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5화. 하늘에 올라 (1)
부서진 광야의 대주술사 뮈노 메드냅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껄껄 웃었다.
- 당신 얼굴에 그런 표정이 나타날 줄은 몰랐구려.
메드냅은 새하늘 아버지가 메드냅의 고향 '돌로라크'에 처음 강림했던 순간, 그날 느꼈던 공포를 잊지 않았다.
산맥보다 거대한 그녀의 몸뚱이보다도, 지축을 가득 채우고 끝없이 몰려오는 멧돼지 괴물보다도 무서웠던 건 시체같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돌로라크의 수많은 금강족과 정령들을 학살하면서도, 마침내 정령왕 중 둘의 항복을 받아내고 차원을 정복하고서도, 그녀는 표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떤 감정도 없는, 단지 존재 그 자체가 파괴인 자연재해처럼.
'그자의 얼굴이 이렇게 일그러지는 걸 볼 줄이야!'
사마에트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돋았다.
"이 잡귀 놈이! 네놈의 세계! 그 남은 조각들까지도 모조리 찢어발겨 버리겠어!"
메드냅이 양손에 정령왕의 힘을 끌어모으며 대답했다.
- 어디, 해보시오.
돌로라크의 정령들을 다스리는 지고한 두 정령왕, 하늘의 정령왕 '깊은 하늘의 괴조'가 우반신에, 땅의 정령왕 '끝없는 땅의 거수'가 좌반신에 깃들었다.
메드냅의 감각이 비그리드에 가득 찬 자연으로 확장되어, 폭풍은 그의 숨이 되고 마그마는 그의 근육이 되었다.
그렇게 대주술사가 마신이 되었다.
새하늘을 떠받치는 다섯 개의 기둥 중 마지막이 이 땅에 도래한 것이었다.
두 정령왕의 음성이 주술사와 하나 되어 울렸다.
- 영토를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마신은 존재하는 그 자체로도 너무나 많은 마력을 필요로 하기에, 자신의 마력이 넘쳐나는 영토를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는 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엄청난 마력을 제공하고 있었다.
- 후우.
큰 숨을 쉬며 하늘을 향해 손을 뻗자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촘촘한 번개가 천지 간에 내리꽂혔다.
꽈르르르릉!
이어서 왼손을 쥐자 땅을 뚫고 거대한 마그마 기둥들이 솟아올라 이형의 괴물들을 집어삼켰다.
단지 공격 두 번에 비그리드를 가득 채우고 있던 이형의 괴물들이 통구이가 되어버렸다.
이형의 괴물들을 학살하는 그 감각 하나하나가 메드냅의 것이었지만, 메드냅에게는 그 현실이 너무나도 멀기만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반쯤 유리(遊離)되는 것, 살아있는 채로 신이 된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메드냅뿐만 아니라, 이 땅에 도래한 마신들 모두가 현실에서 약간 거리를 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사마에트의 표정엔 지독한 증오가 서려 있었다.
사마에트의 목소리가 우렁우렁 울렸다.
"이놈들!"
순간 사마에트의 몸이 흔들리면서 그녀의 뒤로 수천 개의 촉수를 꿈틀거리는 괴물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저것이 바로 가면을 벗어던진 아버지의 진짜 모습이었다.
그와 함께 부서진 하늘 너머의 공허한 우주로부터 거대한 살덩어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땅에 부딪힌 살덩어리가 거대한 꼴뚜기 같은 모습으로 형태를 바꾸었다.
놈들의 온몸에 박힌 새빨간 눈 속의 초록색 눈동자가 마신들을 노려보며 희번덕거렸다.
한 놈 한 놈의 높이가 1백 미터는 족히 넘을 것들이, 수백 마리가 군집을 이루고 꿈틀대고 있었다.
놈들 때문에 비그리드의 푸른 초목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놈들이 합창을 하듯 내장을 쥐어짜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꾸르르르륵."
갈고리처럼 생긴 흉측한 발톱이 빽빽이 들어찬 촉수들이 춤추는 것처럼 흔들렸다.
위대하신 아버지의 청소부들이었다.
마신이 되어 현실로부터 괴리감이 생겼는데도,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놈들이 내뿜는 끔찍한 기운에 몸속에 깃든 두 정령왕이 몸서리를 쳤다.
이 꼴을 더 두고 볼 수 없었다.
- 하늘과 가장 가까운 별의 정령들이여. 시원(時元)으로부터 족속을 지배해 온 왕들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대족장의 주변으로 무시무시한 마력이 휘몰아쳤다.
다른 마신들도 어서 저 이지러진 존재들을 이 땅에서 치워버리고 싶은지, 다 같이 더 많은 힘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세상 끝의 불꽃이 뽑아내는 지옥 불이 용의 형상이 되었고, 지하의 수호자가 불러들인 황충 떼는 싯누런 해일 같은 기세를 뽐냈다.
연옥의 폭군은 시퍼런 검기를 뽑아내며 칼춤을 추었고, 오랜 땅의 이무기의 독비는 유성우처럼 보였다.
세계가 부서지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새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인 마신들의 힘이란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마신 다섯이 힘을 합치면 아버지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도 명백했다.
단지 지금까지 그 다섯이 모일 기회가 없었을 뿐.
- 이제 그 높은 곳에서 내려오시오. 아버지.
자신이 만든 세계의 끝을 바라보는 표정은 어떨까?
그런 궁금증을 안고 하늘을 올려다본 대족장은 순간 마력으로 된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이 땅을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얼굴에 조롱이 가득 담겨 있어서였다.
마신 다섯이 한자리에 모여 아버지에 맞서는 일이 일어났거늘,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그때였다.
시뻘건 기의 흐름이 비그리드의 공간 한쪽을 삼키더니, 쩍 하는 굉음과 함께 그 공간에 있던 존재들이 땅덩이째로 사라져버렸다.
'오랜 땅의 이무기'가 비취색 맹독 비를 뿌리며 춤을 추던 곳이었다.
오랜 땅의 이무기도, 맹독 비에 녹아가던 이형의 괴물들도 모두 사라져버리고, 깊이 파인 구덩이 안으로 시뻘건 기운만이 감돌뿐이었다.
새하늘 아버지가 차가운 목소리로 비웃었다.
"멍청한 놈들, 이 세상 어떤 땅이 네놈들 다섯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더냐?"
눈이 크게 벌어졌다.
- 이런…!
마신 다섯이 한자리에 모이니, 차원 자체가 그들의 존재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마신 다섯이 한 땅에 존재할 수 있을 마력을 공급받는 게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잠시 후 공간을 감쌌던 붉은 색 기운이 잠잠해졌다.
오랜 땅의 이무기가 떨어져 나가고 나니 차원이 안정된 것이었다.
태초의 대족장이 침음성을 흘렸다.
- 크으으으윽!
마신들은 사냥개들에 계속 맞서 싸웠다.
지옥 불과 메뚜기떼와 도깨비불의 향연이 계속되었지만, 사냥개는 줄어들지 않았다.
사마에트가 경멸에 가득 찬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계속해라. 그 본원의 힘까지 모조리 뽑아내서 결국 잡귀로 전락하는 그 꼴을 보자꾸나."
절망이 대족장을 덮쳤다.
* * *
진리의 문을 통해 비그리그를 바라보던 상원의 얼굴이 구겨졌다.
마신 하나하나가 승천자들 정도는 아득하게 뛰어넘는 괴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섯이 한자리에 모이면 공간 자체가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기껏해서 새하늘을 불사르고 새하늘 아버지를 직면했거늘, 정작 다섯 마신의 힘을 모으는 게 불가능했던 것이다.
외눈 현자가 클클 웃었다.
- 똑똑하시군 우리 아버지. 결국, 다섯 마신의 힘은 모을 수가 없는 것이었어.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다리에 힘이 절로 풀렸고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때 기계장치의 신이 말했다.
"인정. 우리 아버지 똑똑하시지. 하지만 말이야 새하늘에서 제일 똑똑한 건 나야."
기계장치의 신이 쫑쫑 다가와 상원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그새 까먹었어? 내가 그랬지? 방법이 있다고."
그제야 우트가르드를 떠나기 전, 추락한 핌불베르트에서 기계장치의 신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신화의 몸을 업데이트할 거라던 말.
상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도 안 됩니다. 공간도 버티지 못하는 힘을 담을 수 있는 몸을 어떻게 만들 수 있어요?"
기계장치의 신이 털을 곧추세우고 날카로운 눈으로 상원을 쏘아보고 있었다.
기계장치의 신의 목소리에서 분노와 짜증이 잔뜩 묻어 나왔다.
그 분노에 주위 공간이 우르릉 울릴 정도였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선명했다.
"어이, 불신자 선생. 아무리 불신자라지만 말이야, 자네 멋대로 내 가능성을 판단하면 안 되지."
상원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기계장치의 신이라지만, 다섯 마신이 깃들 몸을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
상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기계장치의 신을 쳐다보았다.
"자네 그 표정. 그거 보는 게 제일 재밌어. 그래, 가능하지 가능하고말고. 난 기계장치의 신이야. 못 만드는 건 없지. 빠하하하!"
기계장치의 신이 한바탕 경박하게 웃고는 가라앉은 얼굴로 상원을 보았다.
"나무의 자식의 몸도, 공간도 버티지 못하는 힘. 하지만 말이야, 절대자 둘이라면 버틸 수 있겠지."
말끝에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것 같은 목소리에, 상원의 생각이 닿은 곳이 있었다.
'절대자 둘? 잠깐, 그 말 설마?'
"그 업그레이드라는 게… 당신 몸을 여기에 넣는다는 얘기였습니까?"
기계장치의 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방법은 그것뿐이야."
"희생하겠다고요?"
기계장치의 신이 그늘진 얼굴로 짧게 웃었다.
"난 기계장치의 신이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말을 이었다.
"기계장치로 된 신이기도 하고… 기계장치들의 신이기도 하지. 내가 만든 기계가 남아 있다면, 내 이름도 거기 남아 있겠지. 난 기술자 중의 기술자다. 기술자라는 건 그런 거야."
외눈 현자가 끼어들었다.
- 그건 기술자가 아니고 예술가 아닌가?
"죽기 일보 직전에도 입은 살아서 말이야."
기계장치의 신이 상원을 올려다보는 눈빛이 아득했다.
"난 말이야, 그냥 전대 절대자였다는 타이틀 하나 달고 어딘가에서 썩어가는 결말 같은 건 받아들일 수 없어. 그럴 바에야 작품으로 기억되는 쪽을 택하겠다."
기계장치의 신이 뒤집어쓴 다람쥐의 입꼬리가 단단했다.
목구멍에서 무언가 울컥 솟아올랐다.
기계장치의 신은 오롯이 기억되고 싶은 것이다.
무언가의 투영일 뿐이기에 그들이 그토록 목을 매는 고유성, 기계장치의 신 역시도 죽음으로서 그것을 이루려 하고 있었다.
기계장치의 신이 다시 문 너머를 힐끗 바라보고는 말했다.
"시간이 얼마 없다. 서둘러야겠군. 기다려, 몸을 가져올 테니까."
그가 몸을 돌리려는데 외눈 현자가 손을 들었다.
- 잠깐. 필요하다는 그거, 이거 아닌가?
어느새 또 다른 진리의 문이 열려 있었다.
거기서 튀어나온 무수한 손들이 다 같이 붙잡고 내밀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기계장치의 신'의 몸뚱이였다.
잠든 듯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이 슬픈 듯 평온했다.
다람쥐가 피식 웃었다.
"아까까지는 새하늘 지키려고 그렇게 발악을 하더니만 이제 와서 갑자기 협조야?"
- 현자는 태세 전환이 빠르거든.
껄껄 웃으며 대답하는 외눈 현자의 몸이 서서히 흩어져가고 있었다.
문에서 나온 손들이 기계장치의 신의 오른손을 들어 상원에게 내밀었다.
다람쥐가 말했다.
"자, 마지막 업데이트를 시작하자고."
눈을 감은 상원은 기계장치의 신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그때 퍼뜩 든 생각이 있어 상원은 질문을 던졌다.
"영감님, 그래서 이 몸으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나면… 저는 어떻게 됩니까?"
다람쥐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자기 뱃가죽을 잡아당겼다.
"미안….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다. 글쎄, 이거라도 쓰던지. 이거 꽤 쓸만하더라."
'그래, 세 번째 몸은 다람쥐인가?‘
피식 웃는 상원의 손끝에 기계장치의 신의 손이 닿자, 그의 몸이 작은 톱니바퀴들로 서서히 분해되더니 신화의 몸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탈신 모듈을 확장합니다.]
신화의 몸이 환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