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홍염의 산 (2)
'깊은 하늘의 대포'가 쏘아낸, 소용돌이치는 번개로 이루어진 마력탄이 디아블로 떼를 향해 쇄도했다.
거기엔 행성 '돌로라크'의 드넓은 하늘을 모조리 찢어버렸던 대정령의 힘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일전 우트가르드로 가는 길에 상원을 막았던 디아블로들은 이 마력탄에 모조리 가루가 되어버렸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놈들이 일제히 입을 벌리고 분홍색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히 본 적이 있는 광경이었다.
상원이 이를 갈며 말했다.
"이거... '실낙원의 방어막' 이군!"
디아블로들이 에너지를 모아 만든 분홍색 방어막인 '실낙원의 방어막'에 에너지탄이 부딪혔다.
이어서 출렁하고 방어막이 흔들리면서 에너지탄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그 짧은 사이에 디아블로들은 '깊은 하늘의 대포'에 대한 대응책을 준비해온 것이다.
'놈들, 벌써 대응책을 가져왔군. 맞아, 놈들이 괜히 4급이 아니지.'
디아블로는 그 유연하기 그지없는 적응력으로 유명한 놈들이었다.
전생에 같은 편일 때는 든든했는데, 막상 적이 되니 그 적응력이 그렇게 골치 아플 수가 없었다.
그때 스피커가 울렸다.
- 생각하는 대로 잘되지 않으시나 봅니다. 보니까 놈들이 소울 프레임에 대한 대비책을 단단히 들고 나왔나 봅니다만.
문혁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살짝 묻어났다.
상원도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쉽지 않네요."
- 그렇다면 이 수많은 타이탄에 대한 대비책까지 들고 나왔나 확인해보지요.
이어서 스피커를 통해 문혁의 명령이 흘러나왔다.
- 전군, 발포.
콰과과과광!
묵직한 명령에 이어 수많은 스킬들이 디아블로들을 향해 쏟아졌다.
깊은 하늘의 대포에 대비해 만든 방어막은 그 다양한 스킬들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는지, 방금과는 달리 금세 뚫려버렸다.
이어서 근접전용 타이탄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빼어 들고 놈들을 향해 돌격했다.
그때였다.
둥!
하늘에서 북을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화산 연기로 뒤덮인 하늘에서 선명한 빛줄기 하나가 분화구 안으로 쏟아졌다.
'저 별빛!'
상원은 하늘에서 분화구로 이어진 빛줄기를 확대해보았다.
그 빛줄기 안에서 한 남자가 하늘로부터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처럼 새하얀 치마 한 장만을 두른 근육질의 남자는 사람 대신 날카로운 매의 머리를 달고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 어찌 그를 잊겠는가?
상원은 그의 이름을 씹어뱉듯 말했다.
"태양매."
그는 주신 '가장 높은 태양'의 화신이자 시험 최강의 수험자 중 하나, 초대형 길드 '금자탑'의 마스터인 '태양매'였다.
그에게 원한이 있는 스칼렛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 태양매! 저놈이 어째서 여기...!
하늘에서 내려오던 태양매가 서울역의 수험자들을 보더니 비웃음을 흘렸다.
- 새하늘의 진정한 힘을 거부하고서는.... 애쓰는구나 하찮은 놈들이.
아주 먼 거리에서 중얼거린 말인데도 한 음절 한 음절이 귀에 똑똑하게 박혔다.
이어서 태양매의 모습이 화산이 뱉어낸 새까만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진정한 힘'이라니? 힘이라면 모자랄 일 없는 주신급인 태양매가 진정한 힘 운운할 게 있나?'
갑자기 머릿속에 괴물 '격풍'이 되어버렸던 카일 핸드레이크의 모습이 스쳐 갔다.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설마."
쾅!
갑자기 분화구에서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시꺼먼 연기 덩어리가 토사물처럼 쏟아져나왔다.
이어서 분화구로부터 튀어나온 무언가가 분화구의 가장자리에 걸렸다.
자세히 보니 시뻘건 손이었다.
"젠장."
전생, 49번 시험 마지막 퀘스트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화산 지하에서 잉태된 '불의 거인'들이 화산 밖으로 기어 나오던 모습이 저것과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쪽 손에 이어서 다른 손이 튀어나와 분화구의 가장자리를 붙잡았다.
그다음으로 팔꿈치와 어깨, 그리고 머리가 쑥 튀어나왔다.
매의 머리가 반쯤 녹아내린 것 같은 모습이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그 밑으로 드러난 몸뚱이도 머리와 마찬가지로 미완성이었다.
미처 다 만들어지지 않은 피부밑에 밧줄 같은 근섬유 하나하나가 도드라지는 근육과 대리석처럼 새하얀 뼈가 드러나 있었고 그 아래로 미완성의 내장이 꿈틀거렸다.
천천히 구덩이에서 기어 나온 거인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 으오오오오!
상원은 그 익숙한 포효를 듣고 직감할 수 있었다.
"신의 몸."
저것이 바로 승천자 '가장 높은 태양'이 신의 몸뚱이 속에 깃든 모습이었다.
가장 높은 태양, 그 오만하기 짝이 없는 주신이 미완성의 몸뚱이에 부랴부랴 깃든 모습을 보니 기관 측도 급하기는 급한 모양이었다.
기관도 절대자도, 상원이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치지지직!
포효 속에 담긴 막대한 격에 영향을 받은 스피커에서 잡음이 흘러나왔다.
그 뒤로 수험자들의 탄식이 이어졌다.
"저게 뭐야."
"아아... 맙소사."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거대한 화산 연기 기둥을 등지고 선 가장 높은 태양이 뜨거운 콧김을 내뿜었다.
이어서 놈이 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자, 손끝에 시뻘건 불덩이가 맺히기 시작했다.
가장 높은 태양이 그 권능으로 만들어낸 작은 태양이었다.
- 죽어라!
놈이 던진 불덩이가 이쪽으로 날아왔다.
탄속을 빠르지 않았지만 문제는 폭발력이었다.
가장 높은 태양이 육신을 통해 직접 발하는 저 작은 태양의 폭발력은 핵폭발 정도는 우스운 수준일 테니까.
이 중에서 저 스킬에 가장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상원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답은 금방 나왔다.
"엘가!"
- 알겠다.
짧은 대답과 함께, 엘가가 탄 타이탄 '니드호그'가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니드호그가 태양에 부딪힌 그 순간, 니드호그의 등 뒤에서 마치 뱀단지에서 기어 나오는 독사 떼처럼 꾸물꾸물 기어 나온 어둠이 태양을 집어삼켰다.
엘가가 끌어온 마신 '지하의 수호자'의 힘이었는데, 한 줌 볕도 들지 않는 무저갱의 어둠은 역시나 태양과는 상극이었다.
무저갱의 어둠이 새로 생긴 태양을 삼킨 탓에 어둠이 사위를 뒤덮었다.
이어서 태양을 삼킨 어둠이 니드호그까지 같이 삼키더니, 그대로 거대한 뱀의 형상이 되어 가장 높은 태양을 향해 쇄도했다.
저 거대하고 새까만 뱀은 '지하의 수호자'의 다양한 형상들 중 하나였다.
문혁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 가장 높은 태양을 집어삼키는 뱀... 아펩이군요.
아펩은 코브라의 형상을 한,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라의 숙적이었다.
"맞습니다."
'라'를 원형으로 하는 가장 높은 태양을 향해 달려드는 독사 모양의 어둠 덩어리는 그 독사의 이름을 붙여도 모자라지 않은 위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새까만 어둠의 독사가 가장 높은 태양을 묶고 똬리를 틀었다.
이어서 엘가가 지르는 처절한 비명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 끄아아아악!
비록 상극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마신의 일개 전령에 불과한 자신이 거인의 육신에 깃든 주신을 묶고 있는 게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걱정에 찬 문혁의 말이 이어졌다.
- 아펩은 결국 격퇴됩니다만....
"그렇지만 그전까지 시간이 있지요."
지금 엘가가 벌어준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된다.
지금 상원의 편에 선 승천자는 서울역과 그 동맹들, 그리고 바빌론의 수호신들이 전부였다.
서울역에 병합되지 않은 올림포스의 승천자이나 금자탑의 나머지 승천자들 같은 괴물들이 강신의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육신을 되찾기 전에 막아야 했고,
그러려면 지금 당장 저 디아블로 떼를 뚫고 화산으로 진입해야 했다.
상황이 머릿속에서 정리되었다.
나머지 타이탄들이 디아블로 떼를 붙잡은 사이, 정예들을 이끌고 화산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상원은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인원은 디아블로들을 무시하고 저와 함께 화산으로 진입합니다. 창훈, 만웅, 스칼렛, 카렌, 정수, 상중. 문혁 씨, 나머지 타이탄들을 지휘해서 디아블로들과 맞서 주십시오. 이상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을 대신해서 문혁이 짧게 대답했다.
- 알겠습니다.
'좋아.'
상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끝없는 땅의 검' 끝을 화산 기슭에 있는 조그만 동굴에 겨누었다.
화산이 하도 커서 잘 보이지도 않는 그 동굴이 화산의 입구였다.
상원은 등 뒤에 마력을 모았다가, 화산 입구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공기마저 태워버리는 마검의 열기가 소울 프레임의 앞에 거대한 화염막을 만들었고, 디아블로들이 홍해처럼 갈라졌다.
그리고 상원은 디아블로 떼를 순식간에 지나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곧 시꺼먼 어둠과 눅눅한 열기가 온몸을 뒤덮었다.
잠시 후, 상원은 숨을 고르고 뒤를 돌아보았다.
"후우."
수백 대의 타이탄들이 디아블로들과 부딪히고 있었다.
* * *
얼마나 기다렸을까, 곧이어 타이탄 하나가 동굴 속으로 들어왔다.
네 개의 팔에 긴 꼬리를 늘어뜨린 '나가 퀸'이었는데, 온몸에 디아블로의 체액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가 퀸에 탄 샤믹이 말했다.
- 헉, 헉.... 와 대장, 진짜 빠르네요.
이어서 다른 타이탄들이 나타났다.
스칼렛의 초록 '대붕'과 카렌의 푸른 '창룡', 그리고 동굴 입구를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나글파르'까지.
그런데 그 후로 타이탄이 더 나타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고생했습니다 여러분. 나머지 분들은 오시는 중입니까?"
나글파르에 탄 오디나스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 나머지는 디아블로들한테 잡혔다. 그놈들 지독하더구만.
'이런.'
정예 인원들이라면 그놈들을 충분히 뚫고 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사이 놈들이 정예 인원들에게도 적응을 해버린 모양이었다.
그때 동굴 안쪽에서 둥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필시 신의 육체를 가질 또 다른 수험자들이 화산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였다.
증원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갑시다."
상원은 동굴 안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조금 가니 거대한 공동이 나타났다.
거기엔 마주치고 싶지 않던 놈들이 수험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금빛 갑주를 전신에 두른 거인, 기관의 5등급 전투원 '에인하야르' 들이 적어도 수십 대는 되어 보였다.
개활지였다면 저 느린 놈들을 따돌리고 지나쳤을 텐데, 공동이 비좁은 탓에 놈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 우우우우.
놈들이 느릿느릿 수험자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놈들은 신기급 타이탄의 공격은 가볍게 씹어버리는 맷집과 한 방에 타이탄을 부숴버리는 힘을 갖추고 있었다.
종말의 팔랑크스마저도 놈들의 갑옷을 뚫지 못했다.
하지만 최강의 타이탄 소울 프레임이 발휘하는 마신의 힘도 그렇게 막아낼 수 있을까?
"흥!"
상원은 놈들을 향해 '깊은 하늘의 대포'를 쏘아냈다.
시퍼런 에너지탄이 가장 앞에 오던 놈에게 작렬했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이 걸친 흉갑이 깨지며 놈이 그대로 쿵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 오오! 역시 대장!
샤믹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였다.
공동의 반대편, 에인하야르들 너머에서 거대한 포효가 들렸다.
- 오오오오오!
두 번째 거인이 준비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놈들을 하나하나 잡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젠장!"
그때 오디나스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 안으로 들어가라. 너는 여기서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이어서 다른 타이탄들을 제치고 나간 나글파르의 온몸에서 푸른색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글파르를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진동이 공동을 가득 울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 마력, 필시 오디나스가 굉장한 술법을 준비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알겠다."
상원은 에인하야르들의 사이를 재빠르게 달려 공동 반대편 출구로 접어들었다.
그 뒤로 쿵쿵거리는 소리와 거인들의 고함이 이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