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일몰 (1)
혜경이 살짝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어둠이 장막처럼 그녀를 가렸다.
'이제 나도 이 몸을 비워야 할 때인가.'
엘가는 여덟 개의 다리를 튕겨 위로 살짝 뛰어올랐다.
의식의 경계면을 넘어가면서 첨벙 하고 물이 튀는 소리가 났다.
엘가는 의식의 위로 돌아왔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뒤틀리는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끄으으으으윽!"
왜인지 그 없는 정신에도, 엘가는 니드호그를 향해 울먹이며 달려오는 창훈이 똑똑히 보였다.
그 때문일까, 육체가 엘가의 통제를 벗어났다.
심장이 두근두근 거세게 뛰었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사지가 격렬하게 꿈틀대는 통에 날카로운 뼛조각들이 살을 찌르고 들어왔다.
엘가가 중얼거렸다.
"지... 진정해...."
하지만 허사였다.
엘가는 푹 한숨을 쉬었다.
'이제 정말로 놓아줄 때가 됐구나.'
엘가는 조용히 눈을 감고 혜경의 몸을 꾸물꾸물 빠져나왔다.
온몸의 살이 찢어지는 감각이 점점 멀어졌다.
이윽고 엘가는 손톱보다 작은 거미 한 마리의 모습으로 혜경의 뒷목에 붙어있게 되었다.
그 초라한 육신이 엘가의 몸이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마신의 전령이라 해도, 속세에서 엘가가 직접 만들 수 있는 몸은 이 정도가 고작이었던 것이다.
물론 쓸만한 몸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녀도 나글파르에 정착한 오디나스처럼 어둠의 힘을 받아 변이된 니드호그에 깃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금속질의 차가운 몸에 깃드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늘어진 혜경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는 엘가의 심정이 착잡했다.
보드라운 살결과 뜨거운 피로 이루어진 육신의 감각이 잊히지 않았다.
엘가는 지금껏 혜경을 놓아주지 않았던 데 그 미련이 영향을 미쳤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엘가는 눈을 꾹 감았다.
'그래, 저건 내 몸이 아니야.'
엘가는 니드호그에 깃들기로 마음먹고서는, 몸을 한 조각 한 조각 분해했다.
그렇게 가루가 된 엘가가, 잿더미가 바람에 흩날리듯 니드호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팔다리와 긴 꼬리 그리고 드넓은 날개까지, 엘가는 그 거대한 타이탄의 몸을 조금씩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명룡 때문에 몸이 부서지고 있는 건 똑같았지만 그나마 타이탄의 감각이 인체보다는 둔한 덕에, 혜경의 몸속에 있을 때보다 고통은 덜했다.
그렇게 니드호그에 빙의가 끝나가는 찰나였다.
완전히 종류가 다른 힘이 갑자기 엘가의 온몸을 사방으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몸뚱이가 찢겨 나갈 것 같았다.
'큭!'
문득 풍겨온 무덤의 축축한 흙냄새가 힘의 정체를 짐작케 했다.
연옥의 존재들이 풍기는 특유의 냄새, 이건 소환된 명룡이 매개물인 니드호그를 잡아당기는 힘이었다.
니드호그 안에 있을 때는 타이탄의 강철 육체가 엘가를 지켜주었는데, 연옥의 폭군의 힘에 그대로 노출된 지금은 가루가 되어버릴 판이었다.
'이대로... 끝나는 건가?'
그때 갑자기 끈적한 액체 같은, 너무나도 익숙한 힘이 밀물처럼 흘러들어왔다.
너무나도 익숙한, 그녀의 주인이자 모든 이에 밑에 있는 마신 '지하의 수호자'의 힘이었다.
연옥의 폭군에게 몸이 찢겨나가지 않도록, 주인의 힘이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
오디나스가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
'너의 그분은, 너를 많이 사랑하시나?'
지금 몸에 들어오는 이 힘은 그분의 분명한 사랑의 표시였다.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간다!'
그분의 힘을 등에 업고, 엘가는 연옥의 폭군의 힘을 조금씩 조금씩 밀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엘가의 감각이 명룡의 말단에 닿았다.
그 거대한 본드래곤의 날개, 꼬리, 뿔 하나하나가 모두 그녀의 몸이 되었다.
명룡에게 완벽하게 깃든 그녀가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쓰오오오오오!"
오디나스가 말했다.
- 축하한다 거미. 아니 이제는 도마뱀인가?
엘가가 웃으며 대답했다.
- 도마뱀이라니. 니 작품이잖아?
그때 가슴 깊은 곳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니드호그의 조종석 안에 있는 혜경의 움직임이었다.
엘가는 천천히 엎드려 니드호그의 조종석을 열었다.
'그래, 이제 가라.'
그러자 조종석에서 털썩 떨어진 혜경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이어 헐떡이며 달려온 창훈이 혜경을 끌어안았다.
창훈이 흐느끼며 물었다.
"괜찮아 혜경아?"
혜경이 창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푸라기처럼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 괜찮아."
대답하는 그녀의 피부 위로 혈관 몇 가닥이 벽을 오르는 담쟁이덩굴처럼 새까맣게 돋아 있었다.
웬일로 멀쩡하게 대답하나 싶었는데, 그녀의 몸속에 흐르는 그분의 힘이 그녀의 정신을 지탱하고 있던 것이었다.
혜경이 창훈의 품에서 얼굴을 들더니 연기가 솟아오르는 분화구를 보며 말했다.
"가자 오빠. 상원 씨가 우릴 불러."
혜경이 포옹을 풀고 분화구를 향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창훈이 비틀비틀 그녀를 따라가 손을 잡고 말했다.
"그래, 가자 여보."
그렇게 신들의 황혼의 진정한 주역들이 최후의 전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엘가는 분화구를 향해 걸어가는 부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금방이라도 나가버릴 것 같은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혜경과 지푸라기마냥 메마른 몸을 겨우 움직이는 창훈이 서로에게 기대 걷는 모습이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절벽 끝에 선 부부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어서, 그들이 나란히 분화구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들이 잘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제 엘가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단지 이 시험판에는 도저히 없을 것 같은 행운이라는 것이 그들의 편에 함께 하기를 바랄 뿐.
오디나스의 감상은 심드렁하기 짝이 없었다.
- 돌겠군. 요새 저기 뛰어드는 게 유행인가?
엘가가 피식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 대강령술사께서 체통에 어울리지 않게 농이 많으시네.
- 끌끌끌끌, 나도 속세에 물들었나 보다.
엘가는 고개를 들어 연기가 솟아오르는 하늘을 보았다.
새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의 하늘 위로 수많은 별들이 총총하게 뜨고 있었다.
지나치게 밝고 많은 별들, 그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엘가가 별을 헤며 말했다.
- 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불신자가 잘 해주어야 할 텐데.
오디나스가 대답했다.
-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 두 손 모아 기도라도 해야 되나?
- 명색이 제사장이었다는 사람이 말하는 게 그게 뭐야?
그때 분화구를 바라보는 엘가의 등 뒤에서 무시무시한 힘의 파동이 느껴졌다.
- 이번에는 또 뭐야?
뒤를 돌아본 엘가는 믿지 못할 광경을 보았다.
수많은 디아블로들이 꾸물꾸물 모여 거대한 형체를 이루기 시작한 것이었다.
벌레를 닮은 몸통에 길게 뻗어 나온 여섯 개의 다리와 길쭉한 꼬리가 차례차례 만들어졌다.
이어서 악마 같기도 하고 인간의 해골 같기도 한 머리가 만들어지더니 긴 포효를 내질렀다.
"오오오오오!"
그 포효에 홍염의 산을 둘러싼 비그리드의 원시림이 통째로 흔들렸다.
디아블로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그놈의 위용은 말 그대로 종말의 괴물 같았다.
어안이 벙벙해진 오디나스가 물었다.
- 어이, 도마뱀. 뭐냐 저거?
- 글쎄?
'저게 도대체 뭐야?'
전직 기관원이었던 엘가 자신조차도, 4등급 디아블로들이 융합해서 저런 괴물이 될 거라곤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앞발을 휘두르자 서울역의 타이탄 몇 대가 거기 맞고 그대로 터져버렸다.
그 덩치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문혁이 외쳤다.
- 전군, 물러나라! 전열을 정비한다!
문혁의 명령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타이탄 몇 대가 또 터져나갔다.
콰과과광!
이대로라면 서울역이 전멸할 판이었다.
이번에는 엘가가 오디나스에게 물을 게 있었다.
- 이봐 오디나스, 하나 물을 게 있다.
- 뭐냐?
- 너의 그분은, 너를 많이 사랑하시나?
- 뭐?
엘가가 전신에 마력을 돌리자, 그녀의 등 뒤로 귀기를 잔뜩 머금은 시퍼런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뼛조각 하나하나에까지 마력이 밀도 높게 들어찬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 아직 할 일이 남아있는 것 같다.
엘가가 드넓은 날개를 펴자 날개 사이 사이의 부식된 피막 아래로 비그리드의 바람이 들어찼다.
오디나스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 걱정하지 마시라고. 이쪽 그분도 사랑이 아주 두둑하시니까. 깜짝 놀랄 거야.
- 믿겠다.
"쓰오오오오!"
하늘을 향해 울부짖은 엘가가 날개를 움직였다.
명룡의 거체가 하늘을 가르며 종말의 괴물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 * *
상원은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에인하야르들이 대기하고 있던 동공 뒤로는 또다시 긴 통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화산 지하의 뜨거운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그와 함께했던 동료들은 모두 뒤에 남겨지고 이 공간에는 상원 홀로였다.
"역시, 결국은 혼자인 건가."
상원은 소울 프레임의 출력을 높였다.
하얗고 매끄러운 타이탄이 화산 지하의 통로를 빠르게 지났다.
그렇게 얼마쯤 날아가니, 마침내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천장에서 들어오는 옅은 빛이 그 공간을 비추었다.
10미터를 훌쩍 넘는 소울 프레임이 개미처럼 작아 보일 정도로 넓은 공간.
벽으로는 시뻘건 마그마가 줄줄 흐르고 있었고, 바닥에는 주황색 구슬들이 벌레의 알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 구슬 하나하나가 부화 중인 '불의 거인'이었다.
그 모습에 갑자기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 상원은 입을 가렸다.
"우욱."
7등급 마물들이 수백 수천 마리씩 배태되고 있는 건 다시 한번 보아도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때였다.
퉁 하는 익숙한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별빛 줄기가 내려왔다.
"누구지?"
이번에 내려온 건 새까만 정장에 어울리지 않게 변발을 늘어뜨린 남자였다.
변발의 끝이 뾰족한 게 전갈의 꼬리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역시도 상원이 익히 아는 자였다.
"전갈 군신."
길드 금자탑의 부길드장이자 주신 '혼란을 부르는 자칼'의 화신인 전갈 군신.
별빛을 따라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온 전갈 군신의 발이 땅에 닿았다.
그러자 주황색 알 하나가 쩍 갈라지며 그 속에 잉태되어있던 미완의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다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거인이 그대로 전갈 군신을 집어삼킨 것이었다.
거인의 손에 붙들린 전갈 군신의 얼굴은 황홀감에 가득 차 있었다.
"이런 미친."
분화하는 화산의 온갖 소음 속에서도 거인이 전갈 군신을 우적우적 씹어 먹는 소리가 유난히 분명했다.
거인이 전갈 군신을 꿀꺽 삼키자 가죽이 벗겨진 인간처럼 생겼던 놈이 자칼의 머리에 인간의 몸, 그리고 전갈의 집게발과 하반신을 가진 괴물로 변했다.
'혼란을 부르는 자칼'의 힘을 통해 육체를 변형시킨 것이었다.
놈이 마그마가 흐르는 벽을 기어올랐다.
다른 놈들이 더 깨어나기 전에 막아야 했다.
상원은 왼팔에서 '깊은 하늘의 대포'를 뽑아냈다.
그때였다.
"멈춰라, 불신자."
상원의 눈앞에 낯익은 존재가 나타났다.
토가를 걸친 여인이 새까만 날개를 펴고 상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절대자 '외눈 현자'의 전령 '생각과 기억의 까마귀'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