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4화. 홍염의 산 (4)
'이 목소리는?'
이건 분명 혜경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 몸을 엘가가 지배하고 있는 통에 의식이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을 테다.
오디나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떻게 말을 걸어온 거지?'
그런 의문과는 관계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정상에 있었다.
나글파르는 방금 전 괴물이 뚫은 커다란 구멍을 통해 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폭발음이 들렸다.
콰과과광!
홍염의 산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전히 싸우고 있는 타이탄과 디아블로들이 내는 소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글파르는 산의 시뻘건 외벽을 따라 정상으로 향했다.
외벽에는 나글파르가 그대로 들어갈 만큼 커다란 손자국과 발자국이 정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쾅쾅 소리가 이어졌다.
괴물의 손발이 외벽에 박히는 소리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괴물이 저 멀리서 산등성이를 오르고 있었는데, 어찌나 빠른지 그 거대한 덩치가 벌써 엄지손톱만큼이나 조그맣게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정상에 도착했는지 시야에서 아예 사라져버렸다.
그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
몸이 오디나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움직였다.
이 몸의 주인, 용제의 화신은 아직도 연옥에서 다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지가 몸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었다.
"허어."
오디나스는 힘을 빼고 몸이 움직이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얼마나 갔을까, 마침내 화산의 정상이 평탄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정상에 올라 보니, 멀리서 비좁게만 보였던 화산의 분화구는 그 가장자리의 둘레만도 축구장 몇 개를 이어 붙인 정도로 넓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공포감이 느껴질 정도로 거대하고 짙은 연기 기둥이었다.
'이런 걸 연기라고 하는 게 맞는 건가?'
차라리 악마의 몸뚱이라고 하는 게 더 신빙성이 있을 정도였다.
연기를 뿜어내는 분화구는 가장자리가 호가 아닌 직선으로 보일 만큼 컸다.
점점이 이어진 괴물의 손발 자국이 그대로 분화구로 이어졌다.
괴물이 분화구로 그대로 뛰어든 모양이었다.
"저길 그냥 뛰어들었단 말이야?"
아무리 에인하야르 따위는 깡통보다 쉽게 찌그러뜨릴 정도라 해도 저 분화구에 뛰어드는 건 자살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귀에 익숙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 끄아아아아악!
마신 '지하의 수호자'의 전령, 엘가의 비명소리였다.
"전직 기관원이 마신의 종이 되더니... 고생이 많군."
고개를 돌려 보니, 분화구의 가장자리 저쪽에 커다란 고치처럼 생긴 어둠 덩어리가 있었다.
니드호그에 탄 엘가가 펼친, '가장 높은 태양'을 감싼 어둠의 힘이었는데, 정말 말도 되지 않게 컸다.
"이거, 아까 그 괴물만큼은 되겠는데."
그 순간, 뱀의 똬리 사이로 거대한 손이 무덤을 뚫고 일어나는 좀비처럼 쑥 튀어나왔다.
피부가 완성되지 않아 군데군데 근섬유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난 손, 바로 '가장 높은 태양'이었다.
화들짝 놀란 오디나스가 뒤로 살짝 물러섰다.
'깜짝아.'
이어서 같은 자리에서 다른 손이 튀어나오더니 장막을 열어젖히듯 고치를 그대로 찢어버렸다.
그 바람에 힘을 전개하고 있던 엘가의 니드호그가 분화구 저 멀리 그대로 튕겨 나갔다.
그나마 분화구 속이나 바깥으로 떨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아까 서울역의 지휘관이 했던 수수께끼 같은 말이 생각났다.
'아펩은 결국 라에게 집니다만.'
아마 오디나스가 존재를 모르는 예언 같은 것일 게다.
그때 목구멍에서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외침이 불쑥 튀어나왔다.
"여보! 여보, 괜찮아?"
'허허, 이런.'
스피커에서 엘가의 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무슨 말이지?
오디나스가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이 몸의 주인이 빨리 몸을 되찾고 싶은 것 같다. 어이 거미, 괜찮나?"
- 괜찮다.
하나도 괜찮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완성되지 않은 매의 머리를 한 가장 높은 태양이 뜨겁게 불타는 숨결을 내뿜었다.
"후우우우우."
놈의 손끝에 작은 태양이 맺히고 있었다.
"어이 거미 아가씨, 보여? 저걸 맞으면 우린 그대로 통구이가 돼버릴 거야."
- 통구이라도 되면 다행이지. 구운 고기라도 남아 있잖아.
'이 여자, 농담도 하는 걸 보니 속세 생활에 맛이 들렸나 보군.'
피식 웃은 오디나스가 말을 이었다.
"신들의 황혼을 맞아서 할 일이 많을 줄 알았는데, 우리는 저놈 하나 쓰러뜨리는 게 끝일 것 같다."
- 쓰러뜨리기는. 그분의 힘으로도 잠깐 묶어두는 게 고작이었는데.
하지만 오디나스에겐 방금 전 공동에서 쓰려다 만 비장의 카드가 남아 있었다.
그때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손에도 태양을 맺은 '가장 높은 태양'이 니드호그를 향해 다가가며 낸 발소리였다.
가장 높은 태양이 노호성을 질렀다.
"벌레 같은 놈들이!"
'저쪽에 타신 분은 벌레 맞는데 말이야.'
오디나스가 입꼬리를 올리고 물었다.
"거미, 하나 물을 게 있다. 너의 그분은, 너를 많이 사랑하시나?"
- 무슨 소리냐 뜬금없이.
"빨리 대답해라. 중요한 문제다."
잠시 후 스피커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 많이... 사랑하실 거다.
분위기에 맞지 않게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 말, 사실이어야 돼. 왜냐면 그쪽 그분께서 이쪽 그분의 힘을 받아 주셔야 되거든."
오디나스가 씩 웃으며 일순간 마력을 폭발시켜 하늘로 솟아올랐다.
저 아래 가장 높은 태양의 두개골과 뇌가 보였다.
오디나스는 양손에 힘을 잔뜩 모아, 그 앞에 널브러진 니드호그를 향해 전력으로 쏘았다.
시퍼런 불줄기가 레이저 빔처럼 날아가 니드호그에게 꽂혔다.
갑자기 나타난 불줄기에 놀란 가장 높은 태양이 몸을 틀어 나글파르를 올려다보았다.
반쯤 썩어가는 듯한, 거대한 매의 얼굴이 노려보고 있는 모양새가 오싹하기 그지없었다.
"버러지가 또 있구나."
가장 높은 태양이 작은 태양이 맺힌 오른손을 휘두르려는 그 찰나, 널따란 분화구에 커다란 포효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쓰오오오오!"
마치 커다란 고래의 소리처럼 둔중한 소리였다.
이어서 난데없이 나타난 거대한 괴물이 가장 높은 태양을 덮쳐 쓰러뜨렸다.
가장 높은 태양보다도 훨씬 큰, 온몸에서 시퍼런 불줄기가 타오르는 본드래곤이었다.
그 본드래곤이 바로 연옥의 하늘을 누비는 대마물 '명룡'이었다.
본드래곤의 목과 몸통이 이어지는 그 부분에 니드호그가 끼어 있었는데, 본드래곤의 몸뚱이가 니드호그로부터 뻗어 나온 모양새였다.
오디나스가 준비했던 비장의 카드란 바로 명룡 소환이었다.
오디나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성공."
대강령술사 오디나스는 '연옥의 폭군'의 보우 하에 연옥의 망각에 집어 삼켜지지 않은 채로 속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연옥을 방문하고서 깨달은 강령술의 오의, 명룡 소환을 기억한 채로 말이다.
명룡 소환의 매개물이 된 엘가가 이를 갈았다.
- 오디나스... 너, 이런 짓을 하고도....
오디나스가 대답했다.
"사실이네 거미. 그쪽 그분은 너 무지무지 사랑하시나 보다."
모든 강령술이 그렇듯 명룡 소환에도 매개물이 필요했고, 그건 일반적인 강령술과는 궤를 달리하는 물건이어야 했다.
사람의 피와 살로 명룡을 부르려면 수백만으로도 모자랐을 게다.
그런데 눈앞에 마침, 무저갱을 다스리는 마신의 전령이 있던 것이다.
마신의 마력이라면 명룡을 소환하고도 남았다.
"으아아아악!"
명룡에게 깔린 가장 높은 태양이 비명과 함께 발악하듯 양손을 휘둘렀다.
작은 태양이 명룡의 날개에 부딪히며 섬광과 함께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쾅! 쾅!
태양이 그대로 폭발한 것 같은 섬광이 눈을 가렸다.
눈을 떠 보니 명룡의 두 날개와 앞발까지 폭발에 휘말려 사라져 있었다.
가장 높은 태양이 명룡을 밀어내며 외쳤다.
"흥! 고작 이 정도냐!"
하지만 그 정도론 명룡을 이길 수 없다.
오디나스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
가장 높은 태양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명룡의 몸뚱이가 순식간에 재생되어서였다.
"쓰오오오오오!"
하늘을 향해 울부짖은 명룡이 다시 달려들어 가장 높은 태양의 목을 물어뜯었다.
가장 높은 태양의 입에서 피거품이 흘리며 쿵 쓰러졌다.
'이대로면 놈을 이길 수 있다.'
오디나스가 외쳤다.
"좋아! 숨통을 끊어버려!"
가장 높은 태양이 죽어라 비명을 질렀다.
"끄으으아아악!"
가장 높은 태양이 작은 태양을 만들어 마구잡이로 명룡을 때렸지만 명룡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윽고 한순간, 명룡이 그대로 가장 높은 태양의 목을 끊어버렸다.
끊어진 목에서 콸콸 흘러나온 피가 분화구의 바닥을 적셨다.
주신을 쓰러뜨린 명룡이 오디나스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구멍 속에서 시퍼런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때 엘가가 물었다.
- 오디나스... 이거, 언제까지 계속되는 거냐?
소환의 매개물이 된 탓에,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뒤틀려 있었다.
"그거? 그쪽 그분의 사랑이 다 할 때까지."
- 미친 소리 하지 마. 지금 당장이라도 몸이 부서질 것 같으니까.
이어서 끄으으윽 하는 신음 소리가 들렸다.
온몸의 장기와 뼈가 그대로 뒤틀리는 걸 똑똑히 느끼는 것, 산 채로 소환의 매개물이 된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그때, 의지를 벗어난 목소리가 다시 한번 튀어나왔다.
"여보! 여보!"
오디나스는 고개를 들었다.
'아, 이제 나가야겠군.'
이제 곧 튕겨 나갈 것이다.
강제로 튀어 나가 불귀의 객이 되기 전에, 어딘가 깃들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 깃들기 정말 좋은 물건이 하나 있었다.
타이탄 나글파르.
오디나스는 지그시 눈을 감고 창훈의 몸에서 빠져나와 나글파르에게 빙의했다.
오디나스의 감각이 하반신이 없는 인형의 몸에 깃들기 시작했다.
나글파르가 이미 '연옥의 폭군'의 힘을 잔뜩 받아들인 덕에 거기 깃드는 게 매일 잠드는 침대에 눕는 것처럼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오디나스가 눈을 떴다.
이제 그는 나글파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디나스는 바닥에 착륙해, 조종석의 창훈을 손으로 받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손에서 내려와 털썩 엎어졌던 창훈이 잠깐 오디나스를 올려다보더니, 비틀거리며 명룡을 향해 달려나갔다.
"여보! 여보!"
오디나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저 멀리로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파란 별 하나가 떠 있었고, 그 옆으로 선명한 보라색 혜성이 긴 꼬리를 남기며 지나가고 있었다.
오디나스가 혜성을 보고 말했다.
- 오랜만이오, 용제.
* * *
엘가는 지독한 고통에 휩싸여있었다.
온몸의 뼈가 부서지는 것 같았고 그 사이로 '연옥의 폭군'의 이질적인 힘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입에서 침이 줄줄 흘러나왔다.
"끄으으으으윽!"
'나를 명룡의 매개물로 쓰다니! 오디나스가 이런 식으로 엿을 먹일 줄이야!'
그 덕에 가장 높은 태양을 물리칠 수는 있었지만, 그 사실이 고통까지 줄여주는 건 아니었다.
"흐으으으윽."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움직였지만, 주변의 뼛조각 때문에 몸이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 날 놔줘요.
"이건...!"
첨벙.
엘가는 의식 아래로 침잠해 들어갔다.
의식 아래 사방이 새까만 공간에서 엘가는 아라크노이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헝클어진 머리에 배설물로 더러워진 옷을 걸친 여인이 있었다.
이 몸의 주인, 송혜경이었다.
그녀가 엘가에게 다가서며 살짝 웃었다.
"고마워요. 사람들 앞에 이런 꼴로 나다니지 않게 해줘서."
엘가는 혜경의 몸속에 들어간 이후 혜경이 제정신을 차린 것처럼 연기했다.
그렇게 해서 서울역에 섞이는 게, 새하늘을 무너뜨리기는 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알긴 아는군. 그렇다면 내가 너를 떠나면 니가 어떻게 될지도 알 텐데?"
그새 이 몸에도 정이 든 것일까, 엘가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할 거다.""
"알아요."
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무섭지 않아요. 남편이 항상 옆에 있을 테니까."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여보!"
엘가는 의식 위로 올라왔다.
저 바깥에, 이쪽을 향해 비틀대며 뛰어오는 깡마른 남자가 보였다.
그 너머에는 타이탄 나글파르가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저건 나글파르가 아니라 오디나스였다.
'결국 사람의 몸을... 버렸군. 오디나스, 그런 선택을 한 건가.'
엘가가 물었다.
"진심인가?"
혜경이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엘가가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그래."
혜경이 엘가에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엘가가 덧붙였다.
"모든 이의 아래 계신 그분께서는 끝까지 너를 돌봐주실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