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218화 (218/230)

제218화. 일몰 (4)

어찌 된 일인지 바닥에 가까워질수록 연기가 옅어져 연기 너머로 화산 벽면이 보였다.

벽면은 도저히 자연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매끈한 금속질이었다.

그리고 울퉁불퉁한 바위로 된 새빨간 바닥에는 주황색 알들이 한여름 벌레떼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속에서 커다란 그림자들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징그럽기 짝이 없어 절로 구역질이 나왔다.

"욱."

한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인지 헛구역질 한 번에 온 식도가 찌릿찌릿했다.

"하아."

한숨을 내뱉은 창훈이 혜경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그녀의 피부에 검은색이 아닌 황토색 핏발이 돋아 있던 것이다.

눈동자 역시도 누런빛을 띠고 있었다.

음습하게 빛나는 황토색 힘, 창훈은 그 힘의 연원을 알고 있었다.

창훈은 아내의 몸에 깃든 이의 이름을 불렀다.

"지하의 수호자이시여."

마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니 음절 하나하나를 발음할 때마다 입이 저려왔다.

지하의 수호자가 창훈을 보더니 샐쭉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이가 너를 참 많이 걱정했단다. 아내 속을 그렇게 태우다니, 못난 남편이네."

'언제부터 혜경이가 당신 아이였죠'라는 물음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집어삼켰다.

지하의 수호자에게 등짝을 맞았다간 얼얼한 걸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아내의 몸속에 들어가 있는 마신은 샐쭉 웃는 얼굴로도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내뿜었다.

연옥에 다녀오지 않았다면 그 존재감을 견디지 못하고 까무러쳐버렸을 것이다.

'연옥에서 봤던 그것에 비하면... 이 정도야.'

죽은 이의 지배자 '연옥의 폭군'.

창훈은 죽지도 미치지도 까무러치지도 못하는 채로 그 존재감을 흠뻑 뒤집어썼었다.

그 존재를 상기하자 입안이 씁쓸해졌다.

'그게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

그 순간에도 화산 바닥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머리가 박살 나기 전에 뭐라도 해야 되겠는데.'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지하의 수호자의 등 뒤로 누런 나비 날개가 터져 나오면서 낙하 속도가 급감했다.

창훈을 안은 지하의 수호자가 나비처럼 사뿐하게 바닥에 섰다.

주위에 즐비한 알들이 주황빛을 내뿜었다.

입이 떡 벌어졌다.

"뭐 이리 커."

위에서는 탁구공처럼 보였던 알은 가까이 서니 작은 건물만 했다.

크기를 보니 그 안에 미완의 거인이 잠들어 있다는 게 절로 납득이 됐다.

그게 화산 바닥 가득 차 있다는 걸 생각하니 욕이 절로 나왔다.

"염병... 겁나게 많네."

"뭐가 걱정이야? 다 터뜨리면 되지."

부드럽게 웃는 지하의 수호자의 팔이 사마귀의 앞발로 변했다.

"자, 시작하자구."

지하의 수호자가 가장 가까이 있는 알에다 팔을 슥 그었다.

그 팔질 한 번에 커다란 알이 끈끈한 주황색 액을 내뿜으며 터져버렸다.

퍽!

창훈이 엄지를 치켜들고 말했다.

"역시 마신이시군요."

지하의 수호자가 알들을 빠르게 부수며 나지막이 핀잔을 주었다.

"입 발린 소리 하지 말고 한 서방도 좀 도와."

그 말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 서방요?"

그때였다.

퉁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산 바닥에 별빛이 꽂히면서, 한 여자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장신인 혜경보다도 키가 큰, 검은 숏컷을 한 차가운 인상의 여자였다.

'누구지?'

키보다 큰 양손검을 등에 멘 채, 타이트한 트레이닝복의 오른팔을 허공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 팔을 보니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발할라의 부길드장, 주신 '외팔 검신'의 화신 마리야 율리아노바.

이 타이밍에 여기 온 게 하필 그녀일 줄이야.

"외팔 검객...!"

얼음 같은 얼굴로 주위를 경계하던 그녀의 눈이 지하의 수호자에게 박혔다.

그녀의 눈에 차갑기 그지없는 분노의 눈빛이 서렸다.

"너."

그녀는 무려 길드 발할라의 부길드장, 강하기도 강했거니와 그녀와 창훈 부부는 해묵은 원한이 있었다.

생명나무 제전에서 그녀와 맞붙어서 그녀의 자존심을 짓밟았던 것이다.

그녀가 칼을 뽑으며 말했다.

"이번엔 반드시 죽인다."

지하의 수호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죽여? 니가? 나를?"

마리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날 무시하는 거냐?"

지하의 수호자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무시할 만하니 무시하는 것 아닌가?"

저 말, 생명나무 제전에서 마리야가 혜경에게 했던 말이었다.

지하의 수호자는 그때도 부부를 보고 있던 것이다.

자존심에 금이 간 마리야가 노호성을 질렀다.

"끄아아아악!"

순간 공기가 얼어붙을 정도로 강렬한 마력이 대검에 맺혔다.

생명나무 제전에서 만났을 땐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까지 복수의 날을 꿈꾸며 칼을 갈아왔다는 게 절로 느껴졌다.

팟!

지하의 수호자를 향해 범처럼 달려든 마리야가 검을 세로로 내리찍었다.

"큭!"

수호자가 두 팔로 검을 막았지만 그 통에 그녀의 무릎이 풀썩 꺾여 버렸다.

마신의 화신을 저렇게 몰아붙일 수 있다니, 엄청난 힘이었다.

마리야가 그 정도로 강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지하의 수호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직후 잠깐의 찰나에 수호자와 마리야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창훈으로서는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숨 막히는 공방이었다.

수호자의 몸 곳곳이 대검에 베여 누렇고 끈적한 체액이 흘러나왔다.

수호자가 외쳤다.

"야! 구경만 하지 말고 도우라니까!"

"네... 네!"

창훈은 가부좌를 틀었다.

창훈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아내를 돕는 일이었다.

검은 숲의 목자의 마기를 다스릴 때처럼, 지하의 수호자가 연약한 인간의 몸에서 최상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그 끝없는 힘을 다스릴 것이었다.

그때 수호신 '화산정의 혐오체'가 끌끌 웃으며 말했다.

- 외팔 검신을 상대하려니 제아무리 잘난 마신이라도 어쩔 수가 없구만.

수호신이 도와주지 않는 탓에, 이 중요한 순간에 마력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수호신이 그러는 것도 이해는 됐다.

외신 중 하나이자 혜경의 수호신이었던 '검은 숲의 목자' 때문에 새하늘에서 쫓겨났는데, 외신들의 우두머리인 지하의 수호자를 도울 마음이 날 리가 만무했다.

창훈은 애원하다시피 매달렸다.

'할머... 아니, 스승님. 도와주세요. 이대로 있다간 아내가 죽어요.'

화산정의 혐오체가 빈정거렸다.

- 이 하늘 안에서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야. 너도 연옥에 갔다 와 봤으니 알 거 아냐?

'할머님.'

창훈은 한숨을 푹 쉬었다.

'지금 여기서 혜경이를 연옥에 보내면... 상원 씨의 계획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상원이 진정 이루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오디나스에게 들은 터였다.

지금 여기서 혜경이 연옥으로 가버리면 신들이 현신하는 걸 막을 수 없게 된다.

화산정의 혐오체가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 내가 저 족속들... 죽어도 도와주지 않으려고 그랬는데 어쩔 수 없군.

그녀의 어투에서, 사실 그녀가 애초부터 창훈을 도울 생각임을 알 수 있었다.

화산정의 수호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 자, 제자야. 나를 따라 몸을 움직여라. 저 벌레 여왕이 잘 싸울 수 있게 도와주자.

"네, 스승님."

창훈이 지하의 수호자를 향해 양손을 뻗자 손이 보라색으로 타올랐다.

이어서 화산정의 혐오체가 창훈의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지휘자처럼, 창훈의 손을 통해 지하의 수호자의 마력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지하의 수호자의 몸에서 황토색 마력이 폭사했다.

그녀가 기쁨에 찬 소리를 질렀다.

"좋아, 한 서방! 이거지!"

'마신 장모님이라니... 어우, 등골이 그냥 오싹해지네.'

그녀의 그림자가 황색으로 변하더니 거기서 튀어나온 벌레떼가 마리야를 덮쳤다.

커다란 메뚜기를 닮은 벌레는 사자 같은 갈기와 날카로운 이빨을 달고 있었는데, 그 꼴이 성경의 한 구절과 아주 흡사했다.

'뭐야 저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황충이잖아? 게다가 그 주인은 무저갱의 왕...!'

공교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창훈은 그 살벌한 황충 떼를 보면서도 마신의 힘이 고작 그거냐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시험에 그보다 살벌하게 생긴 마물은 차고 넘쳤으니까.

'하다못해 1급 마물 새타니나 늪지 늑대인간도 저것보다는 위협적이겠는데.'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황충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황충들이 마리야의 살벌한 검막을 이리저리 파고들어 그녀의 살을 물어뜯은 것이었다.

마리야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악!"

마리야에게 다가가는 지하의 수호자의 등 뒤로 커다란 날개가 돋아났다.

"벌레에게 뜯어먹혀 죽다니, 악녀에게 참 잘 어울리는 최후로군."

지하의 수호자가 손가락을 뻗어 마리야의 턱을 쓰다듬었다.

"잘 가라."

"개소리하지마!"

마리야가 온몸을 거세게 비틀며 황충들을 떼어내더니, 그대로 뒤에 있던 알에 대검을 꽂았다.

'같은 편 아닌가? 갑자기 왜...?'

창훈은 마리야의 행동을 납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하의 수호자는 그 행동의 의미를 아는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그녀가 알에 칼을 꽂고 있는 마리야에게 물었다.

"왜냐? 왜 그렇게까지...."

얼음장 같은 표정을 되찾은 마리야가 대답했다.

"나라고 좋은 건 아니야."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알이 갈라지며 미완의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미처 다 만들어지지 않은 볼 근육 사이로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마리야가 눈을 감고 말했다.

"하지만 네놈들을 쓰러뜨려야 한다면, 기꺼이...."

마리야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거인이 그대로 마리야를 집어 삼켜버린 것이었다.

"이런... 정신 나간...!"

지하의 수호자가 소리를 지르며 황충 떼를 날려 보냈다.

"변이하기 전에 죽여야 해!"

황충 떼가 거인을 새까맣게 에워싸고 살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갑자기 거인을 중심으로 일어난 돌풍에 황충 떼가 모조리 휩쓸려 버렸다.

돌풍에 같이 휩쓸린 지하의 수호자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창훈의 옆까지 날려왔다.

"꺅!"

창훈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 너머에서 금속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기꺼이 인간임을 포기하겠다."

손을 내렸을 때, 거기는 생각하기도 싫었던 끔찍한 존재가 서 있었다.

온몸을 회색빛 금속으로 감싼 여성형 거인이었는데, 오른팔이 없었고 왼팔은 팔꿈치 아래가 한 자루의 거대한 검이었다.

그게 주신 '외팔 검신'이 이 땅에 현신한 모습이었다.

지하의 수호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막대한 존재감이 날카롭게 창훈의 목줄을 파고들었다.

"으... 으으윽...!"

조금만 있다간 모가지가 떨어져 나갈 판이었다.

한 마디를 내뱉은 거인이 지하의 수호자를 향해 왼팔을 내질렀다.

"죽어라."

그 거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동작이었다.

지하의 수호자가 겨우 두 팔로 칼을 막았다.

쨍!

그녀가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꺄아아악!"

그녀의 두 팔이 완전히 박살 나 오징어 다리처럼 늘어져 있었다.

"여보!"

거인은 부르짖는 창훈을 신경도 쓰지 않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이대로 있다간 아내가 정말로 죽는다.

그때 창훈의 머릿속에 수많은 벌레들이 지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시간이 멈췄다.

언뜻 듣기엔 그냥 붕붕거리는 소리였지만 집중해보니 목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한 서방.

그를 이렇게 부를 자야 지하의 수호자뿐이었다.

그런데 수호자의 목소가 무시무시한 격을 내뿜었다.

마신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던 것이다.

까무러치지 않기 위해, 창훈은 일부러 농을 섞어 대답했다.

- 그 서방 소리 좀 그만하면 안 돼요? 저는 마신 장모님 같은 거 둔 적 없어요.

지하의 수호자가 물었다.

- 알지? 이대로 있다간 이 아이는 죽어. 그래서 말이야, 나는 저 막돼먹은 외팔이 놈을 죽일 만한 힘을 불러올 거야.

- 그럴 수 있어요? 그러면 진작 그럴 것이지.

그때 화산정의 혐오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 그러면 안 돼 멍청한 놈아! 저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만한 힘을 네 아내가 오롯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 네? 그게 무슨...?

지하의 수호자가 호호 웃었다.

- 화산정의 혐오체, 똑똑하구나. 그래 그게 무슨 말이냐면 너도 같이 내 힘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화산정의 혐오체가 덧붙였다.

- 그러면, 너 역시도 전처럼 살지는 못할 거야. 니 아내처럼.

그녀의 목소리에서 제자이자 화신을 향한 한없는 애정이 느껴졌다.

목구멍으로 침이 꿀떡 넘어갔다.

창훈은 검은 숲의 목자의 독기 때문에,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내의 수발을 받으며 살던 때를 기억했다.

그때로 돌아가는 건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나마저도 온전치 못한 상태가 된다면, 아내는 누가 돌봐주지?'

그때 상원, 진아, 샤믹, 태성을 비롯한 서울역 수험자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돌봄이 필요할 때, 그들이 부부의 곁에 있었다.

창훈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 하겠습니다. 저놈을 해치울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화산정의 혐오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지하의 수호자가 말했다.

- 좋다. 무저갱을 연다.

화산정의 혐오체가 덧붙였다.

- 그래, 그게 너의 결정이라면 이 스승이 끝까지 도와주마.

다시 멈췄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콰광!

혜경이 있던 곳에서 갑자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 통에 공중에 높이 솟구쳤던 외팔 검신이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튕겨져 나가 버렸다.

"크아아악!"

벽에 혜경이 온몸에서 싯누런 오오라를 내뿜고 있었다.

"후우우우...."

그녀가 창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의 몸속에 가득 찬 기운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녀가 발을 디딜 때마다 땅이 쩍쩍 갈라졌다.

그렇게 창훈 앞에 선 그녀가 창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여보."

분명 지하의 수호자가 아닌, 아내의 목소리였다.

"좋아."

창훈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곧 창훈의 몸속으로 무겁고 눅눅한 기운이 노도처럼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