐예요?”
“떠넘긴다고.”
“아하. 예. 바로 맞히셨어요.”
의외로 미네르바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쌈박하게 긍정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옛말인 걸 모르나? 한 대 패고 싶군. 진짜로.
나는 알을 가만히 쳐다보다 퍼뜩 물었다.
“왜 하필이면 나야?”
“말했잖아요. 당신이 마지막까지 남은 구제 불능의 용사라서…….”
“그건 거짓말이군.”
“…….”
내 단호한 확신에 미네르바가 입을 콱 닫았다.
나는 그녀를 쳐다보며 이죽거렸다.
“난 호구긴 해도 병신은 아니거든. 그런 중요한 물건을 검증도 안 된 개노답 구제 불능한테 덥석 넘긴다? 그게 거짓말이라는 건 나도 알겠다.”
피식. 내 추궁에 미네르바는 웃음을 흘렸다. 내가 가소롭다는 듯이. 아니나 다를까 가소롭다는 듯한 말들이 쏟아졌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 당신이 뭘 어쩔 건가요?”
“어쩌긴. 추궁해야지.”
“한번 해보시는 건?”
순간 미네르바에게서 압도적인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숨이 막혀 가슴을 움켜쥐었고. 그녀는 그런 나를 보더니 이내 살기를 거뒀다.
내가 가만히 노려보자 미네르바의 입가에 다시금 쓴웃음이 걸렸다.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저희도 공짜로 떠넘길 정도로 양심에 털 나진 않았답니다.”
그녀는 별안간 상체를 내 쪽으로 한껏 기울이며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특별 임무를 수행하는 당신을 위한 특전을 몇 가지 준비했지요.”
“특전…이라고?”
“예, 특전이에요.”
미네르바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알을 소환했을 때처럼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파아앙. 진녹색 섬광이 코앞에서 간질거리더니, 이내 눈앞에 반투명 패널 같은 것이 주르륵 늘어졌다.
[알 수호자의 특전 목록]
첫머리는 이국의 문자로 그렇게 쓰여있었다. 나는 패널과 미네르바를 번갈아 쳐다봤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툭 내뱉었다.
“천천히 읽어 보세요.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하시고요. 나중에 하자 있다고 생떼 써도 소용없으니까요.”
그러라는군. 나는 분부대로 패널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지금 상황이 좀 어이가 없어져 피식 웃고 말았다.
‘이게 존버는 항상 승리한다는 그건가?’
게이트 경쟁에서 최후의 최후까지 밀려난 내가, 이렇게 특별 임무를 받는 처지에 놓이다니. 인생사 어찌 될지 참 한 치 앞을 모르겠다.
쓴웃음을 머금은 나는 곧 잡념을 물리고 패널의 내용에 집중했다.
특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고유 스킬 : 미미르의 눈 ― 특정 사물이나 생물의 상태, 능력을 데이터화하여 표시한다. 레벨이 오르면 능력이 강화된다.]
[2. 전설 스킬 : 신의 총애 ― 전투 승리 시 20%의 경험치 강화 적용. 레벨이 오르면 효율이 상승한다.]
[3. 유물 스킬 : 프로메테우스 ― 스킬의 습득이 용이해진다. 레벨이 오르면 효율이 상승한다.]
[4. 고유 스킬 : 에테르 수집 ― 비전투 시 일정 시간마다 각종 효과를 부여하는 ‘에테르’를 생성. 레벨이 오르면 효율이 상승한다.]
“흐음.”
거기까지 읽은 나는 가볍게 탄성을 흘렸다. 몇 가지 질문거리가 있었기에 패널에서 눈을 떼고 미네르바를 쳐다봤다.
“레벨이니 스킬이니 하는 것들은 뭐야? 게임에서 흔히 말하는 그걸로 해석하면 되나?”
“예, 그렇게 알아들으시면 됩니다. 그 용사 육성 시스템은 당신이 말한 ‘게임’의 시스템을 많이 참고했으니까요.”
“오호.”
미네르바의 긍정에 나는 탄성을 흘렸다.
참고라. 그렇다면 만들다 보니 어쩌다 닮은 게 아니고, 일부러 게임의 시스템을 베꼈다는 소리가 된다.
굳이 그렇게 만든 이유가 슬쩍 궁금했지만. 지금은 나머지 특전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아직 특전의 목록은 반도 지나오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스킬이 아닌 물건들… 즉 아이템 특전이 이어졌다.
[1. 고유 아이템 : 에테르 응결병 ― 에테르를 저장할 수 있는 특수한 병. 해당 아이템은 파손이 불가하다.]
[2. 유물 아이템 : 요검 베스타크 ― 마녀의 기사 ‘한’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칠흑의 양날 검. 무척 오래되어 강도는 보장할 수 없다.]
[3. 유물 아이템 : 성녀의 문장 ― 고대의 성녀 루나의 가호를 받은 엠블럼. 달의 힘이 저장되어 야간 전투 능력이 상승한다. 만월 아래에선 능력이 대폭 상승한다.]
“…이렇게 나만 퍼줘도 되는 거냐?”
좋은지는 모르겠고, 일단 양이 꽤 많아서 놀랍다. 나는 순수하게 감탄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 말에 미네르바는 피식, 대차게 웃었다. 가소롭다는 듯한 조소였다.
“아직 끝까지 안 읽어봤죠? 일단 다 읽어봐요.”
뒷맛이 찝찝한 발언이었다. 아직 남은 몇 줄을 읽기가 급격하게 싫어진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불안한 마음을 다잡고 계속 특전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첫머리부터 이해했다.
다음은 특전…이라고 쓰고 페널티라고 읽어야 하는 부분이 이어지고 있었다.
[고유 효과 : 불사의 결속 ― 불사의 마왕과 수호자의 계약을 맺는다. 계약과 동시에 불사의 마왕은 수호자와 일심동체가 되며, 불사의 마왕이 죽지 않는 한 수호자는 시간을 거슬러 불멸한다.]
“어?”
나는 읽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내 표정 변화를 퍽이나 즐겁게 감상하던 미네르바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들고 자시고… 이거 내가 이해한 그 내용이 맞나?”
“수호자의 계약을 받아들이면. 불사의 마왕이 먼저 죽어서 계약이 파기되지 않는 한, 당신은 죽어도 다시 살아나요. 그렇게 이해하셨다면 제대로 들은 겁니다.”
“이런 미친…….”
내 얼떨떨한 질문에 미네르바는 방글거리며 긍정했다. 내가 멍한 모습이 어지간히도 좋은가 보다. 내 머리는 어느 때보다도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죽지 않는다.
죽지… 않는다?
이건 아무리 상처를 입어도 그 자리에서 재생된다는 뜻인가. 아니면 완전히 생명 활동이 끊긴 뒤 다시 새롭게 부활한다는 뜻인가.
그것도 아니면. 패널에 써있는 대로 시간을 거슬러, 죽지 않았던 시점으로 돌아온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대체 무슨 약을 처먹고 이런 걸 처넣은 거야?”
내가 미네르바를 쳐다보는 눈빛에는 가히 증오라 해도 될 만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죽으면 다시 부활한다라.
말은 좋다. 이 알만 제대로 지켜내는 이상 불사신이라는 소리니까. 이건 남들이 보면 분명 축복이라 할 수 있는 최고의 특전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내가 봐선 이건 절대 축복이 아니다.
오히려 소름 끼치는 저주에 가까웠다.
“그 끔찍한 경험을… 앞으로도 겪으란 말이야?”
그것은 내가 죽음을 이미 경험해 봤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죽음은 절망이다. 눈앞에 닥치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절망.
그저 살고 싶다는 생각 외에 모든 사고가 제한되고. 무신론자인 나조차 무심결에 신을 찾게 되는 경험.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기만 해도 토악질이 나올 것 같단 말이다.
꿈에서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최악의 경험이었다고.
“뭐, 도망 못 가게 말뚝 박아버리는 건가?”
나의 잡아먹을 듯한 시선을 가만히 주시하던 미네르바가, 곧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해하지 마요. 우린 소환자들을 불사신으로 만들 만큼 제1계에 간섭하지 못해요.”
미네르바는 오히려 억울하다는 양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부정했다. 나는 눈썹을 슬쩍 치켜뜨고 그 말을 반추했다.
“그 말은?”
“그 특전… 아니, 저주는 저희가 거는 게 아니라는 소리죠.”
“그러면 누가?”
“누구겠어요? 마왕의 알, 본인의 의지죠.”
“알? 이 알이 나한테?”
“네, 죽음을 거부하는 불사의 마왕이 당신에게 수호의 계약을 거는 거예요. 현상 개입에 제약이 있는 저희는 그 의지를 거스를 수가 없는 거고요.”
나는 그 말에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손아귀에 붙들린 알을 주시했다. 주기적으로 맥동하는 알. 두근거리며 따스한 감각이 손아귀에 퍼졌다.
이 알이 살고자 하는 의지가 저 저주라 이거군. 그렇게 놓고 보니 알에서 느껴지는 뜨뜻한 감각이 유난히 섬뜩하게 다가왔다.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은 미네르바가 손가락을 들어 패널을 가리켰다.
“그래서 저희가 그 저주를 커버해 줄 만한 특전을 또 그 아래 준비했지요.”
“아… 어디.”
그러고 보니 아직 남은 특전 목록이 세 개 있다. 미네르바는 그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었다.
나는 곧장 시선을 내려 남은 특전을 훑었다.
[1. 고유 아이템 : 망자의 함 ― 전생에서 물건을 담으면 현생으로 이어진다. 고유 아이템은 담을 수 없으며, 함의 크기를 초과하는 물건도 담을 수 없다. 해당 아이템은 파괴가 불가하며,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다.]
[2. 고유 스킬 : 사신의 총애 ― 사망 시 현생 경험치 총량의 20%를 다음 생으로 계승한다. 레벨이 오르면 효율이 상승한다.]
[3. 고유 아이템 : 이자나미의 심장 ― 사망 시 전생의 시신에 발생하는 ‘잔류사념’을 회수하는 랜턴. 사용하면 회한의 망령들이 사념의 위치를 인도한다. 해당 아이템은 파손이 불가하며, 타인에겐 보이지 않는다.]
‘…뇌 내 번역기가 고장 났나?’
‘망자의 함’과 ‘사신의 총애’는 설명만 봐도 대충 알겠다.
그러나 마지막의 ‘이자나미의 심장’은 읽어봐도 뭔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곧장 미네르바에게 질문의 시선을 던졌다. 미네르바는 내 의도를 읽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우선 알아두세요. 불사의 마왕이 당신을 부활시키는 방식은 쉽게 말하면 ‘시공회귀’예요.”
“시공회귀가 뭔데?”
“당신을 포함한 모든 세계가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 시점이 언제가 될지는 저희도 알지 못해요. 불사의 마왕 본인이면 모를까.”
“아하…….”
한마디로 게임의 세이브 앤 로드. 이해했다.
이거 완전 그거 아닌가. 게임 중에 ‘다크니스 소울’이라는 어렵기로 정평 난 게임이 딱 이런 식이었지. 화방녀가 눈앞의 이 여자면 좀 하기 싫을 거 같은데.
혼자 진절머리 치던 나는, 순간 어떤 중대한 사실을 깨달은 나머지 목 뒤가 싸늘해졌다.
“서, 설마 그럼… 열렙 해서 초고수가 됐어도… 뒈졌을 때 세이브 포인트가 하나도 없으면…….”
“다시 최초로 돌아가는 거죠, 뭐. 경력 있는 신입?”
“이런 미친…….”
나는 얼이 빠져서 중얼거렸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려서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런 내 앞에 대고 박수를 짝, 힘차게 친 미네르바가 패널을 꾹꾹 누르며 히죽거렸다.
“진정하세요. 그래서 준비한 게 당신에게 준 아이템과 스킬 특전이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질문한 건 바로 그거였지.
대체 저 ‘이자나미의 심장’은 뭐냐?
“이자나미의 심장은 전생에서 잃어버린 기억. 스킬. 그리고 능력치의 일부를 회수해 주는 아이템이에요.”
이건 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서 허리를 떼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아이템의 효과로, 당신이 전생 때 죽은 자리에 시신이 남아요. 그리고 그 시신에는 전생의 ‘잔류사념’이 발생하지요.”
“그건 좀… 소름 돋는데.”
나는 한번 떠올려 봤다. 시신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진 전생의 나를 쳐다보는 현생의 나라.
모르긴 몰라도 등줄기가 시큰해지는 경험일 것 같다.
“현생에서 그 시신이 있던 자리에 찾아가 이자나미의 심장으로 사념을 빨아들이면, 전생의 기억과 능력을 수복할 수 있게 되죠. 사념의 위치는 아이템을 발동시키면 알아서 인도되고요.”
“뭐야. 생각보다 별거 없네?”
나는 맥이 빠진 나머지 헛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미네르바는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언뜻 조롱하는 것도 같고, 가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글쎄요. 어떨까요.”
의미심장한 미소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건 내가 예상하지 못한 애로 사항이 더 숨어있다는 소리겠지. 물어볼까 고민했지만, 관뒀다. 분위기상 물어봐도 대답해 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당신이 직접 알아가는 즐거움으로 놔두고.”
예상대로 미네르바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손을 휘젓자 내 자취방 풍경들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현상.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순백의 공간으로 돌아온 그곳에는, 어느새 게이트가 우뚝 솟아있었다.
나는 게이트 위쪽의 지도로 시선을 옮겼다. 대륙 최북단에 붉은 점이 선명하게 찍혀있다.
―미텔란트, 몰락 요새 할센베르크.
그곳이 내가 소환될 곳의 이름인 듯했다.
“설명해 드릴 건 다 해드렸습니다. 마침 시간도 한 시간 정도 됐군요.”
“…….”
“일하러 갈 시간이에요, 1억 6341만 7413번째 용사 박정용 씨.”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제법 우아한 자세로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손을 들어 게이트 쪽으로 나를 안내한다.
정중한 축객령이었다.
“뭐, 그래. 나도 이날을 석 달이나 기다렸다고.”
장난스럽게 인사를 날린 뒤 곧장 게이트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게이트 앞에 서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쿵쾅대는 심장과 몸을 바싹 조여 오는 긴장에 마른침을 삼키는 무렵.
“…생각보다.”
등 뒤에서 미네르바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미네르바는 나를 불가사의한 듯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저항을 안 하시는군요.”
“무슨 저항?”
“당연히 당신은 좀 더 격렬하게 거부할 줄 알았어요. 제가 당신의 살아생전을 지켜본 결과, 당신은 귀찮은 일을 극히 혐오하잖아요?”
“그랬지.”
참고로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귀찮은 짐을 떠맡은 걸 참 박복하다고 생각하는 중이고.
미네르바는 그런 내 태도가 더 이해가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당신은 생각보다 군말 없이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네요. 왜 그런 거죠?”
“내가 거부해도 시켰을 거잖아.”
“…….”
미네르바는 침묵했다. 사실상 긍정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호구 인생 24년 차인데 그 정도도 간파하지 못할 것 같냐.
나는 피식, 쓴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에게 말했다.
“네 말대로 귀찮은 일은 싫어해. 그러니까 거부하지 않은 거지.”
“그게 무슨……?”
“어차피 거부해도 강제로 시킬 일이면. 거부한다고 힘 빼는 거 자체가 귀찮으니까.”
내 대답에 미네르바는 재차 입을 닫았다.
“…그러네. 당신은 그런 성격이었죠. 후후.”
그리고 못 당하겠다는 듯 힘 빠진 미소가 미네르바의 입가에 어렸다. 가늘게 휘어진 그녀의 눈꼬리가 예쁜 호선을 만들었다.
지금껏 본 것 중에서 가장 진심이 담겨있는 미소였다. 곧 웃음이 사그라든 미네르바는 조금 진지하게 표정을 고쳤다.
“특별히 하나만 충고해 주죠.”
“해봐.”
미네르바는 지그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이 세상에 1억 7천만 가까이 소환됐던 수많은 용사 중 하나일 뿐이에요. 그리고 그중에서도 당신이 관리해야 할 마왕은, 오직 당신이 손에 쥔 그 알 속의 마왕뿐입니다. 그것만 잘해도 당신은 자기 밥값을 충분히 하는 거라고요. 아시겠어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의도가 좀처럼 분간되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손에 쥔 알을 쳐다봤다. 그런 가운데 미네르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놀러 나가는 개구쟁이에게 주의를 주는 부모처럼, 걱정스러운 기색이 다분한 목소리였다.
“쓸데없는 의협심을 버리세요. 자기 목숨을 무엇보다 가장 소중히 여기세요. 불사의 몸이니까 더더욱이요.”
애원에 가까운 말이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미네르바를 쳐다봤다.
왜일까. 그녀의 입가에는 쓸쓸한 자책의 미소가 어려있었다.
“꿈자리 사납기 싫으니까, 제발 망가지지 말고 오래 살아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시작도 안 했는데 초 치고 있네.”
나는 피식 웃어넘기고 곧장 게이트에 발을 집어넣었다. 한 시간 전에도 느꼈던 이질감이 발끝에서부터 몰려왔다. 시야가 명멸한다.
육신이 속절없이 빨려 들어가는 아득한 느낌 속에서, 마지막으로 미네르바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것 보세요. 벌써 그렇게 너덜너덜해졌잖아요.”
안타까움이 사무친 목소리였다.
4. 넌 이미 죽어있다
“크헉!”
게이트를 탄 직후, 나는 경기를 일으키듯 눈을 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필사적으로 본능에 따라 눈을 굴려 상황을 파악했다. 음습한 하수구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악취가 코를 사정없이 찔러 온다.
나는 지금 하수구 한가운데 널브러져 있었다.
“후우… 이, 이상한데. 전에 게이트 탈 때도 이렇게… 힘들었나?”
나는 온몸을 짓누르는 원인 모를 답답함을 떨쳐내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대충 닦아내고, 거친 숨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혼탁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
수 분이 지나자 서서히 벌컥거리는 심장이 진정되었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나는 몸을 일으켰다. 매무새를 대충 정돈한 뒤, 곧장 내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워. 이건 무슨 옷이래?”
그리고 어느새 변해있는 내 차림새를 보고는 탄성을 내질렀다.
꾀죄죄한 니트 차림은 어디 가고, 중세 사냥꾼처럼 셔츠 위로 얇은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가죽 바지 위로는 각반이 채워졌고, 갑옷은 혁대와 가슴띠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등에는 가방이, 허리춤에는 파우치가 메여있다.
내가 신기하다는 듯이 유심히 쳐다보자, 문득 눈가에서 미미한 탈력감이 발생했다.
의아할 틈도 없이 삐빅, 하는 소음과 함께 익숙한 패널이 등장했다.
[명칭 : 가죽 갑옷]
[보정치 : 방어도 +5]
[상세 : 신출내기 용사에게 지급되는 기본 장비. 특별한 성능은 기대할 수 없다.]
[강화 가능 횟수 : 5]
전에 미네르바가 보여줬던 패널과 유사한 형태였다.
그제야 그때 봤던 특전 스킬들의 효과를 떠올렸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게 그 ‘미미르의 눈’이라는 특전 스킬 효과인가?’
이미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무척 신기한 기분이었다. 패널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감탄사만 흘려댔다. 이거야 뭐 완전히 게임 하는 감각이잖아?
나는 기왕 사용하게 된 거, 가방에 들어있던 아이템들은 물론이고 내 상태도 확인하기로 했다. 눈을 감고 신경을 집중하자 곧 삐빅, 하는 소리가 울렸다.
[명칭 : 박정용]
[별칭 : 163417413번째 용사. 마왕의 알 수호자. 불사에 종속된 자]
[LV. 5]
[체력 : 150/150 | 마력 : 112/120 | 신체 상태 : 정상]
[힘 : 15 | 민첩 : 18 | 지능 : 10 | 히어로 센스 : 3]
[남은 능력치 포인트 : 0]
표시된 나의 상태는 무척이나 직관적이었다.
힘, 민첩, 지능이라. 어떤 게임에서든 스테이터스를 가늠하는 척도 중 왕도라고 할 수 있지. 미미르의 눈이 파악해 주는 건 아무래도 저 세 항목뿐인 듯했다.
특이점으로는 마력이 8 삭감된 거랑, 레벨이 시작부터 5였다는 점이다. 왜 5부터 시작하지? 미네르바가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으로 5까지 올려준 건가?
알 수는 없었다만, 레벨이 높아서 나쁠 건 없을 테다.
“…근데 이건 뭐지?”
하지만 두세 번 고쳐 봐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긴 했다. ‘히어로 센스’라는 항목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시스템이 그것을 간파했는지 곧 새로운 패널을 눈앞에 띄웠다. 전에 떠있던 상태 항목에서는 다시금 마력 4가 차출되어 총량은 108이 되었다.
[상세 설명 : 히어로 센스]
[이계에서 소환된 용사만이 가이알란트 대륙에서 가지는 제2의 감각. 운이나 매력, 육감과 직감의 향상으로 이어진다. 통상적인 레벨 업으로는 증강시킬 수 없으며, ‘신의 주사위’를 건드리는 특정한 경험을 통해서만 향상시킬 수 있다.]
“이야, 이거 편리하네.”
나는 찰떡같은 스킬 시스템에 감탄사를 질렀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미미르의 눈은 앞으로도 많이 써먹을 것 같은 스킬이었다.
“자, 그럼…….”
나는 손을 마주 비빈 뒤 주섬주섬 아이템들을 찾았다. 가진 아이템들을 머릿속으로 정리도 할 겸, 한 번씩 제대로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물건을 차례대로 바닥에 내려놓고, 마지막엔 배낭과 파우치도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 번씩 노려보며 집중을 한다.
삐빅. 곧 무수한 패널이 시야 맡에 차례대로 생성되었다.
[명칭 : 가죽 배낭, 가죽 파우치, 망자의 함, 이자나미의 심장, 요검 베스타크, 에테르 응결병, 휴대용 점화기]
그러나 이름만 주르륵 뜨고 상세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고개를 잠깐 갸웃거린 나는 가장 생소했던 휴대용 점화기 패널을 집중했다. 곧 눈가에서 탈력감이 생기며 상세 설명이 아래로 늘어졌다.
[명칭 : 휴대용 점화기]
[보정치 : 발화 기능. 강화 시 모닥불에 버프 부여 가능.]
[상세 : 초행 용사에게 일괄적으로 주어지는 휴대용 점화기. 일반 부싯돌과 작동법은 같으나, 마법 시료를 연료로 사용하여 수명이 반영구적이다.]
[강화 가능 횟수 : 3]
“어쩐지 라이터처럼 생겼다 했더니… 마법 라이터였냐?”
아무래도 상세 설명을 읽는 건 한 번에 하나의 개체만 가능한 듯했다.
나는 이미 사용처를 아는 망자의 함과 이자나미의 심장, 에테르 응결병, 그리고 볼 것도 없는 배낭과 파우치의 설명은 굳이 읽지 않기로 했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마력은 아낄 수 있을 때 아껴놓는 편이 좋겠지.
다른 아이템들을 집어넣은 뒤 배낭을 다시 짊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닥에 남은 예리한 검을 들어 올렸다.
스르릉. 특유의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검의 설명이 눈가를 간질였다.
[명칭 : 요검 베스타크]
[보정치 : 힘 +10, 민첩 +5]
[상세 : 마녀의 기사 한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칠흑의 양날 검. 마기를 흡수하면 성장한다. 고대의 ‘에고’가 잠들어 있다.]
“고대의 에고?”
산 넘어 산. 모르는 거 넘어 또 모르는 게 나왔다.
에고라면 내가 아는 에고 소드의 에고(ego)가 맞나. 쉽게 말해 자아가 있는 검인데 지금은 깨어나지 않았다는 소리?
나의 의문을 이번에도 귀신같이 캐치 한 시스템이 곧 내게 탈력감을 선사했다.
그러나.
[상세 설명 : 고대의 에고]
[오류 : 알 수 없음. 능력치 부족.]
나는 곧장 똥 씹은 표정으로 검을 내렸다. 체념의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직 내가 알기엔 짬이 부족하다 이건가?’
아무래도 고대의 에고 님은 지금의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쉽게 말해 렙이 후달려서 접근이 불가한 영역의 존재인 듯하다.
레벨을 올리고 마검을 성장시키다 보면 언젠가 알게 될 날이 오겠지. 어쩌다 에고가 깨어나면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봐도 되고.
“…좋았어.”
거기까지. 상황 파악도 끝났겠다. 나는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끝없이 이어진 어두운 하수구에서 물소리와 쥐들이 찍찍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나도 모르게 한 차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검을 쥔 손에 바짝 힘을 불어넣었다.
“신나는 모험을 시작해 볼까?”
그렇게 내 첫 모험은 이름 모를 하수구에서 오물 냄새와 함께 서막을 올렸다.
목표는 우선 여기를 빠져나가는 것. 이세계 전생의 기쁨을 누리는 건 일단 그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자. 그런 가벼운 생각으로 나는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이때는 정말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 하수구가 나를 위해 준비된 무간지옥(無間地獄)일 줄이야.
* * *
막노동을 하다 보면 하수구 주변에 기웃거릴 일이 많다.
막노동 공사판이란 게 대부분 건물을 짓는 거고. 건물이란 그냥 터 잡고 뚝딱, 하면 지어지는 게 아니다. 상하수도를 비롯한 주변 인프라를 건물에 끌어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쪽 관련 일도 가끔 투입돼 봤다.
덕분에 나는 전생에서 이미 하수구 냄새에 적응되어 있던 상태였다. 그래서 하수구 특유의 역겨운 냄새로 구역질을 하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크으… 대체 이건 무슨 냄새야?”
다르다. 지금 내가 헤매고 있는 이 하수구에서 퍼지는 냄새는 평범한 하수구의 악취가 아니었다. 나는 코끝을 징징 울릴 정도로 찔러 오는 인상적인 냄새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썩은 내… 그리고 이건…….”
피 냄새. 특유의 쇳내와 비린내가 하수구 냄새에 섞여서 진동하고 있다.
썩은 내는 날 수 있다. 하수구는 무엇이 썩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공간이다. 이미 면역이 된 냄새였기에 코가 금세 적응해서 무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동하는 썩은 내 속에 도사린 강렬한 혈향은 도저히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쪽인가?”
게다가 피 냄새는 점점 진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점점 진해지는 곳으로 내가 향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어깨가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피부가 온통 찌릿찌릿한 느낌이다. 긴장감으로 숨도 쉬기 힘들었다.
이윽고 피 냄새가 썩은 내를 완전히 압도하는 지점에 도달했을 무렵.
“으, 우욱!”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시선을 돌렸다.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도저히 직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시체. 시체. 그리고 또 시체.
무수한 시체로 쌓은 산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하수구의 막다른 곳. 족히 수백 구에 달하는 시체가 피와 오물로 범벅이 된 채 쌓여있다.
하나같이 신체의 일부가 절단되거나 뭉개진 시체들. 죽은 시기가 제각각인지, 어떤 시체는 뼈만 남아 썩다 만 가죽이 들러붙어 있나 하면, 어떤 시체는 갓 죽은 것처럼 혈색이 완연한 것도 있었다.
“이게… 대체……?!”
나는 시선을 조금 돌렸다. 노란색 무언가가 눈에 밟혔다.
시체의 산 옆에 작은 손수레가 있었다. 팔 조각이나 다리 조각이 널브러져 있고, 아직 다 못 내린 시체 몇 구가 실려있었다. 저것으로 어디선가 시체를 실어다 여기에 쌓아두는 게 아닐까. 아마 맞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노란 손수레에 쌓인 시신 하나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어?”
그리고 머릿속이 하얗게 칠해져 버렸다.
“아니, 잠깐만…….”
그 자리에서 몇 걸음 뒷걸음쳤다. 이름 모를 시신에 발이 걸려 그대로 나뒹굴었다. 철퍼덕. 바닥에 고인 진물과 오물이 바지를 빠르게 적셔 왔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을 들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가리켰다.
“아니, 저거… 나?”
내가 목격한 것은 내 얼굴이었다.
잘못 봤나 싶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어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무리 고쳐 봐도 저 시체는 내 것이었다. 수레에 쌓인 시체들 사이 대충 끼어서 눈을 까뒤집고 있는 내가 있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상체의 반쪽이 무언가로 완전히 짓뭉개져 있었다. 둔기 같은 것에 얻어맞은 듯했다.
그걸로 모자라 가슴팍에 피가 흥건한 것이,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수차례 찔린 듯하다. 걸레짝처럼 일그러진 형상에 무심코 내 몸을 쓰다듬었다.
뭐지. 대체 뭐지?
이상하잖아. 무슨 상황이지? 나는, 분명히 나는 방금 게이트에서 소환됐고. 모험을 시작한 직후잖아.
그런데 저건 뭐지? 왜 내가 죽어서 저기에 널브러져 있는 거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우우욱!”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머릿속이 너무 뒤죽박죽이다. 그래서였을까, 참기 힘든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어지럽다.
그런 와중에, 하얀 공간에서 미네르바와 나눴던 말들이 뇌리를 쿵쿵 울린다. 팽팽 맴돈다.
“…글쎄요. 어떨까요.”
“그 랜턴을 발동시키면, 사념이 있는 곳으로 알아서 안내해 줄 거예요.”
“이자나미의 심장은 전생의 기억과 스킬, 일부 능력치를 수복해 주는…….”
그리고 거기에서 나는 깨달았다. 그녀의 목소리 한 구절이 계속해서 반복 재생 됐다.
“기억과 스킬. 그리고 능력치를 수복…….”
기억을 수복해 주는 아이템.
즉 바꿔 말하면 죽었다 부활한 나는, 수복 전까지는 전생의 기억이 없는 상태라는 뜻이다.
왜 그걸 이제야 눈치챈 걸까.
“설마… 설마…….”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허리춤의 랜턴, 이자나미의 심장을 만지작거렸다.
우우우웅.
랜턴이 미미한 빛을 발하더니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희끄무레한 까만빛이 내 앞길을 인도한다. 마치 나보고 따라오라는 듯이 손짓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작동한다.”
랜턴이 빛난다. 발동을 시켰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안내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내가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내가 왜 시작부터 레벨이 5까지 올라있었는지를.
“내가… 나는…….”
우습게도 난 모 만화의 명대사를 떠올렸다.
“난 이미… 죽어있어?”
단지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
그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내가 제정신을 되찾는 데에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확히 기억하진 못하지만, 최소 한 시간 이상은 얼빠진 상태로 거기에 주저앉아 있었던 것 같다. 거대한 쥐 새끼들이 내가 죽은 줄 알고 다리를 물어댔을 정도니 말 다 했다.
“…진정하자. 그래.”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온몸에 다시금 긴장을 차곡차곡 채워 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시신을 뒤로한 채 심연처럼 끝없이 뻗은 하수구 통로 너머를 쳐다봤다. 물소리가 유난히 소름 끼친다. 나는 감각을 최대한 개방해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나는 괜찮아. 나는… 괜찮다. 아직까지는.’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이미 여기서 죽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죽은 뒤 부활한 상태고, 기억이 없어진 상태였기에 나는 내가 이제야 모험을 시작한 상태인 줄 알았던 것이다.
즉 이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이 하수도에는 내가 죽을 수도 있을 법한 위험한 것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일단 잔류사념이란 건… 여기에 없는 거 같고.”
곧장 랜턴을 갖다 대봤으나 랜턴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다만 미미하게 점멸하며, 연신 반대편 통로 쪽으로 어두운 빛무리를 흩뿌린다.
“저기 있다는 거냐?”
랜턴은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양 번쩍, 빛을 토했다.
나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을 간신히 참고 내 시체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랜턴을 잠시 빤히 주시했다.
[명칭 : 이자나미의 심장]
[보정치 : 전생의 기억 수복, 일부 능력치 수복, 사념 2회 중첩 불가]
[상세 : 사신 케이어시스의 계약품. 사망 시 시신과 잔류사념을 다음 생까지 유지해, 일부 능력치와 기억 회수를 가능하게 한다. 해당 아이템의 효과로 잔류한 시신은 타인이 접촉할 수는 있으나, 인식되지 않는다.]
[강화 가능 횟수 : 0]
아까는 안일하게 지나치려 했던 아이템의 상세 설명을 재확인했다. 나는 그걸 몇 번이고 읽어보다가 마지막 대목에서 멈칫했다.
‘…시신은 다른 사람에게 인식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이 상황은 이상하잖아. 시신은 수레 위에 있는데, 잔류사념은 없다. 누가 봐도 내 시신을 누군가 옮긴 것 아닌가.
눈앞에 펼쳐진 상황과 정보의 격차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자니 어김없이 알림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세부 정보 ― 고유 아이템 : 이자나미의 심장]
[시신은 랜턴의 주인 외엔 인식할 수 없으나, 사망 지점에서 지나치게 이격(離隔)되면 전생과 현생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타인에게도 인식되기 시작한다.]
“흠.”
모종의 이유로 내 시체가 사망 지점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남들한테 보이기 시작했다는 건가.
나는 바로 옆에서 흐르는 하수로의 구정물을 쳐다봤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이유라 하면… 죽는 과정에서 하수로 오물에 빠지거나 해서, 둥둥 떠내려갔다는 설 정도니까.
수레 위 시체도 구정물에 절어있긴 했지. 나는 고개를 슬며시 끄덕였다.
“…….”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랜턴이 가리키는 어둠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노란 수레로 시신들을 옮겼다는 내 추측은 틀림이 없는 듯하다.
내가 죽은 곳은 이곳이 아니니까, 시신은 옮겨도 잔류사념은 그곳에 있는 거겠지.
‘그렇다는 건… 나를 죽인 무언가도 거기에 있다는 소리고.’
합리적인 의심이다. 적어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나는 고개를 굳게 끄덕이고 숨죽인 발걸음으로 통로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찌직, 찌지직!
한 걸음씩 나아가는데, 발밑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작은 짐승 무리가 있었다. 쥐들이었다.
…아니, 정정한다. 작은 짐승 무리가 아니다. 쥐치고는 심각하게 컸다.
뉴트리아보다 거대한 시궁쥐 떼가 득시글거리며 나를 지나쳤다.
“으헤악!”
나도 모르게 양팔을 비비며 퍼뜩 벽에 달라붙었다.
쥐들은 그런 나를 아랑곳도 않은 채 자기들 갈 길을 달려 나갔다. 곧 수많은 무리들이 나를 지나쳐 통로 저편으로 멀어졌다.
‘시, 십년감수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아직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은 몇 마리의 쥐들을 눈에 담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그랬듯이 패널이 등장했다.
[몬스터 정보]
[명칭 : 헌팅 랫(hunting rat)]
[체력 : 21 | 마력 : 0]
[힘 : 3 | 민첩 : 6 | 지능 : 1]
[상세 : 미텔란트 북방 변경의 하수도를 지배한 생물. 영악하고, 빠르고, 난폭하다.]
“이것들도 몬스터였어?”
나는 나타난 패널 상단에 시선을 붙박은 채 중얼거렸다.
몬스터.
미네르바의 설명으로는, 옛날 세상을 한번 쫑 냈다는 디아나 뭐시기가 여러 차원에서 소환해 냈다는 놈들이다. 마왕들이 따까리처럼 부리는 놈들이기도 하고.
눈앞의 이 작은(?) 놈들도 그런 종족 중에 하나라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흑색으로 번들거리는 커다란 쥐들을 유심히 쳐다봤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럼… 얘네를 잡으면, 레벨 업을 할 수 있나?’
나는 내 스테이터스와 헌팅 랫의 스테이터스를 비교해 봤다. 내 레벨은 5. 스탯도 훨씬 앞선다. 남은 쥐 새끼의 숫자도 그리 많지 않다. 할 만하지 않나, 이 정도면?
촤아앙! 나는 볼 것도 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몇 마리 쥐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찌직?
쥐들은 내가 다가오는 걸 느끼고 시선을 휙 돌렸다.
하지만 나를 목격했음에도 딱히 적대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땅에 머리를 처박은 채 무언가의 잔해를 뜯어먹기 바빴다. 소위 말하는 ‘비선공 몬스터’라는 거겠지.
나는 침을 한번 삼키고.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었다. 그리고 곧장 땅을 박찼다.
“으랴아! 죽어어어!”
무방비한 헌팅 랫 한 마리의 등에 그대로 칼을 박아 넣었다.
푸지직! 파육음이 울린다. 동시에 기분 나쁜 손맛이 손바닥을 찌르르 울렸다. 나는 질겁하면서 재빨리 검을 뽑았다. 검은 두부를 찌른 양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스킬 ‘후방 강타’의 사용법을 알게 되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그런 패널이 떴다. 나는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손을 물려 그것을 없애버렸다.
파헤쳐진 쥐의 등에서 피가 찔꺽찔꺽 새어 나왔다. 내가 찌른 쥐는 그렇게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늘어져 절명했다.
칼이 잘 드는 건가, 내가 센 건가? 나는 얼떨떨하게 칼과 쥐의 사체를 번갈아 쳐다봤다.
찌직! 찌지직!
하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눈이 시뻘게진 쥐 하나가 하늘을 향해 울음소리를 내나 싶더니. 주변에 있던 모든 쥐들이 그것을 따라 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쥐들은 곧 나를 사방에서 포위했다. 내가 미처 다음 행동을 하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런 미친……. 빠르다!’
나는 급박하게 사위를 살폈다. 삽시간에 나를 둘러싼 쥐들은 대충 10마리 안팎.
낭패다. 주변에 숨어있던 다른 쥐들까지 몰려온 듯했다. 괜히 이름이 헌팅 랫이 아니군. 사람 사냥하는 본새가 물 흐르듯이 능숙하다.
나는 다시금 검을 똑바로 세우고 발끝에 신경을 집중했다. 어디서 튀어나오든 대처할 생각이었다.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건 직후 깨달았다.
찌지직―!
쥐들이 사방에서 동시에 달려든 것이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뒷걸음을 치며, 되는대로 검을 휘둘러 댔다.
“자, 잠깐, 타임! 이건 반칙이지, ×벌럼아! 아악! 내 다리!”
싸움은 개싸움 양상으로 흘러갔다.
내가 어쩌다 휘두른 검에 맞은 쥐는 그대로 두 동강이 났고. 그렇지 않은 쥐들은 내게 달라붙어 나를 마구 물어댔다.
내가 베어낸 건 고작해야 네 마리였다. 사지가 화끈거리며 격통이 밀려왔다. 동시에 쥐들이 달라붙어서 그런지 몸이 무거워졌다.
“떨어져!!”
나는 발악하듯 쥐들을 떼어내려 했지만, 무리였다. 치악력이 어찌나 좋은지 살가죽이 같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결국 나는 특단의 조치를 했다.
첨벙! 하수도 중앙에 흐르는 구정물에 그대로 뛰어든 것이다.
찌직! 찌지직!
쥐들은 허겁지겁 나를 뱉어내고는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하수로의 수심은 1미터 정도였기에, 내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나는 곧장 검을 치켜들었다.
“죽어어어어!”
나는 괴성을 지르며 헤엄치는 쥐들을 하나씩 검으로 찍어 눌렀다. 푸직! 쥐들은 속수무책으로 몸을 반으로 썰리며 절명해 나갔다.
푸욱, 푸욱, 푸푹! 섬뜩한 파육음과 검이 수면을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구정물이 피 보라와 함께 연신 튀어 오른다.
나는 주변에 쥐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짓을 계속했다. 뭐에 씐 양 반복했다.
“허억… 허억… 허어.”
적막이 찾아왔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검을 내렸다. 그리고 사위를 살폈다.
반으로 동강 난 쥐의 사체로 가득했다. 그것들이 구정물에 둥둥 떠서, 물길에 따라 서서히 흘러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나는 검을 어떻게든 허리춤에 집어넣고, 내 손을 쫙 펴서 가만히 쳐다봤다.
미친 듯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검을 너무 세게 잡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아파서 그런 건지, 그것도 아니면 공포 때문에 그런 건지, 잘 모르겠다.
“주, 죽을 뻔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모든 쥐들이 일거에 달려들어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을 다 물어댈 때는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었다. 순간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죽었으리라.
“끄으… 주, 죽겠다.”
나는 곡소리를 내며 하수구에서 나왔다.
바지며 셔츠며 시커멓게 물들어서 구역질 나는 냄새가 올라왔다. 나는 피가 철철 흐르는 환부를 가만히 쓸어봤다. 엄청나게 쓰라리다.
‘그래도 이놈들은… 아니야.’
하지만 내 전생의 시체가 입었던 상처와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그 시신이 입었던 건 날붙이에 찔린 자상이었다면, 내 상처는 찢어지고 뜯어진 열상이다.
심각하게 고민하는 내게, 산통을 와장창 깨는 팡파르가 들려왔다.
[레벨 업!]
[능력치 포인트를 3 얻었다.]
[스킬 향상 포인트를 1 얻었다.]
그렇다고 한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곧 탈력감과 함께 왼쪽에는 내 상태에 대한 패널이,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내가 가진 스킬의 목록들이 떠올랐다.
[명칭 : 박정용]
[별칭 : 163417413번째 용사. 마왕의 알 수호자. 불사에 종속된 자]
[LV. 6]
[체력 : 67/150 | 마력 : 96/120 | 신체 상태 : 열상, 출혈(저), 감염 위험]
[힘 : 15 | 민첩 : 18 | 지능 : 10 | 히어로 센스 : 3]
[남은 능력치 포인트 : 3]
‘이렇게 보니 그야말로 게임 그 자체군.’
나는 눈앞에 펼쳐진 패널들을 읽어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욱신거리는 몸을 새삼 찬찬히 둘러봤다.
레벨을 올린다. 그러면 능력치 강화 포인트를 주고, 능력을 강화한다.
스킬은 내가 하는 행동에 따라 생성되고. 레벨이 올라가면 그것을 새로 배우거나, 아니면 기존에 배워놨던 스킬을 강화할 수 있는 듯하다.
“일단은 살아남는 게 우선이니까…….”
나는 민첩에 2, 그리고 체력에 1씩 투자했다. 체력의 경우 포인트 1당 약 15 정도가 상승했다. 내 전체 체력 비례로 오르는 건지, 아니면 15로 고정인 건지는 모르겠다.
5레벨까지는 전생의 내가 올려놓은 걸 받아먹은 거라서. 뭘 어떻게 올렸는지 현생의 나는 잘 모른다. 똥캐 만들지나 않았으면 좋겠군.
‘그다음은 스킬인데…….’
변화한 상태 창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돌렸는데,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스킬 목록]
[고유 스킬 : 미미르의 눈(패시브) LV.1 ― 승급 가능]
[전설 스킬 : 신의 총애(패시브) LV.1 ― 승급 가능]
[고유 스킬 : 사신의 총애(패시브) LV.13 ― 승급 가능]
[고유 스킬 : 에테르 수집(패시브) LV.1 ― 승급 가능]
[유물 스킬 : 프로메테우스(패시브) LV.1 ― 승급 가능]
[일반 스킬 : 후방 강타(액티브) LV.0 ― 습득 가능]
[남은 스킬 향상 포인트 : 1]
스킬 하나가 레벨이 이미 올라있는 상태인 것이다.
다른 스킬들은 멀쩡한데 단 하나의 스킬만 유난히 높다. 나는 곧장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무슨 상황이지? 설마 전생의 내가?’
하지만 전생의 스킬은 사념을 수복하기 전까진 계승되지 않는다고 미네르바에게 똑똑히 들었다. 그러면 이거 버그 아닌가? GM(?)한테 신고 때려야 되냐?
결국 나는 사신의 총애 스킬에 시선을 집중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상세 설명을 보기 위해서였다.
[스킬 정보]
[명칭 : 사신의 총애 LV. 13]
[효과 : 사망 시 현생 경험치 총량의 38%(20+18)를 다음 생으로 계승한다.]
[상세 : 알 수호자를 위한 특전 스킬. 계승량은 레벨당 보정치 1.5%가 적용된다.]
[특이 사항 : 해당 스킬은 사신 타나트닉스와 독자적인 계약을 통해 계약자에게 적용된다. 사망 이후에도 레벨이 회귀하지 않는다.]
“으음…….”
상세 항목을 읽어봤는데 뭔 소린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설명란에 버젓이 나와 있으니 버그는 아닌 듯하고. 내가 이해한 대로 말해보자면.
“…이중계약?”
알 수호자로서 불사의 마왕과 맺은 계약은 별개로, 사신의 총애는 사신과 따로 맺은 계약 때문에 작용하는 스킬이다.
그래서 서로 간섭되지 않는다는 것 같다.
‘아니, 잠깐… 그렇다는 건?’
나는 퍼뜩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중요한 건, 이 스킬을 통해서 내가 전생의 정보를 하나 유추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꽤 심각한 정보를 말이다.
‘경험치 38퍼센트가 계승되어서 레벨이 5인 상태였다면… 전생의 내 레벨은 끽해야 13 정도.’
하지만 이건 단순하게 계산한 거고. 실제로는 변수가 있다. 레벨 업을 하면 다음 레벨까지 필요 경험치가 증가한다.
어떤 게임이든 레벨 업을 반복할수록 레벨 업이 점점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여기도 똑같은 시스템이니, 아마 전생의 나는 레벨이 13까지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치명적인 모순이 하나 생긴다.
‘레벨이 13을 넘지 못했는데… 어떻게 스킬 레벨이 13까지 올라와 있어?’
방금 경험해 본 결과. 레벨 업당 부여하는 스킬 포인트는 1이다. 그러니 최소한 레벨이 13까지 도달하지 못했으면, 스킬 레벨 역시 13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그 순간. 어떤 가정 하나가 빛살처럼 뇌리를 스쳤다.
“설마…….”
골이 띵해지는 느낌이다. 한 가지 충격적인 결론이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차마 입에 담기도 두려웠지만. 나는 결국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 외엔 답이 없었으니까.
“나 여기서… 한 번만 뒈진 게 아니구나?”
아무래도 나는 답도 없는 무간지옥에 빠져있는 듯하다.
5. 무간지옥(無間地獄)
공포와 혼란에 휩싸였던 나지만, 이번에는 전보다 훨씬 금방 빠져나왔다.
충격도 익숙해지는 모양이다. 내가 여기서 한 번 숨졌다는 걸 깨달았을 때보단, 여러 번 숨졌다는 걸 깨닫는 게 훨씬 버틸 만했다.
‘일단 스킬은 사신의 총애를 찍는 걸로 하고…….’
이쯤 되니 나도 비상 체제로 들어갔다. 원래대로라면 새로 습득한 후방 강타를 배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파리 목숨 신세라고 생각하니, 죽었을 때 다음 생에 뭐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아마 전생의 나나 전전생의 나도, 그래서 저 스킬을 죽어라고 많이 올린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같은 나니까 생각하는 수준은 도찐이 개찐이겠지.
“크으… 이런 젠장. 쓰라려 죽겠네.”
능력치도 상승시켰겠다. 온통 즐비한 쥐의 사체들을 헤집으며 앞으로 향하던 나는 연신 이맛살을 찌푸려야 했다. 어느새 쥐에게 물렸던 상처가 퉁퉁 부어 벌겋게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오물이 잔뜩 묻은 상처가 연신 욱신욱신 쑤신다.
나는 상처에 시선을 집중했다.
[신체 정보]
[상태 이상 : 감염 ― 지속적으로 체력이 저하된다. 소독과 치료를 하지 않으면 점차 악화되며, 종국에는 사망한다.]
[잔여 체력 : 48/165]
과연. 체력이 저하된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아까 능력치를 올릴 때보다 체력 수치가 저하되어 있었다. 저하 속도도 점점 빨라지는 듯했다. 기분 탓인가, 머리도 점점 윙윙 울리는 것 같다.
‘이, 이대로… 죽는 건가?’
제길, 아직 전생의 기억도 흡수하지 못했는데. 전생의 나는 전전생의 내 기억을 흡수했으려나? 그러면 전전생의 기억도 내게 들어오는 건가?
몸이 아프니 뜨거운 머리로 이런저런 생각이 흘러들어 온다. 나는 점점 망가져 가는 몸을 이끌고 랜턴의 빛을 따라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응?”
그렇게 의식을 반쯤 놓은 채 걷던 도중이었다.
어느 순간 파아앙, 하고 맑은 소리가 터지더니 내 몸에서 새파란 빛이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환각까지 보이나 싶었으나, 그 빛이 점점 선명해져서 환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퍼뜩 검을 뽑아 들었다.
“어메, ×발!”
하지만 곧 긴장으로 덜컹대던 심장은 안정되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이 적대적이긴커녕 아늑한 느낌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시원하고 알싸한 청량감이 나를 감싸고 들었다.
‘뭐야, 이 느낌…….’
잠시 그 서늘한 감촉을 음미하고 있자니. 빛무리가 어느 순간 한곳으로 응집되기 시작했다. 동그랗게 모인 빛이 스르륵, 내 배낭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황급히 배낭을 열고 아이템을 뒤져봤다. 그리고 새파랗게 빛나는 병을 꺼내 들었다.
“이건…….”
에테르 응결병이었다.
내 의문을 마침 해소해 주듯, 익숙한 소리와 함께 패널이 생성되었다.
[스킬 성공 ― 에테르 수집(패시브)]
[일정 시간을 충족하여, 물의 에테르를 에테르 응결병에 수집하였다.]
[다음 에테르 생성까지 남은 시간 ― 3시간]
‘물의 에테르?’
내가 응결병을 살살 흔들며 중얼거리자, 이번에도 패널이 타이밍 좋게 튀어나와 내 의문을 해소했다.
[아이템 정보]
[명칭 : 에테르 응결병]
[보정치 : 고유 스킬 ‘에테르 수집’으로 생성한 에테르를 저장한다. 현 레벨 저장개수 : 10개]
[상세 : 사신 타나트닉스의 계약품. 에테르를 저장하는 특수한 병. 사용 시 병을 입에 대고 에테르를 흡수한다. 해당 아이템은 파손이 불가하다.]
[강화 가능 횟수 : 0]
[현재 저장된 에테르]
[물의 에테르(1) : 물의 신 에크라슈의 정기를 응축한 것. 상처와 체력을 회복한다.]
‘조, 좋아. 회복이다!’
끝까지 읽어본 나는 쾌재를 불렀다.
타이밍 좋게도 회복 아이템이 내 손에 떨어진 꼴이 아닌가! 그야말로 하늘이 도왔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타이밍이었다.
“크윽… 병에 입을 대고 흡수하라고……?”
나는 곧장 사용하기로 했다.
더 이상은 머리가 어지러워서 한 발자국도 못 갈 것 같았으니까. 나는 패널이 설명한 대로 응결병의 입구에 내 입을 갖다 댔다.
내가 빨아들이기도 전에, 내 의지를 읽은 건지 에테르가 알아서 빨려 들어왔다.
순간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청량감이 온몸을 감쌌다. 푸른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내 몸이 음습한 하수구를 일순간 밝게 물들였다.
직후 내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목격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회복된다.”
벌겋다 못해 거멓게 죽어가던 상처는 새살이 솔솔 돋아 그대로 아물었다. 붓기도 삽시간에 빠지는가 싶더니, 몸에는 전에 없던 활력이 돌았다.
응결병은 사용하고 나자 다시 전처럼 투박한 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것을 다시 배낭에 집어넣고 몸을 움직여봤다.
편하다. 아팠던 직후라 그런지 처음 눈을 떴을 때보다도 편하게 느껴졌다.
‘물의 에테르가 있다면… 다른 에테르도 있나?’
나는 의문을 떠올렸고, 시스템은 그것을 이번에도 귀신같이 캐치 했다. 내 앞에는 각기 다른 다섯 개의 패널이 떠올랐다. 덕분에 탈력감도 다섯 배로 들었지만.
[상세 정보 ― 에테르]
[가이알란트 차원을 관장하는 자연계 신의 정기를 응집한 것. 각 신의 특성에 따라 피조물들에게 다른 효과를 부여한다.]
[불의 에테르 : 불의 신 라그나크의 정기를 응축한 것. 일시적으로 공격력을 폭증시킨다.]
[물의 에테르 : 물의 신 에크라슈의 정기를 응축한 것. 상처와 체력을 회복한다.]
[땅의 에테르 : 땅의 신 토르칼테의 정기를 응축한 것. 일시적으로 방어력을 폭증시킨다.]
[바람의 에테르 : 바람의 신 스카이트의 정기를 응축한 것. 일시적으로 민첩성을 폭증시킨다.]
‘네 종류가 있나 보군.’
그렇다는 건… 지금 물의 에테르가 아닌 다른 에테르가 나왔다면 나는 꼼짝없이 요단강 건넜을 거란 소리다.
‘소름 돋네.’
나는 패널을 물리고는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더럽게 없었던 토토 운발은 지금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나?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잡념을 물렸다. 그리고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다시 성큼성큼 전진하기 시작했다.
“사념이 가까워졌나?”
끝도 없이 이어진 하수도를 탐험해 나가던 어느 순간. 나는 랜턴을 보고 그것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미미한 진동이 랜턴 끝에서 느껴졌다. 뿜어 나오는 빛도 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찾았다.”
걸음이 멈췄다. 나는 바닥의 한 지점을 빤히 주시했다.
불길하고 음침한 빛을 뿜는 마법진이 있었다. 피로 그린 듯, 더러운 검붉은 색이었다.
누군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계속해서 울리고, 그 위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증기 같은 것이 계속 뿜어 나왔다. 증기가 일렁이는 모습이 흡사 절규하는 얼굴 같았다.
‘무시무시하게도 생겼구만.’
나는 음침하고 어두운 빛을 가만히 쳐다봤다.
빛이 내게 속삭이는 듯하다. 이리로 오라고. 어서 너의 사념을 가져가라고.
그런 강렬하고도 끈적끈적한 의지가 느껴졌다. 마치 척수를 혓바닥으로 핥는 듯한 꺼림칙한 감각…….
“으음.”
나는 침음을 흘리고는 사념에서 퍼뜩 시선을 뗐다.
오래 봐서 정서 함양에 좋진 않을 것 같았으니까. 호기심이 사람을 죽이는 법이다.
나는 헛짓거리 그만두고 곧장 랜턴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마법진에 갖다 댔다.
마법진이 음울한 빛을 번쩍 낸다. 진저리를 치며 시선을 전방으로 들었다.
그리고 나는 목격했다.
“…어라?”
내 팔뚝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나 자신도 믿지 못하겠으니 한번 더 말하겠다.
잘린 내 왼팔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나는 눈을 부릅뜬 채 그것을 멍하니 쳐다봤다.
털썩. 무기력하게 떨어진 내 팔 위로 어깻죽지에서 피가 쏟아져 나온다. 그제야 격통이 찾아왔다.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끄아, 아아아악!”
나는 바닥이 더러운 것도 잊고 그 자리에서 미친 듯이 굴렀다. 어깨를 부여잡았다. 불에 지지는 듯 뜨겁고, 닿은 손이 저주스러울 정도로 아프다!
팔이 뿌리부터 예리하게 잘려 나간 내 어깨는 직접 봐도 현실감이 없었다. 줄줄 피가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니 그저 구역질이 올라올 뿐이다.
“그웁! 우웨에엑!”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토했다. 머리가 녹아버릴 것 같다. 아프다. 괴롭다. 숨이 막힌다.
그런 와중에 띠링, 띠링, 띠리링. 패널과 함께 현실감 없는 사운드가 계속 감각을 어지럽혔다.
쓰러지기 직전. 사념에 갖다 대었던 이자나미의 심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한 것이다.
[아이템 발동 ― 이자나미의 심장]
[전생의 잔류사념을 획득했다.]
[힘을 3, 민첩을 6, 지능을 0 포인트 수복했다.]
[실전(失傳) 스킬 ― 후방 강타(액티브) LV.2를 습득했다.]
[실전(失傳) 스킬 ― 일섬(액티브) LV.3을 습득했다.]
[실전(失傳) 스킬 ― 에테르 수집(패시브) LV.2를 습득했다.]
[전생의 기억을 모두 수복했다.]
“끄아아아악!!”
직후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 엎어졌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고통이 노도처럼 몰아닥쳤다. 어깨의 아픔마저 싹 가실 정도였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안녕. 너는 용사인가?
―모두 네놈들 때문이야. 이제 그 사람이 더 이상 고통받게 두지 않아.
―그냥 얌전히 죽어. 말해줄 건 아무것도 없어.
정보와 기억의 격류. 누군가의 말, 생각, 상황, 잊어버렸던 고통과 감정들.
그리고 죽음, 수많은 죽음. 내가 잊고 있었던 죽음들이 일거에 내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억겁처럼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하악… 하악… 하악…….”
기억이 돌아왔다. 전생의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됐다. 그리고 내가 이 하수도에서만 몇 번이나 사망유희를 즐겼는지도 똑똑히 알았다.
‘…1, 17번. 기억 속에 있는 것만 세어도 17번이나 죽었다.’
아무래도 전생의 ‘나’들은, 어떻게 죽든 간에 사념 수집만은 마치고 죽은 듯했다. 물론 17번 이전에도 더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겹친 기억이 끝나는 지점은 17번째다. 적어도 17번째 전생까지는 사념 수집을 마쳐서 기억이 계승했다는 소리다. 그중에서 약 3번은 쥐에 물려 감염되는 등의 같잖은 이유로 비명횡사했다. 하지만 나머지 14번의 사망 원인은 모두 한결같았다.
지금 내 왼팔을 자르고, 하수로의 어둠 속에 숨어있는 그 누군가.
전부 그 자식의 짓이었다.
‘나는… 곧 살해당한다!’
그래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똑똑히 알았다. 그러니 알고 있다. 늦었다. 나는 이미 그 자식의 먹잇감으로 포착되었다. 나는 분명히 죽을 것이다.
그런 내가 지금 해야 할 행동은 단 하나.
“이런 ×발!!”
나는 곧장 몸을 일으켜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다. 가뜩이나 어두운데 피가 모자라서 그런지, 좀처럼 길이 가늠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길을 더듬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도망… 도망쳐야 해!”
알고 있다. 지금의 허접한 나로서는 그 자식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래도 달렸다. 적어도 이건 의미 없는 발악이 아니었다.
그건 지금까지 죽어간 전생의 내가 증명한다.
‘다시 살아났을 때… 사념이 최대한 가까운 곳에 남도록!!’
그래서 나는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처음에 눈을 뜨는 그곳. 시체의 산과 가까웠던 하수로의 사거리로.
나는 발전하고 있었다.
약 11번째 사망한 나부터는 사념을 얻자마자 상황을 파악하고는, 항상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물론 시작 지점에 도착하기 전에 모두 살해당했지만.
그들은… 아니, 나는 헛짓거리를 한 게 아니었다. 사망이 반복될수록, 사망 지점은 점점 시작 지점과 가까워지고 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더……!’
직각으로 꺾이는 모퉁이를 돌았다. 이제 코앞이다. 희망이 보인다. 다시금 다리에 힘을 주려던 찰나.
“…놓칠 것 같아?”
기괴하게 변조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사형선고였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퍼걱! 둔중한 파육음이 울렸다. 내 몸에서 나는 소리다. 등 뒤에서 날아온 육중한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이다.
“크악!”
내 몸은 하늘을 부웅 날아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우드득, 빠드드득. 땅을 사정없이 구르는 와중에 몸속에서 그런 소리가 났다. 온몸이 잘게 부서지는 소리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았다.
“카학… 하악… 키익……!”
이제 내 입에선 사람 같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쇠 긁는 소리가 숨 쉴 때마다 새어 나왔다. 내 목숨이 빠져나가는 소리였다.
머리에서 철철 흐르는 피 때문에 시야가 새빨갛다. 붉게 물든 하수구 시야 너머로 누군가의 인영이 꿈틀거린다. 그것은 점점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공포가 엄습한다.
카가각. 카가가각.
작은 체구로 검을 질질 끌고 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들어 그것을 노려봤다.
시야가 흐리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이… 새끼……!”
기억이 돌아왔지만 아직도 모른다. 저 자식이 누구인지.
대체 왜? 대체 왜 저 새끼가 날 죽이려 드는 거지?
무수한 의문이 쏟아졌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그 물음이라면 약 6번째 전생에서 이미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얌전히 죽어. 말해줄 건 아무것도 없어.
저 새끼는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는다. 나는 그래서 대신에 씨익, 악바리에 찬 웃음을 지어줬다.
“두고 봐라… 다음… 생에는, 더… 발전해서…….”
네 정체를 알아내고, 죽여버릴 거니까.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내 목을 향해 단두대처럼 떨어지는 시퍼런 날붙이의 형상이었다.
* * *
“크헉!”
백색의 공간에서 게이트를 탄 직후, 나는 경기를 일으키듯 눈을 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필사적으로 본능에 따라 눈을 굴려 상황을 파악했다. 음습한 하수구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악취가 코를 사정없이 찔러 온다.
“후우… 이, 이상하다. 전에 게이트 탈 때도 이렇게… 힘들었나?”
나는 온몸을 짓누르는 원인 모를 답답함을 떨쳐내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온몸을 적신 식은땀을 대충 닦아내고, 거친 숨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혼탁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
“후우, 이제 좀 낫군.”
정신을 가다듬은 나는 스킬 ‘미미르의 눈’을 사용해 내 상태를 확인해 보거나, 아이템을 확인해 봤다. 전체적으로 이상은 없었다. 특전 아이템도 설명받은 그대로였다.
다만 이상한 점이 있다면, 레벨이 이미 3이 되어있었다는 정도?
뭐 미네르바가 보너스로 레벨 2개 얹어줬나 보지. 그렇게 넘어가기로 했다. 대충 사는 건 내 전매특허다.
“…좋았어.”
상황 파악도 끝났겠다, 나는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끝없이 이어진 어두운 하수구에서 물소리와 쥐들이 찍찍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나도 모르게 한 차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검을 쥔 손에 바짝 힘을 불어넣었다.
“신나는 모험을 시작해 볼까?”
그렇게 내 첫 모험은 이름 모를 하수구에서 오물 냄새와 함께 서막을 올렸다.
목표는 우선 여기를 빠져나가는 것. 이세계 전생의 기쁨을 누리는 건 일단 그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자.
그런 가벼운 생각으로 나는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 * *
“으악! 깜짝이야!”
정처 없이 하수도를 떠돌던 나는, 어둠 저편에서 쏜살같이 달려 나오는 수십 마리의 쥐 떼들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냥 쥐 떼면 모르겠는데 몸뚱이가 왕따시만 해서 더 놀랐다.
놈들에게 시선을 집중해 보니 일종의 몬스터였다. 이름은 헌팅 랫. 나는 저도 모르게 허리춤의 검에 손을 올렸다.
‘한번 잡아볼까?’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고민하던 나는 결국 한숨과 함께 긴장을 풀었다. 포기한 것이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지금 내 역량이 얼마나 될지도 모르고. 레벨이 3밖에 안 되는데 쟤네들이 떼거리로 우르르 달려들면 어쩔 거야?
레벨이 한 5 정도 됐으면 모르겠다.
덤벼볼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지.
“음… 조심조심…….”
땅에 얼굴을 처박고 무언가를 열심히 뜯어먹는 헌팅 랫. 나는 놈들의 이목을 최대한 피해 살금살금 움직였다. 다행히 헌팅 랫들은 식사 중엔 다른 것에 별 관심이 없는지, 무사히 쥐 떼가 포진한 지대를 피해 갈 수 있었다.
지나고 나서야 한숨 돌린 나는 괜히 뒤를 돌아보며 꿍얼거렸다.
“용사씩이나 돼서 쥐 새끼들 피해 다니는 게 뭔 꼬라지야……. 그냥 화끈하게 붙을 걸 그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목숨은 하나뿐인 소중한 거니까.
아니지. 지금 나는 목숨이 하나가 아니잖아? 다시 살아난다면서? 하지만 뭐 살아나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사실 내가 죽어도 부활한다는 거 그냥 구라 아냐?
“윽!”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실실 웃던 나는 별안간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황급히 코를 막았다.
익숙해진 하수도의 악취를 뚫고 강렬한 쇠 비린내가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피 냄새?”
피 냄새를 맡자 온몸이 경고 신호를 보냈다.
긴장이 들어차며 감각이 확장되었다. 검을 뽑아 들었다. 나는 발걸음 소리도 죽이며 전방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혈향은 그 순간에도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직각으로 꺾이는 모퉁이가 나왔다. 나는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며 확, 모퉁이를 꺾어 돌았다.
“끄악!”
그리고 곧장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 버렸다. 나는 모양 빠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자빠졌다.
“아오, 씁… 대체 뭐야?”
얼얼한 무릎을 쓰다듬으며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 발 언저리에 묵직한 무언가가 널브러져 있었다. 크기는 딱 사람만 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냥 사람이었다. 미동도 없는 것을 보아 죽은 사람. 시신이다.
“…어?”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시신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나였다.
거멓게 죽은 살가죽. 그리고 피를 잔뜩 뒤집어쓴 내 몸뚱이가 거기에 나동그라져 있다. 한쪽 등짝이 완전히 찌부러져 있었다. 무언가 무거운 것에 얻어맞은 모양새다.
하지만 내 몸을 흥건히 적시고 있는 피는 거기서 나온 것이 아니다. 전부 예리하게 도려내진 왼팔과, 허전한 목 위에서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그렇다. 시신의 목은 저만치 멀리서 따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선명하게 핏발이 선 내 얼굴과 마주친 나는 곧장 숨을 삼켰다.
“허. 으허어억!”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려 내 시신에서 멀어졌다. 혼란을 집어삼키는 압도적인 공포가 몰려왔다.
그런 상태였기 때문일까. 시신 아래서 불길한 빛을 뿜는 마법진을 내가 발견한 것은,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저, 저거… 사, 사, 사념?”
그것의 정체를 가만히 추측해 보던 나는 곧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거기서 느껴지는 특유의 끈적한 속삭임이 그런 확신을 갖다 줬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나는 허겁지겁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손에 걸리는 랜턴을 움켜쥔 채 천천히 마법진에 갖다 댔다.
우우웅. 마법진이 랜턴과 공명하며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예상대로 그것은 전생의 사념이었다.
나는 랜턴이 반응한다는 사실 자체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렇다면… 이 시체가 진짜… 나란 말이야?’
잘못 보거나, 나와 심하게 닮은 누군가가 아니었다. 정말 나였다. 그걸 아이템이 확신시켜 준 것이다.
내가 실감하기 무섭게 시체는 퍼석, 먼지처럼 바스러져 허공으로 휘날렸다.
“아… 크악!”
사라지는 머리통을 가만히 쳐다보던 내게, 어느 순간 화악, 수많은 정보와 기억의 파도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띠링, 띠링, 띠리링. 연신 신호음이 귓가에 맴돌았다.
[아이템 발동 ― 이자나미의 심장]
[전생의 잔류사념을 획득했다.]
[힘을 1, 민첩을 3, 지능을 0 포인트 수복했다.]
[전생에서 실전한 스킬이 없어, 실전 스킬을 수복하지 못했다.]
[전생의 기억을 모두 수복했다.]
“끄아아아악!”
나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그러고도 도저히 고통이 지워지지 않아 벽에 이마를 미친 듯이 박았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피가 나도록 이마를 박았음에도 고통은 내부에서 더욱 심해져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일말의 자비 없이 머릿속을 헤집던 기억과 감정의 격류가 끝이 났다. 순간적으로 찾아온 고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커허… 허억!”
18번.
기억 속에서 나는 18번의 죽음을 반복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만 18번이니, 아마 그 전에는 더 죽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내 시신이 있던 자리를 떠올렸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18번째 나의 최후와 거의 비슷했다. 18번째 나를 19번째 내가 쳐다보는 감각은 감회가 꽤 새롭다.
‘아니… 이, 이럴 때가 아니야!’
나는 곧장 발부터 놀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다. 빠르게 걷던 걸음은 달리기로, 달리기는 곧 전력 질주가 되었다. 망설임은 전혀 없었다.
타타타타! 분주한 발소리가 하수도 벽을 때리고 내 귓전에 흘러들어 온다. 나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리고 어둠 너머를 가만히 응시한 채, 별안간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거기 숨어있는 거 다 알아! 뻑치기 할 생각이라면 이미 뽀록났다 이거야!”
실제로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있다고 가정하고 그렇게 외쳤다. 비단 허장성세를 부리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이렇게 외침으로써 얻는 실질적 효과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상대가 기습을 포기하고 순순히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다. 어떻게 자신의 은신을 눈치챈 건지가 궁금해서라도 말이다.
둘째는 글쎄… 뭐랄까.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미래의 나’에게 짬을 때리기 위해서다. 쉽게 말하면.
‘들킬 거였으면 여기까지 온 시점에 100% 들켰어! 죽이려면 죽여봐라, 이 새끼야!’
18번이나 경험해 봤으니 안다.
그 정체 모를 새끼한테 포착당한 뒤로 살아남는 건 내 깜냥으론 불가능하다. 만약 내가 이미 포착당한 뒤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대신 다음의 나는 지금까지의 나처럼 만만하지 않을 거다, 하수도 뻑치기범아. 왜냐하면…….
“…도착했다.”
이번 생의 내가 이미 시작 지점에 도착해 버렸으니까.
내가 처음으로 눈을 뜨고, 신나는 모험이니 어쩌니 운운하며 떠났던 장소에 돌아왔다. 네 방향으로 수로를 뻗어가는 사거리의 한복판. 나는 지금 거기에 서있었다.
18번이나 반복 재생되는 전생의 기억들이 사방에서 어른거렸다. 가만히 주변을 살피고 있자니 그리움이 풍긴다. 역겨워서 토할 것 같은 그리움이었다.
“어떻게 눈치챈 거지? 미행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가각, 가가각.
멍하니 있던 내 말초신경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돌바닥을 긁는 소리. 이미 전생에서 숱하게 공포가 각인된 소리가 시시각각 가까워진다.
놈이 왔다. 특유의 길쭉한 칼날을 바닥에 질질 끌면서. 어둠 너머에서 다가오고 있다.
“이, 이런, 제길……!”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다. 나는 곧장 철저하게 ‘타살 준비’를 시작했다. 황급히 배낭을 뒤져 아이템을 꺼냈다.
손에 들려 나온 건 알 수 없는 재질의 작고 시커먼 상자였다.
[아이템 정보]
[명칭 : 망자의 함]
[보정치 : 전생의 물건을 담아놓으면 현생으로 이어진다.]
[상세 : 사신 운터드레드의 계약품. 고유 아이템은 담을 수 없으며, 함의 크기를 초과하는 물건도 담을 수 없다. 해당 아이템은 파괴가 불가하며,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다.]
[강화 가능 횟수 : 0]
‘제길… 시간이 없어!’
셔츠 앞섶을 거칠게 찢어발겼다. 그리고 손가락을 깨물었다. 절박한 마음 덕분인지 이빨이 곧장 손가락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나는 찢은 헝겊을 벽에 대고 손가락을 눌러 쓰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천둥벌거숭이로 다시 태어날 과거의 내게 보내는 타임캡슐이다. 머리를 쥐어짜 내 최대한 효율적인 단어들을 골랐다. 그리고 휘갈겼다.
―섣불리 움직이지 마. 일단 ㅈ
거기까지 썼을 때.
“대답해 줄 생각은 없는가 보네. 그래, 좋아.”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쇄애액! 파공음이 섬뜩한 속도로 가까워졌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엎어졌다. 바닥에 몸을 최대한 밀착시켰다.
“그냥 죽어. 다른 쓰레기들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목줄을 긁었다.
콰과광!
내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간 무언가가 바닥을 사정없이 파괴했다. 온몸이 울릴 정도로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나는 흙먼지 너머로 날아온 그것을 눈에 담았다.
“…저, 저거…….”
날아온 것은 거대한 철구였다.
세상에. 구체가 내 상체만 하다. 판타지 영화에서 거인 죄수들이 착용하면 알맞을 크기.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붙은 게 유독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피했어? 어떻게?”
촤르르륵! 철구는 그 육중한 무게감이 거짓말인 양 다시 어둠 너머로 빨려 들어갔다. 철구의 주인이 끌어당긴 것이다.
희번덕, 싸늘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들거렸다. 의문스러운 기색이 담겨있었다.
“내 공격을 미리 읽다니. 대체 정체가 뭐야?”
그? 아니면 그녀? 어쨌든 괴한의 목소리는 변조된 것처럼 노이즈가 끼어있었다. 실제로 변조를 한 듯했다. 마침 장소도 장소였던 덕분에 호러 분위기가 아주 잘 살아났다.
이런 옘병싸맞을. 억울해 미치겠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이세계 하렘 판타지처럼 나 쫓아다니는 여자는 없을망정, 나 죽이겠다고 쫓아오는 살인마는 좀 아니잖아.
‘용사라면서. 이게 무슨 용사냐고!’
왜 나는 고전 명작 스릴러 ‘샤이닝’의 주인공이 됐지?
왜 이세계에서 눈 뜨자마자 냄새나는 하수구에서 사망유희를 반복하고 있지?
저놈은 대체 뭐길래 죄도 없는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지?
“하, 하하하…….”
무수한 의문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입 밖으로 나온 건 어떤 의문도 아닌 헛웃음이었다. 어차피 저놈이 대답해 줄 수 있는 것들도 아니고. 대답해 주지도 않을 테니까.
“음?”
괴한은 내 웃음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낮은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위협적으로 철구를 붕붕 휘두르기 시작했다. 서슬 퍼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웃어? 무슨 자신감이지.”
“자신감은 무슨. 포기한 거지.”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어둠 속 괴한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살고 싶지 않나?”
“살려줄 거냐?”
“그럴 리가.”
“그러면서 뭘 물어. ×벌럼이 장난치나.”
내가 도리어 목에 빳빳이 힘주고 욕지거리를 내뱉자 괴한이 흠칫거렸다. 괴한이 날 쳐다보는 눈빛에는 의문을 넘어서 어떤 혼란이 서려있었다.
“이 반응은 좀 신선하네. 당신… 죽는 게 무섭지가 않아?”
“사자가 사슴 걱정해 주고 자빠졌네. 안 무섭냐고? 존나 무섭다. 뭐 어쩔 건데.”
나는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괴한에게 까딱거렸다.
물론 괴한은 그 손짓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냥 아니꼬운 외국인한테 한국어로 욕한 느낌이지.
생각해 보니 저 괴한과 이렇게 오래 대화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괴한의 기습이 실패한 게 컸다. 항상 사지를 쥐도 새도 모르게 절단당하고, 철구에 얻어맞고. 비명만 지르다 숨이 끊어지기 일쑤였으니.
‘적어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저 괴한이 피도 눈물도 감정도 없는 미치광이 사이코패스는 아니라는 것. 대화가 통하는 인간이다.
이건 큰 수확이다.
“하긴. 네놈들 사고방식을 알아서 좋을 게 없지.”
그리고 괴한은 드디어 대화가 영양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인 괴한의 손이 훌쩍, 내 쪽으로 휘둘렸다.
쇄애애액!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시야에 한가득 철구가 들어왔다.
“으학!”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도저히 철구의 속도를 이길 수 없었다.
퍼어억! 이제는 익숙할 정도인 파육음. 오른쪽 어깨에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동시에 내 몸은 허공으로 치솟아 빙글빙글 돌았다.
“크하악!”
중력에 따라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온몸이 욱신거린다. 어깨엔 감각이 없었다. 신음과 함께 울혈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쿨럭! 커헉!!”
상황이 그렇게 되자 증발하려던 현실감이 다시금 조여들었다.
옘병 오라질, 한가하게 나 잡아 처먹으려는 살인마 새끼랑 담소나 나누고 있었다니.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나 보다.
‘…편지… 하다못해 이거만이라도……!’
나는 그제야 손에 쥐고 있던 헝겊 조각에 생각이 미쳤다.
황급히 반대 손에 쥐고 있던 망자의 함을 열었다. 만질만질한 뚜껑이 폴칵, 부드럽게 열렸다.
그리고 나는 순간 이마를 찌푸렸다.
‘뭐야, 이건?’
함에는 이미 무언가 들어있었다. 나는 황급히 그것을 빼냈다.
종이였다. 꼬부랑글자로 무언가 쓰여있고, 그 위에는 피로 찍은 것 같은 지장이 두 개 찍혀있다.
계약서 쪼가리인가? 그런 것치곤 급조한 느낌이 역력하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의 내가 넣어둔 건가? 그럴지도 모른다.
아무튼 지금 이런 것에 신경 쓸 틈이 없다. 전생의 내가 뭘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다음 생의 내가 좀 살고 보자!
나는 종이 쪼가리를 하수도에 대충 던져버리고는 혈서를 쓴 헝겊을 재빨리 집어넣었다.
“유언 있나?”
그르르릉. 작업을 마치고 나니 칼날을 끄는 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괴한은 언제나 마지막 한 방을 저 칼날로 지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나는 꿈쩍도 않는 목을 어떻게든 돌려 괴한의 발치에 시선을 뒀다. 피와 오물로 점철된 검은 구두가 눈에 밟혔다. 나는 피식 웃으며 유언을 말했다.
“구두 멋지네.”
“…칭찬, 고마워.”
뿌드드득!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물감이 폐부에 훅 치고 들어오며 엄청난 고통이 쏟아졌다.
“크아아아악!”
그리고 곧 의식이 끊어졌다.
* * *
“크헉!”
백색의 공간에서 게이트를 탄 직후, 나는 경기를 일으키듯 눈을 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필사적으로 본능에 따라 눈을 굴려 상황을 파악했다. 음습한 하수구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악취가 코를 사정없이 찔러 온다.
“후우… 이, 이상하다. 전에 게이트 탈 때도 이렇게… 힘들었나?”
나는 온몸을 짓누르는 원인 모를 답답함을 떨쳐내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온몸을 적신 식은땀을 대충 닦아내고, 거친 숨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혼탁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
“이제 좀 낫군. 그럼 어디…….”
정신을 가다듬은 나는 스킬 ‘미미르의 눈’을 사용해 내 상태를 확인해 보거나, 아이템을 확인해 봤다. 전체적으로 이상은 없었다. 특전 아이템도 설명받은 그대로였다.
다만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있었는데. 우선 레벨이 1이 아닌 2부터 시작했다는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뭐야, 이거. 깜빡거리네.”
특전으로 받은 아이템 중 하나인 ‘망자의 함’이 불길한 보라색으로 번쩍거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가만히 주시하자 시야 근처로 기묘한 탈력감이 생기며 미미르의 눈이 발동되었다.
[아이템 정보]
[명칭 : 망자의 함]
[알림 : 아이템 갱신 ― 전생에서 망자의 함 저장 아이템이 갱신되었다.]
“아이템 갱신?”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들고 있던 망자의 함을 저도 모르게 툭 떨어트렸다. 함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고, 황급히 함을 다시 들어 올렸다.
“…설마.”
한 가지 가정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워낙 믿기 어려운 가정인지라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갱신됐다는 건… 내가 벌써 한 번 죽었다는 소리?’
설마, 하는 생각과 함께 코웃음이 나왔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의욕이 충만했던 다리는 어느새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설마… 하지만 혹시?
그런 주저가 내게 족쇄를 채운 것이다.
우우우우. 하수도의 어둠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후우.”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망자의 함 뚜껑에 조심스럽게 손을 갖다 댔다.
일단 갱신됐다는 아이템이 뭔지나 확인하자. 놀라든 당황하든 그건 그 뒤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천천히 손에 힘을 줬다.
뽈칵. 신기한 재질로 만들어진 상자는 의외로 쉽게 열렸다. 안에는, 피로 문자를 휘갈겨 쓴 섬뜩한 헝겊 쪼가리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들어 올려 문자에 시선을 박았다.
―섣불리 움직이지 마. 일단 ㅈ
한국어다. 혹시나 싶어 반대로 뒤집어도 봤다. 그래도 한국어다.
혈서라 알아보긴 힘들지만, 괴발개발인 글씨체로 보아 아마 내 글씨는 맞다.
한 번 보고 고쳐보고 세 번이나 다시 본 뒤, 나는 해석한 그대로 소리 내 읽었다.
“섣불리 움직이지 마. 일단… ×.”
갑자기 쌍욕을 박는 전생의 나.
대체 의도가 뭐지. 나는 고개를 모로 꼰 채 한참을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의도한 바를 모르겠다.
하지만 거의 하나의 사실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아니… 뭐야. 지, 진짜 죽었어?”
내뱉고서도 어이가 없어 허탈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가정. 하지만 나는 그 터무니없는 가정을 어쩔 수 없이 믿게 되었다.
혹시나 싶어 허리춤의 랜턴에 손을 갖다 대자, 랜턴이 음울한 소리로 울부짖으며 환하게 빛났기 때문이다.
‘…발동된다.’
이자나미의 심장이 발동한다. 즉, 나는 이미 죽은 게 맞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랜턴을 들어 올렸다. 우웅, 우우웅. 랜턴이 낮게 진동하며 어딘가를 향해 환한 빛을 쏘아냈다.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의외로 빛의 방향이 가깝다. 가까워도 너무 가깝다.
아니나 다를까. 내 시신이 누워 있었다. 하수로의 어둠 때문에 지금껏 못 본 듯하다.
몸통이 끔찍하게 짓이겨진 채 가슴이 꿰뚫려 있다.
“오와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랜턴을 내던졌다. 공교롭게도 내던진 랜턴은 정확히 내 시신에 맞고 바닥을 굴렀다.
우우우웅.
랜턴은 시신 아래 그려져 있던 핏빛 마법진과 공명했다. 시체는 흔적도 없이 바스러져 공기 중으로 날아갔다. 뇌리에 연신 신호음이 울렸다.
[아이템 발동 ― 이자나미의 심장]
[전생의 잔류사념을 획득했다.]
[힘을 0, 민첩을 1, 지능을 0 포인트 수복했다.]
[전생에서 실전한 스킬이 없어, 실전 스킬을 수복하지 못했다.]
[전생의 기억을 모두 수복했다.]
“끄아아아악!!”
나는 다시금 머리를 싸매며 고통의 비명을 질러야 했다.
이로써 딱 20번째다. 기억이 돌아온 나는 고통 속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아오, 씨봉알. 진짜 못 해먹겠네, 이거.”
나는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고통이 심한 나머지 바닥에 대가리 처박다가 난 상처였다.
전생의 숱한 기억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온 뒤 안정기에 접어들면, 현자 타임이 빡세게 온다. 나는 지금 그 여파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상태였다.
가만히 시간 축내기도 뭐하고. 나는 나의 상황을 한번 객관적으로 살펴보기로 했다.
‘일단 망자의 함은 재시작에서 굉장한 도움이 됐다.’
받을 때도 대체 이놈의 아이템을 어디다 써먹을까 생각했는데, 과거로 보내는 타임캡슐로 써먹다니. 그 급박한 상황에서의 임기응변치곤 기특하다, 전생의 나.
나는 앞으로도 망자의 함을 그렇게 써먹기로 했다. 애초에 이 용도 외에 쓸모가 있을지부터 의문이긴 하지만.
일단 나는 전생에서 했던 것처럼 앞섶을 찢어 헝겊을 만들었다. 그리고 미처 다 쓰지 못한 부분을 마저 써 넣었다.
―섣불리 움직이지 마. 일단 잔류사념에만 집중해라. 넌 이미 죽어있다.
마지막 한마디는 유머 겸 경고였다.
초창기의 내가 생각 없이 털레털레 움직이는 것은, 아직 죽어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자각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가 나타나리라.
“좋아, 이제 바꾸면…….”
나는 원래 있던 헝겊을 빼고 새 헝겊으로 갈아 넣었다.
이러면 혹시나 죽었다 깨어나도, 아까처럼 함이 보라색으로 빛나면서 아이템 갱신을 알려줄 것이다. 다음 생의 나도 결국 나니까 이걸 보면 이변을 자각할 거다.
여기서 깨어나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자각을 말이다.
‘그러면 존버 메타를 타겠지.’
그리고 지금의 나처럼, 천천히 생각할 시간도 벌 수 있을 테고.
나는 별안간 고개를 돌려 사방을 살폈다. 하수도가 네 갈래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내가 괴한에게 죽은 방향을 앞으로 치면 앞과 뒤,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 이렇게 네 방향.
‘생각을 좀 해보자고.’
내가 열여덟 번째 생에서 시체 더미를 발견했던 건 뒤쪽이다. 계속해서 죽임을 당했던 건 앞쪽이었고. 뒤쪽의 하수로는 시체 더미를 끝으로 막다른 길이며, 앞쪽은 제법 길게 이어져 있다.
‘그렇다는 건, 그 괴한이 내 시신을 옮겨놓은 거라고 치면… 이 시점에서 놈은 이미 시체 더미 쪽을 들렀다는 소리.’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지금껏 틀어박혀 있던 전제를 뒤바꿨다.
그렇군. 나는 시체 더미 쪽으로 향하던 괴한과 정면으로 마주친 게 아니다. 같은 방향으로 가던 괴한을 내가 따라잡았거나, 뒤따라오는 내 기색을 괴한이 눈치챈 것이다.
‘이런 미친…….’
빨리 선택을 해야 한다. 그 괴한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선 어디로 가야 할까. 일단 앞은 절대 아니고. 왼쪽, 아니면 오른쪽?
아니, 나는 곧 고개를 뒤흔들었다. 정답이 번득였기 때문이다.
‘뒤. 시체 더미 쪽으로 간다.’
지금 내가 하려는 건 어디까지나 시간을 버는 것이다. 현 상황에 오른쪽 길이든 왼쪽 길이든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주먹을 틀어쥐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나는… 목숨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망가지지 마라.’라고 당부하던 미네르바의 말이 어른거린다.
죽는다는 건, 아무리 죽지 않는다 해도 존나게 무서운 거다. 내가 100번 뒈졌어도 101번째 나는 분명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다.
나란 인간이 19번 망가지는 경험으로 이미 충분하다. 20번째는 극구사양이다.
‘그놈 목적이 순찰이든 살인이든… 한번 갔던 곳을 다시 오지는 않겠지.’
왼쪽이나 오른쪽과 달리 뒤쪽의 짧은 수로는 빠삭하다. 이미 가본 적이 있으니 안다. 괴한은 한동안 그 시체 더미에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전생의 숱한 죽음과 경험이 만들어낸 명백한 증거. 쾌거였다.
“가볼까.”
결정됐으면 망설일 이유는 없다. 나는 곧장 몸을 일으키고 뒤쪽 하수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나의 최종적인 목적은 어쨌든 이 하수도를 나가는 것이다. 일단 지상으로 나가야 용사라고 뻐기면서 모험이든 뭐든 할 거 아니냐.
‘프롤로그는커녕 포장지도 안 뜯은 상황이라고 지금.’
그 때문에 하수도를 나가는 데 최종적으로 괴한이 거슬린다면, 그 괴한을 격퇴해야만 한다. 최소한 뿌리칠 정도의 무력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내가 생각하기에 세 가지 정도다.
‘첫째로는 이 하수도의 전체적인 지도.’
이곳의 지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괴한의 동선 또한 파악해야 한다.
이건 내가 이미 전생의 기억들을 토대로 작성하고 있었다. 전생의 나 중에는 앞쪽 수로의 끝자락까지 간 놈도 있었기에 뒤쪽과 앞쪽의 수로는 거의 완벽하다.
물론 끝자락에 도달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괴한에게 척살당했긴 했지만, 적어도 그쪽에 출구가 없었다는 건 확실하다. 결국 왼쪽이나 오른쪽도 언젠가는 둘러봐야 한다는 소리다.
‘두 번째는 레벨 업.’
아무리 동선을 짜고 발버둥을 쳐도 여차하는 순간에 맞닥뜨리면 당장 내 무력이 중요하다.
지금 내 레벨은 2. 전생에서 가장 높은 레벨을 찍었던 건 17번째의 나. 즉 시체 더미에 뻗어있던 그 시신이었다. 당시 레벨은 11 정도. 그래서 38퍼센트 경험치를 받은 18번째 나는 5레벨로 전생한 거였다.
‘하지만 그때도… 그 괴한에게는 역부족이었다.’
물론 항상 그랬듯 불의의 기습을 당했다고는 하나, 레벨이 높아서 민첩성이 좋아진 나는 그 기습의 상처가 얕았다.
그래서 저항을 해보았지만 무리였다. 괴한의 실력은 당시의 나를 아득하게 뛰어넘고 있었다.
적어도 레벨 20. 안전을 기하면 약 25까지는 레벨을 키워야 한다. 이기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놈의 공격에 반응이라도 할 수 있도록.
‘마지막 세 번째는… 에테르 풀 충전.’
내가 18번째 전생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된 ‘에테르’의 수많은 효능. 적의 전력이 나를 아득히 상회하는 이상, 나는 그것을 극한으로 활용해야 한다.
‘전생에서도 에테르가 차오른 적은 있었지.’
그러나 대수롭잖게 생각하고 넘어가거나, 사용할 틈조차 없었다. 대부분 태평하게 모험 분위기를 내다가 불의의 기습을 당하고 그대로 숨이 끊어졌으니까.
오직 18번째 인생. 헌팅 랫에게 까불었다가 빈사가 되고 시기적절하게 물의 에테르가 나왔던 나만이 깨달은 게 에테르의 유용함이었다.
‘필요한 건 시간이다. 방법은 단순하니까.’
계획한 건 간단하다. 우선 필요한 에테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다 불필요한 에테르가 나오면 그것을 마셔버리고, 다시금 필요한 게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이름하여 ‘에테르 인디언 기우제 작전’이다.
‘공격 에테르는 필요 없어. 나는 그 괴한을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다.’
지금 필요 없는 건 공격력, 즉 불의 에테르다. 나머지 방어력, 민첩성, 그리고 회복 에테르만으로 10개의 에테르를 모두 충전할 계획이었다.
현재 계획상으로는 433 전략이 이상적이다. 축구 아니다. 회복이 4, 방어가 3, 그리고 민첩이 3이라는 의미다.
‘이렇게까지 하고 나면… 그나마 좀 해볼 만하겠지.’
그래서,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느냐면.
산처럼 쌓인 시체 더미 사이에 숨어서 무한 존버를 하는 중이다.
“크으… 썩은 내……!!”
당연한 말이지만 시체 사이에 숨어서 가만히 있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악취부터가 그렇고. 기분은 말도 못 하게 꺼림칙하며, 가끔 배 쪽이 간지러워서 긁어보면 시체 파먹던 구더기가 손톱에 딸려 나온다. 화들짝 놀라서 몸을 뒤척이면 어딘가에서 떨어져 나온 눈알과 마주친다.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그 짓을 지금 하루째 하는 중이다.
“버티자… 버텨야 산다……! 버텨라, 박정용……!”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혹시나 괴한이 찾아왔을 때를 위한 조치다. 송장인 척하는 게 송장 되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직접 20번쯤 시체가 돼봐라. 내가 죽음을 반복하면서 깨달은 건, 죽음이란 건 알면 알수록 무섭다는 것뿐이다. 살 수만 있다면 더한 짓도 기꺼이 하게 된다.
“이, 이제 나올 때가 됐는데…….”
나는 눈물을 머금고 애타게 에테르 병을 쳐다봤다.
시간이 거의 다 됐다. 워낙 절박해서 그런가, 이젠 신체 타이머가 에테르 나올 시간을 거의 정확하게 알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곧 몸에서 환한 빛무리가 쏟아졌다. 응집되어 정제된 빛이 고스란히 응결병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희망을 가득 담아 패널에 시선을 향했고.
[스킬 성공 ― 에테르 수집(패시브)]
[일정 시간을 충족하여, 불의 에테르를 에테르 응결병에 수집하였다.]
[다음 에테르 생성까지 남은 시간 ― 3시간]
“이런 ×바아알!”
욕지거리를 주워섬기며 곧장 새빨간 에테르를 들이켰다. 호랑이 기운이 눈물겹도록 용솟음쳤다.
앞으로 최소 3시간 여기에 박혀있을 생각을 하니 눈물도 절로 솟아올랐다.
6. 열렙 용사
“…다, 다 됐다. 드디어.”
결국 내가 이상적인 에테르 수집을 완료한 건 이틀이 다 지나서였다. 나는 온몸에 진득하게 밴 시체 냄새에 연신 구역질을 하며, 에테르 병을 빤히 쳐다봤다. 병에 담긴 에테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저장된 에테르]
[물의 에테르 (4) : 물의 신 에크라슈의 정기를 응축한 것. 상처와 체력을 회복한다.]
[땅의 에테르 (3) : 땅의 신 토르칼테의 정기를 응축한 것. 일시적으로 방어력을 폭증시킨다.]
[바람 에테르 (3) : 바람의 신 스카이트의 정기를 응축한 것. 일시적으로 민첩성을 폭증시킨다.]
“물의 에테르가 이렇게 안 나오는 거였을 줄이야…….”
나는 치를 떨며 에테르 병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시체 더미에 숨어 지내던 나날이 새록새록 솟아오른다.
나오라는 물의 에테르는 안 나오고 불의 에테르가 왜 그렇게 튀어나오는지. 이 세상에도 물욕 센서라는 게 존재하는 건가? 이젠 빨간 불빛만 봐도 경기가 일어날 것 같다.
“밥이라도 먹고 왔으니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아사하겠네.”
꼬박 사흘을 숨어있었는데도 아직 허기는 참을 만한 수준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시험의 장막에서 먹고 온 점심밥 덕분이었다. 스칼로가 강조했던 ‘일신우일신’ 어쩌고 때문에 습관적으로 먹던 건데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그게 고작 사흘 전 일이라는 것도 놀랍군. 죽음을 반복한 내 기준으론 수십 일은 지난 기분인데 말이다.
‘스칼로, 세스나, 알드콘 할배랑 크라네이드도… 잘 지내고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니 문득 장막에서 만났던 인연들이 떠올랐다. 내 처량한 신세 때문인지 유독 감상에 젖는 듯했다. 나는 곧 궁상을 접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궁금하면 여길 빠져나가서, 직접 확인해 보면 되는 일이고.”
나는 자신에게 다짐하듯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하수로 너머로 뻗은 어둠을 가만히 주시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요 사흘간, 괴한은 시체 더미 쪽으로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쌓인 시체의 부패 상태로 봐선 내가 이곳에 오기 직전까지도 시체를 옮겨 쌓은 듯한데. 내가 오고 나니 거짓말같이 발길이 끊어진 것이다.
“내가 숨어있는 걸… 이미 알고 있나?”
순간 섬짓한 가정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으면 그대로 내버려 둘 이유가 없다. 지금껏 이유도 모른 채 척살당하던 나였기에 안다. 괴한이 내 꼬락서니가 불쌍해서 봐줬을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어둠 속에서 예광을 발하던 그 올곧은 눈을 똑똑히 기억한다.
“모두 네놈들 때문이야. 버러지 쓰레기들. 그 사람이 더 이상 고통받게 두지 않아.”
모두 네놈들 때문이라고. 그 사람이 더 이상 고통받게 두지 않을 거라고.
언제였더라. 어쨌든 전생의 내가 죽기 직전, 그 괴한이 중얼거린 말 중 하나였다. 괴한이 나를 죽이고, 이 시체의 산을 쌓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내가 모르는 어떤 명백한 이유가.
‘뭐 어쨌든. 안 와주면 나는 땡큐지.’
하긴 나 죽이겠다는 사람 사정 따위 알 게 뭐냐. 나는 찌뿌둥한 몸을 풀며 내 상태를 살폈다.
[명칭 : 박정용]
[별칭 : 163417413번째 용사. 마왕의 알 수호자. 불사에 종속된 자]
[LV. 2]
[체력 : 105/105 | 마력 : 100/100 | 신체 상태 : 공복]
[힘 : 10 | 민첩 : 13 | 지능 : 10 | 히어로 센스 : 3]
[남은 능력치 포인트 : 0]
신체 상태가 정상에서 공복으로 바뀐 것 말고 특이점은 없었다. 굳이 꼽자면 지나치게 허접하다는 것 정도?
뭐 상관없다. 허접스러운 레벨은 지금부터 올릴 계획이니까.
‘앞으로도 당분간 면상 볼 일 없었으면 좋겠다, 뻑치기범.’
나는 손을 마주 비빈 뒤 허리춤의 베스타크를 뽑아 들었다. 촤아앙! 청명한 소리와 함께 새카만 검신이 부르르 떨린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주시하다가, 이내 통로 너머의 어둠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깊고 음습한 어둠이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가볼까. 열렙 하러.”
나는 새삼 전생들의 죽음을 곱씹으며 조심스럽게 한 발짝씩 걸음을 옮겼다.
끈적한 발소리가 발걸음마다 잔향처럼 남았다.
* * *
경험상, 이 하수도에 분포해 있는 몬스터는 헌팅 랫뿐이다.
물론 왼쪽과 오른쪽 수로는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적어도 앞과 뒤는 그렇다. 그래서 내가 때려잡을 계획인 몬스터도 헌팅 랫이다.
전에 호되게 당한 이력이 있는 나는 당연히 철저한 조사와 계획을 마친 상태였다.
‘이놈들의 사냥법은 정해진 단계가 있어.’
첫 번째, 사냥감을 발견했다는 신호를 냄.
두 번째, 사냥감을 다수가 포위.
세 번째, 일제 다구리.
네 번째, 한번 물면 패 죽여도 안 놓음.
다섯 번째, 게임 셋. 시마이.
‘사실상 2단계까지만 와도 끝장이다.’
포위당한 후면 늦는다. 나는 3단계인 일제 공격을 방어할 자신이 없다. 레벨이 5였을 때도 반응속도가 부족했는데 2인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레벨을 11까지나 올린 17번째 전생을 토대로 봤을 때, 헌팅 랫의 공격을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되는 건 적어도 8레벨의 스탯부터다. 내가 11레벨까지 올릴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레벨의 나는 정공법을 쓰면 안 된다. 편법을 써야 한다. 쥐 새끼들조차 비열하다고 치를 떨 치졸한 편법을.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쳐 죽여야 한다.”
나는 중얼거렸다. 내 작전의 골자가 그거였다. 그러나 이게 쉬웠으면, 굳이 하루 내내 시체 더미 속에서 생태 관찰하며 철저하게 조사할 이유가 없지.
이 작전을 내가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붙는다.
‘첫째. 우두머리 개체를 파악하고 있을 것.’
헌팅 랫은 모든 군집 생물이 그렇듯, 우두머리가 있다. 그리고 사냥 시 사냥감 발견의 신호는 그 우두머리를 기점으로 발생한다.
즉, 우두머리를 가장 먼저 척살하면 놈들은 신호의 시발점을 잃는다. 더욱이 우두머리를 잃은 그 무리는 오합지졸로 전락한다. 남은 건 구심점을 잃고 도망치는 놈들을 일방적으로 도륙하는 것뿐이다.
참고로 식별법은 이미 터득했다. 좀처럼 눈에 띄는 특징이 없어서 힘들었지만, 이마의 생김새가 미세하게 다르다. 우두머리는 작은 돌기가 뿔처럼 자라있다. 몇 번의 실험을 통해 알아낸 확실한 정보다.
‘둘째. 밤에만 사냥할 것.’
이건 다른 게 아니라, 내가 미네르바에게 받아 온 특전 아이템 때문이었다. 나는 배낭을 뒤져 문제의 그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달빛처럼 은은하게 주변을 비추는 손바닥만 한 엠블럼이었다.
[아이템 정보]
[명칭 : 성녀의 문장]
[보정치 : 달이 뜬 날에 한해 모든 능력치 1.5배 적용. 만월 시 2배 적용.]
[상세 : 고대의 성녀 루나 루에바의 가호를 받은 엠블럼. 달의 힘이 저장되어 야간 전투 능력이 상승한다. 타락한 최초의 용사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담겨있다.]
[강화 가능 횟수 : 1]
능력치가 무려 1.5배. 만월일 땐 2배나 증가한다. 지금 기준으로 레벨 3~4를 올린 것과 같은 수치다.
레벨이 올라 능력치가 점점 강화되면, 이 아이템의 시너지도 사기적으로 상승하겠지. 내가 가진 아이템 중에서 ‘사기’ 소리 들어도 씨불일 말이 없는 아이템이다.
그러니 나는 밤에만 사냥해야 한다. 아주 조금이라도 우두머리 기습 성공률을 높이도록.
‘그리고 지금은 밤이다.’
엠블럼이 내 손안에서 은은하게 빛나며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수도라 시간 감각이 애매한 내게 있어서, 이 아이템은 시계 같은 역할도 하는 중이었다.
“좋아, 간다.”
엠블럼을 한번 꽉 쥐고는 허리의 파우치에 집어넣은 나. 검을 뽑고 천천히 눈앞에 어슬렁거리는 헌팅 랫들에게 다가갔다.
숨을 죽이고, 천천히 살핀다. 수는 약 8마리 정도. 신중하게 놈들의 이마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이 번득였다. 우두머리를 찾았다.
‘조심스럽게… 끝까지, 칼을 박아 넣고 한 바퀴 돌려 버린다. 숨도 쉬면 안 돼!’
전생처럼 대가리 비워놓고 우라돌격 하는 멍청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우두머리는 다른 개체보다 훨씬 예민하다. 그 때문에 만전에 만전을 기해도 과하지 않다.
어느 순간. 드디어 나는 완벽한 타이밍을 포착했다. 우두머리가 점점 다가오는 나를 눈치채지 못한 채 내게서 등을 돌린 것이다.
‘지금이다!!’
나는 숨을 한껏 삼키고는, 그대로 검을 박아 넣었다.
푸각! 살과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전생에서도 느껴본 적이 있는 감각이 손바닥으로 전해져 온다. 경험해 봤다고 안 불쾌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소리 지르는 건 면했다.
찌지직, 찌이익!
우두머리가 버둥거리며 단말마의 비명을 토했다. 그러나 신호의 울음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비명 소리다. 다른 쥐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며 그 자리에서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잔인하게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그리고 검을 잡은 손에 잔뜩 힘을 줬다.
“죽어!”
우드드득! 나는 검을 박아 넣은 채로 한 바퀴 회전했다. 쥐가 온몸을 경련하듯 쭉 펴더니, 이내 떨림이 멈췄다. 죽은 것이다.
띠링. 익숙한 신호음이 들려오며 패널이 등장했다.
[스킬 ― ‘후방 강타’의 사용법을 알게 되었다.]
[스킬 ― ‘잠입’의 사용법을 알게 되었다.]
[스킬 ― ‘내장 타격’의 사용법을 알게 되었다.]
한 번의 기습으로 무려 세 개나 되는 스킬의 사용법을 터득했다. 내가 가진 패시브 스킬 ‘프로메테우스’의 영향인 듯했다.
나는 파리 쫓듯이 패널을 물리고 곧장 검을 뽑았다. 우지직. 검에 딸려 나온 우두머리의 내장이 질척한 소음을 냈다. 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그것을 털어냈다.
찌직! 찌지직!
주변의 잡졸 헌팅 랫들은 이미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놈들이 도망을 가지 못하는 걸 잘 알고 있다.
놈들의 지휘 체계는 생각보다 철저하다. 우두머리에게 도주 명령을 받지 못했으므로, 이놈들은 여기서 절대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얌전히 경험치가 돼라… 빌어먹을 뉴트리아 새끼들아!”
나는 서슬 퍼렇게 중얼거리며 놈들이 밀집한 곳으로 다가갔다.
참고로 내가 전생에서 이 쥐새끼들한테 물려 뒈진 것만 약 4번이다. 18번째에서 죽을 뻔한 것까지 합치면 딱 5번이고. 이 정도면 자비 없이 죽일 이유는 충분하지?
푸욱, 푸욱, 푸욱! 나는 마치 두더지 잡기를 하듯, 바닥을 발발거리는 놈들을 하나씩 찍어 눌러 죽여갔다. 놈들은 단말마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몸을 경련하며 죽어갔다.
그것은 이미 ‘몬스터 사냥’이라기엔 어폐가 있는 광경이었다. 학살이었다.
“후우, 끝났다.”
기념적인 첫 사냥이 끝나고, 나는 긴장이 풀린 나머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변에 내 몸통만 한 쥐 사체가 즐비해서 그런지 역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코를 찡그리며 휴식을 취하고 있으려니 팡파르가 연신 들려왔다. 몇 번을 들어도 참 분위기에 안 맞는 효과음이라고 생각했다.
[레벨 업!]
[능력치 포인트를 3 얻었다.]
[스킬 향상 포인트를 1 얻었다.]
[레벨 업!]
[능력치 포인트를 3 얻었다.]
[스킬 향상 포인트를 1 얻었다.]
총 8마리의 헌팅 랫을 잡자 레벨이 훌쩍 4까지 상승했다. 단숨에 2레벨 업. 5레벨이던 시절 10마리의 헌팅 랫을 잡았으나 고작 1레벨이 올랐던 걸 생각하면 레벨이 오를 때마다 경험치 상한 폭이 꽤 가파르게 상승하는 듯했다.
“뭐 그래도. 쉬워졌으면 쉬워졌지 어려워질 일은 없으니까.”
차근차근 가보자. 나는 마음을 편하게 먹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앞으로 레벨이 오르면 오를수록 사냥은 더 쉬워질 것이다. 부여받은 능력치 포인트를 힘과 민첩에 각각 3씩 투자한다고 치면. 당장 성녀의 문장이 주는 보너스 포인트가 각각 6, 8포인트가 된다. 종합해 보면 사실상 8레벨 스테이터스와 비슷한 것이다.
이 정도면 방금처럼 치졸한 짓을 하지 않아도 놈들의 기습이나 사냥법에 대응할 수 있다.
물론, 계속 이렇게 잡을 거지만.
‘가정만 하고 있을 게 아니지. 지금 당장 올리자.’
나는 생각난 김에 스테이터스를 각각 힘과 민첩에 3씩 투자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스킬 창을 열어 새로 얻은 ‘잠입’과 ‘후방 강타’ 스킬에 포인트를 투자했다.
[스킬 습득 완료 ― 잠입 LV.1]
[상세 : 접근 시 발각률을 저하시킨다. 공격 성공 시 치명률이 상승한다.]
[스킬 습득 완료 ― 후방 강타 LV.1]
[상세 : 적의 배후를 잡아 급습하면 치명률과 공격력이 상승한다.]
이건 내 입장에서 리스크가 큰 투자였다. 죽어도 다음 생에 그대로 이어지는 사신의 총애를 올릴까 고민했지만, 이번 생을 길게 보고 투자한 것이다.
후방 강타는 몰라도 잠입은 이번 내 사냥법에 있어 최적의 스킬이다. 미리 숙련해 둬서 나쁠 건 없으리라.
‘그래, 길게 봐야 해.’
패널을 물린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하수로 너머로 이어지는 까마득한 어둠 속을 가만히 주시했다.
가가각, 카가가각 하는 소리가 당장이라도 들려올 것만 같다. 나는 흠칫 시선을 내렸다.
의문점이 무수히 머리맡에 쏟아진다.
괴한은 왜 어느 순간부터 앞과 뒤쪽 수로에 발길을 끊었는가. 괴한이 움직이는 주기에 규칙은 있는가. 왜 괴한은 사람들을 죽여서 쌓아놓는가.
그리고 왜 나를 죽이려 드는가.
무수한 의문들이 쌓여갔지만 결국 답해줄 이는 아무도 없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고민들을 털어냈다. 파각! 검을 바닥에 박고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휴식 시간은 여기까지였다. 잡생각도 마찬가지다.
“다음, 가볼까.”
나는 곧장 사냥감들을 찾아 하수로를 떠돌기 시작했다.
* * *
“흐음.”
사냥을 시작한 지도 어언 사흘이 흘렀다.
나는 내 상태 창을 보며 가만히 침음을 흘렸다.
[명칭 : 박정용]
[별칭 : 163417413번째 용사. 마왕의 알 수호자. 불사에 종속된 자]
[LV. 17]
[체력 : 215/345 | 마력 : 130/130 | 신체 상태 : 심한 공복]
[힘 : 27 | 민첩 : 38 | 지능 : 10 | 히어로 센스 : 3]
[남은 능력치 포인트 : 0]
그사이 나는 제법 레벨을 많이 올렸다. 레벨은 어느새 17. 전생을 통틀어 최고 기록이다.
나는 정말 눈에 띌 정도로 강해졌다. 비열하고 치졸한 방법으로 노가다 성장을 한 내가 머쓱해질 정도다.
어느 정도냐면 고작 17레벨을 달성한 나도 웬만한 바위는 전력으로 베면 썰 수 있을 정도다. 달리기는 우사인 볼트가 칠갑산 조깅 동호회원으로 보일 수준이었다.
‘처음엔 사기 먹은 게 아닐까 싶었는데… 진짜 용사가 되긴 됐나 보군.’
그런 실감이 드는 성장 폭이라고 해야겠다.
레벨이 한 50 정도만 돼도 강철을 박살 내고 무림 고수처럼 허공답보를 하는 건 아닐까.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미네르바를 비롯한 제2계의 신들이 준비했다는 이 육성 시스템은, 확실히 효과가 엄청나다.
‘하지만… 이젠 어쩐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 고민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레벨 업이 더뎌졌다. 그게 고민인 이유는 더 간단하다. 레벨 업이 더뎌진 원인이, 내가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아니 뭐, 게임도 아니니까. 역시 리젠 되진 않는구만…….”
리젠. 정확히는 리제너레이션(Regeneration).
게임에서 필드에 몬스터가 말라버리면 유저들이 사냥을 할 수 없다. 그 때문에 몬스터는 일정 시간마다 그 사냥터에서 다시 생성되도록 프로그래밍 된다. 이것을 리제네레이션, 속칭 리젠이라 부른다.
게임에서는 사냥터 필드의 회전율에 따라 그 리젠율을 조정한다. 그렇게 사냥터에 몬스터가 마르지 않도록 하여 게임 시스템을 유지한다.
하지만 이 세상은 게임이 아니다.
내가 몬스터… 헌팅 랫을 사냥하는 속도는 날이면 날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진 반면, 헌팅 랫의 번식 속도는 산술급수적이다. 결국 이 잡듯 뒤져서 숨어있던 마지막 한 놈까지 잡아버린 지금.
‘하수로의 쥐새끼가… 씨가 말라 버렸잖아.’
그렇다. 더 이상 잡을 놈이 없다. 단 한 마리도 안 보인다. 그래서 레벨 업을 못 하는 상태이다.
나는 이마에 손을 얹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디 모아다가 사육이라도 할 걸 그랬나.”
가두리 양식(?)으로 철저하게 관리를 해서, 조금씩 잡아다 죽일 걸 그랬다. 잡고 남은 고기들은 갖다 먹어서 식량난(?)도 동시에 해결하고. 여러모로 일석이조였을 듯싶은데 안타깝다.
뭐, 그건 이미 지난 일이니 차치하고.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뿐인가?’
나는 시작 지점의 사거리로 돌아와 시선을 양옆으로 흘깃 던졌다. 느릿느릿 네 방향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전부 들리는 곳이다 보니, 천장의 반향 역시 유독 크게 울렸다.
더는 앞과 뒤의 수로에서 얻을 게 없다. 그렇다면 이젠 미뤄뒀던 오른쪽과 왼쪽 수로를 공략하는 수밖에 없다. 그 앞에 괴한이 있든, 또 다른 몬스터가 있든 간에.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될 일이었다.
그게 예상보다 좀 빨라졌을 뿐이지.
‘레벨이 아직 낮은 감이 있지만…….’
헌팅 랫들이 덩치가 커서 그런가, 생각보다 개체 수가 적은 게 컸다. 또한 레벨이 오를수록 다음 레벨까지의 경험치 폭이 급격히 늘어난 것도 한몫했다. 15레벨쯤 가서는 쥐 새끼 100마리를 잡아도 경험치의 반도 차지 않을 정도였다.
‘뭐, 일단 부딪쳐 보는 수밖에.’
불가항력인 일에 고민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나는 호구일지언정 바보가 아니다. 고민해도 소용없는 일을 고민하는 건, 지능이 처참한 병신들이나 하는 짓이다.
“좋아, 바로 정해볼까.”
쇠뿔도 단김에 빼라지. 먼저 조사할 방향부터 정하기로 했다.
나는 파우치를 뒤져 엠블럼을 꺼냈다. 그리고 하늘 높이 팅, 하고 쳐올렸다. 엠블럼은 빙글빙글 돌며 허공을 유영하다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터벅. 옆면이 보이기 전에 그것을 발로 밟았다.
‘달이 나오면 왼쪽. 여신이 나오면 오른쪽이다.’
이지선다의 선택지가 있을 때 가장 쉽고 빠른 결정법. 코인 토스다.
나는 서서히 발을 뗐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엠블럼의 상태를 확인했다.
엠블럼은 여신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오케이. 오른쪽부터.”
나는 엠블럼을 다시 주워 파우치에 집어넣었다.
기껏 믿고 맡겼으니까 굽어 살펴주십쇼, 고대의 성녀님. 의미 없는 기원과 함께 터덜터덜 오른쪽 수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 * *
“여기는 좀 맛있는 몬스터가 있으려나?”
오른쪽 수로를 따라 얼마나 걸어왔을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자연스럽게 그런 고민이나 먼저 떠올린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꼈다.
하지만 뭐 어쩌겠냐.
의식주 중에서 의(衣)랑 주(住)는 더럽고 구질구질해도 어떻게든 참겠는데 배고픈 건 참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잖아. 점화기로 불 피워서 쥐새끼 통구이 해 먹는 짓거리도 슬슬 넌더리가 난단 말이지.
워낙 험하게 자라서 먹는 거 자체엔 거부감이 없지만 일단 맛이 없어서 문제다.
“으음?”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던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눈에 힘을 주고 어둠 너머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최대한 소리를 죽여 검을 뽑아 들었다.
‘무언가 있다.’
어둠 너머에서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와 무수히 겹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뿐만 아니다. 쇳소리처럼 걸걸하게 도란거리는 음성도 들렸다. 나는 그 소리들의 정체를 깨닫고 숨을 삼켰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서로를 향한 말소리였다.
‘지성체. 그것도 도구를 쓴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 최대한 몸의 기척을 죽였다. 요 사흘간 헌팅 랫 사냥을 하면서 몸에 박힌 동작이었다.
‘잠입.’
스킬까지 사용했다. 푸쉬익, 김빠지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어둠에 녹아들었다. 아직 스킬 레벨이 낮아서인지 완전히 안 보이는 수준은 아니지만, 식별은 확실히 어려워질 테다.
나는 하수도 샛길 쪽으로 몸을 숨긴 채 숨죽여 상황을 주시했다. 무질서한 발소리와 소란이 점점 가까워져 왔다.
“갸악! 가갸악!”
“도먕! 괴물갹!!”
이윽고 놈들의 형체가 파악될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나는 드러난 놈들의 모습을 보고 저절로 연상된 단어를 내뱉었다.
“고블린?”
초록색 피부에 1미터가량의 작은 키. 길쭉한 귀와 추한 얼굴. 조악한 방어구를 두르고 이가 빠진 철검을 든 놈들이 약 6마리가량. 연신 뒤를 돌아보며 헐레벌떡 달려가는 중이었다.
나는 곧장 눈에 힘을 주고 놈들 중 하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기다렸다는 듯이 패널이 떠올랐다.
[몬스터 정보]
[명칭 : 하수도 고블린]
[체력 : 43/121 | 마력 : 5/5]
[힘 : 13 | 민첩 : 16 | 지능 : 6]
[상세 : 할센베르크 변경백령의 하수도에 자리 잡은 고블린 일족. 소규모 무리 생활을 하며, 고블린 종족 중에서 지능은 낮은 편이다.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며, 어눌하게 말을 할 줄 안다.]
내 생각대로 놈들은 고블린이 맞았다. 이 세상에도 고블린이 있긴 있군. 판타지 만만세다.
특이점으로는 체력이 굉장히 삭감되어 있었다. 다른 개체들을 살펴봤는데 모두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만 봐도 모두 자잘한 상처투성이다.
게다가 연신 뒤를 돌아보며 허겁지겁 달려가는 저 행색. 나는 어떤 결론에 다다랐다.
‘…도망치고 있어? 누구한테서?’
나는 다시금 경계심이 온몸에 들어차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 대상은 눈앞에서 정신없이 도망치는 고블린들이 아니었다.
고블린들을 도망치게 만든 어떤 존재. 어둠 너머의 무언가를 향한 경계였다.
“갸아악!”
“살려! 갸악! 도망!”
고블린들은 코앞에 숨어있는 나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눈물과 콧물을 질질 짜며 나를 지나쳐, 내가 지나왔던 길을 달려 나갔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무언가 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끼리릭, 끼릭.
그러자니 무슨 소리가 들려온다. 낡은 기계가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소리다. 혹은 무언가의 바퀴가 어렵사리 굴러가는 듯한…….
눈에 힘을 주고 다시금 쳐다보니, 무언가 꿈틀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좀 더 가까워지자 윤곽이 확실히 보였다.
소리를 내는 것은 수레였다. 노란색의 손수레.
무언가를 가득 담은 수레가 위태롭게 흔들거리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저건……!’
수레에 넘칠 듯이 담겨있는 건 다름 아닌 고블린들의 시퍼런 사체들이었다.
시체. 그리고 노란 손수레. 두 단어가 어떤 영상을 섬전처럼 뇌리에 때려 박았다.
“뭔가… 익숙?”
나는 온몸이 굳어버렸다.
머리가 뒤흔들리며 시야가 요동쳤다. 그러는 와중에도 노란 수레와, 그 수레를 끄는 이는 시시각각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나는 저 수레를 어디선가 분명히 본 적이 있다.
전생에서. 아니, 전전생에서였나.
‘시체 더미 앞에 놓여있던 그……!’
나는 등줄기를 번쩍 후려치는 전율에 몸을 떨었다.
생각해 보자. 내가 그 수레를 시체 더미 앞에서 목격했던 건 전전생의 일이다. 전생에서는 아예 시체 더미 쪽으로 가지도 않았으니 거기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면 지금. 이번 생에서는, 시체 더미 앞에 노란 수레가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이번 생에서 노란 수레는 없었다. 나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전이랑 달라?’
시간이 돌아와서 달라진 건 나뿐만이 아니구나.
다른 이들의 행동도 전과 달라질 수 있는 거다. 그것이 전생과는 달랐던 나의 행동이 기폭제가 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중요한 건, 전에는 시체 더미 옆에 있던 수레가 지금은 없었다는 점. 그리고.
끼리릭. 끼릭…….
전생에서는 앞과 뒤쪽 수로에서 인간 시체의 산을 쌓았던 당사자가, 지금은 고블린 시체를 가득 담은 채 오른쪽 수로에서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런, 제길… 어떻게 해야……!”
고블린들처럼 도망칠까?
아니, 늦었다. 이미 내 시야가 확보될 정도로 가까워졌으니, 저 수레의 주인이 문제의 괴한이라면 나를 순순히 놔줄 리가 없다.
그러면 맞서야 하나?
아니, 지금 레벨로 가능할까? 하지만 선택지가 없잖아. 어쩌지?
그 자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자니.
“거기에 숨어있는 분. 누구시죠?”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처음 들어보는 이국의 언어였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치고 올라왔지만. 그 전율은 금세 의문으로 바뀌었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여자?’
들려온 건 변조된 걸걸한 목소리가 아니라 여성의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가냘프고 어딘가 자신감이 결여된 기색의 목소리. 예상 밖의 상황에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런 와중에도 수레 끄는 여인은 계속 말했다.
“일단 나와보실래요? 고블린들이라면 도망쳤으니까요.”
“…….”
“계속 말없이 숨어계시면 저도 당신의 정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답니다.”
그렇다는군. 나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결단을 행했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필사적으로 끌고 나갔다. 좁은 샛길에서 튀어나와 수레의 정면에 섰다. 그리고 수레를 끄는 주인을 똑똑히 두 눈에 담았다.
예상대로 여자였다. 흑백이 교차하는 메이드복을 입은 여성. 담갈색 머리를 트윈테일로 묶어 내리고, 그 아래로 우울하게 빛나는 진녹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제 이름은 레이라. 이 하수도의 주인인 할센베르크 변경백님의 시녀입니다.”
메이드 여자… 레이라는 모습을 드러낸 나를 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절도 있는 예법이 몸에 밴 기색이었다.
그녀는 굳어있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곧 한 걸음 성큼 다가오며 물었다.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착 가라앉는 음울한 목소리였다. 이 하수도가 그렇듯이 말이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자, 주사위가 던져졌다.
시체를 잔뜩 쌓은 노란 손수레의 주인. 어쩌면 기억 속에서 숱하게 살해당했던 괴한의 정체일지도 모르는 그녀. 이름은 레이라.
그녀에게 내 정체를 곧이곧대로 말하는 건 과연 잘하는 짓일까?
‘아니, 천만에.’
순간적으로 판단하고는 짱구를 팽팽 돌리기 시작했다. 이내 그럴싸한 변명이 생각났다. 나는 퍼뜩 입을 열었다.
“아! 저, 저는 핫산베르크 님한테 고용된 사람입니다.”
“할센베르크겠죠.”
“아, 예. 할센요, 할센.”
무표정한 레이라의 시선이 한층 따갑게 내 얼굴을 쳐다본다. ×발, 하필이면 거기서 이름을 틀리냐. 나는 입을 어물거리며 식은땀을 흘리기 바빴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응시하던 레이라는, 이내 낮은 한숨과 함께 여러 가지를 질문하기 시작했다.
“사용인이 늘었다는 얘기는 처음 듣네요. 할센베르크 백작님이 직접 고용하셨나요?”
“아, 네! 그, 그렇습니다. 용병…이라고 해야 하나요.”
“용병? 무슨 일을 하는?”
“이 하수도의 몬스터들을 정리하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레이라는 내 말에 잠시 턱에 손을 짚었다. 고민에 빠진 기색이다. 그녀가 연신 중얼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하긴. 후임 사냥꾼이 필요할 때가 되긴 했죠……. 근데 설마 용병을 고용할 줄은…….”
그녀가 중얼거리며 상념에 빠져있는 찰나가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런 레이라를 기다렸다.
이윽고 레이라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날 쳐다보는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진 기분이다.
“시종장님께는 말씀드렸나요?”
“시종장…님요?”
이런 썩을. 신캐릭터가 출현했다.
내가 되묻자 레이라는 눈을 번쩍 치켜뜨며 계속 물어 왔다.
“네, 하수도 몬스터 청소 용병이라면, 시종장님의 허가를 받고 들어왔을 텐데요?”
“아아! 아하하! 네! 그분이 시종장님이셨군요! 허가라면 받고 왔습니다!”
“깐깐한 분이신데 용케 허가받으셨군요. 제법 강하신가 봐요?”
“아, 뭐. 실력을 좀 보여드렸더니 금세 알아보시고 들여보내 주셨습니다!”
“헤에.”
기분 탓일까. 탄성을 낸 레이라의 입가가 조금 말려 올라간 듯했다.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가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와 버렸기 때문이다.
레이라는 탕탕, 자기 옆에 세워둔 손수레를 손끝으로 치며 내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 수레부터 당장 끌어주실까요?”
“…예?”
“몬스터를 정리하라고 명령받았다면서요? 짬 낮은 사람이 짐 옮겨야죠, 후배님.”
“…….”
설마 이래서 웃은 거였냐. 부려먹을 후임이 생겨서?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미미하게 생글거리며 내 뒤로 붙었다. 재촉하는 듯한 눈빛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수레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리고 힘껏 밀기 시작했다.
‘무, 무거워!’
나는 순간 휘청거렸다. 생각보다 수레가 엄청 무거웠기 때문이다. 하긴 쌓인 사체만 몇십 구인데 안 무거운 게 이상하지.
“그아아앗!”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수레를 밀었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레이라를 쳐다봤다.
이런 엄청난 무게의 수레를 눈 하나 깜짝 않고 지금까지 끌고 왔단 말인가?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건지, 레이라는 뜬금없이 손을 올려 브이를 만들어냈다.
“이곳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저절로 힘이 붙는답니다, 에헴.”
“…아, 예.”
그 실없는 반응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정말 이 여자가 기억 속에서 나를 무참히 도륙했던 그 냉혈한과 동일 인물이라고? 내 안에서 그 전제가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대화도 스무스했고. 좀 어두워 보여서 그렇지 문답무용으로 죄 없는 사람을 참살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생각난 김에 레이라의 상태를 확인해 봤다. 눈을 크게 뜨고, 앞장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주시했다.
[인물 정보]
[명칭 : 레이라]
[별칭 : 덤벙이 시녀, 할센베르크 하수도 관리자, 그윈의 연인]
[LV. ???]
[체력 : ???/??? | 마력 : ???/??? | 신체 상태 : ???]
[힘 : ??? | 민첩 : ??? | 지능 : ???]
‘…뭐야, 물음표?’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손에 힘이 풀렸다. 수레가 멈추자 레이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돌아봤다.
“농땡이 피우지 마세요, 후배님. 빨리 따라오세요.”
“아, 예에.”
나는 석연찮은 기분을 뒤로한 채, 온 힘을 다해 수레를 끌었다.
* * *
“아시겠어요? 우선 이 하수도의 고블린은 5~6마리 정도가 함께 다녀요. 구성은 검병 셋. 궁병이 하나. 방패병 하나. 경우에 따라서 척후가 하나씩 붙죠.”
“으음, 그렇군요.”
우리는 내가 지나쳐 왔던 오른쪽 하수도를 그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중앙의 사거리를 지나, 지금은 왼쪽 하수도를 걷고 있었다. 나는 하수도의 구조를 머릿속에 똑똑히 새겨놓기 위해 주기적으로 사방을 살폈다.
“놈들은 인간보다 지능이 떨어지지만 평균적으로 신체 능력은 좋아요. 게다가 친족끼리 결속이 뛰어나요. 그러니까 하나하나가 자기보다 약하다고 얕봤다간 칼침 맞고 송장 되는 경우가 허다해요. 주의하셔야 할 거예요.”
“네, 네에.”
그런 와중에 레이라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대부분 이곳에 사는 몬스터에 대한 설명이었다. 즉 헌팅 랫과 고블린의 생태에 관한 것들.
나를 진짜 자기 후임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심심풀이 겸 떠드는 건지. 어쨌든 들어서 나쁠 건 없으니 나는 계속 떠들게 냅뒀다.
“자, 다 왔어요. 여기다 버리면 돼요.”
“크하아, 예, 예에. 드디어…….”
어느 순간 레이라가 걸음을 멈췄다. 너무 힘들어서 반쯤 정신 놓고 수레를 끌던 나는 그제야 눈을 들어 앞을 쳐다봤다.
그리고 지금껏 눈치채지 못한 엄청난 악취와, 코앞에 펼쳐진 참상에 눈을 부릅떴다.
“뭘 그렇게 놀라요. 고블린 번식력은 헌팅 랫보다도 좋다고 했잖아요. 이 정도 시체가 쌓일 것도 예상하지 못하셨어요?”
레이라가 자못 한심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난 어떤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전에 봤던 인간들의 시체는 귀여운 동산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수도의 막장 벽면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주변으로 두셋의 사체 더미들이 더 쌓여있다. 아무리 인간이 아니라지만, 사체가 된 고깃덩어리가 쓰레기 매립지처럼 쌓여있는 광경에 담담할 수 있을 리가.
“얼른 일하세요, 후배님.”
“아… 네, 네.”
레이라는 멍한 나를 가로지르더니 수레에 담겨있던 사체들을 옮겨 쌓기 시작했다. 나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그것들을 옮겼다.
아직도 얼떨떨한 정신으로 작업을 계속하는데, 문득 레이라가 목소리를 냈다.
“사람이 말이죠. 타인을 믿는 데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아세요?”
“예?”
“저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예에…….”
“그래서 저는 신용하지 못할 사람에게는 당연히 증거를 요구해요. 증거도 없이 믿어주는 사람을 의롭다고 하는 옛날 동화들은,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그, 그건 맞는 말이죠.”
내가 어떤 반응을 하든 레이라는 자기 할 말을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기계처럼 움직여 고블린 사체들을 치우고 있었다. 밥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느낌. 일견 섬뜩해서 꺼림칙했지만, 일단 나도 작업을 계속했다.
레이라의 말이 이어졌다.
“이 할센베르크령에는요. 언젠가부터 용사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소환되기 시작했어요. 아시나요?”
“예에. 대, 대충 들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을 밟고 지나갔어요. 개중엔 착한 이도 있었고 나쁜 이도 있었어요. 용사라 해도 사람 됨됨이는 천차만별이니까요.”
식은땀이 나는 주제였다. 나는 연신 레이라의 눈치를 봤지만, 레이라는 여전히 내게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고블린 사체를 옮기고 있을 뿐이다.
수레의 사체가 거의 바닥났을 즈음, 그녀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저는 그 용사라는 더러운 족속들을 용서할 수 없게 됐죠.”
“…….”
“저의 소중한 사람이 그 개버러지들 때문에 고통받고 있었거든요. 그걸 빤히 보고도 아무것도 못 하는 제가 너무 싫었어요. 증오스러웠죠.”
“…….”
“그래서 저는 지금도 그 새끼들이 정말 싫어요. 그 사람이 착하든 나쁘든 상관없어요. 저는 그냥 여기에 소환된 그 불결한 용사들을. 쓰레기들을. 전부 없애버리고 싶을 뿐이에요.”
“하, 아하하… 히, 힘드셨겠네요.”
나는 애써 딴청 피우며 수레의 사체를 집기 위해 손을 뻗었다. 일에 집중하는 편이 차라리 이 숨 막히는 분위기보단 나았으니까.
그런데 덥석, 사체 더미 안에서 차갑고 만질만질한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응?”
나는 의아함에 사체들을 옆으로 치우고 그것을 잡아당겼다. 레이라가 너무 조용해졌다 싶은 생각이 들던 찰나. 숨어있던 물건이 철그럭, 쇳소리와 함께 딸려 나왔다.
거대한 철구였다.
“저기요, 후배님. 그거 아세요?”
새카맣고, 매끌매끌하고, 살점과 피가 덕지덕지 묻은 거대한 철구. 그것이 고블린 사체 아래 파묻혀 있었다.
호흡이 가빠진다. 역겨운 전생의 기억이 일순간에 몰려드는 가운데.
“폐성(閉城) 할센베르크에는 시종이 저밖에 없어요.”
그녀의 한마디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두근. 심장이 정지했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레이라를 쳐다봤다. 레이라는 히죽,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시종장 같은 건 애초에 있지도 않다는 소리죠.”
정적이 감돌았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문득 그녀가 내게 한 발짝 다가온다.
“수레 옮겨줘서 고마워요, 수상한 후배님.”
본능적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철구를 목격한 순간 나는 싸늘한 오한을 느꼈고. 본능에 따라 몸을 옆으로 날렸다.
어쩌면 고작 3밖에 안 되는 ‘히어로 센스’가 운 좋게 발동한 걸지도 모르지.
“감이 좋으시네요.”
서걱!
직후 싸늘한 백광이 내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아마 내가 가만히 있었으면, 그대로 내 몸을 둘로 갈랐으리라.
화끈한 통증이 옆구리에서 퍼져 나갔다.
“크아아악!”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곧장 레이라에게서 떨어졌다. 옆구리의 고통으로 쓰러질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지금 쓰러지면 그대로 죽는다. 그런 직감이 뇌리를 후려쳤기 때문이다.
‘에, 에테르!’
나는 곧장 가방을 뒤져 에테르 병을 꺼냈다. 병에 허겁지겁 입을 대고 빨아 마셨다.
솨아아, 싸늘한 청량감과 함께 몸에서 새파란 빛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옆구리의 고통이 빠르게 완화되며 상처가 아물어 갔다.
“어머나, 귀찮은 걸 가지고 계시네요, 후배님. 포션은 엄청 비싼 아이템인데.”
키이잉! 레이라는 어느새 손에 든 빗자루를 내게 내밀며 그렇게 말했다.
자세히 보니 빗자루 끝자락에서 시퍼런 날붙이가 튀어나와 있다. 전장은 약 2미터. 나보다 키가 작은 그녀가 들면 땅에 끌리고도 남을 길이다.
저 길쭉한 칼날. 특유의 생김새. 그리고 수레 안에 들어있던 철구까지. 이제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가 없었다.
“역시. 역시 너였군… 이 개 같은 연쇄살인범 새끼……!”
괴한이다. 괴한의 정체는 눈앞의 시녀 레이라였다.
의외로 말이 잘 통해서 혹시나 반전이 있을 줄 알았는데, ×발. 그딴 거 없었다. 이년이 그 천하의 ×년 맞았다.
차아앙! 나는 곧장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에테르 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내 의지에 따라 병이 초록색으로 빛나더니, 입가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그래, 좋아. 해보자고.’
바람 에테르의 효과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감각이 확장되며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나는 눈가를 좁히고, 빗자루를 휘적거리는 레이라를 노려봤다.
에테르의 지속시간은 약 5분. 전투 한 번을 버티기엔 빠듯한 시간이다.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
‘간다!’
나는 곧장 지면을 박찼다. 퍼어엉! 내 몸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폭발적인 스피드가 나왔다.
내 예상보다도 훨씬 빠른 접근에 내가 당황하고 말았다.
“크, 으앗!”
나는 어떻게든 레이라에게 겨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너무 엉성했다. 그녀는 고개를 슬쩍 까딱여 내 공격을 가볍게 피했다.
번득. 당황에 찬 내 눈과 레이라의 눈이 허공에서 맞붙었다.
‘위험하다!’
나는 곧장 에테르 병을 입에 갖다 댔다. 샛노란 빛이 터져 나오며 내 몸에 스며든 직후. 그녀의 검이 내 배를 찔러 들어왔다. 도저히 검으로 반응할 짬이 나지 않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카아앙! 다행히도 레이라의 칼날은 내 뱃가죽을 뚫지 못하고 불꽃과 함께 튕겨 나왔다. 레이라가 순간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백스텝을 밟았다.
숙련된 암살자처럼 교묘한 움직임이었다.
“…정말 성가시네요, 그 병. 방어력을 강화한 건가요? 맨살에도 제 칼이 듣지 않는 건 좀 놀랍네요.”
레이라가 후퇴한 곳은 수레 주변이었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철구를 들어 올렸다. 철그럭. 육중한 쇳소리와 함께 사슬 달린 철퇴가 레이라의 발치로 늘어졌다.
히죽. 레이라의 입가에 뒤틀린 미소가 어렸다. 그녀가 철퇴를 크게 휘둘러 허공에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섬뜩한 파공성이 연신 울렸다.
“어디 이것도 견딜 수 있나 볼까요?”
그런 무지막지한 걸 견딜 리가 있냐. 맞으면 차례상 빈대떡처럼 짜부라질 거다. 나는 땀으로 미끄러지는 검을 고쳐 쥐고 레이라의 행동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이윽고 그녀가 손을 뿌렸다. 철퇴가 쏜살같이 내게 날아온다. 순간 숨을 삼켰지만,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보인다. 피할 수 있다!
“…지금!”
나는 타이밍을 재다가 철구가 코앞까지 왔을 때 몸을 비틀었다. 후우웅, 하는 살벌한 소리가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내가 설마 피해낼 줄은 몰랐는지, 레이라는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뜨며 몸을 굳혔다. 기회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금 도약했다.
이번엔 실수 같은 건 없다!
“죽어어!”
섬전처럼 날아간 찌르기가 레이라에게 쇄도했다
그녀는 철구를 다시 불러오려다가, 내 속도가 예상 밖으로 빨라서인지 입술을 악물었다.
“…큿!”
채애앵! 찢어지는 금속음이 터졌다. 어느새 레이라가 치켜 올린 빗자루 칼날에 막힌 것이다. 그 완벽한 타이밍의 기습을 막아내다니, 저게 사람 새끼냐.
하지만 괜찮다. 애초에 노린 건 저 여자를 죽이는 게 아니었으니까. 잠깐의 틈을 벌었으니 계획은 대성공이다!
“잠입!”
나는 스킬을 외치는 것과 동시에 레이라의 면상에 대고 냅다 칼을 휘둘렀다. 반 박자 늦은 찰나의 타이밍. 이게 진짜 내가 노리던 타이밍이다!
태세를 정비하던 그녀는 순간적으로 내 공격을 눈으로 좇지 못했다. 잠입의 효과 때문에 칼날이 반투명해졌기 때문이다. 레이라가 순간 인상을 팍 찡그렸다.
“제법인데요!”
레이라의 입에서 처음으로 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의 눈가에서 희번덕거리는 무언가를 읽은 나는, 저도 모르게 상체를 조금 뒤로 물렸다.
찰나의 판단이었다.
“크헉!”
레이라의 신형과 내 신형이 일순간 교차했다. 나는 쿨럭, 기침을 토했다. 나는 떨리는 눈으로 내 몸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가슴을 가로지르는 검의 궤적이 어른거린다. 가슴에 덧댔던 가죽 갑옷은 그녀의 일섬 한 번에 하릴없이 쪼개졌고, 땅의 에테르를 두른 몸도 아랑곳없이 새빨간 선혈 줄기를 남겼다.
“하, 상처 입은 건 오랜만이에요. 죽는 줄 알았어요. 정말이에요.”
반면 레이라는 얕게 베인 목에 손을 갖다 댔다. 피가 진득하게 묻어 나오자 그것을 핥았다. 자기 피를 핥는 그 모습에서는 어떤 형용 못 할 광기가 뿜어 나오고 있었다.
그 여유로운 표정. 그리고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 혹시나 했지만 역시 이 여자는 괴물이다. 직감은 확신이 됐다.
‘나는 못 이긴다.’
물론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곧장 물의 에테르 하나를 목으로 넘겼다. 상처가 회복되며 컨디션이 돌아온다.
이제 플랜 B로 이행할 차례다.
“잠입!”
푸쉬익! 김빠지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반투명하게 어른거린다. 나는 곧장 레이라에게 달려들었다. 레이라는 그런 나를 보고도 잠시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왼손에 쥐고 있던 쇠사슬을 크게 휘둘렀다.
슈르르륵! 쇠사슬이 빠르게 감겨 오며 땅에 박혀있던 철구가 쏜살같이 쇄도했다. 목 뒤가 아찔해지는 기습이다.
“허억!”
순식간에 철구가 커진다.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바닥을 굴렀다.
콰광! 거대한 소리가 등 뒤로 울렸다. 이젠 잠입 스킬도 적응됐다 이거냐? 나는 섬짓함을 느끼며 곧장 튕겨 나갔다. 레이라는 달려오는 나를 향해 칼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방어 태세가 완연하다. 도저히 파고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 애초에 파고들 생각 따윈 모기 뒷다리만치도 없었다.
“에라이 썅!”
나는 들고 있던 베스타크를 그대로 레이라의 면상에 대고 던졌다. 정말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던졌다.
쇄애액! 어쩌다 무게중심이 잘 잡혔나 보다. 검은 일체의 흔들림도 없이, 그녀의 머리를 두 쪽 낼 기세로 매섭게 허공을 갈랐다.
“아니?!”
그 불의의 기습에는 표정 변화가 희미한 레이라조차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황급히 검을 치켜들어 날아오는 검을 쳐냈다. 카아앙! 공기가 찌르르 울리는 금속음이 퍼진다. 내 베스타크는 속절없이 튕겨 나와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제 몫을 충분히 해줬다. 이미 시선을 끌 만큼 끌어줘서, 내가 그녀의 지척까지 접근했으니까.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레이라에게 달려들었다.
“으랴아아!”
덥석. 나는 레이라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메이드복에 풍성하게 부푼 프릴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거, 옷이 잡을 데가 많아서 좋네.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으아아아!”
나는 비명처럼 기합을 내지르며 레이라를 사정없이 밀어젖혔다. 미식축구에서 태클을 걸듯이.
레이라는 어, 어어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가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우리는 동시에 하수도의 구정물 속으로 빠져버렸다.
첨벙. 물보라가 일어난다. 오물의 끈적거리는 촉감이 느껴진다. 사방에서 악취가 쏟아져 들어온다. 나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푸하아!”
불쾌해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이번이 사실상 마지막 찬스다!
나는 곧장 바람 에테르 하나를 더 흡입하고는 곧장 오물에서 빠져나왔다. 주변에 나뒹굴던 베스타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스킬을 외쳤다.
“잠입!”
이제야 수면에서 머리를 꺼낸 레이라를 등지고, 나는 반투명해진 몸을 열심히 놀려 줄행랑을 쳤다.
그렇다. 줄행랑. 빤스런이다.
들키지 말라고 스킬까지 써가며 온 힘을 다해 도망을 치는 중이었다.
“하아… 후아… 허억!”
스스스스!
바람 에테르를 먹은 직후라 그런지 속도는 가히 어마어마했다. 주변 경치가 자동차를 탄 것처럼 휙휙 지나갔다. 바람이 뺨을 거칠게 할퀴고 귀는 먹먹해졌다.
이미 레이라를 쓰러뜨린 자리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그럼에도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가 내게 심어놓은 공포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이제 조금… 조금만 더!”
나는 곧 시작 지점인 사거리까지 돌아왔고. 그 뒤로도 계속 앞으로 향하려 했다.
앞, 뒤, 그리고 왼쪽 수로까지 모두 탐험을 마쳤다. 그러나 출구는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오른쪽 수로. 오른쪽 수로에 반드시 출구가 있을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곳을 드디어 탈출할 수 있다. 그런 희망이 가슴속에서 싹틀 때쯤.
“…칼을 그렇게 쓰는 방법이 있었네요. 허를 찔렸어.”
등 뒤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신체 말단부터 전율이 올라왔다. 레이라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목소리가 조금 멀다. 짐작컨대 철구의 리치도 절대 닿지 않을 거리. 나는 속으로 안심하며 달리기에 박차를 가하려고 했다.
“크, 허억?”
레이라의 빗자루 칼날이 내 가슴을 꿰뚫은 것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이게 왜…….”
쉴 새 없이 놀리던 다리에서 힘이 빠진다. 곧 뒤엉켜서 그 자리에 나자빠졌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한 감각 속에서 필사적으로 뒤를 쳐다봤다. 예상대로 레이라가 한참 멀리 떨어져 있었다. 손을 길게 내뻗고, 상체를 숙이고 있다. 무언가를 투척하고 난 직후 같은 자세였다.
그녀가 던진 게 빗자루 칼날이라는 것은, 관통당한 내 몸이 증명한다.
“고마워요, 후배님. 한 수 배웠네요.”
철벅, 철벅. 오물로 범벅이 된 구두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가 내 앞에 당도한 것이다.
이 구도는 익숙하다. 그 익숙함이 내게 어떤 실감을 선사했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질질 새어 나왔다.
“하, 흐하하하.”
실패했다.
나는, 이번에도 살아남는 데 실패한 것이다.
제길, 옘병할. 빌어처먹을.
분하다. 너무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다.
“왜… 대체 왜……!”
나는 레이라를 표독스럽게 쳐다보며 으르렁거렸다. 레이라에게 묻는 질문은 아니었다. 그건 이번에도 무력하게 패배해 버린 나 자신에게 묻는 물음이었다.
레벨 업이 부족했나? 훈련이 부족했나? 아니면 에테르 활용이 미숙했던 게 문제였나? 애초에 저 메이드 년은 뭐 이리 강한가? 이거 사기 아니냐? 밸런스 팀 일 안 하냐? 프롤로그부터 최종 보스가 등장하는 판타지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냐?
무수한 의문들이 쏟아졌다가, 허무하게 흩어진다. 의문들이 사라진 자리엔 고요한 분노만이 남았다. 갈 곳을 잃은 분노는 그대로 레이라를 향해 쏟아졌다.
“왜냐니요?”
레이라는 무심한 눈길로 그런 나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태연하게 말한다.
“오히려 묻고 싶네요. 후배님은 왜 저를 그런 눈으로 보세요?”
“뭐…라고?”
“오해하지 마세요. 나는 당신을 배신한 게 아니에요.”
“…….”
“애초에 당신을 믿은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레이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칼날을 뽑았다. 쑤우욱, 가슴팍에서 이물감과 함께 고통이 쏟아졌다. 허파가 몸 밖으로 딸려 나가는 느낌이다.
탱그랑. 품에 넣어뒀던 여신의 문장이 바닥을 굴러 내 눈앞에서 멈췄다.
“카하아아악!”
“저를 속이려는 시도는 좋았어요, 후배님. 그럼.”
레이라는 싸늘하게 한마디 하고는 곧장 칼날을 치켜들었다. 요동치는 머릿속으로 그녀의 무미건조한 동작들이 천천히 입력된다.
나는 허파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흐.”
그래, 차라리 고맙다. 믿지도 않는 수상한 놈한테 이렇게 면상 까고 나와줘서. 내가 말이야. 그렇게 숱하게 뒈지고 뒈지면서. 네 낯짝을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냐?
네년의 그 상판대기 한번 확인하자고. 20번이나 이 짓거리를 반복했단 말이다.
“크…으으…….”
나는 엠블럼이 발하는 은은한 빛 너머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던 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악에 가득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얼굴… 기억해 뒀다.”
나는 씹어뱉듯이 중얼거렸다. 레이라는 그 기세에 순간 몸을 물렸지만 이내 싸늘한 미소와 함께 내게 반박한다.
“기억하면 어쩔 건가요. 죽으면 소용없게 되는걸.”
“그럴까?”
나는 도발하듯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클클거리며 웃음이 새어 나올 때마다 내상으로 인해 피가 벌컥벌컥 쏟아졌다. 아프다. 심장이 타는 것 같았다.
“추하기가 그지없네요. 죽기 직전에 허세 부리는 꼴이란.”
나를 빤히 쳐다보던 레이라가 곧 빗자루를 역수로 쥐었다.
키이잉! 그 끝에서 튀어나온 길쭉한 날붙이가 눈가를 간질였다. 익숙한 예광. 어둠 너머에서 바닥에 불꽃을 튕기는 걸 숱하게 봤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운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흐핫.”
씨익, 레이라에게 도전적인 미소를 보냈다. 이번 생의 레이라가 최대한 석연찮도록.
나는 필사적으로 웃었다. 내 나름대로 그녀에게 거는 일종의 저주였다.
“한번 죽여봐. 어떻게 되는지.”
“재촉 안 해도 할 거예요.”
“다음 생의 너는 지금 순간을 땅을 치고 후회할 거다. 물론 너한테는 지금의 기억 따윈 없겠…….”
“헛소리.”
레이라의 싸늘한 선고가 내 말을 잘랐다.
직후, 칼날이 쇄도했다. 어디를 뚫렸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알기 전에 의식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 * *
“크헉!”
백색의 공간에서 게이트를 탄 직후, 나는 경기를 일으키듯 눈을 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필사적으로 본능에 따라 눈을 굴려 상황을 파악했다. 음습한 하수구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악취가 코를 사정없이 찔러 온다.
“후우… 이, 이상하다. 전에 게이트 탈 때도 이렇게… 힘들었나?”
나는 온몸을 짓누르는 원인 모를 답답함을 떨쳐내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온몸을 적신 식은땀을 대충 닦아내고, 거친 숨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혼탁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
“이제 좀 낫군. 그럼 어디…….”
정신을 가다듬은 나는 스킬 ‘미미르의 눈’을 사용해 내 상태를 확인해 보거나, 아이템을 확인해 봤다. 전체적으로 이상은 없었다. 특전 아이템도 설명받은 그대로였다.
다만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있었는데. 우선 레벨이 1이 아닌 9부터 시작했다는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뭐야, 이거. 깜빡거리네.”
특전 아이템 중 하나인 망자의 함이 불길한 보라색으로 번뜩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그것을 주시하자 곧장 패널이 튀어나왔다.
[알림 : 아이템 갱신 ― 전생에서 망자의 함 저장 아이템이 갱신되었다.]
나는 순간 숨을 삼켰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꺼림칙함을 느끼면서도 함을 열어봤다. 거기엔 피로 글자를 새겨둔 헝겊이 있었다.
―섣불리 움직이지 마. 일단 잔류사념에 집중해라. 넌 이미 죽어있다.
“난 이미… 죽어있다.”
아마도 전생의 내가 남기고 싶었을 말들. 유언이었다.
방금까지 들떠있던 기분은 어디 가고, 나는 가슴이 착 가라앉는 걸 느꼈다. 혈서까지 쓴 걸 보면, 전생의 내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대충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뭐…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지.”
나는 쪽지가 시키는 대로 일단 잔류사념에 집중하기로 했다. 허리춤에 걸려있던 이자나미의 심장을 들어 올렸다.
우우웅. 랜턴은 기다렸다는 양 음울한 빛을 뿜어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와… 지, 진짜 죽었나 보네, ×벌.”
방금 깨어났다고 느끼는 지금의 나는 도저히 믿기 힘든 전개지만, 이렇게 증거가 속속 튀어나오는데 뭐 어쩔 텐가. 믿어야지.
내 유일한 장점이 그거 아닌가. 개 같은 상황이 닥치면 순응이 빠르다는 것.
‘이쪽인가?’
나는 빛이 강하게 비치는 곳으로 곧장 발걸음을 돌렸고, 얼마 가지 않아서 바닥에 널브러진 내 시체를 목격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식겁했다. 졸라리 식겁했다.
“어메, ×발! ×바아알! 이거, 뭐여 이거!”
너무 놀라서 욕 박고 사투리까지 튀어나왔다. 아버지랑 대화할 때 말곤 좀처럼 안 나오는 건데. 그만큼 패닉에 빠졌다.
내 예상을 상회할 정도로 시체 상태가 참혹하다. 눈 하나가 관통되어 완전히 찌부러져 있었고. 등에도 날카로운 무언가로 후벼 판 관통상이 있다.
등의 상처는 검사의 수치라던데, 도망치다 칼 맞았나 보다. 추하게도.
“뭐야… 대체 무슨 짓을 당하길래!!”
미지에 대한 설렘이 곧장 공포로 바뀌었다. 음습한 하수도의 공기가 유난히 폐에 달라붙는 것 같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나는 꺼림칙함을 느끼면서도, 시신 아래서 빛나는 마법진에 랜턴을 갖다 댔다. 곧장 시체가 모래처럼 바스러지며 머릿속에 연신 신호음을 울렸다.
[아이템 발동 ― 이자나미의 심장]
[전생의 잔류사념을 획득했다.]
[힘을 5, 민첩을 9, 지능을 0 포인트 수복했다.]
[실전(失傳) 스킬 ― 후방 강타 LV.3을 수복했다.]
[실전 스킬 ― 잠입 LV.4를 수복했다.]
[실전 스킬 ― 미미르의 눈 LV.3을 수복했다.]
[실전 스킬 ― 일섬 LV.1을 수복했다.]
[전생의 기억을 모두 수복했다.]
“끄아아아악!”
나는 영혼이 찢어지는 절규를 내질렀다.
기억의 파도가 내 머릿속을 미친 듯이 뒤엎었다. 한동안 그 자리에서 떼굴떼굴 구르며 발광했다. 뇌가 쥐어짜이는 괴로움이 멎을 때까지.
그리고.
“구와아아악! 똑똑히 기억했다, 이 ×년아아아!!”
21번째 전생에서 진정한 의미로 부활한 나.
제정신을 차리고 제일 먼저 외친 말은, 그것이었다.
* * *
“복수! 피의 복수다! 리벤지! 리베에~엔지!”
이 하수도에서만 21번째 전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직후. 나는 미친 듯이 발광하며 분노에 몸을 맡겼다.
아직 혼란스러운 머리로 어떻게 그 메이드 년의 사지를 잘근잘근 씹어 먹을지 온갖 발상을 떠올리던 중. 서서히 머리가 식으며 이성이 돌아왔다.
“후… 흐, 흐흐.”
이성이 돌아온 나는 대차게 코웃음부터 쳤다.
방금 전까지의 내게 보내는 조소였다.
“리벤지는 예미 ×벌…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현실적으로 그렇다. 그만큼 그 여자와 내 실력 차는 확연했다.
나름대로 레벨을 올린다고 올리고, 에테르까지 충전해서 덤볐는데도 도망조차 제대로 못 쳤으니. 그대로 싸워봤어야 결과는 뻔하다.
‘계책. 그 여자한테서 살아남을 계책이 필요해!’
그것도 기왕이면 평화적인 쪽으로. 나는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자고로 손자병법에서도 말했다. 전투하지 않고 이기는 게 상책이고 외교전이 중책이고 맞상대는 하책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히죽, 웃음을 머금었다. 지금 상황을 타파할 만한 가장 적절한 방법. 그것이 머리맡을 스쳤기 때문이다.
‘실패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 따윈 들자마자 구겨 처박아 버렸다.
‘실패하면. 까짓것 죽기밖에 더하겠냐.’
20번이나 뒈졌다 부활한 나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옘병할 하수구 메이드 년아.
7. 하수도의 주인
“죽어어!”
나는 방패를 든 고블린의 뒤를 잡고, 그대로 검을 찔러 들어갔다. 섬전 같은 찌르기가 쇄도한다.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속도를 한참 초월했다. 스킬 ‘후방 강타’의 효과였다.
“케에엑!”
경추를 직격당한 고블린은 피를 분수처럼 뿜으며 쓰러졌다. 다른 고블린들이 우왕좌왕하며 갑작스러운 습격자에게 무어라 외치기 시작했다. 나를 향한 살기가 찌르르 하수도를 울린다.
너희는 소리칠 시간이 있으면 공격을 한 번이라도 더 했어야 됐다. 나는 숨을 멈추고 곧장 다음 타깃을 향해 검을 내밀었다.
‘잠입!’
스스스! 유령처럼 흔들리는 신형이 고블린 검병들을 미끄러져 지나갔다. 고블린들이 뒤늦게 칼을 휘둘렀지만 아슬아슬하게 맞지 않는다.
나는 코앞까지 다가온 고블린 궁병의 앞에서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일자로 깔끔하게 정수리를 내리쳤다.
“일섬!”
스킬이 발동되며 키이잉, 날카로운 기운이 검날에 깃들었다. 내리친 검의 궤적을 따라 새파란 잔상이 일렁거린다.
푸화악! 고블린은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그대로 두 동강이 나버렸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내지 못했다.
“끄갸! 도, 도망!”
“도망갸!”
순식간에 방패병과 궁병을 잃은 놈들은 금세 전의를 상실했다. 칼조차 내팽개치고 후다닥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헐레벌떡 도망가는 놈들의 뒤를 쫓으며 차갑게 웃었다.
하다못해 우두머리를 잃은 헌팅 랫들은 최후까지 저항이라도 하는데. 이래서야 지능이 높은 게 축복인 건지 저주인 건지 모르겠다.
뭐, 일방적으로 도륙할 수 있으니 내 입장에선 땡큐지만.
“끼갸아악!”
“갸아악!”
“키야악!”
옆구리를 동강 내고, 뒤통수에 검을 박아 넣고, 마지막 한 마리는 다리를 잘라낸 뒤 심장에 검을 박아 마무리했다.
놈들은 죽기 직전, 끝까지 나를 쳐다보며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같은 말을 했다. 다른 말은 어눌하면서 그 말만은 제법 유창하게 했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놈들은 학습을 한 것이다. 비굴하게 빌면 살려주는 인간들이 간혹 있다는 것을.
“고블린들을 절대 살려주시면 안 돼요. 놈들은 절대로 원한을 잊지 않아요.”
“세상에 인정을 베풀면 안 되는 놈들이 딱 두 종류 있는데요.”
“하나는 보증 서달라는 친구고 나머지 하나가 고블린이에요.”
그럴 때마다 전생의 기억 속에 각인된 목소리가 내 정신을 일깨웠다.
이놈들에게 연민을 느껴 살려주면 동포의 죽음을 갚기 위해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나를 찾아온다. 그리고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나를 쳐 죽이려 들 거다.
그래서 나는 놈들을 절대 살려두지 않는다. 그렇게 배웠으니, 그대로 실행했다. 지금껏 그녀의 가르침이 틀렸던 적은 없었다.
그런 피 같은 조언을 준 스승님이, 나를 십수 번이나 쳐 죽인 여자라는 게 문제지만.
“잘하셨어요. 이제 좀 사냥꾼 티가 나네요.”
그런 생각을 하던 내게, 박수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아끼지 않은 전생의 스승이자, 나를 수없이 죽인 살인마이자, 이 하수도의 몬스터를 정리하는 관리자이기도 한 여자.
할센베르크 성의 시녀 레이라. 그녀가 내게 천천히 다가오며 대견하다는 듯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나는 복잡한 시선으로 레이라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아직 미숙한데 뭐.”
“하루 만에 이 정도로 성장한 건 대단한 거예요. 정말 놀랐어요.”
레이라가 그렇게 말하더니 고블린 사체들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구석에 놓여있던 노란 수레에 싣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고, 레이라는 특유의 우울한 눈을 내게 돌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제가 뭐 가르칠 것도 없네요. 부사수로 데리고 다니는 것도 오늘부로 졸업하겠어요.”
“…….”
“어디서 과외라도 받고 오셨어요? 어떻게 여기 고블린 생리를 이렇게 잘 아시나요.”
과외? 네가 해줬다 어쩔래. 그런 말이 혓바닥 아래까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근질거리는 입을 애써 다물었다. 레이라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날카롭게 벼린 눈을 하고서, 가만히 그녀의 뒷모습만 응시했다.
그리고 기가 막힌 지금 상황에 다시금 한숨을 흘렸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됐지…….’
물론 알고 있다. 모두 내가 뿌린 씨앗이라는 것을. 하지만 알고 있어도 한탄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레이라와 내가 오순도순 파티 맺고 고블린 사냥을 하게 된 계기는 정확히 3시간 전.
내가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 * *
피의 복수를 포기하고, 전략적 후퇴(빤스런이라고도 한다)를 선택한 21번째 나.
나는 중앙 하수도를 하염없이 걸어 다니며 생각을 정돈해 나갔다.
그 망할 살인광 메이드에게서 살아날 계책들을 말이다.
“스텝 1.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그를 위해 일단 내 몸 상태부터 체크해 보기로 했다. 지피(知彼)는 맘대로 못하니 지기(知己)라도 잘해야 생존율이 올라갈 거 아닌가.
나는 곧장 내 상태 창과 스킬 창을 시야 맡에 띄웠다.
[명칭 : 박정용]
[별칭 : 163417413번째 용사. 마왕의 알 수호자. 불사에 종속된 자]
[LV. 9]
[체력 : 180/180 | 마력 : 112/120 | 신체 상태 : 정상]
[힘 : 24 | 민첩 : 30 | 지능 : 10 | 히어로 센스 : 3]
[남은 능력치 포인트 : 0]
[스킬 목록]
[미미르의 눈(패시브) LV.3]
[신의 총애(패시브) LV.1]
[사신의 총애(패시브) LV.14]
[에테르 수집(패시브) LV.1]
[프로메테우스(패시브) LV.1]
[후방 강타(액티브) LV.3]
[잠입(액티브) LV.4]
[일섬 LV.1]
[남은 스킬 향상 포인트 : 0]
“스테이터스는 나쁘지 않고.”
전생에서 9레벨까지 올렸던 스테이터스가 그대로 계승되고, 거기에 이자나미의 심장으로 나머지 잃어버렸던 스테이터스의 일부가 계승되었다. 지금 내 스테이터스는 전생 때의 9레벨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8레벨이나 폭삭 주저앉은 건 뼈아프다만.
문제는 스킬 쪽이었다. 전생에서 각각 레벨 4, 6, 8까지 올려놨던 미미르의 눈, 후방 강타, 잠입 스킬이 반토막 나있었다. 나는 침중하게 신음을 흘렸다.
“…스킬 레벨이 너무 모자란데.”
전생에서는 숨 쉬듯 뒈지다 보니 눈치챌 새가 없었는데, 아무래도 실전 스킬은 사신의 총애로 계승된 레벨 내에서만 전승되나 보다.
만약에 스킬을 안 찍은 채로 죽거나, 사념을 수복하지 못하게 되면, 그냥 스킬 포인트가 레벨 분량만큼 쌓이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들쭉날쭉 올라있는 스킬 레벨에 대해서도 대충 계산이 맞았다.
“하긴 안 그러면 사기긴 하지.”
나는 납득했다가, 잠시 속으로 투덜거렸다.
지금 이 냄새나고 축축한 하수도에서 스물한 번이나 되살아나 가며 지랄 쇼를 벌이고 있는데. 시작부터 이런 개빡센 난이도로 떨굴 거면 그 정도 사기는 괜찮지 않냐?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고 치사하다.
괜히 미네르바 얼굴이 어른거린다. 특유의 느물거리는 얼굴을 떠올리고 나는 굳게 다짐했다.
다음에 걔 만나면 꼭 내가 한 대 때리고 만다.
“아, 그래. 리포트(?) 갱신.”
나는 배낭에 쑤셔 넣어뒀던 망자의 함을 꺼냈다. 전에 있던 헝겊을 빼고 새 헝겊을 만들어, 이번엔 좀 다른 문구를 써넣었다.
이번 생의 내 목적지는 명확하다. 그리고 주의해야 할 대상 역시 명확하다. 그러니 다음 생의 나에게 내리는 지시도 더 명확히 할 수 있었다.
―오른쪽 수로에 출구 있음. 이쁘장한 갈색 머리 메이드 주의. 속지 마라. ×년이다.
잠깐. 근데 ‘오른쪽’이란 건 내가 경험으로 대충 정한 거고, 새로 깨어난 나는 오른쪽이 어디 수로인지 모르잖아.
표시 같은 걸 남겨봤자 다음 생엔 시간이 되돌아가니 남지도 않을 거고.
‘아하, 이러면 되겠군.’
고민 끝에 나는 하수도의 약도를 그려 동봉했다.
주변 지형지물을 대충 표시해 두고 방향을 적어놨으니 이 정도면 알아볼 수 있으리라. 다음 생의 나는 세심한 센스에 감동하며 자화자찬을 하겠지. 역시 나야, 이 지랄 하면서.
…사실 다음 생까지 갈 일이 없는 게 제일이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말이다.
“좋아, 할 건 다 했다.”
망자의 함을 배낭에 집어넣은 나는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수로의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처음 향한 곳은 오른쪽이 아니라 뒤쪽의 수로였다, 확인할 게 하나 있어서다.
“흐음.”
가면서 이런저런 고민을 해봤다. 전략에 대한 고민이었다.
몇 가지 생각나는 게 있긴 하다. 과연 성공할지 어떨지 미지수긴 하지만, 망설일 시간은 없다. 나는 일단 그 계획들을 천천히 구체화해 나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뒤쪽 수로의 막장에 도달했다. 숨 막히는 피 냄새와 썩은 내가 상념을 방해했다.
“아오, 냄새.”
코를 틀어막고 주변을 재빨리 살폈다. 기억 그대로의 시체 더미가 거기에 있다.
하지만 노란색 수레는 거기에 없었다.
“…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뒤돌아 수로의 사거리로 되돌아왔다. 확인할 건 전부 확인했으니까. 그 불쾌한 곳에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내가 추측한 바로는 그녀… 레이라는 앞뒤 쪽 수로와 양옆 쪽 수로를 번갈아 가며 청소하는 듯했다.
즉 인간이 쌓여있던 앞뒤 쪽 수로에 수레가 없다는 건, 현재는 고블린들을 청소하기 위해 양옆 수로를 쏘다닌다는 얘기다.
‘거기다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라는 거지.’
내가 전생에서 깨달은 충격적인 사실. 시간이 돌아왔다고 해서, 미래의 변화를 일으키는 게 나뿐인 건 절대 아니다.
“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 전처럼 코인 토스를 해보자.
나는 주머니를 뒤져 성녀의 문장을 꺼냈고 그 자리에서 허공으로 튕겼다가 손등 위로 받아냈다.
나온 면을 천천히 확인해 봤고, 이내 내 입가엔 쓴웃음이 어렸다.
‘역시.’
달이 나왔다.
전에 코인 토스를 해서 방향을 정할 땐 분명 여신이 나왔다. 하지만 똑같이 ‘진행 방향을 정하기 위해’ 코인 토스를 했지만 결과는 같지 않았다.
나는 전생마다 반복됐던 죽음들을 떠올리며,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해 냈다.
‘확정되지 않은 미래는, 생각보다 쉽게 변한다.’
20번의 전생 동안, 그녀는 양옆 수로를 탐색할 때도 있었고 앞뒤 수로를 탐색할 때도 있었다.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는데도 그냥 미래가 들쭉날쭉 바뀌는 거다.
왜? 이번 생의 레이라가 그렇게 하고 싶었으니까.
그것뿐이다.
‘생각해 보면 죽는 타이밍이 항상 달랐던 것도… 내 의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어.’
전생에서 앞쪽 수로를 탐험하며 절반도 못 간 채 살해당한 적이 있나 싶으면, 끝까지 도달한 뒤에야 죽은 적도 있다.
그 시기를 결정한 건 내가 아니다. 레이라가 숨죽이고 날 지켜보다가 ‘지금이다’ 싶을 때 죽인 거다. 그 시기가 각각 전생마다 달랐던 거고.
그래서 나는 이번 생에 이르러서야 계획다운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변수를 줄인다. 그게 핵심이야.’
최대한 내 의도대로 장기말을 움직여야 한다.
다행스러운 점은 이 하수도에서 지금껏 발견된 장기말이라 해봐야 나와 레이라, 둘뿐이라는 점. 즉 변수의 컨트롤 자체는 어려운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어쨌든 레이라보다 내가 선수를 쳐야 한다는 점이다.
“레이라 씨! 레이라 씨―!”
나는 오른쪽 수로에 들어서자마자 목청을 높여 외쳤다.
반대편은 조용했다. 고블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며 소리쳤다.
“레이라 씨! 어디 계십니까! 들리면 나와주세요!!”
어디 있긴. 분명히 오른쪽 수로에 있을 것이다. 나는 히죽 웃으며 계속 그녀를 불렀다.
당연하다. 이 하수도는 중앙의 사거리를 기점으로, 왼쪽과 뒤쪽 수로는 지극히 짧다. 그리고 오른쪽과 앞쪽 수로가 굉장히 길다.
검 두 개를 가로질러 놓은 모양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레이라 씨이이이! 복면을 벗고오오!! 정체를 드러내 주세요오오오!!”
지능이 없는 헌팅 랫이면 몰라도 고블린은 절대 왼쪽 수로에는 살지 않는다.
숨을 공간도 별로 없을 정도로 짧은 데다, 고블린들의사체가 그렇게 쌓여있으니까. 전생에서도 왼쪽 수로에선 살아있는 고블린을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그 때문에 고블린을 사냥하는 레이라 역시 오른쪽 수로에 있을 수밖에 없다.
“레이라 씨이이! 오겡끼데스까아아아!”
나는 철 지난 패러디까지 섞어가며 애타게 그녀를 찾았고.
그 구질구질함에 신이 탄복했는지, 드디어 반대편에서 반응이 들려왔다.
“…당신 때문에 고블린이 다 도망갔잖아요. 뭐예요, 당신은?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아요?”
끼리릭. 끼릭.
익숙한 수레 소리와 함께 등장한 것은 밤색 머리에 녹색 눈의 메이드, 레이라였다.
그 무심한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는 본능처럼 흠칫 굳었지만 이내 심호흡을 하고 히죽, 웃었다.
팔자에 없는 영업용 스마일을 지었더니 얼굴에 경련이 오는 듯했다.
“반갑습니다, 레이라 씨. 할센베르크 성주님한테 고용된 박정용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렇게 레이라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고 그녀는 뻗어진 손을 빤히 쳐다봤다.
그렇다, 선수를 친다.
레이라가 나를 먼저 발견해서 발생하는 가장 큰 변수. 나에 대한 의심. 그걸 없애기 위해, 나는 내 발로 직접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자,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나는 호기롭게 콧김을 내뿜고는 마른침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머리가 다시금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고용됐다고요? 주인님한테?”
레이라는 조심스럽게 다가오면서도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눈은 내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나를 향한 눈동자에 의심의 기색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흐음.”
레이라가 수레 옆에 끼워놓은 빗자루를 만지작거린다. 저것의 정체를 아는 나는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서라.
손 떼, 인마. 때찌다, 때찌.
“예, 그분이 시켜서 내려왔는데,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서요.”
나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며 대답했다. 레이라가 흐응, 하고 비음을 냈다.
무슨 의미일까. 일단 호의적이지 않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아무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여기로 내려보냈다고요?”
“예, 가서 레이라라는 나인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설명해 줄 거라고.”
“…일단, 제가 레이라가 맞긴 한데.”
말을 얼버무리는 레이라. 별안간 레이라가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녀의 입가에 슬쩍, 회심의 미소가 떠오른다.
“알겠습니다. 시종장님께는 말씀드렸겠죠?”
왔군. 이번에도 똑같은 대사로 시험하는구나, 망할 살인광 메이드.
미안하지만 두 번 걸려줄 생각은 없다. 나는 곧장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당황한 시늉을 했다.
“시, 시종장님요? 그런 분도 있었나요?”
“…….”
“제가 할센베르크 님한테 들은 바로는 시종은 레이라 씨 하나뿐이랬는데… 죄송합니다. 시종장님은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습니까? 지금 허락받고 오겠습니다!”
내가 허둥지둥 짐 싸려는 시늉을 하자, 레이라의 눈에 맺힌 의심의 기색이 조금씩 걷혀갔다.
그녀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그런 사람 없습니다. 잠깐 시험해 본 거예요.”
“아아,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제가 뭘 또 잘못한 줄 알고.”
“미안해요. 의심해서.”
“아닙니다! 당연한걸요!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나는 듬직하게 웃으며 넘어갔다.
내가 호구로 많이 살아봐서 아는데. 이럴 때 껄껄 웃으면서 넘어가 주면 상대는 금세 안심하게 된다. 그러면 그 안심이 미안함과 섞여, 상대에 대한 호의로 발전하는 경우가 꽤 많다.
물론 그대로 호구 잡히는 경우도 부지기수니 추천은 하지 않는다.
그냥 법대로 가라.
“…후후,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어쨌든 노림수대로 레이라는 순순히 나를 믿어줬다.
그럴 테지. 시종장이 없다는 성의 내부 사정을 아는 만큼, 거짓말이라곤 생각하기 힘들 것이다.
일단 급한 고비는 하나 넘겼다. 나는 주먹을 몰래 불끈 쥐었다.
“그럼, 재차 잘 부탁드려요. 할센베르크 변경백님을 모시고 있는 시녀 레이라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용병 박정용입니다.”
“바르크… 쟌용? 특이한 이름. 발음이 어렵네요.”
레이라가 고개를 모로 꼬며 내 이름을 연신 되뇌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그냥 편한 대로 부르십쇼.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그냥 후배님으로 하죠. 저도 누구한테 선배질 해보는 게 꿈이었거든요.”
“그러십쇼, 선배님.”
“아하하.”
내 가벼운 익살에 레이라는 생긋 웃었다.
어딘가 음울한 기색이 숨어있던 웃음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맑은 웃음을 보여줬다. 길가의 야생화처럼 수수하지만 매력적인 미소다.
저런 식으로 웃을 줄도 아는군. 나는 머릿속 그녀와의 이미지 차이 때문에 몸서리가 쳐졌다.
“가죠. 일단 첫날이니, 대략적인 업무를 소개해 드릴게요.”
“아, 예.”
“그리고 경어는 됐어요. 저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는데.”
“그럴까요… 아니, 그럴까?”
“그러자고요.”
레이라는 내가 진짜 사용인임을 확인하자마자 나를 데리고 수로를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생에서 그리했듯, 이곳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의 특성을 설명해 줬다.
전에 들었던 것들도 있고, 이번에 처음 듣는 사항도 꽤 많았다. 저번엔 내가 밑장 뺐다는 걸 일찌감치 알고 있었으니 대충대충 했던 거겠지.
‘상태 확인.’
[인물 정보]
[명칭 : 레이라]
[별칭 : 덤벙이 시녀, 할센베르크 하수도 관리자, 그윈의 연인]
[LV. ???]
[체력 : ??? | 마력 : ??? | 신체 상태 : ???]
[힘 : ??? | 민첩 : ??? | 지능 : ???]
나는 이번에도 기회를 봐서 그녀의 스탯 창을 훑었지만, 역시나 명칭과 별칭 외엔 모두 물음표 상태였다.
아무래도 둘 중 하나인 듯했다.
‘스킬 레벨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저 여자보다 내 레벨이 낮아서 확인이 불가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일 가능성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당장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속으로 혀를 차고 있으려니, 어느새 레이라의 대화 주제가 변했다. 일방적인 설명에서 내게 말을 걸어오는 쪽으로.
“그런데 후배님은 어쩌다가 이 성까지 찾아오게 됐나요?”
“어, 예?”
“들어보셨을 거 아니에요. 할센베르크의 소문. 직접 보니 어때요?”
“…….”
레이라의 눈꼬리가 낮게 처진다.
기본적으로 무표정 인상이 강해서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생각보다 감정이 잘 드러나는 여자였다. 그녀는 지금 슬퍼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덩달아 슬퍼졌다.
들어봤을 리가 있냐. 난 네년 때문에 이 하수도에서 탈출해 본 적도 없단 말이다. 씨×장.
나는 레이라의 침울한 표정과 더불어, 전생의 그녀가 했던 말들을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간신히 몇 가지 키워드들이 머리맡에 떠올랐다.
‘…폐성. 폐성이라 그랬지.’
즉, 버려진 성. 그녀는 분명 전생에서, 이 하수도 위에 있다는 할센베르크를 보고 ‘폐성’이라고 했다.
나는 머리를 쥐어짜 내 최대한 어색하지 않을 말들을 만들어냈다. 두루뭉술하고, 그러면서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얘기를 늘어놓는다.
“사실 저도 급전이 필요해서 무작정 온 거라… 제대로 된 사정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성의 꼴이 말이 아니던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저런, 그랬군요.”
레이라가 내 얘기를 듣더니 낮은 탄성을 흘렸다.
안타깝다는 듯이 슬쩍 웃으며 “도착했을 땐 사기당한 기분이셨겠네요.” 같은 말을 한다. 내가 용사로 소환됐다는 이유로 냉철하게 척살하던 그녀의 모습과는 그야말로 딴판이었다.
이것이 이 살인광 메이드의 진짜 모습일까. 아니면 용사인 내게 보여주던 그녀가 진짜 모습일까. 둘 다 아닐 수도, 둘 다일 수도 있겠지.
어쨌든 레이라는 우울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말했다. 꽤 길게 이어지는 설명이었다.
“주인님은 이 나라 미텔란트의 최북단을 수호하는 변경백입니다. 알고 계세요? 아직도 미텔란트 북방에는 한파 속에 숨죽인 마녀의 잔당들이 우글거려요. 할센베르크는 그들이 창궐해 인간의 터전을 노릴 때마다 일선에서 대적했죠. 그러다가…….”
조잘조잘 세계관 설명을 늘어놓는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나도 시험의 장막 지도에서 본 적이 있는 미텔란트. 여기는 그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있는 할센베르크 변경백령.
북쪽에서 몰려오는 고대 마족의 파도에 대항해 세워진 이 요새는, 추위와 잦은 전쟁으로 척박하고 혹독하여 사람들이 발길을 꺼리는 곳이다.
그러나 전임이 죽고 새로 들어온 변경백, 할센베르크의 선정과 영지민들의 충성심으로 요 수년간은 나름대로 잘 버텨나가고 있었다.
“할센베르크 주인님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좋은 분…이셨죠.”
이 요새 할센베르크의 주인인 할센베르크 변경백은 무력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된 사람이다. 전장에서는 항상 일선에 서서 지휘했으며, 본인의 무력이 막강하다.
또 그 계책이 신묘하여 강대한 고대 마족들이 쪽도 못 쓰고 털렸다나. 게다가 북방의 혹한으로 흉년이 들 때면 영지민들을 성안에 들여 비상식량을 나누며 구휼하는 등, 그야말로 성군이었다고.
“하지만 한계가 있었죠. 애초에 여기는 인간이 살 만한 땅이 아니니까요.”
버티고 버텼지만 식량난은 점점 악화되었고, 고대 마족들의 공세는 거세지기만 했다.
병사고 평민이고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속출하며 할센베르크령에는 연일 비탄이 감돌았다. 변경백은 시간이 날 때마다 중앙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대부분 묵살되었다.
―엄살 피우지 마라.
―중앙도 국정이 혼잡해서 힘들다.
―멀어서 못 찾아간다고 뺑끼 치는 거 아니냐.
―기다리면 어련히 지원해 줄 걸 왜 자꾸 보채냐. 해주기 싫게.
뭐, 쉽게 풀자면 그런 내용의 서신들만이 연일 날아들었다고 한다. 군대에서 당해봐서 아는데 저거 진짜 ×같다.
설상가상으로 고대 마족 중에서도 끔찍하기로 소문난 언데드 군단과 그 수장인 엘더리치가 공격을 가했고. 할센베르크는 내외로 혼란스러운 시국에서 이와 맞서야 했다.
“그 뒤로 이 성에는… 저주가 걸렸어요.”
그렇단다.
엘더리치는 죽은 사람들을 영면조차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자그마치 불사의 저주가 이 땅에 스며들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나처럼 시공회귀를 하는 건 아니고. 말 그대로 죽지만 않는 상태… 즉 언데드가 되는 저주에 걸린 것이다.
산 사람들은 어제까지 동료였던 이들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고, 사랑하던 이웃, 가족, 연인에게 뜯어 먹히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주인님은 결국 선택해야만 했어요.”
변경백은 직감했단다. 요새의 몰락은 예견된 사항이었다. 얼마나 더 버티느냐의 문제일 뿐.
결국 변경백은 모든 병사 및 평민들에게 피난령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만이 이 할센베르크 성에 남기로 결정했다. 끝까지 변경백의 곁을 지키기로 결정한 그의 부인과, 충성을 저버리지 않은 백인의 결사대만이 이곳에 함께 남았다.
“그런데 까고 보니… 주인님의 선택은 퍽이나 탁월한 것이었죠.”
남은 결사대는 모두 잔뼈가 굵은 실력자에 베테랑들이었고, 먹을 입이 줄어 식량 사정도 개선되었다. 또한 전투 후에도 사망자가 잘 나오지 않아 적의 전력을 무의미하게 늘리는 일도 없었다.
비록 식량이 소진되든 전투로 진이 빠지든, 결국은 그들의 패배로 끝나는 것이 기정사실이었지만. 이 혹한의 땅에서 똘똘 뭉친 결사대 앞에, 다시금 희망이라는 것이 싹트는 듯했다.
“그 개 같은 쓰레기들만 없었더라면. 이 땅도, 주인님도… 그윈도 이렇게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정확히 그 시점부터.
이 할센베르크 성에 용사들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노라고 레이라는 말했다.
‘용사’를 입에 담는 레이라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차갑게 식어있었다. 수레를 쥔 레이라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하얗게 물들었다.
그 고운 손에 매번 김장김치처럼 담가졌던 나로서는 간담이 서늘한 상황이었다.
“…이 뒤로는 제가 말씀드릴 영역이 아니네요.”
레이라는 거기에서 말을 끊었다. 한창 흥미진진한 구간이었는데 얘가 장사 좀 할 줄 아네. 다음은 결제해야 들려주냐?
나는 입맛을 다셨고. 그녀는 피곤한 기색으로 슬쩍 웃었다.
“나머지는 주인님께 직접 들으세요. 주인님의 신임을 얻으면… 말씀해 주실지도 모르지요. 언젠가는.”
그리고 레이라는 전처럼 묵묵히 입을 닫은 채, 수레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축 처진 어깨와 등을 보면서 뼈저리게 다짐했다.
‘…여기를 나갈 때까지. 용사의 ㅇ 자도 아가리에 담지 말아야겠다.’
대체 이 사람들한테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애꿎은 내가 이렇게 고통받아야 되는 거냐, 이 빌어먹을 선임 용사 새끼들아.
의미 없는 원망만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뭐 그런 느낌으로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나는 그대로 레이라에게 끌려 다니며 몬스터들의 청소를 시작했다.
“우선 간단하게 시험이나 해보죠, 후배님. 제가 아까 고블린들을 상대할 땐 어떻게 하라 했죠?”
“어… 우선은 상대의 정확한 수를 파악하고. 제일 먼저 활을 든 놈부터 죽여라?”
“네, 허투루 듣진 않으셨네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척후가 존재할 경우 척후를 1순위로, 그렇지 않은 경우 궁병을 1순위로…….”
레이라는 몬스터와 만나기 직전까지, 걸어가며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놓았다. 대부분은 아까 들었던 거 리바이벌이었고, 간혹 새로 듣는 정보가 나오기도 했다. 다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이번 설명에는 심지어 ‘숙련된 조교의 시범’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침 저기 오네요. 잘 보세요. 이렇게…….”
레이라가 하수도 어둠 너머를 흘깃 보며 중얼거린다. 내가 눈에 힘을 주고 맞은편 고블린 무리의 윤곽을 간신히 찾아낸 순간.
레이라가 유령처럼 내 옆에서 사라졌다.
“우선은 궁병부터 죽이는 거예요.”
나도 고블린들도 깜짝 놀라서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봤다. 고블린들의 뒤쪽이었다.
거기엔 어느새 홀연히 나타난 레이라가 있었다. 들어 올린 빗자루 칼날은 가장 후미에서 걸어오던 고블린 궁병의 목을 관통한 상태였다.
“끄… 갹.”
푸스슥. 레이라가 신속하게 칼날을 빼자 궁병은 마대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경련하며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다가, 그대로 죽어버린다.
“갸아아악!”
“여, 여자! 죽인댜악!”
“무, 무서운 여쟈!”
고블린들은 제각기 뭐라 외치며 황급히 검을 뽑아 들었다. 일행의 선두에 있던 방패병이 헐레벌떡 레이라 쪽으로 달려오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펄쩍, 레이라는 그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공중에 떠오른 그녀의 몸은 가공할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다음은 방패병.”
레이라가 번개처럼 내리친 칼날의 섬광이 번득인다 싶은 순간. 그녀는 이미 바닥에 안착해 다음 고블린을 향해 발돋움을 한 상태였다. 한 템포 늦게 방패병 고블린의 육신이 쩌적,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다 처리하면 마지막으로 검병들을 상대하는 겁니다.”
순식간에 두 명이 당해버리자 멍하니 앞만 보는 고블린 검병들. 전의를 상실했는지 얄쌍한 다리를 파들파들 떠는가 하면, 이미 칼을 놓쳐버린 놈도 있었다.
레이라는 나를 도륙할 때처럼 싸늘한 눈빛으로 세 놈을 쓰윽 훑어보는가 싶더니. 이내 빗자루를 옆으로 늘어뜨려 수평으로 만들었다.
“일섬.”
그리고 어느 순간, 풍차처럼 칼날을 크게 휘둘렀다. 그 궤적을 따라 은빛의 섬광이 잔상처럼 일렁거렸다. 나는 한동안 홀린 듯이 검광이 지나간 자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것이 ‘스킬’의 이펙트라는 것은, 중얼거린 스킬명 덕분에 간신히 깨달을 수 있었다.
“갸…우, 우악.”
어느 고블린이 비명을 질렀다. 고블린은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어리둥절할 게다. 지켜보던 나도 어이가 없었으니까.
고블린 세 마리는 동시에 일도양단되어, 아직 꼿꼿이 서있는 자기 하반신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마지막 건 굳이 따라 할 필요 없어요. 세 마리를 한꺼번에 잡는 건 초심자는 버거울 거예요. 저는 그냥 귀찮아서 한 번에 해버린 거고요.”
순식간에 다섯 마리의 도륙 난 고블린이 널브러진 하수도 한가운데. 피로 얼룩진 메이드복을 털어내던 레이라가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어조. 그야말로 일상적인 해프닝이라는 느낌이다.
그녀는 특유의 미동도 없는 초록색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하실 수 있겠죠?”
나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새삼 생각했다.
저런 괴물에게서 도망쳐 나갈 생각을 했다니. 내가 어리석어도 한참 어리석었다고 말이다.
* * *
“이야아아!”
나는 기합과 함께 검을 찔러 넣었다. 푸슉. 고블린의 얇은 가죽 갑옷을 뚫고 검이 쑤욱 들어간다. 파육음이 울린다.
하지만 그 순간 시큰, 하고 화살이 박힌 왼 어깨가 욱신거렸다. 나도 모르게 검을 쥔 손에서 힘이 슬쩍 빠져나갔다.
“구…갸아아……!”
고블린이 몸부림쳤다. 나는 황급히 손에 다시 힘을 줬다. 그리고 힘껏, 검을 양쪽으로 빙빙 돌려 후벼 파기 시작했다. 고블린이 발작하듯 괴성을 질러댔다.
“갸아아악! 가아악!”
기분 나쁜 손맛이 찌르르 등줄기를 울린다. 인상을 찌푸렸지만, 동시에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이 기분 나쁜 손맛이야말로 내 승리를 확신시켜 주니까.
아니나 다를까 고블린은 곧 입에서 피를 잔뜩 쏟으며 절명했다. 내가 이긴 것이다.
“후우.”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아드레날린이 팽팽 돌아 좁아졌던 시야가 넓게 돌아왔다. 나는 주변을 쓰윽 훑었다.
열 구에 가까운 고블린 시체가 주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아찔했던 방금 상황을 반추했다.
“설마 고블린들도 저희들끼리 임시 동맹을 맺을 줄은…….”
한 고블린 무리를 사냥하고 있던 차에 다른 고블린 무리가 지나가다 합세했다. 이미 궁병과 방패병, 그리고 검병 하나를 죽여놓은 상태였다고는 하나. 일곱 마리의 고블린을 기습의 어드밴티지도 없이 이기기는 무척 힘든 일이었다.
“기습이 실패했을 땐 무조건 검병의 수부터 줄이세요. 개싸움이 되고 나면 근접 전투원의 숫자가 많을수록 생존율이 제곱수로 떨어집니다.”
그때 레이라의 조언을 떠올려 우선 상대하던 검병들을 전력으로 쓰러뜨리고, 정공법으로 고블린들을 상대했다.
방패병, 검병, 그리고 마지막으로 궁병 순으로 모두 척살했다. 덕분에 화살을 어깨에 맞고, 검병들에게 자잘하게 긁히긴 했지만. 죽지는 않을 수 있었다.
“대단해요. 여차하면 제가 나서려고 했는데. 정말 내일부턴 혼자 다니셔도 되겠어요, 후배님.”
짝짝짝. 뒤에서 희미하게 박수 소리가 났다. 피곤한 눈을 들어 그쪽을 보니 레이라가 있다. 기특하다는 양 연신 박수를 치며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내 앞에 서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내 머리를 쓱쓱 문지르기 시작했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레이라의 양 입가에 번져있었다.
“정말 잘했어요. 칭찬해 줄게요.”
내가 개냐.
순간 레이라의 취급에 울컥했지만. 도저히 받아쳐 줄 기운도 없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솔직하게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뭐, 다 네 조언 덕분이지. 나는 그냥 들은 대로 했을 뿐이야.”
“어머, 조언은 조언일 뿐이죠. 그걸 단박에 실전에서 응용하는 건 분명히 엄청난 재능…….”
어느새 나와의 대화도 익숙해진 레이라가 청산유수로 나를 칭찬했다. 정확히는 칭찬하려다 멈췄다. 시선이 내 어깨에 박힌 화살로 향해있었다.
레이라의 얼굴이 굳어있길래 나는 뺨을 긁으며 설명했다.
“검병들부터 상대하려니 화살 몇 대는 맞을 수밖에 없더라. 그나마 한 대만 박힌 게 다행이지.”
원래 두 세대 정도 더 맞았지만 나머지는 가죽 갑옷에 맞고 튕겨 나갔다. 아마 질 낮은 화살이라 그렇겠지만, 어쨌든 가죽 갑옷 만만세다.
내가 대수롭잖게 설명했음에도 레이라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은 채 풀릴 생각을 안 했다.
“레이라?”
“조금 따끔할 거예요.”
“엥?”
레이라가 별안간 중얼거린 말의 의미는 직후 알 수 있었다.
쑤욱, 그녀가 내 어깨에 박힌 화살을 그대로 뽑아버린 것이다. 근육이 딸려 나가는 듯한 고통이 일순간 몰려왔다. 나는 비명을 지르기 위해 입을 쩍 벌렸고, 벌어진 입에선 비명 대신 숨 막히는 신음만 흘러나왔다.
“으, 으어… 레, 레이라. 지금 뭐 하는…….”
“잠시 가만히.”
레이라가 내 어깨의 상처에 입술을 갖다 대고 피를 쭈욱 빨아들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잘 안 돌아간다. 그녀의 입술과 뺨에서 흘러드는 따듯한 기운이 느껴진다. 문득 레이라가 무아지경으로 상처를 핥다가 내 쪽을 흘금 올려다봤다. 눈을 부릅뜨고 있던 나는 퍼뜩 시선을 피했다.
그제야 빨아낸 피를 뱉어낸 레이라가 말했다.
“고블린 화살에는 약한 마비 독이 묻어있어요.”
“…아.”
“치명적인 건 아니지만 당장 빨아내지 않으면 하루 정도는 몸이 마비돼서 움직일 수 없게 돼요. 응급처치를 하려는 거예요. 오해하지 말아요.”
“그, 그래.”
그러시단다. 절찬리에 오해를 했다. 다음부턴 깜빡이나 켜고 해주십쇼. 제기랄.
난 괜히 민망해져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레이라는 자기 메이드복의 앞치마와 프릴을 거칠게 뜯어냈다. 그것으로 내 어깨를 감싸고 간이 붕대를 만들었다.
‘흐음.’
나는 그녀의 행색으로 보고 다른 의미로 많이 놀랐다.
무척이나 익숙한 몸놀림. 타인을 치료해 주는 것이 전문가처럼 능숙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일단 임시방편은 되겠죠.”
레이라는 이어서 프릴을 엮어 삼각건을 만든 뒤 팔을 지탱하도록 내 목에 걸쳤다. 삼각건을 걸어줄 때 순간적으로 그녀의 몸이 밀착되어 나는 숨을 삼켰다.
반면 그런 걸 신경도 쓰지 않는 레이라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내 몸에 자잘하게 난 상처들을 흘끔 보더니, 곧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돌아가죠. 따라오세요.”
레이라가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나는 응급처치를 끝낸 환부를 슬슬 만져보다가 퍼뜩 레이라의 뒤를 쫓았다.
“어, 혹시 나 때문에 돌아가는 거냐?”
“네.”
단호하다. 단호박인 줄 알았다.
어쨌든 지금은 좀 곤란하다. 아직 위로 올라가면 할센베르크라는 양반한테 무슨 변명을 대야 할지 생각도 안 해놨고. 마음의 준비도 안 됐다.
나는 애써 표정을 밝게 고치고 팔을 빙빙 돌렸다.
“나 아직 말짱해. 까짓거 화살 박힌 것쯤이야 포션 하나 빨면 회복되는 상처잖아.”
나는 대수롭잖게 던진 말이었는데. 레이라는 내 생각보다 훨씬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그녀가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포션? 힐링 포션을 말하는 건가요?”
“어, 그런데?”
“후배님, 포션도 가지고 있나요?”
“엉? 그야…….”
나는 ‘당근 빠따죠 쉬바!’라고 외치려다가 가까스로 막았다.
급발진을 멈춘 난 일단 진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맹렬하게 두뇌를 회전시켰다. 그러고 보면 전생에서 레이라도 저런 반응이었던 것이다.
‘내가 에테르를 흡수해 강화하거나 회복되는 걸 보고 꽤나 놀랐지.’
어쩌면. 이쪽 세계관에선 포션이 굉장히 비싼 축에 드는 물건이 아닐까? 아니, 비싼지는 몰라도 일단 일반인이 구하기는 어려운 물건인 게 확실하다.
‘그렇다면 이건 위험하다.’
내가 포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체가 의심받을 수도 있으니까. 돈이 없어 이런 척박한 곳까지 굴러왔다는 놈이 그런 희귀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여기까지 생각하는 데 약 10초. 결국 난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내, 내 말은. 그냥 그 정도로 가벼운 상처라는 의미지, 응.”
“…흐응.”
레이라는 콧소리를 내며 내게 슬쩍 다가왔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화살이 박혔던 내 어깨를 쿡, 쑤셨다. 나도 모르게 펄쩍 뛰었다.
“아오, 씁!”
“그런 것치곤 많이 아파 보이네요, 후배님.”
“…….”
“허세 부리지 말고 오늘은 그만 가서 쉬어요, 알겠죠?”
레이라는 피식 웃더니 등 돌려 걸어갔다.
딱히 변명할 말이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잠자코 뒤를 따랐다.
8. 폐성의 주인
한참을 레이라를 따라 하수도를 걷자니. 문득 레이라가 물어 왔다.
“그러고 보니 거취에 대해서 주인님께 지시받은 게 있나요?”
“거취라면?”
“어디서 잘지. 밥은 어떻게 할지. 그리고 성내에서 후배님의 취급은 우리 같은 사용인인지, 아니면 주인님의 정식 식객인지… 뭐,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요.”
“아아… 그거.”
제길, 올 것이 왔군.
머리를 최대한 굴렸다.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갈까. 생각해라. 다시 죽기는 싫잖아! 이제 이 하수도에서 깨어나서 신나는 모험 어쩌고 지랄하는 것도 지긋지긋하다고!
나는 고심 끝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레이라에게 일임한다고… 그렇게만 들었어. 너한테 가면 다 설명해 줄 거라고. 내가 들은 건… 그것뿐이야.”
난 결국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할센베르크 씨를 짬 처리 대마왕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일종의 도박 수였다. 당장 위기 모면은 쉽지만, 만약 할센베르크라는 양반이 평소 원리원칙에 철저한 사람이라면? 거짓말이 단박에 들통날 가능성도 있다.
조마조마하게 쳐다보는데, 레이라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다가 이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녀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또 그렇게 저한테 떠넘기시는군요. 뭐, 이해가 안 되진 않지만…….”
슬픈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린다. 입가엔 자조가 어려있었다. 금세 지워져서 내가 잘못 본 건가 싶기도 했다.
어쨌든 그녀는 곧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다면 우선은 비어있는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어차피 거의 유령 요새라서 본성 저택엔 비어있는 방 천지긴 하지만요.”
“아… 그래.”
그 뒤로 이렇다 할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레이라는 생각에 잠긴 듯이 앞만 보며 걸었고. 나도 딱히 그녀와 친해지고픈 마음은 없었으니 구태여 말을 걸지 않았다.
가는 도중에 꽤 많은 무리의 고블린과 마주쳤지만, 레이라가 귀신같은 칼솜씨로 전부 썰어버리거나. 아니면 철구를 풍차처럼 휘둘러 순식간에 으깨버리는 것으로 상황은 금세 종료되었다.
철구에 잔뜩 묻은 피딱지를 떼어내며 레이라가 중얼거렸다.
“휴우, 요즘 들어 번식기라 그런가 고블린이 많아진 거 같아요. 이제 저도 좀 지치네요.”
안 지치면 그게 더 이상하다.
내가 본 것만 최소 100마리는 잡은 것 같은데. 오늘 내가 잡은 고블린을 다 합쳐도 방금 레이라가 1시간 동안 잡은 고블린보다 못 잡은 건 확실하다.
그렇게 거침없이 전진하고 있자니. 곧 우리는 오른쪽 수로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그리고 나는 감동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추, 출구…….”
빛이다.
수로 끝자락의 벽면에 붙은 낡은 줄사다리. 그 위로 뚫린 구멍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따스함이 느껴지는 그 빛은 누가 봐도 태양빛. 바깥세상의 빛이었다.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은 내 행색을 가만히 보던 레이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입을 가리고 쿡쿡거리며 웃었다.
“왜 그러세요. 하수도에 몇십 일은 갇혀있던 사람 같은 반응이네요.”
“…아, 아니. 그냥 좀… 잠깐 있었는데도 이러네… 하하…….”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변명했다.
물론 잠깐 있었던 게 맞다. 이번 생의 나는 분명 그렇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내가 느끼기엔 정말 몇십 일은 갇혀있었던 느낌이다.
그런 내 심정을 정확하게 꿰뚫다니. 이게 여자의 직감이라는 건가? 아님 그냥 저 여자가 유달리 촉이 좋은 걸지도 모르겠다.
“올라가요. 할센베르크 성으로.”
“…그래.”
나는 침을 한 덩이 꿀꺽 삼키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처덕, 처덕. 하수도의 습기를 머금은 사다리를 타고 한 단씩 천천히 올라갔다. 갈수록 빛살이 강해졌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내가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리게 됐을 즈음.
“윽!”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화악, 하고 사위가 밝아졌다.
동시에 뺨을 엘 듯한 한파가 일거에 몰아닥쳤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면서도 허겁지겁 그 공기를 들이마셨다. 심장이 얼 것 같았지만, 하수구 특유의 숨 막히는 공기와 차원이 다른 상쾌함이 몰아쳤다.
바깥이다. 드디어 바깥으로 나왔다. 이 빌어먹을 부조리한 이세계 땅을 사실상 처음으로 밟은 거다!
“크으, 눈이…….”
나는 연신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애를 썼다. 내 뒤를 쫓아온 레이라가 옷을 털고 내 옆에 섰을 때. 나는 드디어 정상으로 돌아온 시야를 끔벅거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선 채로 얼어붙었다.
“…뭘 그렇게 놀라요.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텐데.”
내 앞에 펼쳐진 성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문득 레이라가 그렇게 말하며 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답지 않게 당황하는 얼굴. 내 반응이 민망한 듯했다.
나는 레이라의 재촉에 따라 성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연신 주변을 향해 눈을 돌렸다.
높다란 성벽을 기점으로, 아무 데나 버려져 눈이 덮인 시체들.
부패한 식물로 가득한 텃밭. 그 위로 날아다니며 진수성찬을 즐기는 까마귀 떼들. 피를 덮은 눈. 그리고 그 위를 다시 한번 덧칠한 얼어붙은 피. 그 위를 또다시 덮는 눈.
군데군데 무성한 잡초와 음울한 색채가 인상적인 성벽. 그 안에 쥐 죽은 듯 고요하게 서있는 성채가 하나. 갈기갈기 찢어진 깃발이 강풍에 펄럭이는 그 성은, 아무리 노력해도 디즈니 꿈동산보다는 공포 특급 중세 버전을 연상시켰다.
“이건…….”
폐성.
전생에서 레이라가 했던 말대로. 몰락한 성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 * *
“으음.”
야심한 밤. 내가 몰락 요새 할센베르크에 입성한 지 약 30분이 흘렀다.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나는 레이라에게 배정받은 방 침대에 앉아있었다. 앉아서, 눈앞에 뜬 패널을 보고 고민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이 패널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내가 할센베르크 풍경의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한 시점. 다 쓰러져가는 성에 발을 들이자마자 등장한 놈이다.
[퀘스트 발생!]
[명칭 : 폐성 탈출]
[난이도 : 전설]
[상세 : 정식 용사가 되기 위한 미텔란트의 제131시험. 난이도의 비정상 폭증으로 폐지되었으나 알 수호자를 위해 특별히 개편되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도 좋다. 저주받은 폐성 할센베르크를 탈출하라.]
[보상 : 정식 용사 칭호. 1급 랜덤 상자 ― 사신의 선물. 전 스탯 +20. 히어로 센스 +5]
퀘스트. 내가 익히 아는 바로 그 퀘스트 패널이 등장한 것이다.
그래 뭐, 퀘스트 좋지. 게임의 빠질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하고. 내용도 참 직관적이다. 내 목적도 분명히 해줘서 오히려 좋다.
게다가 클리어하면 보상도 준다. 통상적으로 올릴 수 없는 ‘히어로 센스’를 보상으로 주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전에 설명란에서 봤던 ‘신의 주사위를 건드리는 경험’이란 이런 식으로 시스템화된 퀘스트를 의미하는 듯하다.
뭐 그래. 다 좋다 이거야. 근데 한 가지. 딱 한 가지 거슬리는 게 있는데…….
“…난이도가 전설?”
퀘스트를 포함하여, 이 육성 시스템에 등록된 아이템이나 스킬에는 모두 등급이 있다. 이 등급도 RPG 좀 땡겨봤다 싶은 사람들에겐 굉장히 익숙한 티어 형식이다.
내가 미미르의 눈으로 방금 전에 알아본바, 다음과 같다.
[상세 정보 ― 등급(graduation)]
[가이알란트의 세계수 시스템에 등록된 모든 아이템, 스킬, 퀘스트를 위계에 따라 구분하는 항목. 총 다섯 개 등급이 존재. 하위부터 상위로 각 일반, 고급, 희귀, 유물, 전설로 구분한다.]
[일반 : 가장 일반적 난이도/희소성/성능.]
[고급 : 약간 상향된 난이도/희소성/성능.]
[희귀 : 적응하기 힘든 난이도/발견 확률이 매우 희박한 희소성/명확한 고성능.]
[유물 : 만분의 일만이 돌파할 난이도/만에 하나에게만 허락되는 희소성/전술급 성능.]
[전설 : 세계 유일급의 난이도/희소성/성능.]
다시 퀘스트 패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난이도는 전설로 표기되어 있었다.
나는 가만히 쳐다보다 중얼거렸다.
“세계 유일급의, 난이도…….”
그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가히 전설이라 불릴 법도 하다.
이 세상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얼라들을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하수도에 처넣어 놓고, 그걸로 모자라서 괴물 딱지 살인마 메이드를 풀어놨으니.
나만 해도 수십 번을 죽었다. 나야 슈퍼마리오처럼 뒈져도 살아나니 여기까지 왔지.
목숨이 하나면 몇 명이 몰려오든 싸늘한 시체가 돼서, 하수도 끝자락의 시체 동산에 지분 하나씩 차지하게 될 거다.
‘물론… 이 시험을 다른 용사 놈들이 받을 리가 없겠지. 아마도.’
나는 인상을 쓴 채 혀를 찼다. 머릿속에 똥털의 얼굴을 그리며 쌍욕을 바가지로 날렸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퀘스트 패널의 상세 항목 문구가 그 증거를 보여주고 있으니까.
―난이도의 비정상 폭증으로 폐지되었으나 알 수호자를 위해 특별히 개편되었다.
이걸 쉬운 말로 길게 풀어보겠다.
원래 다른 후보생들에게 주어지는 시험은 이렇게 토악질 나올 난이도가 아니다. 그래서 밸런스 문제로 폐지했던 시험인데, 나를 위해 부활시켰다.
한마디로 내가 알 수호자이기 때문에 여기서 개고생을 하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
“이런 씨파아알! 이, 이 개 같은 달걀이 대체 뭐라고……!”
억울하고 배알 꼴리고, 더럽고 치사해서 못 해먹겠다.
결국 나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침대에서 떼굴떼굴 굴렀다. 파우치에서 꺼낸 문제의 알을 침대에 팽개치고 갖은 욕을 퍼부었다.
아까부터 30분 동안 그 짓만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좀 추하긴 하다.
슬슬 자괴감이 들어 그만하자 싶어졌을 때. 문득 밖에서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울렸다.
“후배님 계세요? 식사 거리를 좀 가져왔어요.”
익숙한 목소리와 건조한 말투. 그리고 특유의 호칭. 레이라였다.
“어, 음, 드, 들어와.”
나는 황급히 하던 짓을 멈추고 정상인 코스프레를 시작했다.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자니 레이라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두 손에는 쟁반이 들려있었고, 쟁반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와 작은 밀빵이 있었다.
레이라가 침대 옆 탁자에 쟁반을 놓았다. 그리고 내 옆으로 성큼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드세요.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네요.”
“아, 그래. 고마워.”
나는 수프에 빵을 찍어 한입 베어 물었다.
퍽퍽하고 밍밍하다. 수프와 빵 양쪽 다. 시험의 장막에서 배식받아 먹었던 것에 비하면 확실히 맛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막입이라 주는 건 뭐든 감사히 잘 처먹는다. 나는 입에 있던 걸 모두 삼키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먹을 만하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레이라가 내 말에 슬쩍 웃더니 다리를 흔들거렸다. 구두 끝을 비비며 발장난을 친다. 꽤 인간적인 일면이다.
도저히 머릿속 이미지와 매치가 안 된다. 난 저 구두 끝만 보고 있어도 체할 거 같은데, ×발.
“잠자리는 좀 어떠세요? 그나마 가장 호화롭고 깨끗한 방으로 골라봤어요.”
레이라가 문득 내게 물어 왔다. 나는 주변을 한번 쓰윽 훑었다.
심플한 구조에 멀끔한 가구들. 먼지가 좀 있긴 하지만 관리는 나름대로 잘된 편이었다. 전 주인은 기사였는지 방 한구석에 멋들어진 휘장과 갑옷이 떡하니 놓여있다.
“뭐 확실히… 나쁘진 않네.”
“그렇죠? 다행이네요. 방 더 둘러볼 필요는 없겠어요.”
레이라는 한시름 덜었다는 양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피식 웃고는 음식 넘기는 데 집중했다.
사실 난 비바람만 막아주면 자는 건 어디든 상관없다. 텐트에서 재워도 그러려니 할 자신이 있다. 어차피 전생에선 시체 썩는 내 풍기는 하수도에서 몇 날 며칠을 보냈는걸 뭐.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당장의 보금자리가 아니다. 얻어낸 보금자리를 어떻게 수호하는가. 그게 중요하지.
‘…지금 반응을 보면… 아직 변경백이라는 작자한테 나를 알리진 않은 거 같은데.’
내가 가장 불안했던 건 레이라가 도착하자마자 나의 존재를 할센베르크 변경백한테 보고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아마 내 거짓말이 곧장 뽀록났을 거고. 여기는 보금자리가 아니라 묫자리가 됐겠지. 나는 그 역겨운 하수도에서 22번째 신나는 모험을 다시 시작해야 될 테고.
제발. 이제 그런 시나리오는 상상도 하기 싫다. 나는 새삼 옆에서 발장난을 치는 레이라를 노려보며 각오를 굳혔다.
‘어떻게 해서든.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얘보다 먼저 변경백을 만나야 해!’
그리고 그놈과 협상을 하든 싹싹 빌든, 입을 맞춰야 한다. 나는 그 할센베르크 변경백에게 고용되어 여기에 눌러살게 된 용병 박정용의 신분이 되어야 한다.
‘좋아, 일단 질러보자.’
결심을 마쳤으면 고민할 시간은 없다. 나는 곧장 행동에 들어가기로 했다.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레이라를 불렀다.
“저기, 레이라.”
“음? 왜요, 후배님.”
“지금 당장 성주님을 좀 만나봐야 될 거 같은데… 이 시간엔 어디 계시지?”
“성주님? 주인님을요?”
레이라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빤히 나를 쳐다봤다. 제발 그런 표정으로 나 좀 쳐다보지 마라. 내가 뭐 잘못 말했나 싶어서 심장이 벌렁거린단 말이다.
한동안 그녀는 눈싸움하는 기세로 나를 쳐다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순순히 대답했다.
“주인님이라면 지금쯤 본채의 회랑에서 백작 부인과 함께 계실 거예요.”
“본채의 회랑이라면…….”
“옛날엔 영주 알현장으로 쓰였던 곳이죠. 지금은 찾아오는 이가 없으니… 그냥 무식하게 길고 큰 방 중에 하나지만요.”
외국 중세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보이는 그걸 말하는 듯하다.
엄청 넓은 복도 끝자락에 높으신 분이 앉아있고, 그 앞으론 열주가 주르륵 늘어져 있고. 가운데 넓게 펼쳐진 양탄자 위로 사람들이 꿇어앉아 인사하는… 뭐, 내 이미지론 그렇다.
나는 레이라에게 끌려오면서 봤던 성의 풍광들을 새삼 떠올려 봤다.
“음… 그런 곳이… 있었나?”
“있어요. 아무리 전투용 요새라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명색이 백작의 성인걸요.”
“여기로 올 때 지나치지 않았나 보지? 기억이 없는데.”
“아뇨,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왔는데요.”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널찍한 알현실 같은 건 본 적이 없는 듯하다. 나는 순간 목 뒤에 싸한 기분이 들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레이라를 빤히 주시했다.
‘설마 이 여자……!’
이 질문도 날 떠보기 위한 것이었나? 아직 나에 대한 의심은 완전히 풀린 게 아니었나?
목에 칼이 들어온 느낌이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한층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여기 오면서 지나쳤던 곳 중에 큰 방이라 하면… 쓰레기장이랑… 시체 보관소랑… 또…….”
넓은 공간이 있긴 했다. 하나는 생활 쓰레기가 아무렇게나 쌓인 널찍한 방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불탄 인간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던 장방형 공간이었다.
어느 쪽도 알현실이라기엔 너무 민망한 곳이다. 민망이 뭐냐, 무서운 곳이다.
내가 손가락을 꼽으며 되짚어가자니, 가만히 듣고 있던 레이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체 보관소요? 그런 데는 이 성에 없는데요.”
“…엥?”
“아하. 그런 거였군요. 하긴 오해할 법도 하네요.”
레이라는 평행선을 타는 우리 대화의 문제점을 찾아냈는지, 탄성을 흘렸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조금 슬픈 듯이 웃으며 방문을 가리켰다.
“그 시체 보관소로 가보세요. 거기에 주인님이 계실 거예요.”
나도 그제야 깨달았다. 잘못된 건… 착각을 하고 있는 건 레이라가 아니라 내 쪽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알현실이 곧 내가 말하는 시체 보관소였던 것이다.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홀린 듯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기 직전, 간신히 입이 열렸다.
“…알현실에 시체를 쌓은 건… 너야?”
나는 레이라를 쳐다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쳐다보기가 무서웠다. 나를 스물한 번이나 척살했던 그때의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
하지만 등 뒤로 들려오는 레이라의 먹먹한 목소리는 더 끔찍한 현실을 내게 들이밀었다.
“아뇨, 주인님 본인이세요.”
그렇단다.
알현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층 무거워졌다.
“혼자 가실 수 있으시겠어요? 뭐하면 같이 가드릴 텐데요.”
“…아니, 됐어. 적응해야지.”
“그러시다면야.”
레이라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어 왔다. 나는 손사래를 치고는, 황급히 문을 닫아버렸다.
닫히기 직전,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해요, 후배님.”
* * *
내가 말했던 시체 보관소… 알현실은 성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머무는 기사단용 숙소는 성의 왼쪽 첨탑과 붙어있었기에, 나는 방을 나와 곧장 오른쪽 복도를 따라 걸었다.
가면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깨진 유리창 틈새로 칼바람이 몰아닥쳤다. 나는 양팔을 비볐다.
“으, ×벌. 안 그래도 추운데 무섭기까지 하네.”
돌바닥은 다 낡아서 갈라져 버스럭거렸고, 그 위로 깔린 융단은 넝마 쪼가리가 되어있다. 본래 고풍스러웠을 벽의 그림들은 피와 오물로 얼룩져 호러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샹들리에가 떨어져 복도 구석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다.
“여기군.”
귀신의 집 뺨치는 복도의 끝자락에 도달하자, 문제의 알현실이 등장했다. 널찍한 장방형 공간에 시체가 산발적으로 쌓여있다.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아까는 레이라가 들고 있던 마법 랜턴 덕분에 훨씬 밝았지만. 지금 이곳의 조명이라곤 벽에 간간이 달려있는 촛불뿐이다. 불빛에 일렁거리며 비친 시체의 무리들은 당장이라도 움직일 것만 같았다.
“으… 오오오…….”
아니, 씨팔! 진짜 움직이잖아, 저거!!
“히에에에엑! 뭐, 뭐야! 뭐냐고!!”
나는 기겁하며 시체 무리에서 떨어졌다. 시체들을 자세히 보니 손끝이나 발끝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불타 바스러진 입에서는 나무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현기증이 일어난 나머지 이마를 짚고 비틀거리는 순간.
“누구인가.”
그런 장중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나도 모르게 퍼뜩 고개를 돌렸다.
시체 더미들의 끝자락. 퇴색한 화려함을 간직한 의자 위에 누군가 있다. 반백의 머리칼에 강직한 주름이 박힌 얼굴. 끝을 모르게 심원한 검은 눈동자. 시커먼 갑주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남자가 옥좌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남자가…….’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 성의 주인. 할센베르크 변경백이다.
남자가 발하는 특유의 기운이 있었기에 알 수 있다. 내가 무림 고수도 아니고 뭔 놈의 기운을 알아차리냐 그러면 할 말은 없는데. 적어도 저 남자에게서는 일반인인 나조차도 느껴지는 기백이 확실히 존재했다.
나는 곧장 고개를 꾸벅, 숙여서 최대한 예를 표했다.
“어, 안녕하십니까, 변경백님. 처음… 뵙겠습니다.”
“…그래, 다 쓰러져가는 누추한 성에 어인 일인가, 나그네.”
남자… 할센베르크는 숨 막히는 분위기와는 달리 느긋하게 풀어진 말투로 대꾸했다.
나와 할센베르크의 첫 대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나는 한참을 굳은 채 할센베르크와 눈싸움을 했다. 그 역시 묵묵히 나를 쳐다볼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내가 굳어있는 건 비단 움직이는 시체나 할센베르크의 존재가 갑작스러워서만은 아니다.
할센베르크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여인의 시신이 내 이목을 사로잡은 것이 컸다.
“아… 우… 그아.”
특유의 나무를 긁는 듯한 목소리를 내며 허연 눈을 뒤룩거리고, 연신 몸을 움찔거린다. 살아생전엔 한 미모 했을 법한 이목구비는 다 썩어 문드러져서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고목처럼 메마른 손발이 드레스 끝자락으로 빠져나와 꿈틀댄다. 목에 걸린 새빨간 루비 펜던트 위로는 하얀 구더기가 드글드글하고 있었다.
‘워우.’
그리고 나는 뒤늦게 눈치챘다. 할센베르크가 그녀의 고목 같은 손가락을 소중히 쥐고 있는 것을. 나는 두 사람의 관계를 어렴풋이 직감했다.
내 시선을 눈치챈 건지, 할센베르크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멋쩍은 듯 말한다.
“내 반려일세. 이름은 이자벨. 이자벨라 폰 할센베르크.”
“아, 예. 그… 미, 미모가 출중…하시군요.”
“인사치레는 됐네. 죽어서 썩어 문드러진 언데드가 미모는 무슨.”
“…….”
설마 본인 입으로 ‘썩어 문드러진 언데드’라고 일축해 버릴 줄이야. 예상을 빗나간 전개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뭐야, 이 사람. 죽은 마누라 못 잊어서 미쳐버린 게 아니었다. 괜히 선입견 때문에 생사람 잡을 뻔했군.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이자니, 할센베르크가 이자벨의 손을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그럭. 육중한 갑옷 소리와 함께 그가 내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래, 어쨌든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 아닌가. 할센베르크는 언제나 나그네를 환영한다네.”
“아, 예. 그…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어떤가. 우리 성에 대한 감상은. 자네의 솔직한 평가가 듣고 싶군.”
“…….”
솔직히 말하면 뭐 이런 미친 동네가 다 있나 싶습니다만. 솔직하게 말하라는 사람치고 진짜 솔직하게 말하면 화 안 내는 놈을 내가 본 적이 없다.
여기선 실리와 유머를 함께 챙기는 전략으로 가볼까. 나는 쌓여있는 시체 더미들을 가리키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저것들은 데커레이션…입니까? 하하, 좋군요. 으스스한 분위기 물씬 나고.”
“영지민들일세.”
“…….”
“정확히는 영지민들이었던, 추악한 언데드들이지, 하핫.”
이런 ×발, 지뢰 밟았다.
껄껄 웃으며 말하는 할센베르크와 달리 나는 안색이 파리하게 굳었다. 분위기 좀 풀어보겠다고 개드립 쳤다가 역효과만 낸 셈이니까.
하지만 할센베르크는 연신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다시금 자기 의자로 돌아갔다. 털썩 걸터앉은 그가 다시금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
“아, 저는 지나가던… 일반인? 아무튼 이름은 박정용이라고 합니다.”
“나는 이 성의 성주인 변경백 요한 폰 할센베르크일세. 이젠 명패만 남은 껍데기 귀족이니 편할 대로 부르게. 반말을 해도 괜찮네.”
“아뇨, 반말은 무슨…….”
할센베르크가 팔걸이에 턱을 괸 채 말했다. 정말 어떻게 부르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눈치다. 엄격해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성격이 시큼털털했다. 하긴 성의 꼬락서니를 보면 명예나 체면을 신경 쓰는 것도 웃기긴 하다.
어쨌든 저런 성격이라면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지. 나는 곧장 내 용건을 들이밀었다.
“변경백님, 초면에 죄송한데 부탁 좀 해도 되겠습니까?”
“부탁?”
할센베르크는 눈썹을 튕겼다. 내가 생각해도 뻔뻔한 발언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는 처음엔 좀 멍한 표정이다가, 이내 히죽 웃었다. 아무래도 또라이를 좀 좋아하는 성격인 듯했다. 이런 데 오래 있으니까 정신이 저렇게 탁해지는 거다, 쯧.
“당돌한 나그네로군그래. 부탁이란 무엇인가?”
“저 좀 여기서 일하게 해주시면 안 됩니까?”
“…호오, 하하하. 퍽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나그네.”
할센베르크는 그렇게 한동안 제 혼자 껄껄댔다. 나는 나름대로 진지한데. 아마 저 양반 입장에선 웃긴 게 사실이리라. 갑자기 다 망해가는 성에 찾아와서 하는 말이 여기 취직시켜 달라니. 그럴 법도 하지.
이윽고 웃음을 멈춘 할센베르크의 눈빛에는 나에 대한 이채가 어려있었다.
“그래, 무슨 일을 하려고 온 겐가?”
“하수도의 몬스터 처리를 하고 싶습니다.”
“흐음, 그거라면 나의 충직한 시녀인 레이라 양을 찾아가는 것이…….”
“이미 만나고 왔습니다.”
내가 고개를 저으며 일축하자 할센베르크가 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한 건지, 가볍게 책망하는 눈빛을 뿌렸다.
“그럴 리가. 그런데 자네가 어떻게 살아있을 수가 있나.”
“…예?”
“레이라를 만났으면 살아있을 수가 없지, 그렇지 않나? 자네가 진정 만나봤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터.”
나는 그 말에 눈을 부릅뜨고 할센베르크를 쳐다봤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렇군. 이 양반이 자기 성 밑 하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모를 리가 없어. 즉 레이라의 용사 학살극도 전부 알고 있을 거란 소리다.
대체 무슨 관계일까. 레이라의 용사 학살엔 어떤 내막이 숨어있는 것인가. 그런 생각들로 뒤죽박죽인 머리를 한 번에 정리해 주는 할센베르크의 한마디가 들려온다.
“자네는 이계에서 소환된 용사가 아닌가.”
“……!!”
들켜버렸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뽀록나 버렸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아니, 애초에 들켜있었다고 해야 하나? 어떤 전조도 없이 내 정체가 까발려지자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사실상 정답이라고 시인하는 꼴이었다. 깨달았을 땐 이미 할센베르크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 미텔란트는 일곱 명의 마존(魔尊)이 다스리는 마법의 국가일세. 나 역시 마법사지. 자네의 생체 마력은 이 세계 인간들과 근본적으로 달라.”
“…그, 그렇군요.”
“레이라가 그 정도 경지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기게, 흐하하.”
제길, 그렇다 한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긴 일러. 어차피 저 양반이 내게 살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눈치도 채지 못한 시점에서 죽었어야 했다.
지금 이렇게 대화가 통하고 있는 것 자체가 협상 가능성이 아직 있다는 소리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예, 안 그래도 그 레이라 문제 때문에 좀 도와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발, 철판 깔고 부탁해 보자. 이젠 이거 말고 뾰족한 방법도 없다.
“흐음, 좋네. 말해보게.”
눈가를 좁힌 할센베르크가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의중을 파악하려는 것 같다. 나는 최대한 간절한 표정으로 할센베르크를 보며 말했다.
“사실 처음에 살아남으려고 여기 고용됐다고 이빨을 좀 깠습니다.”
“오호.”
“그래서 말을 좀 맞춰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제가 오늘부터 변경백님 특명으로 고용된 용병이라는 설정으로요. 안 그러면 저 진짜 죽을지도 몰라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내 말을 끝까지 경청한 변경백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뭐지. 화났나. 안절부절못하며 그랜절이라도 박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하하하하! 재밌군. 자네 정말 재밌는 친구야!”
변경백은 별안간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 앉아있던 언데드 부인이 그 소리에 놀라 몸을 움찔거린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재밌고 웃기냐. 당사자는 지금 심각하다 이 말이야. 자그마치 21번 죽었다 살아났다고. 당신이 그 하인 관리 똑바로 안 해서!
부글부글 끓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센베르크는 곧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네는 내가 고용한 걸로 해두지.”
“오오, 감사합니다, 변경백님!”
“대신.”
나는 어깨를 움찔했다.
대신. 대신이 나왔다. 뭔가 조건을 걸겠다는 소리겠지.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할센베르크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그는 여전히 흥미진진한 얼굴로 말했다.
“하는 일은 좀 바꿔줘야겠네.”
“…예? 그게 무슨.”
“용사씩이나 돼서 하수도 정리나 하면 체면이 안 서지.”
“그… 말씀은.”
오랜만에 뇌 내 호구 센서가 미친 듯이 발광했다.
이거 뭔가 좋지 않아. 지금 변경백 표정이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작업할 병사 끌고 가려는 행보관의 표정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자네가 나와 함께 북방의 마족들을 막아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청천벽력.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연신 탄성을 흘리다가, 나를 직시하는 할센베르크의 표정을 보고는 곧 깨달았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사자성어는 누가 만든 걸까. 뒤이어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패널이 떠올랐다.
[퀘스트 분기점 도달!]
[당신의 선택에 따라 퀘스트 ― ‘폐성 탈출’의 향방이 달라질 것이다.]
[선택 1. 할센베르크 변경백을 도와 북방의 마족을 척결한다.]
[선택 2. 계속 레이라를 도와 하수도의 고블린들을 척결한다.]
선택의 순간이 닥쳤다.
“어떡할 텐가. 자네가 선택하게.”
변경백이 넌지시 재촉했다. 나는 그제야 퍼뜩 고민하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이죽거리는 할센베르크를 한번 쳐다보고, 레이라를 한번 떠올렸다. 이 선택은 중요하다. 돌이킬 수 없다.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 손익을 계산했다.
결정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 * *
나는 홀린 듯이 방으로 돌아왔다.
끼이익, 덜컹. 문소리에 침대맡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레이라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풀린 눈이 나에게 향했다.
“아… 오셨군요. 어떻게, 이야기는 잘 마치셨나요.”
“뭐, 일단은.”
“다행이네요… 후아암.”
레이라가 눈을 비비며 늘어지는 하품을 했다.
“그럼, 저는 졸려서 이만. 내일 봐요, 후배님.”
기지개를 켜며 레이라가 몸을 일으켰다. 비척비척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에게 나는 지나가듯 내뱉었다.
“나 내일부터 변경백님 따라서 고대 마족 잡으러 간다.”
“…예?”
방을 나가려던 레이라가 우뚝 멈췄다. 그녀가 나를 쳐다보는 눈이 전에 없이 부풀어있었다.
나는 내가 내렸던 결정을 레이라에게 담담히 통보했다.
“오늘 사냥하면서 짬 좀 쌓였을 테니 바로 마족 잡으러 가자던데. 그래서 알겠다 그랬어.”
“아니, 무슨… 마족 사냥을 주인님이 그렇게 쉽게 결정할 리가…….”
레이라는 혼란스러운 듯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한참을 횡설수설하다 이내 핫, 하고 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은 더없이 싸늘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다.
“후배님, 제게 뭔가 숨기는 게 있지 않나요?”
“…아니, 아무것도 없는데.”
레이라의 기세가 워낙 서슬 퍼래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일단 변명을 하긴 했지만, 레이라의 목소리에는 이미 어떤 확신이 깃들어있었다.
“제가 이 성에서 얼마나 일했다고 생각하세요. 주인님의 그 결정은 이상해요. 당신이 뭔가 숨기고 있지 않은 이상, 주인님이 마족 사냥에 당신을 데려갈 리가 없어요.”
날카롭군.
하지만 이 정도 추궁은 나도 예상했다. 나는 곧장 어깨를 튕기며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본인이 그러더라고. 자기도 이제 늙었고, 이 땅의 언데드 저주를 중화하는 것만 해도 버겁다고. 마침 후임 사냥꾼이 필요했다고 그랬어.”
“…그건.”
“다 들었어. 네가 말했던 100인의 결사대도 이미 전멸한 지 오래라며? 사실상 지금까지 살아서 이곳을 지키고 있는 건 할센베르크 변경백 혼자뿐이라면서. 어쩐지 사람이 너무 없다 싶었어.”
“…….”
“뭐, 말하자면 후임이 필요했던 건 너뿐만이 아니었다 이거지.”
참고로 내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다.
변경백은 실제로 내게 저런 식으로 말했다. 내가 제안을 수락하자마자 그는 이 성에 얽힌 많은 사실들을 이야기해 줬다.
“나도 왕년엔 칠마존(七魔尊)에 버금가는 마법사라는 소리를 들었네만… 이제는 늙었네. 홀로 이 많은 저주를 어깨에 이고 다니는 것도 버겁다 이 말일세.”
그중 하나로. 변경백이 밤마다 시체가 즐비한 알현실에 가는 이유는 단순히 청승을 떨기 위해서가 아니다. 시체를 모아놓은 것도 호러 분위기 연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뛰어난 기사이자 마법사이기도 한 변경백은 이 땅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언데드를 억누르고 있다. 낮에는 괜찮지만 밤이 되면 저주가 강해져서 시체가 거리를 배회한다. 그래서 시신을 한데 모으고 자신의 마법으로 제압하는 것이라고 했다.
썩어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부인을 마주 보며, 그 손을 붙들고, 저주를 중화하고 있었다.
“…칫.”
레이라는 분한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히 뭔가 더 있다고 확신하는 눈빛. 하지만 내 변명이 일리가 있다 보니 반박을 못 하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이다.
나는 변경백의 제안을 수락했을 때, 그가 탄식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레이라에겐 자네 정체를 비밀로 하게. 그녀는 자네의 정체를 알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살의를 품을 걸세.”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너무 미워하진 말아 주게. 그 아이 입장에선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야. 용사들을 증오하지 않고는 버티지 못하는 걸세.”
대체 왜 그렇게까지 용사들을 싫어하는 겁니까.
내가 그렇게 묻자, 변경백은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침중한 목소리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윈. 그 이름을 대 보시게. 내킨다면 내막을 이야기해 줄지도 모르지.”
그윈이라고 했지. 그러고 보면 레이라의 이명(異名) 중에 ‘그윈의 연인’이라는 게 있었지, 아마.
나는 표독스럽게 노려보는 레이라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변경백님이 그러시던데. 네가 외부인에게 경계심이 강한 건 ‘그윈’이라는 사람 때문이라고.”
“……!”
레이라가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더듬거리는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그, 그걸… 말했나요? 주인님께서?”
“이름 외에 자세히는 몰라. 듣고 싶으면 너한테 들으라던데.”
“…….”
“뭐,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대신 가겠다는 거 방해나 안 하면 돼.”
나는 그렇게 통보해 버리고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레이라를 주시했다.
주사위는 던졌다.
그녀가 자진해서 내막을 밝혀준다면 더 안전한 계획을 짜서 탈출할 때 용이하겠지만, 이대로 할센베르크를 돕다가 기회 봐서 빠져나가도 상관이 없다.
일단 레이라는 하녀의 신분이기에 변경백에게 대들지는 않을 테니까. 내가 그의 사냥 동료로 나선 이상 레이라는 이제 나를 해코지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변경백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거다.
난 더 이상 저 여자한테 모가지 썰리고 싶지 않아.
“…….”
“…….”
얼마나 대치하고 있었을까.
한참을 가만히 땅만 쳐다보고 있던 레이라가 결국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며 내 쪽을 흘깃 돌아봤다.
“…따라오세요.”
나는 잠시 멀뚱히 쳐다보다가, 레이라의 채근하는 눈빛이 쏟아지자 그제야 퍼뜩 일어섰다. 그리고 레이라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보여드리죠. 이 잔인한 세상이 제가 사랑하던 사람에게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치직. 그녀는 손가락을 튕겨 핸드 랜턴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점점 어두워지는 성의 외곽으로 향했다.
“이쪽입니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등장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로 이어지는 숨 막히는 어둠에 나는 잠시 발을 멈췄다.
랜턴 빛이 어둠 속에서 흔들거리며 나를 채근했다. 가만히 서있는 나를 레이라가 돌아본다.
“내려오세요. 이제 와서 겁이라도 먹었나요?”
일부러 자존심을 긁는 양 히죽 웃는 레이라. 나는 순간 발끈해서 퍼뜩 그녀의 뒤로 따라붙었다.
우리는 점점 아래로,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