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9화. 일몰 (5)
지하의 수호자로부터 폭발한 기운이 외팔 검신을 튕겨냈다.
폭발에 휩쓸려 땅에 처박힌 외팔 검신이 욱신거리는 어깨를 감싸 쥐었다.
신음이 절로 나왔다.
"끄으으으윽."
신체를 통해 느껴지는 고통이 낯설었다.
단단한 갑옷의 틈새로 파고드는 후끈한 열기도, 왼쪽 팔꿈치 아래 칼날에 흐르는 서늘한 냉기도 모두 오래도록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고통과 동시에 희열이 용솟음쳤다.
'이 얼마 만에 느끼는 고통인가!'
검객이자 결투자로서 전장을 누비던 그 감각이 하나씩 살아 돌아왔다.
외팔 검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왼팔을 가로 그어 보았다.
새하늘의 그 어떤 무기보다도 날카로운 칼날이 차갑게 공간을 갈랐다.
'외팔 검신', 정정당당을 철칙으로 삼은 새하늘 최강의 결투자.
이제 이 칼로, 새하늘의 질서를 무너뜨리려 한 죄인들을 엄단할 것이다.
외팔 검신이 칼끝으로 지하의 수호자를 겨누었다.
"새하늘의 법칙을 무너뜨리려 한 그 죄를 엄단하겠다. 죗값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리라."
그때 지하의 수호자로부터 싯누런 기운이 다시 한번 폭발했다.
기운이 수 없는 황충 떼가 되어 외팔 검신을 덮쳐 왔다.
수만 마리 벌레떼가 지분거리는 소리가 화산 내부에 가득 울렸다.
새하늘을 떠받치는 다섯 마신 중 하나인 지하의 수호자의 힘이었으니, 화신이 애를 먹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외팔 검신은 화신이 아니라 육신을 가지고 시험의 땅에 직접 현현해 있었다.
그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외팔 검신에겐 저 황충 떼는 단지 메뚜기 몇 마리일 뿐이었다.
외팔 검신이 콧방귀를 뀌며 가볍게 검을 그었다.
"흥."
그러자 노도처럼 몰려오던 황충 떼가 검풍에 쓸려 살충제를 뒤집어쓴 모기 떼마냥 바닥에 우수수 떨어져 버렸다.
외팔 검신이 차갑게 말했다.
"이런 잔재주로 날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그 누구보다 냉정한 외팔 검신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 불같은 게 꿈틀거렸다.
"날 무시하는 건가?"
입을 닫은 외팔 검신이 흠칫 놀랐다.
그 물음은 그의 마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건 무슨 감정이지?'
그건 그의 얼음장 같은 화신이 유독 강하게 가지고 있던 감정인, 무시당한 데 대한 증오였다.
그 낯선 감정에 마음속을 들여다본 외팔 검신은 그게 화신 마리야의 잔재임을 깨달았다.
절대자가 마련한 육체가 화신을 잡아먹고 현신을 위한 그릇이 되었으니, 그 안에 화신의 감정이 남아있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투에서 그런 감정을 가지는 건 자살행위였다.
외팔 검신이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침착하자.'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방심하지 않는다는 그 태도가, 그를 새하늘 최강의 결투자로 만들어 주었다.
마음을 가다듬은 외팔 검신이 지하의 수호자의 그릇을 노려보았다.
'간다.'
외팔 검신이 달려들려는 그 찰나, 갑자기
수호자의 몸에서 흘러나온 노란 기운이 남자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자세히 보니 그 노란 기운은 개미며 거미, 지네를 비롯한 온갖 벌레들이었다.
누런 벌레떼가 남자뿐만 아니라 부부를 집어삼키고는 고치 같은 모양이 되었다.
그리고는 빵이 부풀어 오르듯 순식간에 커지기 시작했다.
본능이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저 고치를 놔두면 안 된다.'
고치를 향해 번개처럼 짓쳐 들어간 외팔 검신이 고치 한가운데 검을 찔러 넣었다.
물렁한 두부를 찌른 것처럼 검이 고치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수천 마리 벌레떼가 몸을 기어 다니는 듯한 끔찍한 감각이 검을 따라 흘러와 검신은 몸서리를 쳤다.
"으윽...!"
그때 고치가 터지는 바람에 외팔 검신은 고치에서 흘러나온 누렇고 끈끈한 액체를 뒤집어썼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악취를 풍기는 액체가 그의 눈을 가렸다.
"이런!"
외팔 검신은 눈을 닦았다.
그의 눈앞에, 고치에서 나온 존재가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크르릉!"
지하의 수호자가 그릇으로 썼던 그 여자가 개처럼 웅크리고 있었는데, 몸이 어찌나 커졌는지 어깨가 외팔 검신의 눈높이에 와 있었다.
다리는 역관절로 비틀려 있었고 팔꿈치와 무릎 아래로는 벌레를 닮은 털이 무수히 돋아 있었으며, 어깨 위로는 사마귀의 앞발을 닮은 두 개의 앞다리가 솟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가슴에 남자의 상반신이 십자가에 매달린 것처럼 조그맣게 드러나 있었다.
그의 눈코입귀에서 선지피가 연신 흘러나와 여자의 가슴팍을 적셨다.
그 형상을 보니,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없는 말이 떠올랐다.
'가슴을 피로 적신 거대한 사냥개.'
그 생각과 함께 연원을 알 수 없는 근원적인 공포가 숨통을 조여 왔다.
입에서 잔뜩 억눌린 숨소리가 삐져나왔다.
"크... 으으윽...."
날카로운 짖음과 함께 놈이 외팔 검신에게 달려들었다.
"컹!"
외팔 검신은 비명에 가까운 기합과 함께 놈을 향해 칼을 찔러 넣었다.
"으아아악!"
허사였다.
놈이 그 덩치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칼을 피해버린 것이었다.
이어서 놈이 낫을 닮은 두 앞발을 휘둘렀다.
외팔 검신의 단단하기 그지없는 갑옷이 포일처럼 찌그러졌다.
내장을 토해낼 것 같은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악!"
그 순간, 화산 입구로부터 밀물처럼 밀려 들어온 어둠이 화산의 내부를 감쌌다.
* * *
그보다 조금 전, 홍염의 산의 바깥.
서울역의 수험자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디아블로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유충을 닮은 거대한 괴물 때문이었다.
지금껏 보아왔던 어떤 마물보다도 커다란 놈이 움직이는 속도는 말도 안 되게 빨랐다.
놈이 사지를 휘두를 때마다 성물급 타이탄들이 몇 대씩 터져 나갔다.
문혁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역시 49번 시험인가. 저런 놈을 상대해야 한다니.'
그나마 어디선가 날아온 본드래곤이 놈의 목줄기를 물고 늘어진 덕에 조금의 여유를 벌 수 있었다.
본드래곤은 괴물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다리에 얻어맞으면서도 끈덕지게 목덜미를 물고 늘어졌다.
목덜미를 물린 괴물이 버둥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끄어어엉!"
본드래곤의 목과 몸통이 이어지는 부분에 혜경의 타이탄 '니드호그'가 끼어 있었고, 그 덕에 문혁은 저 본드래곤이 혜경과 창훈의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문혁은 본드래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혜경 씨."
혜경 부부가 만들어 준 여유를 이대로 날려버릴 수 없었다.
괴물이 본드래곤을 떼어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며, 문혁은 저놈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계산을 끝냈다.
'진을 재정비해서 싸우면 못 이길 상대는 아니다.'
가슴 속에 '해안선의 귀신'의 웅혼한 기가 들어찼다.
문혁은 명령을 내렸다.
"전군, 물러서서 진을 정비한다."
그의 명령이 현무의 양어깨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 전선에 퍼져나갔다.
그러자 문혁의 눈앞에 파란 말이 가득한 장기판이 나타났다.
저쪽 편에 있는 커다란 빨간 말은 물론 괴물을 의미했다.
문혁은 파란 말들을 움직여, 괴물과 싸우느라 흐트러진 진영을 재정비했다.
괴물의 신체에 최적의 타격을 입힐 수 있는 형태로 원거리 타이탄을, 놈이 들어올 경로에 맞춰 근거리 타이탄을 배치했다.
문혁의 조종에 따라 서울역의 타이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진열시 순식간에 정비되었다.
문혁은 다음 명령을 내렸다.
"전군, 발포하라."
수십 가지 스킬과 무기들이 총천연색 빛을 내뿜으며 괴물에게 작렬했다.
집중포화에 맞은 괴물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끄어어어엉!"
한동안 몸부림치던 괴물이 자세를 바꿔 잡고 아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또한 이미 예상한 바였다.
"근거리조, 대기."
타이밍을 재고 있던 문혁이 정확한 타이밍에 다음 명령을 내렸다.
"절삭."
그 경로에 대기하고 있던 근거리 타이탄들이 있는 힘껏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자 놈의 앞다리가 그대로 잘려 나가 버렸고, 놈은 그 통에 바닥에 고꾸라져 버렸다.
"근거리조 퇴각. 원거리조 계속 발포하라."
다시 한번 포화가 쏟아졌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저 괴물의 숨통도 끊어질 터였다.
그때였다.
뜨거운 마그마가 들끓는 홍염의 산의 기슭에서 난데없는 오한이 문혁을 엄습했다.
"윽!"
등골을 따라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무슨...?"
그 오한이 어디에서 온 건지 문혁은 직감했다.
문혁뿐만이 아니었다.
서울역의 타이탄들이, 괴물의 목덜미에 붙은 혜경이, 그리고 괴물마저 고개를 들어 한 곳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화산의 위로 깔린 짙은 화산 연기 속이었다.
갑자기 일어난 돌풍이 화산 연기를 멀리 날려버렸다.
그러자 공중에서 대치하고 있는 작은 형체 두 개가 보였다.
"뭐야?"
줌을 당긴 문혁이 헛숨을 들이켰다.
"헛."
한쪽은 한눈을 안대로 가린 노인이었다.
다 늙어버린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몸은 바위처럼 단단했고, 그가 꼬나쥔 룬문자가 가득 새겨진 마창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문혁이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해안선의 귀신'이 침음성을 흘렸다.
- 외눈 현자. 이 시험의 정점에 있는, '절대자'다.
'절대자!'
절대자라니, 필시 주신보다 높은 존재일 것이다.
그런 자가 여기에 직접 나타나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문혁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다른 자에게 향했다.
새하얀 갑주를 걸친, 오른팔은 빨갛게 왼팔은 파랗게 빛나는 타이탄.
바로 상원의 '소울 프레임'이었다.
홍염의 산 앞에서 대치하던 모두를 주목케 한 오싹한 한기는 소울 프레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원 씨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던가...?'
지금껏 상원과 함께하는 동안, 문혁은 상원이 냉기계 스킬을 쓰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자세히 보니 소울 프레임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망토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척추의 양옆을 따라 제어봉들이 튀어나와 있던 것이다.
거기에서 검은 기운이 강물을 뒤덮는 오수처럼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한순간, 소울 프레임의 등에서 흘러나오던 검은 기운이 사방으로 퍼졌다.
하늘도 땅도 해도 달도 그리고 별들도 모두 그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 세상의 생명이라고는 모두 죽어버린 것 같은 고요가 전장을 덮쳤다.
그 어둠 속에서 홍염의 산이 내뿜는 시뻘건 불빛만이 홀로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그때, 어느새 나타났는지 모를 새하얀 비만체들이 문혁의 곁을 스쳐 홍염의 산을 향해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6미터에 달하는 거구들이 발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들이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렸다.
"밤께서 부르신다."
"부르신다."
"부르신다."
그리고 문혁은 보았다.
소울 프레임이 있던 곳, 어둠이 가장 짙은 그곳에 서 있는 존재를.
그는 새까만 갑주를 온몸에 빈틈없이 두르고 짐승의 털로 된 것 같은 망토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사지 끝에 삐져나온 발톱과 긴 주둥이 속에 빛나는 이빨들, 그리고 시뻘건 안광을 뿜어내는 붉은 눈,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한 늑대인간 같았다.
정점에 선 외눈의 현자, 그리고 그와 대치하는 검은 늑대.
문혁은 그것을 보면서 북유럽 신화의 텍스트인 '에다'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사슬을 푼 늑대는 위턱이 하늘, 아래턱이 땅에 닿을 만큼 거대해져 결국 신들의 왕을 잡아먹을지니."
늑대인간이 하늘을 향해 포효하자 온 땅이 쩌렁쩌렁 울렸다.
"크허어엉!"
다시 한번 참을 수 없는 오한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문혁은 이를 악물었다.
"큭."
그때 외눈 현자가 말했다.
"그러지 않았나, 자네 마음대로는 안된다고."
외눈 현자가 지팡이를 짚듯 허공에 창끝을 찍었다.
그러자 한순간 그 어둠이 거짓말처럼 물러가 버렸고 그와 함께 외눈 현자와 늑대 인간도 사라져 버렸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마찬가지였다.
"어... 어?"
'그 덩치들이 갑자기 어디로 간 거지?'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절망적이었다.
저 짙은 화산 연기구름 너머에서, 수많은 빛줄기들이 홍염의 산을 향해 꽂히기 시작한 것이었다.
"젠장! 진형을 정비한다!"
문혁이 절규하듯 명령을 내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