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223화 (223/230)

제223화. 하늘에 계신 (2)

그보다 조금 전, 화산의 바깥.

도저히 쓰러질 것 같지 않던 종말의 벌레가 비그리드의 밀림 위로 쿵 쓰러졌다.

하지만 문혁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홍염의 산 분화구 위로 승천자가 현신한 거인들이 꾸역꾸역 기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가장 높은 태양'만큼 강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땅에 도래한 신들이었다.

그들을 상대하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불덩이와 번개와 얼음과 폭풍과 별빛과 화살과 돌덩이가 서울역 수험자들에게 빗물처럼 쏟아졌다.

그것들 하나하나가 승천자의 성현들이었다.

문혁이 마이크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방어! 방어!"

수십 대의 타이탄들이 힘을 합쳐 전개한 방어막에 성현들이 부딪혔다.

콰과과광!

문혁 또한 그 방어막에 힘을 보태고 있었기에, 그 충격이 고스란히 전달되어왔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충격에 비명이 절로 나왔다.

"끄으으으윽...!"

하지만 마음 놓고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지휘관인 자신이 비명을 지르면 지휘를 받는 수험자들의 사기는 그대로 꺾여버릴 테니까.

문혁은 혼신의 힘을 다해 비명을 참았다.

어찌나 이를 세게 물었는지 빠드득하고 이빨이 깨졌다.

"퉷."

문혁은 이빨 조각을 뱉어내고 재빨리 장기말을 움직였다.

그에 따라 방어형 타이탄들이 물러나고 원거리 공격형 타이탄들이 최전방에 나섰다.

문혁은 명령을 내렸다.

"쏴라!"

'종말의 팔랑크스'의 두 줄기 입자 광선을 비롯해 수십 개의 스킬들이 신들의 성현에 결코 밀리지 않는 기세로 허공을 수놓았다.

스킬에 맞은 거인 몇 놈이 둔탁한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그아아악!"

"으어어억...!"

하지만 쓰러진 것보다 더 많은 거인이 분화구에서 꾸역꾸역 올라왔다.

게다가 또 다른 승천자들이 이 땅에 내려옴을 알리는 별빛들은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문혁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이런... 빌어먹을...."

그때 분화구 위 하늘이 문이 열리듯 쑥 갈라지면서 그리로부터 작은 물건 하나가 분화구 속으로 툭 떨어졌다.

그건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캡슐이었다.

'저거... 분명 본 적 있는 물건인데?'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문혁의 날카로운 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

그건 바로 상원이 비그리드로 진군하는 에인하야르 군단의 머리 위에 떨어뜨렸던 그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필시 저 안에는 진아가 들어있을 것이었다.

"지... 진아 씨!"

캡슐이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일까?

저 캡슐에 정말로 진아가 들어있을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그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삐 하고 귓속이 울려 대는 통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양 귀를 움켜쥐었다.

그 고요 속에서, 지금껏 분화구에서 올라온 거인이 꼬마로 보일 정도로 거대한 손이 분화구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손이 분화구 위에 선 거인들을 쓸어버리자, 서울역 타이탄들의 포화를 맞고도 멀쩡했던 거인들이 그 손짓 한 번에 그대로 피떡이 되어버렸다.

'뭐야...!'

그건 그야말로 미증유의 폭력이었다.

도대체 세상 그 어떤 존재가 사바세계에 현신한 승천자들을 저런 식으로 학살할 수 있단 말인가?

이어서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분화구 근처에서 엄청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콰과과광!

"윽!"

문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산이 본격적으로 분화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저건...?"

스피커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저게 뭐예요?

- 말도 안 돼.

홍염의 산의 윗부분을 통째로 날려버리며 등장한 건 산보다도 드넓은 어깨였다.

이어서 흙먼지를 뚫고 또 다른 손이 산기슭을 짚었다.

그제야 그것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어마어마한 거인의 상체가 홍염의 산 윗부분을 무단 점령하고 있었다.

터질 듯한 근육질 육신을 뒤덮은 피부는 늘어 붙은 재처럼 새까맸고, 그 사이사이로 회색 연기가 슬슬 피어올랐다.

거인의 몸 곳곳에서 타오르는 연한 회색빛 불꽃을 보면서, 문혁은 직감했다.

"세상... 끝의, 불꽃."

그 이름을 한 음절 한 음절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혀가 얼얼했다.

해안선의 귀신이 침음성을 흘렸다.

- 끄으으으음....

그 음성엔 그의 수호신에게서 한 번도 느낄 수 없던 감정, 짙은 공포감이 배어 있었다.

분화구 위로 나타났던 그의 오른손에 어느새 긴 검이 들려 있었다.

'저걸 검이라고 하는 게 맞을까?'

검이라고 하기엔 너무 굵고 투박한 게 차라리 빌딩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거인이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자, 검 끝이 어찌나 높이 올라가는지 이 땅을 지켜보는 별들이 가득한 하늘을 그대로 찔러버릴 것 같았다.

검이 회색 불꽃을 내뿜었다.

또다시, 문혁의 머릿속에 에다의 한 구절이 스쳐 갔다.

"불꽃의 거인이... 그가 가진 불꽃의 검으로 세상을 모두 태워버렸다."

저 하늘의 별들이 일렁였다.

그 긍지 높은 승천자들이, 저 검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삼켜버릴 거라는 공포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해안선의 귀신이 덤덤하게 말했다.

- 이제 하늘과 땅을 가르는 장막이 찢어질 것이야.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문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 저 하늘의 별들이 모조리 땅에 떨어지겠지.

미간이 구겨졌다.

'별들이 떨어진다고?'

사바세계에 떨어진 별은 그냥 돌덩이로 전락할 뿐이다.

그렇다는 건 수호신과 화신의 관계도 깨진다는 얘기였다.

계약 당사자 중 하나의 지위가 승천자에서 잡귀로 격하되는데 수호 계약이라고 그대로일 리가 없으니까.

"그러면 장군님도... 이 사바세계에 그냥 굴러떨어지시는 겁니까?"

해안선의 귀신이 허허 웃었다.

- 그렇지는 않네. 다행히 나는 깃들 곳이 있군.

"깃들 곳이요? 어디 말씀이십니까?"

- 자네가 탄 그 기계.

문혁의 타이탄 '현무'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아."

납득은 됐다.

'현무'는 해안선의 귀신의 마력에 맞춰져 있는 상태이니, 해안선의 귀신이 여기 깃들기도 쉬울 테다.

그때였다.

계란처럼 밋밋했던 거인의 얼굴에 회색으로 불타는 여섯 개의 눈이 나타났다.

그와 함께 하늘을 찌를 듯 솟았던 화염검이 지상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검과 대기가 마찰하며 일어난 불꽃이 검을 통째로 감싸고 있었다.

검의 크기가 말도 안 돼서 검이 떨어지는 속도가 느려 보일 정도였다.

순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왔다.

문혁은 질끈 눈을 감았다.

쩍!

저 거검이 지면을 뚫었음을 짐작케 하는 엄청난 굉음이 귀를 강타했고, 그와 함께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큽."

살짝 눈을 떠 하늘을 본 문혁은 헛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헉!"

거대한 불꽃이 하늘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보라색 황혼을 드리운 하늘이 말 그대로 불타고 있던 것이었다.

불살라진 하늘이 사라진 자리로 수천수만 개의 별들이 약동하는 시꺼먼 우주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보이는가? 저기가 바로 새하늘일세.

해안선의 귀신의 목소리가 아득했다.

거기에 박힌 수많은 별들 하나하나가 어딘가 익숙했다.

'저 별들 모두가 승천자들이로구나!'

수 없는 별무리 가운데 저 먼 남쪽 하늘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별 하나가 유독 눈에 박혔다.

그것이 바로 해안선의 귀신의 별이었다.

문혁은 깊은 존경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하늘이 모두 불타고 새하늘이 천공을 뒤덮었을 때, 그 모든 별들이 일거에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49번 시험의 끝이라고?"

그럴 리가 없었다.

50번째 시험이 끝나고 승천을 해야 하는데, 정작 올라야 할 그 하늘이 사라져버리다니, 무언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그때 귀신이 말했다.

- 회귀자가 성공했군.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그와 함께 수호신의 생각이 머릿속에 밀려 들어왔다.

해안선의 귀신은 우트가르드에서 홍염의 산에 이르기까지 여정을 겪으면서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상원의 계획을 파악했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불살라 새하늘을 무너뜨리고 그 너머에 있는 존재에게 대적하는 게 상원의 계획이었다.

생각의 흐름 속에서 유독 한 이름이 문혁의 주의를 끌었다.

"그 너머의 존재."

- 그래, 그건... 조금 이따 나타날 걸세.

그 말을 끝으로 해안선의 귀신의 별 역시도 긴 혜성이 되어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와 함께 귀신의 기운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해안선의 귀신뿐만이 아니라 서울역 수험자들의 수호성들이 자기들의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수호신의 힘이 끊긴 탓에, 검은 하늘 아래 선 타이탄들이 내뿜는 불빛이 하나둘 꺼져 갔다.

별들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검은 우주 아래로, 회색 화염검을 든 거인이 긴 포효를 내질렀다.

"오오오오오!"

모든 일을 끝냈다는 듯 거인이 여섯 눈을 감았다.

이어서 거인의 몸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최후의 마신이 이 땅을 떠났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무너진 우주 아래, 오로지 인간들만이 자기들의 신을 잃은 채로 서 있었다.

그때 새하늘의 끝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산맥 같은 인영(人影)이 등 뒤로 일곱 쌍의 날개를 펼치자 그 드넓은 우주가 어두운 그림자 속에 모조리 잠겨버렸다.

이어서 그림자가 점점 실체를 띠어 가기 시작했다.

순백색 나신에 짙은 분홍색 박쥐 날개를 단, 숨 막히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문혁은 그 이름을 읊조렸다.

"섭리의 집행자 사마에트."

사마에트가 시체 같은 얼굴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 보았던 그 날, 평화로운 세계에 승천 시험이 선포되었던 그 날의 감정이 살아 돌아왔다.

그건 압도적인 공포감이었다.

문혁의 입에서 신음이 삐져나왔다.

"으... 으으윽...!"

그녀가 입을 열자 천둥 같은 음성이 천지를 강타했다.

"나무의 자식들아."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인지 시험의 표식이 격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말씀으로 오를 이와 가라앉을 이를 구분하려 하였거늘, 너희는 그 생명의 말씀을 걷어차고 하늘을 불살라 버렸구나."

갑자기 발밑에서 돼지 소리가 들렸다.

"꾸익, 꾸익."

'돼지? 갑자기?'

아래를 내려다보니 새빨간 돼지가 현무의 발목을 물어뜯고 있었다.

새하늘의 인도자, 새빨간 돼지였다.

그런데 시험을 치르는 동안 보았던 건 귀여운 새끼였는데, 지금 나타난 건 생김새가 영락없는 멧돼지였던 데다 덩치가 집채만 했다.

돼지의 입질 한 번에 현무의 발목이 우그러졌다.

"윽!"

문혁은 재빨리 물러났다.

이어서 여기저기서 돼지들이 꿀꿀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그리드의 밀림을 뚫고, 돼지 무리가 바퀴벌레 떼마냥 꾸물꾸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표정을 보인 적 없었던 사마에트가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손끝에서 작은 빛무리가 피어올랐다.

"괜찮다. 새하늘은 새로 만들면 되니까."

'새하늘을 새로 만든다고? 그렇군...! 새하늘 아버지는 사마에트 본인이었구나!'

사마에트의 정체는 파악했다.

새하늘이 무너졌으니, 새하늘 아버지가 새로운 하늘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등골을 따라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새로운 하늘을 만들면, 헌 하늘과 합쳐진 이 땅은 어떻게 되는 건가?

폐기처분 말고 다른 것이 있는가?

"꽤애애애액!"

돼지들이 소리를 지르며 수험자들에게 달려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