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226화 (226/230)

제226화. 하늘에 올라 (2)

기계장치의 신이 들어오면서 신화의 몸이 변형을 시작했다.

몸속이 모조리 뒤틀리는 느낌과 함께 무지막지한 통증이 밀려왔다.

"끄으으으윽!"

통증을 이겨내려고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변형 중인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비그리드를 향해 열린 진리의 문이 상원의 온몸을 붙잡았다.

여인의 것처럼 생긴 따스한 손길이 통증을 그나마 줄여 주었다.

상원을 바라보는 외눈 현자가 긴 생의 끝에 다다른 고래 같은 표정을 지었다.

- 그대를 기다리는 곳으로 가시게.

손가락 한 마디도 꼼짝하지 못하는 상태였기에, 눈을 깜빡이는 게 최선의 인사였다.

'고맙습니다.'

그 뜻을 제대로 읽었는지 외눈 현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리의 문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비그리드 특유의 짙은 초목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살인적인 므깃도의 공기와는 다른, 상쾌하지만 조금은 눅눅한 구석이 있는 공기가 상원의 뺨을 스쳤다.

상원은 외눈 현자가 남긴 말을 곱씹었다.

'태어나고 다시 태어날지니 죽음이란 거짓이라.'

외눈 현자는 상원이 그렇게 굴러가는 세상의 수레바퀴의 방향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물론 그걸 바꿀 자신은 없었다.

다만 이제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

"잘 가시게."

처음 들어본 외눈 현자의 육성은 아주 오래된 나무 같았다.

그 말을 끝으로, 마침내 새하늘의 마지막 절대자가 금빛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이어서 문에서 나온 손이 상원의 눈을 가리자 새까만 어둠 사이로 하얀 너울이 조금씩 흐르는 공간이 펼쳐졌다.

차원 므깃도와 차원 비그리드의 경계면이었다.

그때 누군가 상원에게 말을 걸었다.

- 자네로군.

이제야 몸이 말을 듣기 시작했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거대한 괴수와 형체가 검은 공간 속을 유영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익숙했다.

샤믹이었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대장."

여전히 뱀 인간의 모습을 한 그녀의 비늘은 밝은 비취색을 띠고 있었고, 머리에는 솟은 커다란 사슴뿔 한 쌍과 백발이 된 머리가 용을 연상케 했다.

게다가 덩치도 화산 내부에 나타났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커져서 그야말로 용이 따로 없었다.

끝도 없이 거대한 몸을 부드럽게 움직이며 공간을 유영하는 그녀의 머리 위에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자가 있었다.

삼십 센티미터를 갓 넘길 것 같은 조그만 뱀, 다섯 마신 중 하나인 오랜 땅의 이무기였다.

차원 비그리드가 다섯 마신을 모두 받을 수 없어 사출되고 난 뒤, 그 주변을 헤엄치고 있던 것이다.

상원은 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랜 땅의 이무기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을 들어 보이는 부처님처럼 그를 향해 꼬리를 살짝 들어 보였다.

-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믿으며 스스로 깨달으니, 그 안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

그의 눈이 비취색 불꽃으로 가득 찼다.

- 그 안에 이 힘을 받게.

오랜 땅의 이무기가 초록 액체를 살짝 뱉어내자, 액체가 무중력 공간을 떠다니는 물처럼 방울지더니 상원에게 둥실둥실 떠왔다.

물방울에서는 오래된 절이 풍기는 짙은 향취가 났다.

물방울이 이마에 닿자 이루 말할 수 없이 쾌청한 감각이 전신을 관통했다.

그와 함께 온 피부 위로 비늘의 형태를 띤 초록 기운이 살짝 올라왔다 사라졌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강신 회로에 '오랜 땅의 이무기'를 입력하였습니다.]

처음에 이 몸에 태초의 대족장의 힘을 받았을 땐 그것만으로도 몸이 붕괴했었는데, 지금은 두 번째 마신의 힘을 받고도 회로가 넉넉했다.

- 우연과 우연, 그것들이 겹치면 결국은 필연이 되지. 자네의 필연으로 나아가게.

므깃도에서 비그리드로 향하는 통로를 지나는 짧은 순간, 오랜 땅의 이무기를 마주 본 그 찰나가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공간의 저편, 비그리드의 공기가 점점 짙어졌다.

샤믹이 주먹을 불끈 쥐며 덧붙였다.

"그 문어 자식, 죽여버려요 대장."

상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그리드로 향하는 출구가 상원을 삼켰다.

* * *

풍경이 바뀌면서 파공음이 귀를 스쳤다.

상원은 비그리드의 밀림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비그리드 쪽에 열린 출구는 높이가 상당해서, 아무리 신화의 몸이라도 그대로 떨어지면 멀쩡하지 못하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 높이에서는 비그리드의 상황이 한눈에 보였다.

하늘은 완전히 무너져 그 너머로 공허한 우주가 보였고, 그곳으로부터 시꺼먼 살덩이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땅에 떨어진 살덩이들은 끔찍하기 그지없는 사냥개의 몸을 하고서는 혐오스런 촉수를 꿈틀거렸다.

지옥 불과 황충과 도깨비불과 벼락과 마그마에 집어 삼켜지면서도 놈들은 끊임없이 끊임없이 떨어졌다.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니 죽음이 거짓이란 말은 저놈들에게 더 어울리는 게 아닐까?'

저 하늘의 사마에트는 지친 기색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반면 마신의 힘을 부리는 이들이 눈에 띄게 지쳐가는 게 보였다.

진아가 펼친 분홍빛 날개는 점점 옅어지고 있었고, 저 멀리 화산 기슭의 창훈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바싹 말라 있었다.

연옥의 폭군이 깃든 용기사는 조금씩 부서져 가고 있었고 뮈노 메드냅의 코와 입으로 시뻘건 선지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 찰나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어딘가에 털썩 떨어졌다.

"아윽."

등이 부서질 것 같았다.

떨어진 곳이 부드러워서 다행이었다.

손을 뻗어 그곳을 만져보니 끈적거리는 피와 녹아내린 살점이 손에 묻었다.

"씁."

충격을 참고서 몸을 일으키는데 무언가가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뒤로 몸을 돌리니, 수 없는 해골로 된 갑주를 뒤집어쓴 거대한 기사가 보였다.

투구 안의 새까만 공허 안에는 두 눈 대신 시퍼런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오디나스와 엘가, 그리고 수천 구의 시체를 통해 이 땅에 현신한 마신 '연옥의 폭군'이었다.

상원이 떨어진 곳은 폭군이 탄 좀비 드래곤의 등이었던 것이다.

귀신 불로 된 두 눈이 상원을 내려다보며 불규칙적으로 일렁거렸다.

이어서 연옥의 폭군이 검을 쥐지 않은 손에 시퍼런 불꽃을 모아 그대로 상원에게 불덩이를 씌웠다.

차가운 불꽃이 상원을 감싸자 수천 망자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황야를 지나는 바람처럼 귓전을 스쳤다.

시야가 시퍼렇게 물들면서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강신 회로에 '연옥의 폭군'을 입력합니다.]

그와 동시에 연옥의 폭군과는 다른, 강렬하지만 익숙한 존재감이 상원을 덮쳤다.

수천 마리 벌레떼가 붕붕거리는 소리를 내며 좀비드래곤의 널따란 등 위로 날아왔다.

잠시 후 벌레떼가 물러가자 그 안에서 혜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윤이 나는 외골격에 싸여 단단한 전 같이 된 그녀의 몸속에 깃든 '지하의 수호자'가 말했다.

"결국, 이렇게까지 됐구나."

그녀가 날카로운 손톱과 가시 같은 털이 돋은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을 잡자 그녀의 몸 곳곳에서 올라온 좁쌀만 한 누런 벌레들이 상원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벌레떼가 몸 위로 기어오는데도 혐오스럽다거나 기분 나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고, 반대로 부드러운 손길이 몸을 매만지는 것 같았다.

지하의 수호자가 말했다.

"가라, 불신자."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강신 회로에 '지하의 수호자'를 입력합니다.]

이어서 진아가 좀비드래곤의 등 위에 내려앉았다.

진아가 상원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뭐야. 사람을 무슨 폭탄 취급하고 말이에요, 그래도 되는 거예요?"

우트가르드에서 진아가 든 캡슐을 에인하야르 떼 위로 던졌던 일을 말하는 것이겠지.

상원은 살짝 웃으며 두 손을 모았다.

"미안합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새까만 목검에 눈이 갔다.

그것이 바로 지상에 강림했던 세상 끝의 불꽃이 타고 남은 재였다.

타락신이 된 낙원의 수문장이 거기 깃들어 있었다.

''낙원의 수문장', 그 자존심 높은 성령이 마신의 재에 깃들 줄이야.'

그나마 낙원의 수문장도 불칼을 다루는 자라는 게 다행이었다.

그 덕에 저 목검에 깃드는 게 쉬웠을 테니.

"괜찮아요 상원 씨. 다 뜻이 있겠죠. 자, 이제 이걸 줄 차례인 거죠?"

진아가 목검의 끝을 살짝 쥐어 바스러뜨리고는 부서진 부분을 상원에게 내밀었다.

그 숯덩이를 받아 들어보니 아직 미약한 열기가 남아 있었다.

"부탁해요."

싱긋 웃으며 주먹을 꽉 쥐어 보인 진아가 다시 지상으로 날아갔다.

땅을 가득 채운 사냥개들을 상대로 미약한 힘이나마 분전하는 타이탄들을 앞으로 지옥 불의 파도가 솟아올랐다.

손에 들린 숯덩이가 잿가루가 되어 사라지면서 매캐한 연기 같은 기운이 온몸에 흐르기 시작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강신 회로에 '세상 끝의 불꽃'을 입력합니다.]

마침내 신화의 몸속에 다섯 마신의 힘을 모두 받아 넣었다.

'좋아.'

기계장치의 신이 자기 몸을 갈아 넣은 덕에 무한에 가깝게 확장된 마력 저장고가 넘칠 듯 차올랐다.

그 안에, 결코 모일 수 없는 다섯 힘이 저마다 존재감을 뽐내며 회오리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떨어진 살덩어리들이 연옥의 폭군을 덮쳤다.

쾅!

그 바람에 중심을 잃은 상원은 좀비드래곤으로부터 떨어져 추락하기 시작했다.

"끄으으윽!"

마력 때문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서 지면에 부딪히면 그대로 가루가 돼버릴 것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상원은 뱃속의 마력을 있는 대로 끌어올려 전신에 돌리기 시작했다.

[탈신을 시작합니다.]

[탈신 대상: 태초의 대족장, 오랜 땅의 이무기, 연옥의 폭군, 지하의 수호자, 세상 끝의 불꽃]

단전의 저장고로부터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서서히 흘러나오던 마력이 무언가에 걸려 막혀버렸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마력의 총량이 의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몸이 안에서부터 서서히 부서져 갔다.

기계장치의 신이 자기 몸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의체를 업그레이드했는데도 다섯 마신의 힘을 담기엔 부족했던 것이다.

상원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저 하늘 끝 공허한 우주에서 상원을 내려다보는 사마에트의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이대로 갔다간…….'

그때 상원의 눈앞에 누군가 나타나 하늘을 가렸다.

새파랗게 빛나는 우반신과 새빨갛게 타오르는 좌반신, 상원이 가장 처음 복사한 힘의 주인이자 상원에게 주술사의 인장을 내린 자, 마신 태초의 대족장이었다.

- 꼴이 말이 아니구만.

대족장이 끝없는 자연의 힘이 고동치는 양손을 상원에게 내밀며 껄껄 웃었다.

- 길을 뚫어주겠네.

상원은 대족장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무지막지한 힘이 양팔을 통해 흘러들어오며 전신의 마력 통로를 휩쓸었다.

몸이 통째로 터져나갈 것 같았다.

"끄아아아아악!"

내장을 토해낼 듯 비명을 지르는 그 와중에도 몸속의 마력 통로는 넓게 넓게 뚫리고 있었다.

대족장의 힘이 신체의 말단까지 휩쓸고는 다시 상원의 몸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그렇게 뚫린 통로를 따라 들끓는 자연의 힘과 맹렬한 독기, 뜨거운 지옥 불과 차가운 귀신 불, 그리고 음습한 지하의 그림자가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온몸이 인조 피부가 벗겨져 나가고 근육들이 터져나갔다.

시스템 메시지가 연속으로 떴다.

[다섯 마신의 결집을 이루었습니다. 새로운 의태체를 형상화합니다.]

상원은 눈을 떴다.

[의태 형상: 있을 수 없는 마신]

끝을 알 수 없는 힘이 비그리드의 밀림을 뒤덮고 공허한 우주를 향해 쏘아져 올라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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