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일몰 (6)
늦은 밤, 중원의 비급서점 '만공당'의 앞마당.
만공당주 단국호의 주먹이 복면 쓴 괴한의 명치에 박혔다.
쩍!
괴한이 피를 뱉으며 절명했다.
"컥!"
여남은 명의 괴한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부들부들 떨리는 칼끝이 겁먹은 그들의 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단국호가 나직이 말했다.
"이대로 물러가면 목숨은 살려주마."
그 말에 괴한들이 무기를 버리고 줄행랑을 쳤다.
단국호는 괴한들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쯧."
황제의 생일부터 시작된 무뢰배들의 침입이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그날 황제는 흑천교주 해원향에게 죽었고, 해원향은 마기를 버티지 못하고 괴물이 되어 자멸했다.
교주가 자멸한 흑천교는 그냥 괴물 무리로 전락해버렸고, 황제가 이인자를 모조리 숙청해버린 황실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렇게 대국을 망치던 두 악이 사라졌다.
하지만 세상은 좋아지지 않았다.
대국을 지배하던 두 폭군이 일시에 무너지자 권력의 진공상태가 된 대국에 무뢰배들이 판을 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단국호는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어."
늘 하늘을 가리고 있던 나무가 사라진 덕에 총총한 별들이 보였다.
대국을 짓누르던 나무는 사라졌지만 혼세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 나갈 때가 되었나?'
무림에 발을 들인 후 속세와 연을 끊었고, 무림맹이 무너진 후엔 기억과 비급을 지키겠다는 핑계로 은거했다.
이제는 그 은거를 끝낼 때가 된 것 같았다.
아수라장이 된 대국을 두고 볼 수는 없었으니까.
그때였다.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하늘이 쪼개지는 것 같은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쩡!
단국호는 소리가 난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웬 난데없는 벼락인고?"
그리고는 입을 떡 벌리며 중얼거렸다.
"저것이... 무엇이야...?"
난데없이 두 거인이 나타나 있었다.
한쪽은 몸 곳곳이 녹아내려 뼈와 근육이 드러나 있었는데, 그가 든 뼈망치에서 시퍼런 벼락이 흘렀다.
다른 쪽은 그보다 훨씬 거대했는데 온몸이 시퍼런 비늘로 덮인 여자의 형상에 엉덩이로 긴 꼬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생각조차 싫었던 이름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해원향...?"
잠시 주변을 살펴본 거인들이 괴성을 지르며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천둥을 두른 대전사의 마음은 착잡했다.
깜둥이 계집년의 꼬리에 잡혀 끌려온 곳이 하필 중원인 탓이었다.
"쓰읍."
바로 여기서 조상원이라는 놈에게 생각할수록 속이 쓰린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게다가 여기는 저 여자가 뒤집어쓴 뱀 가죽의 주인, 얼마 전 하늘에 오른 '인식의 경계'라는 잡귀가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본인은 절로 위축되지만 적은 편안한 곳, 그러니까 중원은 최악의 전장이었다.
대전사가 침음성을 흘렸다.
''외눈 현자', 하필 고른 곳이 여기인가?'
천둥을 두른 대전사가 고개를 저었다.
외눈 현자도 저년을 빨리 치워야겠다는 마음만 급했을 것이.
'내가 저년과 같이 중원에 떨어지는 결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겠지.'
여자가 깐족거렸다.
"여기 떨어질 건 너도 예상 못 했지? 고릴라 놈아."
대전사를 비웃는 그녀의 얼굴이 저 높은 곳에 있었다.
여러 번 시험을 치르면서도 저 정도로 거대한 마물은 묵시록의 용 말고는 본 적이 없었다.
한 합을 나눠 본 결과 덩치만 큰 풍선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비늘은 어찌나 단단한지 혼신의 힘을 담은 뼈망치에 고작 손만 부서졌을 뿐이었고 그 손을 순식간에 재생할 정도의 재생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힘 역시 대전사를 손쉽게 날려버릴 정도였다.
그게 일개 수험자가 가질 수 있는 힘이라는 게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지만 일단 그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어쨌든 당면한 문제는 그게 아니라 최악의 전장에서 저런 괴물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니까.
대전사가 깊은숨을 내뱉었다.
"후우."
믿을 건 오로지 힘, 새하늘 최강의 승천자라는 타이틀을 안겨준 그 힘뿐이었다.
대전사가 뼈망치에 벼락을 둘렀다.
빠지지직!
그 벼락을 손에 쥐니 마음이 안정되었다.
'시공간의 세습자'의 두 신기 '아스트라페'와 '케라우노스'를 합쳐도 이것의 반도 되지 않는다.
산만한 괴물을 노려보는 대전사의 마음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숙적.'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저 괴물은 숙적임이 틀림없었다.
그 생각을 하니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러자 뼈망치를 두른 벼락 또한 정갈하게 정리되어 자루가 짧은 워해머의 형상을 띠었다.
새하늘 최강의 무기 '뇌신의 파괴자'였다.
대전사에게서 흘러나오는 힘이 질적으로 달라졌다는 걸 직감했는지, 여자가 이빨을 드러내며 뱀 소리를 질렀다.
"쓰아아아악!"
대전사가 나직하게 말했다.
"와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가 도마뱀처럼 네 발을 땅에 대고 짓쳐들어왔다.
그 덩치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정도였다.
'무슨 속도가...!'
대전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태산 같은 주먹이 그의 코앞에 날아와 있었다.
쩍!
대전사는 주먹에 맞고 속절없이 땅에 처박혔다.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지만 그걸 느낄 새는 없었다.
몸을 다 일으키기도 전에 그녀의 주먹이 대전사를 향해 떨어지고 있던 것이다.
"젠장!"
대전사는 젖먹던 힘까지 짜내 몸을 굴렸다.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주먹이 떨어졌고, 대전사는 그 후폭풍에 쓸려 멀리 튕겨 나갔다.
대전사는 입안 가득 고인 피를 뱉어냈다.
'판단이 틀렸군. 정말 더럽게 세구나!'
그녀는 당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고 훨씬 강했다.
어쩌면 육신 자체는 묵시록의 용보다도 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무릎을 꿇을 것이었다면 최강의 승천자라는 타이틀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다음에 옥좌에 오를 몸이었다.
'이런 괴물 따위에게 쓰러져서야 어찌 절대자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대전사가 뱃속 가득 숨을 채우자 배를 두른 벨트가 끝없는 힘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허벅지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먹어라!"
여자의 얼굴을 향해 그대로 짓쳐들어간 대전사가 그 속도를 그대로 실어 그녀의 턱에 뇌신의 파괴자를 휘둘렀다.
그러자 우두둑하는 뼛소리와 함께 여자의 고개가 위로 넘어갔다.
"컥!"
그녀가 피를 뿜으며 뒤로 넘어갔다.
보통 마물이었다면 이 한방으로 절명했겠지만, 이 괴물이 이대로 끝날 리가 없었다.
'다음!'
후속타를 먹이기 위해 하늘 높이 날아오른 대전사가 그대로 그녀의 명치에 뇌신의 파괴자를 내리꽂았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그녀의 명치가 아닌 지면에 박혔다.
그새 충격을 회복한 그녀가 뇌신의 파괴자를 피해버린 것이다.
굉음과 함께 지면이 폭발하듯 쪼개졌다.
쾅!
벌써 저만치 물러난 그녀가 몸을 웅크리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전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젠장!"
대전사는 다시 한번 망치에 벼락을 두르고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그때였다.
그녀의 등마루가 꼬리 끝에서부터 파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저 공격,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해무 광선!'
이곳 중원에서 펼쳐진 스물다섯 번째 시험에서, 괴물이 된 해원향이 저 공격으로 수많은 수험자를 도륙했었다.
'피해야...!'
콰아아아!
대전사의 다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차가운 해무 광선이 밤하늘을 가르고 대전사의 가슴팍에 꽂혔다.
온몸이 뼛속부터 얼어붙는 것 같았다.
추위에 몸이 오그라든 탓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 으윽...!"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지 못하게 된 채로, 대전사는 그를 향해 짓쳐 들어오는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우악스런 두 손으로 대전사를 쥐고는 압도적인 체중을 그대로 실어 대전사를 찍어누르기 시작했다.
뼈와 근육이 부서져 장기를 찔렀다.
"그... 아아... 아악!"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옥좌를 이어받을 승천자가 이런 이야기를 남길 수 없었다.
이렇게 쓰러지는 건 그의 운명이 아니었다.
'내 운명에 패배란 없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그 순간, 허리띠로부터 엄청난 힘이 밀려들어 와 그녀의 손아귀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으... 으윽!"
그녀가 신음을 흘리며 손에 잔뜩 힘을 주었지만 손아귀는 여지없이 풀리고 있었다.
바깥에서 몸을 옥죄는 힘과 안에서 그걸 밀어내는 힘이 그의 몸속에서 부딪히는 통에 무지막지한 고통이 그의 몸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대전사는 정신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버티는 한순간, 손아귀가 풀렸다.
바로 그때, 대전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뛰어올랐다.
손아귀가 풀려 당황하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도 느리게 흘러갔다.
망치에 모든 힘을 싣자, 시험에 든 이래 단 한 번도 발해본 적 없는 밝은 빛이 폭사했다.
해무 광선으로 얼어붙은 몸에 멀쩡한 상태로도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실은 탓에 몸이 그대로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그의 운명에 패배란 없다는 사실.
대전사는 눈앞에 온 그녀의 관자놀이에 망치를 휘둘렀다.
망치가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순간마다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고 내장이 터져나갔다.
망치가 관자놀이에 닿았을 때 난 소리는 의외로 작고 정갈했다.
쩍.
그 반작용이 그의 몸을 그대로 찢어버렸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비명을 지를 목이 남아 있지 않았다.
고통마저 느끼지 못하는 채로 추락하면서, 대전사는 그녀의 몸이 재가 되어 부서져 내리는 걸 보았다.
아무리 대단한 괴물이라도, 저렇게 가루가 되도록 부서져서는 재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대전사의 발이 지면에 닿았다.
대전사가 돌아서서 넝마가 된 몸으로 겨우 걷기 시작했다.
역시나 그의 운명에 패배란 없었다.
그렇게 한 발짝, 두 발짝, 아홉 발짝을 디뎠다.
그때 버티지 못한 몸이 서서히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털썩 쓰러진 대전사의 눈에 그녀가 쓰러진 자리가 들어왔다.
바람에 흩날리는 잿더미 속, 거기에 돌로 된 알이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염병. 죽으면서도 알을 남겼어?'
그래도 이기긴 이겼다.
그때 정신이 얼어붙을 정도로 섬뜩한 기운이 대전사를 찍어눌렀다.
'이게... 무슨...?'
시험에 든 이래 이토록 강한 기운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다.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는 채로, 대전사는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단 하나의 존재를 보았다.
그건 돌 알을 기어오르는, 삼십 센티미터를 갓 넘길 것 같은 조그만 뱀이었다.
뱀이 삼층 건물만큼이나 큰 알을 열심히 기어올라, 마침내 알의 꼭대기에 똬리를 틀었다.
뱀이 가만히 머리를 들고 대전사를 바라보았다.
그 조그만 뱀이 넉넉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제야 대전사는 뱀의 정체를 깨달았다.
새하늘을 떠받치는 다섯 마신 중 하나, 오래된 늪지의 주인, 모든 이무기가 승천할 때까지 승천을 미루었다는 자.
'오랜 땅의 이무기.'
대전사를 애도하듯, 오랜 땅의 이무기가 끔뻑 눈을 감았다.
'아아.'
모든 풍경이 새까맣게 멀어졌다.
새하늘에서 가장 큰 별 하나가 그렇게 졌다.
* * *
외눈 현자의 창질 한 번에 또 풍경이 바뀌었다.
하늘은 새빨갛게 불타고 있었고 땅은 온통 검은 초토였다.
새빨간 불을 뿜는 화산들이 저 멀리까지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 하나하나가 홍염의 산보다도 컸다.
지옥에 가장 가까운 행성이자 마지막 시험의 무대이며, 새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 '비그리드'와는 가장 멀리 있는 곳.
상원은 그 익숙한 별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므깃도."
외눈 현자는 전장을 여기로 옮기는 게 상원이 현신을 방해하는 걸 막을 최적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명백한 오판이었다.
상원이 외눈 현자에게 말했다.
"당신, 실수한 거요."
상원의 말을 듣기는 한 걸까?
외눈 현자는 말없이 눈을 감을 뿐이었다.
그 뒤로 황금빛 파문들이 수없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