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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210화 (210/230)

제210화. 신들의 황혼 (8)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키 큰 사람이 주조종실 문간에 기대 서 있었다.

햇살을 등지고 서서 그림자가 생긴 탓에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 실루엣이 어딘가 익숙했고 말투는 더 익숙했다.

상원은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그 인영의 정체를 찾아냈다.

"'기계장치의 신'."

그는 상원에게 의체 '신화의 몸'을 주었던 승천자, 옥좌의 탈환을 노리는 선대 절대자 '기계장치의 신'이었다.

그가 주조종실 안으로 들어오자 날아가 버린 천장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를 비추었다.

그는 현생에서 탈락하고 연구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꾀죄죄한 연구복을 걸친 깡마른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이 모습으로 보는 건 더 오랜만이지?"

상원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네요. 웬일로 오늘은 태엽 박은 다람쥐로 나타나지 않으셨군요."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기계장치의 신이 이를 드러내며 껄껄 웃었다.

"알잖아. 여기 비그리드는 새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별이야. 그러니까 나도 원래의 모습으로 있는 데 부담이 없는 거지. 새하늘의 에너지가 흘러들어오니까."

"그렇겠군요. 새하늘에서 멀지 않으니 원래의 모습으로 있기도 쉽겠지요."

"맞아."

상원의 말에 대답한 기계장치의 신이 부서진 스크린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더니, 쓰러진 솔미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솔미르 이븐 왈리 바라드. 원래대로라면 무기고 앞을 지키는 괴물이 됐어야 할 친구가... 인간의 모습으로 죽었군."

이어서 그가 뒷짐을 지고 다 부서진 스크린을 올려다보았다.

"네트워크 타나스도 말이야. 아버지께 침식돼서 시험의 수족이 됐어야 했는데, 나름대로 의지를 지키고 있네."

쯧, 하고 혀를 찬 기계장치의 신이 상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처음에는 '일곱별의 왕관' 완성해서 새하늘에 올려보낼 생각이었지. 그런데 말이야, 지금 보니까 그것보다 엄청난 것들을 하고 있잖아. 끌끌끌, 대단하군 대단해."

상원이 가볍게 팔짱을 끼고 물었다.

"최근 들어 레벨이 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건 위업이 아닌가 보죠?"

"알잖아? 레벨업 시스템은... 드높으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런 거 위업으로 치지 않으신다고."

그렇다.

새하늘에 있는 수많은 위업들은 모두 누군가를 물리치거나 아이템을 독식하는 것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게다가 시험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면 솔미르가 괴물이 되는 신세를 벗어나는 일이 일어나는 건 고려의 대상조차 아니었을 테니 상원이 한 일은 위업으로 책정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기계장치의 신이 물었다.

"그래, 그래서. 27번 시험이 시작도 안 했는데, 우주 도시 핌불베르트를 비그리드에 추락시키겠다는 정신 나간 생각을 한 건 예언 때문이겠지?"

"그렇습니다."

기계장치의 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때 말했던... 타나스는 알고 있지만 너는 모른다던 그 예언, 그걸 찾았구나."

고개를 끄덕인 상원은 브라카다의 장서관에서 보았던 '신들의 황혼'의 내용과 그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50번 시험이 되기 전에 '묵시록의 용'을 완성하면 그 용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장막을 불살라 새하늘의 승천자들을 모조리 땅에 거꾸러뜨린다는 것.

그러면 마신의 군대를 이끌고 승천자들을 물리칠 수 있으며, 그런 뒤에는 새하늘 아버지를 직면하게 되리라는 것.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기계장치의 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리고 이야기가 다섯 마신의 힘을 모으면 새하늘 아버지를 무찌를 수 있다는 데까지 갔을 때, 기계장치의 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기계장치의 신이 씹어뱉듯 말했다.

"염병, 캡팃 플래닛이야? 다섯 마신의 힘을 하나로 모으면...."

흥분해서 말을 뱉은 기계장치의 신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어쨌든 내용 들어보니 신빙성은 있는 것 같고, 계획 보니까 승천자 나으리들 잡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말이야, 다섯 마신 힘 모으는 거 그거 어떻게 할 건데?"

상원의 얼굴이 굳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에 대한 뾰족한 대답은 없었으니까.

기계장치의 신이 한숨을 푹 쉬었다.

"세상 끝의 불꽃, 그거 하나 소환하는 데도 '므깃도' 내핵에 있는 드래곤의 몸뚱이가 필요한데, 마신 다섯을 한 번에 받을 수 있는 육체 같은 게 시험 우주에 있을 것 같냐?"

'그렇지.'

상원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기계장치의 신도 곰곰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섯 마신을 한 번에 받을 수 있는 육신... 그런 게 있을까?'

기억의 궁전으로 잠겨 들어가 저장된 기억을 닥치는 대로 읽어보았지만, 그에 가까운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때 기억의 궁전 안으로 기계장치의 신의 목소리가 들려온 통에, 상원은 정신을 퍼뜩 차리고 기계장치의 신을 마주 보았다.

"그래도 말이다, 불신자 선생 말 들으니까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 것 같네."

기계장치의 신이 씩 웃고 있었다.

"방법이... 있는 겁니까?"

"응."

기계장치의 신이 얼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법이 있다는 건 좋은 소식이었다.

'이 양반... 청소부들에게 쫓겨 수호 계약마저도 할 수 없는 신세잖아?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상원의 생각이 실마리를 찾았다.

지금껏 기계장치의 신이 해온 행동들을 생각해보면 답은 단 하나였다.

바로 신화의 몸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었다.

상원이 한껏 밝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신화의 몸을 더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겁니까?"

기계장치의 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데 그 대답에 머리를 스치는 걱정이 있었다.

탈신 모듈 하나 탑재하는 데도 20이라는 레벨이 필요했다.

그런데 다섯 마신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려면 도대체 얼마나 높은 레벨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 레벨에 도달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인가?

그러면 그때는, 새하늘 아버지를 물리치기에 너무 늦는 것 아닌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첫 번째 것부터 차근차근 풀어보자.'

상원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레벨을 얼마나 올려야 합니까?"

"응? 레벨업 필요 없어. 지금까지 심었던 것들... 뭐 강신회로나 탈신모듈 같은 거 심는 데는 레벨이 필요했지만, 이번 건 그렇지 않아."

"그렇습니까?"

"그래. 이번 거는 레벨업 같은 걸로 커버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게 무슨...?"

기계장치의 신이 손을 내밀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나도 생각을 정리해야 돼. 조만간 연락할게.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때까지 부디 무사하라고."

"아니, 이봐요...."

상원이 손을 내미는 찰나 기계장치의 신이 홀연히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었다.

주조종실 문의 구석으로 쪼르르 사라지는 다람쥐의 꼬리가 보였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허."

다섯 마신의 힘을 한 몸에 담을 수 있는 방법, 그게 있다고는 했다.

의체를 만들어준 승천자 기계장치의 신은, 그게 무엇인지는 이야기하지 않은 채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다시 응답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아니다.'

198시간 20분, 타나스의 대답이 상원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 안에 기관의 삼엄한 방어선을 뚫고 홍염의 산 지하 불의 연못에 닿아야 했다.

'일단 할 수 있는 걸 하자.'

상원은 소울 프레임을 불러 타고 우트가르드로 돌아갔다.

* * *

몇 시간 뒤, 서울역의 중앙지휘본부.

상원과 문혁이 전술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주조종실에서 돌아온 상원은 그대로 중앙지휘본부로 와 우트가르드에서 홍염의 산에 이르는 지도를 그렸다.

전술적인 차원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지형 정도는 모두 기억하고 있었기에, 전술 지도를 그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옆에는 상원이 노트에서 본 내용과 전생의 기억을 바탕으로 그린 홍염의 산 방어 시설의 내부 그림이 있었다.

문혁이 머리를 싸매고 말했다.

"49번 시험의 클리어 조건이라는 게... 그러니까, 이 시설을 190... 시간 안에 공략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신들의 몸이 완성되기 전에 홍염의 산을 공략하려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거짓말.

문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거 그냥 시설이 아니라 요새인데요. 진입로도 좁고 방어 시설도 촘촘하고 기관의 병력도 많고...."

"그래도 아까 봤던 에인하야르는 없습니다."

"그것참 위로가 되네요."

허허 웃은 문혁이 덧붙였다.

"그래도 이 정도 되니 49번 시험이겠죠. 어땠습니까 상원 씨, 전생에 이거 할 때는... 그때도 어려웠습니까?"

"그렇다마다요."

49번 시험은 정말로 어려웠다.

그런데 그 시험이 지금 할 일보다는 쉬웠다.

그때 수험자 하나가 지휘본부의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상원 씨, 누가 상원 씨를 찾아왔어요."

상원과 문혁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반문했다.

"예?"

누군가 상원을 찾아오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지구가 아니고 아예 다른 항성계의 외계 행성인데, 누가 여기를 찾아온단 말인가?

'누구지?'

필시 보통 수험자는 아닐 것이었다.

전갈을 받은 상원은 서울역 광장으로 달려나갔다.

광장에 뜻밖의 인물들이 서 있었다.

휘둥그런 눈으로 주변의 풍경을 보며 서 있는 사람들, 그들은 다름 아닌 '바빌론'의 길드원들이었다.

그들의 선두에 서 있던 정장 차림의 여자, 주신 '천정의 재판관'의 화신인 지치지 않는 법률가 스칼렛 이베르손이 상원에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바빌론의 길드장인 그녀의 옆에는 부길드장, 주신 '지혜로운 해결사'의 화신 카렌 스나이더가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스칼렛이 물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나요?"

"그럼요. 오랜만입니다, 스칼렛."

'그런데 이 사람들이 여기 왜 있는 거지?'

"바빌론이 왜 여기 온 건지 궁금한 것 같은데...."

카렌의 말에 스칼렛이 덧붙였다.

"천정의 재판관과 지혜로운 해결사께서 계시를 주셨습니다. 상원 씨와 남은 길을 함께 걸으라고요."

"아아."

상원은 먼 하늘을 보았다.

그 하늘 가운데, 지금껏 보지 못했던 낮별 무리가 총총한 빛을 내고 있었다.

천정의 재판관과 지혜로운 해결사를 비롯한 바빌론의 수호신들이었다.

이들이 온 걸 보니 새하늘의 승천자들이 상원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알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아마 불신자 조상원을 비롯한 서울역의 수험자들이 49번 시험을 한 번에 깨겠다고 불나방처럼 비그리드에 달려들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리고 그들 중 바빌론은 그 말도 안 되는 도박을 하는 상원에게 배팅을 한 것이고.

신들의 황혼은 새하늘에 맞서 싸우는 이들의 편에 같이 하는 별들이 있다고 했다.

'그게 이들이었군.'

상원이 스칼렛의 손을 마주 잡았다.

"반갑습니다 스칼렛."

"그래요, 우리가 뭘 하면 되죠?"

"일단 저 무기고에 있는 무기들부터 보시죠."

바빌론의 합류,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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