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1화. 일몰 (7)
수 없는 파문들의 가운데서 금빛 무구로 온몸을 무장한 여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머리 위 고리가 하나에 투구에는 날개 장식이 한 쌍 그리고 등 뒤로 금빛 날개가 세 쌍이었다.
기관원으로서의 등급을 나타내는 상징물이 도합 5개, 절대자의 직속 부하이자 5등급 전투원 '발키리'들이었다.
발키리의 창이 눈부신 금빛을 뿜어 어둠을 몰아냈다.
'발키리를 상대하게 될 줄이야.'
상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들이 얼마나 강한지 직접 겪어본 터라 마음이 무거웠다.
기관 전투원의 전투력은 1등급 높은 등급의 마물에 필적한다.
그러니까 하나하나가 6등급 마물과 맞먹는 자들이 군세를 이루고 있던 것이다.
전생에는 저 모습이 그렇게 든든했는데, 이제는 저들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상원도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 위안이 되었다.
발키리 군단의 출현에 맞추어 상원을 도울 존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먼저 소울 프레임의 오른쪽 어깨 위에 와서 선 존재가 말했다.
- 이리 짙은 밤을 펼칠 줄이야. 역시 인장을 받을 자격이 있었군.
어린아이만 한 덩치에 머리통은 커다랬고 그 가운데 박힌 외눈이 시뻘건 빛을 흘렸다.
'네 발 달린 밤'을 신내림 받은 '밤의 주술사'였다.
소울 프레임의 뒤로 프레임의 어깨까지 올 정도로 커다랗고 하얀 비만체들이 상원의 뒤에 늘어섰다.
주술사와 함께 네 발 달린 밤을 섬기는 '밤의 사도'들이었는데, 이들 하나하나도 6등급에 필적했다.
밤의 사도들이 말했다.
"부르심을 받았나이다."
"받았나이다."
"받았나이다."
이어서 소울 프레임의 왼쪽 어깨 위에 서 있던, 검은 갑주를 걸친 늑대인간이 말했다.
"이 밤에선 짐승의 냄새가 나는군. 늑대의 냄새야."
이 목소리는 분명히 블라드의 가주, 뱀파이어 발라딘 블라드였다.
"발라딘, 그 모습은?"
"늑대의 밤으로부터 받은 힘이지."
'네 발 달린 밤'의 힘이 발라딘을 변이시킨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므깃도에 있는 겁니까?"
발라딘과 그의 수하들은 신우주와 함께 해왔으니 비그리드까지도 왔겠지만 므깃도에 있는 건 의외였다.
발라딘이 코를 킁킁거리며 대답했다.
"이렇게 향기로운 밤이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 있나? 자네가 밤을 펼칠 때 여기에 왔지. 그러다가 공간 이동에 말려들어 버렸지 뭔가?"
발라딘이 클클 웃었다.
그러니까 밤의 가면을 썼을 때 그 안에 들어왔다가 외눈 현자의 공간 이동에 같이 쓸려 왔다는 얘기였다.
'외눈 현자와의 싸움에서 뱀파이어들의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예상치는 못했지만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밤의 사도의 커다란 몸뚱이 사이 사이로 발라딘을 따르는 블라드가의 뱀파이어들이 칼을 뽑아 들고 서 있었다.
이들 역시도 '네 발 달린 밤'의 마력을 받아 늑대인간으로 변해 있었다.
뱀파이어들의 힘은 4등급 정도에 불과했지만, 밤의 정령왕의 마력을 잔뜩 머금은 지금은 6등급에 달하는 마력을 내뿜고 있었다.
밤의 사도들이 내뿜는 붉은 안광과 뱀파이어들의 칼에 맺힌 보라색 검기가 밤 속으로 흩어졌다.
어두운 전장에 뱀파이어들의 하울링이 울렸다.
"아우우우우!"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발키리의 진영으로부터 둔중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뿌우우우우!
그 순간, 어둠의 군세와 빛의 군세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서로를 향해 돌격했다.
묵직한 몽둥이와 날카로운 검기가, 그리고 태양의 마력을 담은 금빛 창이 서로의 갑주를 뚫고 살을 쑤셨다.
두 군세가 팽팽하게 맞섰다.
그 전장의 한가운데서, 외눈 현자가 홍해를 가르는 선지자처럼 전장을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오로지 상원의 목을 꿰뚫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가까운 목표 의식만이 읽힐 뿐이었다.
마창에 빼곡히 각인된 룬 문자가 살벌한 빛을 내뿜었다.
상원은 마음을 다잡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후우."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오메가 블레이드'에 정령왕 '네 발 달린 밤'의 힘을 결합합니다.]
['오메가 블레이드'가 '갓슬레이어'로 강화되었습니다.]
오메가 블레이드가 커지면서 검신에 빼곡히 박혀 있던 문자들이 사라졌다.
갓슬레이어는 길이가 소울 프레임만하고 너비는 소울 프레임의 몸통만 한, 무식하기 그지없는 거검이었다.
'신을 죽이는 검이라.'
검을 가로 긋자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그르릉.
시꺼먼 어둠의 마력이 전신을 꿰뚫었다.
구두망 따위를 상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에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그런데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이 정도 힘은 있어야 저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갓슬레이어'에 마력을 불어넣자 투박한 검신이 서서히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경고: 지금 버전의 동기화 시스템으로는 주입 중인 마력을 동기화할 수 없습니다. 마력 주입을 계속하려면 동기화 시스템 업데이트가 필요합니다.]
[주입 중인 마력을 회수합니다.]
당황스러운 메시지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게 무슨 소리야?'
주입 중인 마력을 동기화할 수 없다니, 오랜 세월 소울 프레임을 몰면서도 이런 메시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추측이 닿는 지점은 있었다.
'아... 설마?'
'네 발 달린 밤'의 마력은 모든 스킬의 아버지인 외눈 현자조차도 잘 모르는 힘이니, 시험의 시스템에 맞춰 설계된 소울 프레임에게도 낯선 힘인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힘을 동기화하려면 업데이트가 필요하다는 것도 당연했다.
이어서 뜬 메시지는 충격적이었다.
[주입 중인 마력을 회수할 수 없습니다. 마력 주입을 계속합니다.]
[동기화 시스템 업데이트 절차에 강제 돌입합니다.]
[업데이트 진행률: 0.01%]
'뭐?'
그 메시지를 끝으로 소울 프레임의 움직임이 덜컥 멈춰버렸다.
아무리 움직이려 해봐도 소울 프레임은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지 않았다.
업데이트 진행률이 올라가는 속도는 달팽이만큼이나 느렸다.
그 사이 외눈 현자는 무슨 수를 써도 막을 수 없는 운명의 순간처럼 서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다가오고 있었다.
창끝에 시리게 반사되는 전장의 불빛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대로... 끝인가?'
그때 거대한 마물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짙은 어둠을 뚫고 들려왔다.
"콰오오오오!"
"으오오오!"
그와 함께 하늘로부터 거대한 그림자들이 쏟아졌다.
사자의 몸뚱이에 여자의 얼굴과 박쥐의 날개를 단 6등급 마물 일식 사자들이 빗방울처럼 쏟아져 발키리들을 물고 늘어졌다.
회색 불꽃을 온몸에 두른 6등급 '지옥불거인'과 오래된 늪지의 하늘을 누비는 6등급 '맹독 비룡'도 전장 곳곳에서 외눈 현자의 군대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6등급 마물들 사이로, 햇빛마저 삼켜버릴 듯 새까만 비늘을 온몸에 두른 거대한 드래곤들이 두 쌍의 날개를 펴고 전장을 급습했다.
'끝없는 지하'에 서식하는 마물의 정점, 7등급 마물 '암흑용'이었다.
콰아아아아아!
암흑용들이 하늘을 가르며 뿜어낸 어둠보다 어두운 브레스에 맞은 발키리들이 새까만 불꽃에 싸여 산화했다.
예언서 '신들의 황혼'에 쓰여 있던 마신의 군대가 본격적으로 합류한 것이었다.
상원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들이 합세하자 발키리들이 급격하게 밀리기 시작했다.
그 어떤 표정도 드러내지 않던 외눈 현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세상 끝의 불꽃, 오랜 땅의 이무기 그리고 지하의 수호자. 다들 미쳤군."
떨리는 목소리에는 분노와 함께 짙은 공포가 배어 있었다.
"아버지랑 한 판 해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때 6등급 마물 몇 마리가 동시에 그를 덮쳤다.
일식 사자의 발톱과 맹독 비룡의 브레스 그리고 지옥불 거인의 불타는 주먹이 외눈 현자에게 쏟아졌다.
씁쓸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외눈 현자가 지팡이를 두드리듯 창끝으로 지면을 때렸다.
톡
그 한순간, 달려들던 마물들이 시간이 멈춘 듯 정지해버렸다.
이어서 외눈 현자가 창을 휘돌리자 6등급 마물들이 그대로 가루가 돼버렸다.
상원의 눈이 터질 듯 커졌다.
'미친...!'
창질 한 번에 6등급 마물들을 한 번에 산화시키다니, 말도 안 되는 힘이었다.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외눈 현자가 창에 마력을 불어넣자 마법 문자들이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대지에 창을 두드리니, 창으로부터 퍼져나간 금빛 막이 전장을 집어삼켰다.
전장의 시간이 멈췄다.
외눈 현자가 태초의 거인에게서 배웠다는 아홉 마법 중 두 번째,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둔다는 '시간의 댐'이었다.
그 이후는 외눈 현자의 독무대였다.
창을 휘두를 때마다 번개 폭풍이 일어나고 수천 개의 유성이 떨어지고 땅이 쩍쩍 갈라졌다.
주신급 수험자들도 겨우 한 번 쓸까 말까 한 스킬들이 평타라도 되는 양 쏟아졌다.
주신급 수험자에 맞먹는 6등급은 물론, 주신급들도 집단으로 상대해야 하는 7등급마저도 무더기로 쓸려나갔다.
'이래서 절대자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격이 다른 힘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동기화 시스템이 업데이트되는 동안, 상원은 그 광경을 두 눈 뜨고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성 덕택에 시간의 댐에 갇히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밤과 마물의 군세가 낙엽처럼 쓸려나가는 와중에도 숫자는 조금씩 오르고 있었으니까.
"으... 으윽!"
마침내 시체가 즐비한 전장 가운데서, 마창의 끝이 군세의 마지막 생존자 발라딘의 심장을 꿰뚫었다.
검을 힘없이 떨어뜨리며, 그가 처량한 눈으로 상원을 바라보았다.
"용서는... 이걸로...?"
발라딘 블라드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재가 되어 사라졌다.
상원은 눈을 감고 읊조렸다.
'안녕히 가시오.'
그렇게 또 하나의 동료가 시험을 떠났다.
그 순간이었다.
고대하던 메시지가 떴다.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갓슬레이어가 시꺼멓게 물들었다.
"좋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끊을 수 없는 속박을 마침내 끊어버린 늑대처럼, 상원은 검 끝을 외눈 현자에게 겨누고는 총알처럼 짓쳐 들어갔다.
갓슬레이어가 마창에 부딪치자 시뻘건 섬광이 튀었다.
쾅!
외눈 현자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러났다.
상원은 여세를 몰아 급소를 노리는 늑대처럼 달려들었다.
이에 질세라 외눈 현자도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독사처럼 마창을 휘둘렀다.
쾅! 쾅!
몇 합을 주고받도록 결판은 나지 않았다.
팔이 부서질 것 같았다.
상원은 숨을 고르기 위해 멀찍이 물러났다.
'이대로는 결판이 나지 않겠군.'
무슨 수가 있을까 생각하던 상원의 시선이 소울 프레임을 둘러싸고 꿈틀거리는 힘에 닿았다.
은 힘은 금방이라도 튀어 나가려는 늑대처럼 사납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건 정령왕 '네 발 달린 밤'의 의지였다.
자신을 낮으로부터 은거하게 했던 데 대한 원망, 그리고 자신의 사도들을 모조리 죽인 데 대한 원한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상원은 눈을 감고 읊조렸다.
"그래, 좋다. 기왕 마력이 필요하다면, 이걸 모두 써라."
그 순간 단전에서부터 마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상원은 아득해지는 정신줄을 붙잡았다.
"윽!"
소울 프레임의 주변으로 일렁이는 검은 힘이 거대한 늑대의 형상을 갖추어갔다.
정령왕 '네 발 달린 밤'이 현신하고 있었다.
상원은 팽팽한 시위를 놓듯 긴장의 끈을 놓았다.
"가라."
그와 함께 거대하고 새까만 늑대가 외눈 현자를 향해 튀어 나갔다.
그 거대한 형체가 움직이는데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단지 그걸 올려다보는 외눈 현자의 한숨이 아득하게 들렸을 뿐.
"허어."
턱.
한입에 하늘과 땅을 모조리 집어삼킬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늑대의 아가리가 외눈 현자를 삼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