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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224화 (224/230)

제224화. 하늘에 계신 (3)

시뻘건 가죽을 뒤집어쓴 집채만 한 멧돼지 떼가 밀림을 헤집으며 몰려오는 광경은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수호 계약이 끊어지는 바람에 기동을 멈춰버린 타이탄들이 멧돼지 떼에 쓸려 종잇장처럼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도 충격적이었지만, 더 경악스런 사실은 따로 있었다.

바로 새하늘의 인도자들이 수험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문혁은 마음을 다잡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어쨌든 서울역 수험자들은 상원의 의도에 따라 새하늘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한 상황이었다.

새하늘 아버지는 그것이 자의가 아니었음을 알았을 터였지만,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저 하늘에 있는 아버지 사마에트는 수험자들이 돼지들에게 짓밟히는 걸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와서 자의가 아니었다고 항변해봐야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지금껏 최선을 다해 서울역을 이끌어 왔던 상원이라면, 수험자들을 속이고 새하늘을 뒤엎기로 한 데도 필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문혁은 상원의 심중에 있을 그 이유를 믿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제 저 돼지들한테서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해야겠군.'

멧돼지들은 에인하야르들보다도 훨씬 빠르고 힘이 셌으니, 살아남으려면 수호신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장군님!"

문혁은 현무에 깃들리라던 수호신을 애타게 불렀지만, 수호신의 대답은 없었다.

'현무에 깃드는 건 아직인가…!'

문혁은 조종석 구석에 세워두었던 '주몽의 활'을 꼬나 들고 조종석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조종석 안에서는 맡을 수 없었던, 코가 문드러질 것 같은 오물 냄새가 풍겨와 구역질이 났다.

"웁!"

문혁은 겨우 구역질을 참고 몰려드는 돼지 떼의 선두에 선 놈을 노려보았다.

수호신은 없지만, 아이템과 신력 그리고 스킬은 남아있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스킬 '급소 타격'을 사용합니다.]

급소 타격 덕에 놈의 미간 정중앙, 손톱보다 작은 급소가 수박만큼 크게 보였다.

문혁은 괴력으로 인간이 당길 수 없는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겨, 용력을 통해 한껏 높인 솜씨로 정확히 화살을 놓았다.

퓻!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화살이 놈의 급소에 박혔다.

웬만한 마물은 단매에 절명시킬 화살이었지만 웬걸, 놈은 머리를 흔들고 말 뿐이었다.

"꾸룩?"

고개를 돌려 문혁을 노려보는 놈의 눈이 흉흉했다.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하고 도발만 한 것이었다.

'이런 젠장!'

놈이 웬만한 대검보다 큰 어금니를 앞세우고는 밀림을 무너뜨리며 돌진해왔다.

그때, 철컥하고 조종석 문이 닫히는 바람에 문혁은 조종석 안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현무의 조종석에 다시 불이 들어와 있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타이탄 '현무'에 타락신 '해안선의 귀신'이 깃듭니다.]

[타락신의 의지가 현무의 운영시스템을 대체합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해안선의 귀신이 타락신이 된 것이었다.

타이탄의 기계음을 대신한 해안선의 귀신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 준비하게!

재회 인사를 할 시간도 없었다.

멧돼지가 코앞까지 닥쳐왔기 때문이었다.

문혁은 현무에 마력을 있는 대로 불어넣고 돌진하는 멧돼지의 어금니를 붙잡았다.

쾅!

멧돼지와 부딪힌 충격에 현무가 뒤로 쭉 밀려났다.

현무에 깃든 해안선의 귀신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 끄으으윽!

놈은 아직도 힘이 남았는지 시뻘건 콧김을 씩씩 뿜으며 현무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 여파가 조종석까지 밀려온 탓에 문혁도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이제 한계였다.

"제길…!"

그때 녹색의 두 줄기 섬광이 멧돼지에게 박히며 거센 폭발을 일으켰다.

콰과광!

멧돼지가 쓰러진 덕에 고통에서 벗어난 문혁이 씩 웃으며 광선을 쏘아낸 이의 이름을 외쳤다.

"강 회장님!"

'종말의 팔랑크스'의 두 오벨리스크 끝에 맺힌 입자 광선이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강 회장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 '마천루 건설자'께서 여기 깃드셨군.

마천루 건설자뿐만이 아니었다.

새하늘이 무너지며 타락신이 된 승천자들이 깃든 덕에, 빛을 잃었던 타이탄들이 다시 빛을 내고 있었다.

타락한 승천자들의 가호는 미약하지만 분명했다.

"좋아."

문혁은 가상의 장기판을 소환했다.

해안선의 귀신의 가호가 약해진 탓에 빛깔은 약했지만, 말들의 형상은 여전히 분명했다.

말 하나하나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사고도 예전처럼 빠르지 않았고 최적의 진형을 계산하는 것도 어려웠다.

문혁은 이를 악물고 말들을 옮겼다.

'굴하지 않는다.'

그렇게 수험자들은 완전하지만은 않은 진형을 구성한 채로 멧돼지들에게 맞섰다.

* * *

싸움은 쉽지 않았다.

수험자의 처절한 비명과 타이탄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계속되었다.

"끄악!"

"으으으윽…!"

하지만 분명히, 타이탄이 쓰러지는 속도보다 돼지가 산화하는 속도가 빨랐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마지막 멧돼지가 길게 혀를 빼물고 쓰러졌다.

"꾸우우욱."

문혁은 가쁜 숨을 내뱉으며 전장의 상황을 체크했다.

절반 정도의 수험자가 명을 달리했고, 부상자들까지 고려하면 전력은 1/3 이하로 줄어 있었다.

'그렇지만, 끝났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미소가 피어났다.

"하아."

그리고 하늘을 올려본 문혁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싸움을 내내 지켜본 사마에트의 얼굴에 다시 한번 소름 끼치는 웃음이 걸려 있어서였다.

"애썼다."

그 말과 함께 결코 더는 듣고 싶지 않았던, 멧돼지들이 꿀꿀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꾸우우욱."

"꾸웨에에엑."

사마에트가 썩은 연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발악하는 꼴을 조금 더 구경해야겠다."

밀림을 헤치고 멧돼지 떼가 나타났다.

쿠르르르릉!

아니, 그것들은 더 이상 멧돼지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눈이 수십 개에 이빨이 어깨까지 찢어지고 등짝에는 촉수가 꾸물거리는, 대왕고래만 한 놈들을 어떻게 멧돼지라고 부른단 말인가?

그런 것들이 지평선을 가득 메우고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었다.

그 군세를 본 것만으로도 가슴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혐오감과 함께 짙은 공포가 엄습해왔다.

해안선의 귀신마저도 지금껏 들을 수 없었던 절망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 7등급 이상, 수백.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을 거라는, 아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절망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괴물들이 지근거리까지 다가오는 그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다.

스피커를 통해 정신줄을 놓아버린 수험자들이 중얼거리는 소리와 실소가 들려왔다.

- 아아, 아버지….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 히히, 헤헤헤…….

멧돼지 중 한 놈이 끈적거리는 촉수를 뻗어 현무의 목을 휘감았다.

수 없는 입들이 촉수를 뒤덮고 지분거리는 꼴이 눈에 가득했고, 형언할 수 없는 악취가 조종석까지 뚫고 들어왔다.

놈이 다섯 갈래로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자, 그 갈래 끝마다 붙어있는 칠성장어의 빨판을 닮은 입이 뻐끔 뻐금 움직였다.

차라리 미치는 게 낫겠다 싶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아니…. 죽지도 못할 게야.'

그때였다.

"꾸어어어억!"

멧돼지가 멱따는 소리와 함께 풍선처럼 터지면서, 피와 살점이 카메라를 가렸다.

퍽!

'갑자기 무슨?'

카메라를 닦아내자, 현무의 앞에 네 장의 분홍색 날개를 펼친 여인이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넝마 사이로 드러난 마른 몸과 머리 위에서 회전하는 분홍 불빛은 그녀의 정체를 말해 주었다.

왈칵 울음이 터져 나왔다.

"진아 씨!"

'무사했어! 무사했구나!'

진아가 문혁을 돌아보며 씩씩하게 경례를 했다.

"복귀 신고합니다, 사령관님."

문혁이 울면서 중얼거렸다.

"경례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진아의 오른손에 들린 불타버린 장작이 오싹한 마기를 뿜어냈다.

해안선의 귀신이 그 정체를 알려주었다.

- '세상 끝의 불꽃'이 남긴 재다. '낙원의 수문장'이 거기 깃들었군. 악마가 남긴 물건에 깃들다니 한순간 한순간 몸이 부서지는 느낌일 텐데…….

해안선의 귀신의 말마따나, '낙원의 수문장'은 몸이 부서지는 고통을 이겨내며 진아에게 가호를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마음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전장 위로 날아오른 진아가 허공에 가볍게 검을 그었다.

"이런 돼지들 따위야."

그러자 땅밑에서 세상 어떤 불꽃보다도 뜨거운 시꺼먼 옥염(獄炎)이 솟아올라 멧돼지들을 덮쳤다.

마신 중의 마신이 지옥의 가운데서 직접 길어 올린 불꽃이었다,

콰아아아!

그 한 번에 멧돼지 수십 마리가 한 번에 통구이가 돼버렸다.

지금껏 보았던 그 어떤 스킬보다도 압도적인 위력에 입이 떡 벌어졌다.

진노한 사마에트의 외침에 하늘이 쪼개지고 땅이 뒤집어졌다.

"세상 끝의 불꽃! 네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그 존재감을 못 이긴 타이탄들이 픽픽 쓰러지는 와중에도 진아는 하늘에 꼿꼿하게 선 채로 입을 열었다.

그녀가 목이 다 쉬어버린, 젊음이 다 타고 남은 재와 같은 노파의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당신을 칠 기회가 왔거늘 가만있을 수 있겠소? 그러게 평소에 마음을 좀 잘 쓰시지 그러시었소?"

그게 바로 마신 '세상 끝의 불꽃'의 육성이었다.

사마에트가 차갑게 말했다.

"기둥 하나 없어졌다고 우주가 무너지진 않는다. 기둥은 다시 세우면 그만이다."

사마에트의 말과 함께 멧돼지 떼들 너머로 그보다 거대한 이형의 존재들이 나타났다.

더 이상 돼지의 형상조차도 아닌, 부정형의 살덩이에 수천 개의 눈과 입과 촉수가 붙은 괴물들은 그 덩치가 빌딩만 했다.

세상 끝의 불꽃이 이형의 괴물들을 보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기둥이 다섯 개나 되는데 하나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갈 수 있겠지요. 그런데 어찌합니까 아버지시여?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 것 같거늘."

그 순간 커다란 벌레떼가 붕붕거리는 소리가 귀를 가득 채웠다.

지평선 저 멀리서부터 누런 구름이 밀림을 가득 덮고 몰려들고 있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구름이 이형의 괴물들을 집어삼켰다.

그건 하나하나가 사람보다도 커다란 메뚜기 떼였다.

문혁은 요한계시록의 한 구절을 읊조렸다.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로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과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그와 함께 하늘에서 또 다른 인물이 서서히 내려왔다.

큰 키에 농익은 체구가 진아와는 대비되는 여인, 혜경이었다.

커다란 파리의 날개와 전갈의 꼬리를 단 그녀의 눈이 '지하의 수호자'를 상징하는 누런 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는 누런 기운이 홍염의 산의 기슭으로 이어졌고, 그 끝에는 미라처럼 말라버린 창훈이 고행하는 부처처럼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이어서 전장 한가운데 시퍼런 불꽃에 덮인 본드래곤이 운석처럼 쿵 떨어졌다.

본드래곤의 위에는 창훈의 타이탄 '나글파르'가 얹혀 있었다.

‘어? 저것들, 창훈 씨랑 혜경 씨가 조종하는 게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찰나, 부서진 타이탄들의 잔해와 돼지들의 시체가 본드래곤에게 날아들어 새로운 형상을 이루었다.

반쯤 썩은 좀비드래곤의 등에 해골로 된 갑주를 걸친 기사가 올라탄 모습이었다.

해안선의 귀신이 읊조렸다.

- 연옥에서 돌아온 강령술사와 지하의 수호자의 전령이, 힘을 합쳐 폭군의 그릇이 되었군.

"네? 그게 무슨…?"

그때 기사를 태우고 하늘로 날아오른 좀비드래곤이 이형의 괴물들을 향해 시퍼런 불꽃을 내뿜었다.

그리고 저 멀리 하늘 한쪽은 비취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안에서 거대한 뱀의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녹색 폭우가 이형의 괴물들을 향해 쏟아졌고, 거기 맞은 이형의 괴물들이 녹아내렸다.

"그워어어억……."

끝도 없이 강력한 힘들이 전장에 넘쳐 흘렀다.

49번 시험의 무대였던 비그리드의 밀림은 어느새 터무니없는 신격들의 격전장으로 변해 있었다.

해안선의 귀신이 그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 지하의 수호자, 연옥의 폭군 그리고 오랜 땅의 이무기.

시험을 떠받치는 다섯 마신들 중 넷이 이 땅에 도래해 있었다.

그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혔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때 머릿속에 누군가의 전음이 범종처럼 울렸다.

- 껄껄껄껄. 다섯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 오기는 오는군.

어느새 현무의 곁에 깡마른 금강족 노인이 나타나 있었다.

벌거벗은 그의 윗몸에 상원의 것과 똑같은 번개 문신과 지진 문신이 좌우 반대로 찍혀 있었다.

'그 힘의 출처가 저기였군.'

마신 '태초의 대족장'의 그릇, 금강족의 대주술사 뮈노 메드냅이 전장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이놈들!"

사마에트의 노호성이 전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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