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213화 (213/230)

제213화. 홍염의 산 (3)

상원이 공동을 가득 채운 금빛 거인들 사이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어서 앞으로 나선 나글파르의 주위로 새파란 불꽃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샤믹은 나글파르에 타 있는 게 창훈이 아니라는 걸, 그 불꽃을 보고 한 번 더 확신했다.

단순하게 색깔 때문이 아니라, 그 파란 불꽃에서 창훈의 불꽃에선 느낄 수 없었던 시린 한기가 느껴져서였다.

'저 불꽃, 분명히 본 적이 있어. 거기가 어디였지? 아, 생각났다.'

거긴 이 세계 에키나르타의 수도 다림델이었다.

다림델 하늘에 나타났던 황성, 그걸 칭칭 감고 있던 '저승의 새'가 토해냈던 불꽃이 저것과 똑같았다.

창훈이 말했다.

- 다들 물러나라.

'그러고 보니 이 높낮이 없는 말투, 그때 들었던 '오디나스'와 똑같네.'

15번 시험의 보스, 대강령술사 오디나스.

불꽃의 기운과 목소리 모두, 저 특이한 타이탄의 파일럿이 창훈이 아닌 오디나스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창훈 씨는 어디로 가고, 그 사람이 왜 우리 편에서 싸우는 걸까?'

이해하기 어려운 이 상황은 아마 대장의 작품일 것이다.

도저히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이루어진다면, 그건 대개 상원이 한 일이었다.

그때 스피커를 통해 창훈의 아니, 오디나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오오오오오.

사람이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낮은 만트라가 동굴 속처럼 울렸다.

그러자 나글파르를 둘러쌌던 새파란 불꽃이 땅바닥으로 쑥 들어갔다.

이어서 땅바닥이 쩌적 갈라지며 백골로 된 짐승의 앞발과 등마루 그리고 뿔 달린 커다란 두개골이 튀어나왔다.

그 덩치가 어찌나 큰지 두개골이 에인하야르만 했다.

- 7등급 마물 스컬 드레이크!

- 잘 아는군.

오디나스가 잔뜩 놀란 스칼렛의 말에 심드렁하게 답했다.

'7등급이라고?'

7등급이면 일반 마물들 중 최고 등급인데, 오디나스가 그런 걸 부를 정도로 강하단 말인가?

오디나스가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크오오오오!"

스컬 드레이크가 에인하야르들을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소리를 지르더니, 그대로 놈들을 덮쳤다.

그 크고 강한 에인하야르들이 볼링공에 맞은 볼링핀처럼 쓰러지고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샤믹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대단하다. 역시 7등급...."

그때 오디나스가 핀잔을 주었다.

- 뭘 꾸물거리는 거냐? 구경만 하지 말고 도와.

- 네... 네!

화들짝 놀라 대답한 스칼렛과 카렌이 각각 힘을 전개했다.

스칼렛이 불러낸 거대한 별빛 전사들이 에인하야르들에게 달라붙었고 카렌이 쏘아낸 물의 화살이 에인하야르들을 꿰뚫었다.

"좋아, 나도!"

샤믹은 네 개의 팔에서 시퍼런 마력검을 뽑아냈다.

네 개의 팔을 놀리는 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힘으로 찍어누르면 되니까.

"간다!"

샤믹이 에인하야르들에게 달려들어, 가장 앞에 보이는 놈을 두 위팔로 내리찍었다.

놈이 도끼로 칼날을 받아내자, 놈의 발이 땅바닥에 푹 박혔다.

그때 다른 놈들이 기다렸다는 듯 샤믹을 둘러싸고 도끼를 내리찍기 시작했다.

샤믹은 그중 두 개를 나머지 팔로 받아내고, 꼬리를 휘둘러 뒤에서 다가오던 놈을 쳐냈다.

"방해하지 마!"

그렇게 다른 놈들을 떨쳐내고 나서, 샤믹은 처음 놈에게 네 개의 팔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놈이라고 네 개의 칼날을 모두 받아낼 순 없었다.

칼날이 갑주를 때릴 때마다 그 단단한 갑주가 조금씩 부서지더니, 한순간 칼날 하나가 부서진 갑주를 쑥 파고들었다.

그러자 둔중한 신음과 함께 에인하야르의 투구 속에서 퍼런빛이 흘러나왔다.

"그어어어억."

다음 순간 에인하야르가 빈 깡통이 찌그러지듯 쩌적 소리를 내며 갑주 채로 그대로 찌그러져 버렸다.

'이놈들, 속이 비었어?'

그때였다.

무지막지한 무게가 나가 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큭!"

한 놈을 잡기 무섭게 놈들이 떼거지로 나가 퀸에게 달라붙은 것이었다.

놈들의 막대한 질량이 조종석의 샤믹에게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젖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팔다리와 꼬리로 놈들을 튕겨내자 달라붙었던 놈들이 우당탕 쓰러졌다.

하지만 다음 놈들이 기다렸다는 듯 나가 퀸을 찍어 눌렀다.

한 번 또 한 번, 놈들을 튕겨낼수록 숨이 가빠지고 사지에 힘이 풀렸다.

그러다 한순간 나가 퀸의 골격이 우저적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경고, 나가 퀸의 손상이 심각합니다.]

나가 퀸이 문제가 아니었다.

"끄으으윽!"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고, 입으로는 피가 왈칵 솟구쳐 올라왔다.

눈앞이 흐려지고 감각이 점점 멀어져 갔다.

'안돼.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는데.'

문득, 샤믹은 정신을 잃었다.

* * *

샤믹이 눈을 뜬 건 살랑 불어오는 더운 바람 때문이었다.

눈을 떠보니 열대의 뜨거운 햇살이 그녀를 향해 내리쬐고 있었다.

그녀는 헛숨을 들이쉬며 몸을 일으켰다.

"헛!"

'방금 전까지 에인하야르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샤믹은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있는 곳은 높은 절벽 위였다.

그녀의 앞으로는 빽빽한 열대 우림이 쭉 이어지고 있었고, 그 너머로는 거대한 산맥이 몸뚱이를 드리우고 있었다.

절벽 뒤쪽으로도 열대 우림이 펼쳐져 있었다.

"여긴...?"

그때였다.

우르릉 소리와 함께 저 멀리 산맥이 몸을 일으켰다.

그 상상도 못 한 광경에 샤믹이 입을 떡 벌렸다.

"어?"

샤믹이 산맥이라고 생각했던 건 사실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여인의 몸뚱이였다.

그런데 그녀는 커다란 몸뚱이와는 달리 앳된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샤믹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동시에 따스했다.

'저 눈빛.'

샤믹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가라앉은 거인?"

그녀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신에 필적하는 힘을 지니고 있지만 너무 게을러서 화신을 아예 돌보지 않는다는 그 신이 저런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게으르기 짝이 없다는 수호신이 자기 공간에 화신을 부르다니, 정말로 탈락이 임박했단 생각이 들었다.

샤믹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껏 불렀을 때는 말 한마디 없더니, 죽기 직전에야 눈앞에 나타난 건가요?"

가라앉은 거인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미안해.'

샤믹은 수호신이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수호신과 화신은 그런 관계니까.

샤믹이 한숨을 쉬자, 가라앉은 거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툭 떨궜다.

그제야 샤믹은 수호신이 낯선 물건을 감싸 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새파란 구슬이었는데, 그 안에서 긴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샤믹은 수호신의 커다란 팔로도 다 감싸지지 않는 그 새파란 구슬이 무엇인지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오랜 땅의 이무기'의 힘이군요."

수호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의 진정한 주인, 흑천교주 해원향이 샤믹에게 먹였던 내단이 저런 형상으로 있는 것이었다.

그때 구슬 안의 뱀이 꿈틀 몸을 움직이자, 어마어마한 진동이 공간 전체를 뒤흔들었다.

"꺅!"

샤믹이 새된 비명과 함께 엉덩방아를 찧었다.

수호신이 얼굴을 잔뜩 구기며 구슬을 더 세게 감싸 안자, 구슬을 감은 두 팔에 우저적 균열이 갔다.

샤믹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설마 지금까지... 그걸 계속 안고 있던 거에요?"

수호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았던 수호신이 사실은 저 무시무시한 마신의 힘을 몸이 부서지도록 억눌러 왔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왜 그런 거예요... 바보같이...."

가라앉은 거인이 천천히 대답했다.

"이건... 위험해...."

천둥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에 샤믹이 귀를 막았다.

그녀의 수호신이 지금껏 침묵했던 게 사실은 기도에 화답하면 화신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호신이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젠 막지 못할 것 같아. 미안해."

다시 한번 그림자가 몸을 꿈틀거리자 그녀의 팔 일부가 투둑 부서져 나갔다.

순간 울컥하고 울음 같은 게 치밀어 올랐다.

"괜찮아요 이제. 그걸 놓아주세요."

가라앉은 거인의 얼굴이 쓸쓸했다.

"많이 아플 거야, 샤믹."

"상관없어요."

샤믹은 자신의 가엾은 수호신을 향해 입꼬리를 끌어올려 보였다.

"당신이 계속 저를 지켜 주실 테니까. 그렇죠?"

수호신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수호신이 두 팔을 벌려 구슬을 놓자, 구슬이 쩌적 하고 갈라지더니 그 안에 있던 거대한 그림자가 똬리를 풀고 하늘로 서서히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가라앉은 거인이 꼬마로 보일 정도로 거대한 용이었다.

저 용, 승천하는 해원향의 모습이었다.

샤믹은 내단을 먹여 자기를 반 괴물로 만들어 버린, 치가 떨리는 그 이름을 불렀다.

"해원향!"

빠드득 이가 갈렸다.

시퍼런 비늘에 꼬리를 단 파충류 인간이 되어버린 게 전부 저 여자 탓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에서 똬리를 튼 용이 무심하게 말했다.

- 나는 '인식의 경계'. 오랜 땅에 남으신 이무기의 사도일지니.

샛노란 용안이 샤믹에게 박혔다.

- 너에게 오랜 땅의 힘을 내리노라.

샤믹이 외쳤다.

"그래! 해 봐!"

그녀의 가슴 속에서 분노와 함께 뜨거운 기운이 용솟음쳤다.

"내가 괴물이 되어서라도... 니년이 있는 그 하늘을 박살 내줄 테니까!"

샤믹의 주변으로 매서운 폭풍이 일었다.

주변의 풍경이 산산이 깨졌다.

* * *

그 순간, 타이탄 나글파르에 탄 오디나스는 안타까운 눈으로 나가 퀸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인하야르들이 떼를 지어 나가 퀸을 짓누르는 모습이 무덤이 따로 없었다.

'생매장이라도 시키려는 건가.'

에인하야르들 사이로 삐져나와 꿈틀거리던 나가 퀸의 꼬리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당장 가서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기는 '스컬 드레이크'를 움직이는 것만도 벅찼으니까.

오디나스가 메마른 한숨을 쉬었다.

"하아."

스승에 대한 질투심에 눈이 멀어 새하늘 아버지라는 괴물에게 신민들을 팔아넘긴 죗값을 치르는 일, 그 일을 함께할 사람 하나가 그렇게 연옥으로 떠났다.

저자가 없으면, 자신을 포함한 세 사람이 에인하야르들에게 도륙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대로는 안 된다.'

오디나스가 단전에서부터 힘을 끌어올리자 나글파르가 새파란 불꽃에 휩싸였다.

비장의 카드를 써야 했다.

"지금 쓰려고 모아둔 힘이 아닌데."

그때였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무덤처럼 쌓여있던 에인하야르들이 모조리 튕겨 나갔고, 뒤이어 비명에 가까운 포효가 널따란 동공에 쩌렁쩌렁 울렸다.

"끄아아아아악!"

이어진 엄청난 풍압에 오디나스는 얼굴을 가렸다.

"크윽!"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오디나스는 믿지 못할 광경을 보았다.

난데없이 나타난 시퍼런 괴물이 공동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덩치가 어찌나 거대한지 에인하야르 수십 기가 서 있던 공동이 비좁아 보일 지경이었고, 그 밑에 깔린 에인하야르들은 한순간 모조리 깡통이 되어버렸다.

괴물의 샛노란 눈이 오디나스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은 분명 그 여자의 것이었다.

오디나스가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갑자기 괴물이 오디나스의 옆으로 거대한 팔을 날렸다.

그러자 단단하기 그지없는 홍염의 산의 등성이가 거짓말처럼 뚫렸다.

이어서 괴물이 양손으로 바위벽을 긁어내고는 산 밖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오디나스는 이 높다란 동공이 사실은 괴물의 가슴 두께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괴물이 지나간 자리로는 타이탄들이 조그맣게 보일 정도로 널따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밖으로 타이탄들과 디아블로들이 맞붙는 전장이 보였다.

괴물이 분화구로 올라가는지 동공이 쿵쿵 울리며 흙먼지가 후두둑 떨어졌다.

그때 오디나스의 귓전을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 도와줘 여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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