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216화 (216/230)

제216화. 일몰 (2)

생각과 기억의 까마귀가 씹어 뱉듯 말했다.

"잘도 여기까지 왔구나."

"그래, 덕분에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힘들었다."

상원은 왼팔에 마력을 잔뜩 불어넣었다.

포신 끝에 맺힌 강렬한 전격 에너지가 소용돌이쳤다.

상원이 그녀를 향해 대포를 겨누며 말했다.

"이제 끝내자."

혐오스러운 벌레라도 보는 듯 상원을 바라보는 저 지긋지긋한 얼굴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제아무리 드높은 절대자의 전령이라 해도, 마신의 힘이 담긴 '깊은 하늘의 대포'를 맞고 무사할 순 없다.

까마귀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밀랍 인형마냥 표정이 사라졌다.

그 얼굴이 상원이 지금껏 시험을 치르며 보아 왔던 그 어떤 마물보다도 소름 끼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니 마음대로는 안될 거다."

그녀가 새까만 날개로 몸을 감싸더니, 그대로 까마귀의 모습이 되어 날아가기 시작했다.

상원은 으드득 이를 갈며 대포를 쏘았다.

"어딜!"

거대한 격발음과 함께 포구에서 쏘아져 나간 시퍼런 포탄이 까마귀를 집어삼킬 듯 날아갔다.

쾅!

그러다 갑자기, 포탄이 빛나는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상원이 눈을 크게 떴다.

"!!"

이어서 난데없는 바람이 불어왔다.

마신의 힘이 담긴 포탄을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자, 바람과 함께 나타나는 자.

새하늘을 통틀어 그런 자는 단 하나뿐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상원은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외눈 현자."

새하늘 끝의 옥좌에 앉아 시험을 굽어보는 이, 이 시험의 정점인 절대자 '외눈 현자'.

그가 왔다.

바람결 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일세."

두 개의 필름을 이어 붙인 것처럼, 소울 프레임에 맞먹을 만큼 덩치가 커다란 거인이 나타난 건 한순간이었다.

외눈 현자였다.

그가 그 이름처럼 안대로 왼쪽 눈을 가린 채 오른쪽 눈으로 상원을 바라보았다.

수 없는 세월이 얹혀 쳐진 눈꺼풀 아래 그 눈빛이 세상 끝까지 꿰뚫을 듯 형형했다.

그대로 드러난 상체는 그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근육으로 꽉 차 있었는데, 상처가 촘촘히 새겨져 수 없는 세월을 견뎌온 바위 같았다.

상원이 목을 가다듬고 외쳤다.

"오랜만이오, 외눈 현자."

실물을 처음 본건 스물여섯 번째 시험의 서울역 광장, 카일 핸드레이크를 상대할 때였다.

외눈 현자, 본디 새하늘 제일의 무사였으며 새하늘 끝에 있다는 '지혜의 샘물'을 마시고는 우주의 원리까지 꿰뚫었다는 승천자.

무력과 마력 모두 정점에 달해 있는 이 존재를 상대하게 되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전생에는 그랬다.

하지만 시험을 끝장내려고 마음먹을 때부터, 상원은 외눈 현자와 맞서는 이 순간을 상상해 왔었다.

'역시 상상과 실제는 다르네.'

절대자의 강대한 격에 짓눌린 팔다리가 저려왔고 이마에선 식은땀이 송글 송글 흘렀다.

외눈 현자가 대답했다.

"그래, 우리가 만난 게 스물여섯 번째 시험이었지. 스물일곱 번째 시험이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그 짧은 세월이 왜 이리 길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어."

그의 목소리는 그 덩치에 어울리게 묵직하고 걸걸했다.

그 말마따나 그를 만난 후 아직 다음 시험을 치르기도 전이었는데, 세월이 몇 년은 흐른 것 같았다.

상원이 외쳤다.

"외눈 현자. 스물일곱 번째 시험은 없을 거요."

대답 대신, 외눈 현자가 가만히 상원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수험자가 반기를 들 거라고 말하는 데도, 외눈 현자에게선 어떤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외눈 현자가 물었다.

"어째서인가? 자네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을 텐데,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건가? 어째서,"

외눈 현자가 숨을 고르고 말했다.

"낙원을 망치려는 건가?"

그 말에 가슴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었다.

'낙원? 그게 낙원이라고?'

상원이 빠득 이를 갈고 물었다.

"외눈 현자, 아시오? 아니, 당신은 지혜의 샘물을 마셨으니 모를 수가 없겠지. 새하늘은 단지 승천자들이 단꿈을 꾸는 요람에 불과하다는 걸 말이오."

외눈 현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원이 힘주어 말했다.

"나는 그 거짓 구원을 거부하겠소."

외눈 현자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그래. 새하늘은 요람에 불과하지. 그런데 그 달콤하기 그지없는 꿈이, 과연 거짓일 뿐인가?"

상원이 살짝 쉰 목소리로 반문했다.

"외눈 현자, 꿈이 어떻게 진실일 수 있소?"

"그래서, 단지 자네가 거짓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이유 하나로,"

외눈 현자가 눈썹을 치켜들자 그의 단단한 이마에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 같은 주름이 졌다.

"저 많은 별들을 꿈에서 깨워서, 그 오수뿐인 곳에 던지려는 건가?"

외눈 현자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럴 수 없네. 누군가 그 시험을 깨지 않도록 하는 게 나의 일이야. 옥좌에 앉은 자의 숙명이라는 건 그런 것이지."

으드득, 상원이 이를 갈고 물었다.

"새하늘의 단물을 빨아 드시던 아버지의 존안을 보고서도, 그런 생각이 드셨소?"

"그래. 그러니 더더욱 그럴 수 없다는 게 아니겠는가?"

"싸워볼 생각도 하지 않고...."

외눈 현자가 상원의 말을 끊었다.

"너는 그럴 수 있겠지."

그의 목소리에는 나무의 단단한 심처럼 응축된 분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옥좌에 앉은 이는 그럴 수 없어. 새하늘에 오른 모든 이들의 꿈이, 그곳이 진짜 낙원이라 여기는 자들의 믿음이, 이 어깨 위에 있다."

외눈 현자가 상원을 향해 마법 문자가 잔뜩 새겨진 긴 창을 겨누었다.

한 번 겨눈 목표물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그 마법의 창이 상원의 숨통을 노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퉁 하는 소리와 함께, 외눈 현자의 등 뒤로 빛줄기 하나가 내려왔다.

'이번엔 또 누구야?'

그 빛줄기 속에는 상원이 익히 아는 사람이 있었다.

정말 사람이 맞나 싶은 거한, '천둥을 두른 대전사'의 화신인 천둥망치 군나르 인그로소였다.

상원은 스물다섯 번째 시험 '생명나무 제전'에서 군나르 인그로소를 처참하게 짓밟았었다.

'그 뒤로 폐인이 되어 두문불출했다고 들었는데.'

상원이 들은 소식 그대로, 군나르의 몰골은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정상급 보디빌더를 연상케 했던 조각 같은 몸은 지방이 잔뜩 끼어 뚱뚱한 소세지 같았다.

머리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고, 그나마 드러난 부분도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시뻘겠다.

화산의 바닥에 닿은 군나르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군나르의 신음 소리가 화산 내부에 쩌렁쩌렁 울렸다.

"끄어어어억."

오딘이 측은한 눈길로 군나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네가 망쳐버린 꿈 하나가 여기 있군."

한때 시험 최강의 수험자였던 군나르 인그로소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자였다.

그런 자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벌레처럼 짓밟혔으니, 저렇게 무너져버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다.

시험은 그런 것이니까.

상원이 이죽거렸다.

"마음이 아프시겠소? 차기 절대자로 점찍어두었던 자가 저런 꼴이 나버렸으니 말이오."

그때였다.

군나르가 상원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너... 너! 네놈 때문에! 네놈 때문이다!"

그의 입가에 게거품이 부글부글했다.

소울 프레임에 타고 있는 상원을 알아본 건 오메가 모드의 양팔에 흐르는 마신의 기운 때문일 터였다.

뒤이어 알 하나가 퍽 하고 터지면서 거기 들어있던 오렌지색의 끈끈한 액체가 군나르를 덮쳤다.

군나르가 액체에 쓸려 나동그라졌다.

"으윽!"

그리고 그 알에서, 미완성의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거인이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둔 걸인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군나르를 내려다보며 낮은 괴성을 냈다.

"그으으으으."

볼이 다 만들어지지 않아 드러난 턱뼈 사이로 맑은 침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기가 무슨 꼴이 날 줄 아는지 모르는지, 군나르가 황홀한 표정으로 거인을 올려다보며 광소를 흘렸다.

"흐흐... 흐흐흐흐."

군나르가 고개를 돌려 상원을 쏘아보았다.

"너... 죽여주마. 벌레처럼 짓뭉개주겠어."

거인이 손을 뻗어 군나르를 주워 입으로 가져갔다.

쩍 벌린 입속에 늘어선 날카로운 이빨들이 흉흉했다.

거인의 입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군나르는 희열에 찬 웃음을 흘렸다.

쩍!

거인이 군나르를 삼켰다.

거인이 턱을 오물거릴 때마다 끔찍한 소리가 고요한 화산 아래 가득 울렸다.

그 소리 한 번 한 번에 상원의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뭘 했길래... 수험자들이 저런 표정으로 거인에게 잡아먹히는 거요?"

외눈 현자가 대답했다.

"딱히 무슨 짓을 한 건 아니네. 단지 그들의 수호신에게 귀띔해줬을 뿐이지. 화신을 불의 거인에게 바치면 차원이 다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야."

파지지지직!

군나르를 삼킨 거인의 주위로 매서운 번개 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거인의 머리 주변으로 거대한 뿔이 자랐고, 미완성의 피부 위로 갑옷이 만들어졌다.

근섬유로 만들어진 허리끈이 허리를 감싸고, 뼛조각으로 된 망치가 오른팔에서 뻗어 나왔다.

"후으으으으."

그가 내뿜은 입김이 뇌운이 되었고 그 속에서 우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벼락이 일었다.

주신 중 최강을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자, 군나르의 수호신 '천둥을 두른 대전사'가 눈을 떴다.

천둥을 두른 대전사가 시퍼런 뇌전을 두른 눈으로 상원을 쏘아보았다.

"네놈이 감히."

오른손에 든 망치에 무지막지한 뇌전이 흘렀다.

그가 상원을 향해 발을 디디자 쿵 하고 땅이 울렸다.

그때였다.

난데없는 비명이 화산 가득 울렸다.

"끄아아아아악!"

이어서 분화구로부터 무언가가 거대한 게 쾅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 충격이 어찌나 큰지 그것이 떨어진 돌풍에 소울 프레임이 뒤로 날려갔다.

외눈 현자마저도 창을 들어 돌풍을 빗겨내야 할 정도였다.

잠시 후 흙먼지가 가라앉았다.

천장에서 떨어진 건 앞서 벽을 타고 올라갔던 '전갈 군신', 그리고 그와 한대 뒤엉켜 있는 무언가였다.

전갈 군신을 자그마한 강아지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로 커다란 그것이 두 팔로 전갈 군신을 땅바닥에 짓이겼다.

그제야 그것의 형상이 식별되었다.

성숙한 여인의 몸에 공룡처럼 긴 꼬리가 달려 있었고, 금속질의 광택이 흐르는 새파란 비늘이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그 모습이, 승천하기 직전 괴물이 되어가던 해원향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쩍!

그녀가 두 손가락을 전갈 군신의 가슴에 박아넣자, 잠시 바둥거리던 전갈 군신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것이 전갈 군신을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내던져버리고는 고개를 돌려 상원을 보았다.

새까만 머리칼 아래 분명한 이목구비는 상원이 아는 얼굴과 똑같았다.

"샤믹!"

그녀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때였다.

"이년! 그때처럼 짓밟아 주마!"

천둥을 두른 대전사가 괴성을 지르며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엔 그때랑은 달라.”

샤믹이 자신만만하게 받아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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