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8화. 신들의 황혼 (6)
비그리드의 원시림들을 묘목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인들이 황금빛 무구로 중무장한 채 행군하는 모습만으로도 문혁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선두에 선 놈이 다시 한번 뿔피리를 불었다.
뿌우우우-!
둔중한 소리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아, 문혁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문혁뿐 아니라 주변의 수험자들까지 동요하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저 기세에 눌려 아무것도 못하고 무릎을 꿇을 판이었다.
지휘관으로서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문혁은 북극의 활을 뽑아내 뿔피리를 든 놈을 향해 얼음 화살을 날렸다.
피잉 하고 꼬리처럼 눈보라를 날리며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얼음 화살이 뿔피리를 든 놈에게 박혔다.
두두두둑!
4등급 기관원 몇 마리를 한 번에 얼려버린 화살이었다.
그러나 화살을 맞은 놈은 잠시 주춤거릴 뿐, 언제 화살을 맞았냐는 듯 다시 걸음을 이었다.
쿵, 쿵!
발자국 소리가 적군의 북소리 같았다.
“크아아악!”
비명에 가까운 고함과 함께 날아간 형광색 레이져가 놈에게 작렬하자, 놈이 쿵 소리를 내며 털썩 쓰러졌고 짙은 흙먼지가 일어났다.
문혁이 외쳤다.
“강상중!”
강상중의 신기급 타이탄 ‘종말의 팔랑크스’ 옆에 선 두 대의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쏜 입자 레이저였다.
전투용 타이탄인 종말의 팔랑크스의 레이져는 지휘용인 현무의 활보다 훨씬 강했다.
‘효과가 있나…?’
아니었다.
흙먼지 속에서, 놈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났다.
레이져가 박힌 가슴팍엔 약간의 그을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문혁의 얼굴이 구겨졌다.
저 레이져 한 방에 4등급 몇십 마리가 한 번에 산화됐었는데, 단지 한 등급 차이였을 뿐인데도 5등급의 맺집은 4등급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얼음같은 침묵이 서울역의 수험자들을 덮쳤다.
종말의 팔랑크스의 입자 레이져에 끄떡도 하지 않는 놈을 어떻게 상대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문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원을 따라 49번 시험을 깨겠다고 했을 때, 이 정도는 이미 예상했었다.
마음을 다잡은 문혁은 서울역과 거인들 사이의 거리, 거인들이 걷는 속도 그리고 놈들의 맺집을 면밀하게 계산했다.
잠시 후, 계산을 마친 문혁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딱 그 정도였지만 그 가능성에라도 매달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 괴물들이 서울역을 비그리드의 원시림처럼 그대로 짓밟아버릴 테니까.
문혁은 보이지 않는 것에게 빌었다.
‘장군님, 힘을 주소서.’
문혁의 단전에서부터 성스러운 힘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문혁의 안에 깃든 ‘해안선의 귀신’이 문혁의 입을 빌어 말했다.
“학익진을 전개한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권능 ‘학익진’을 전개합니다.]
현무의 주변으로 별빛을 띈 장막이 퍼져나가 이쪽의 타이탄들과 저쪽의 기관원들까지 감쌌다.
문혁의 눈앞에 홀로그램으로 된 작은 장기판이 떴다.
장기판 이쪽에는 아군의 타이탄이 파란색으로, 저쪽에는 접근하는 기관원들이 빨간색으로 표시되었다.
문혁은 장기말을 옮기듯 원거리 공격에 능한 이들을 학의 날개에, 근거리 공격에 능한 이들을 몸통에 배치했다.
아군이 문혁의 손짓에 따라 그대로 움직였다.
저쪽의 기관원들은 그런 것 정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문혁의 눈썹이 꿈틀했다.
‘진형을 바꾸는 게 신경 쓸 것조차 아니라는 건가.’
곧 그게 오판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접근하는 이들을 상대하기 위한 최적의 진영을 짠 채로, 문혁은 타이밍을 기다렸다.
그러다 선두에 선 놈이 임계선을 넘는 그 순간, 문혁은 조용히 명했다.
“발포.”
[스킬 ‘발포 명령’을 타이탄 ‘현무’에 동기화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현무의 양 어깨 갑옷이 들리며 튀어나온 스피커에서 둔중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
그와 함께 수십 대의 타이탄이 동시에 불을 뿜기 시작했다.
콰과과광!
포화가 놈들을 덮쳤다.
효과가 있었다.
장기판 위, 빨간 말들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며 진형이 흐트러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역시, 집중포화 앞에 장사는 없군,’
문혁은 다음 명령을 내렸다.
“돌격조 투입.”
문혁의 명령에 수십 대의 타이탄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다.
그 선두에는 벼락을 뿜는 할버드를 든 박정수의 ‘카우킹’과 보라색 검기를 두른 대검을 휘두르는 김만웅의 ‘카인그랑’이 있었다.
양떼를 덮치는 이리처럼, 그들이 우왕좌왕하는 거인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집중포화로 진형이 흐트러진 틈에, 낙오한 놈들을 하나하나 끊는 게 문혁이 생각한 전술이었다.
십 미터를 넘어가는 커다란 로봇들과 그보다 몇 배는 큰 거인들이 맞부딪히자 안그래도 짙었던 흙먼지가 더 짙어졌다.
그 사이로 섬광이 번쩍이며 쇠와 쇠가 부딪히는 굉음이 들렸다.
흙먼지가 하도 짙어서, 문혁은 전장의 상황을 장기판을 통해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장기판을 보던 문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젠장.”
빨간 장기말의 수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와중, 무시무시한 굉음이 들렸다.
쾅!
이어서 문혁은 믿지 못할 광경을 보았다.
파란 말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계산이 틀렸다.’
문혁이 외쳤다.
“후퇴! 후퇴하라!”
수십 대의 타이탄이 흙먼지를 헤치고 튀어나와 아군의 진형을 향해 돌아왔다.
그들의 수가 조금 줄어 있었다.
이어서 흙먼지 속에서 금빛 거인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놈들이 든 도끼에 아군 타이탄들의 잔해가 묻어 있었다.
그 모양을 보니 도끼질 한 번에 타이탄이 부서졌음을 알 수 있었다.
상상 이상의 힘에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제길!”
‘5등급 기관원…이 정도의 괴물이었다는 말인가?’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절망이 조금씩 싹트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쾅 하는 폭발음이 들려왔다.
‘갑자기 뒤에서? 뭐지?’
뒤를 돌아본 문혁은 그토록 반가울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서울역 위로 새하얀 타이탄이 망토를 휘날리며 날아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깨끗하다시피 한 백색 몸통과는 달리 새빨갛게 빛나는 오른팔과 새파랗게 빛나는 왼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저건 그 누가 봐도 조상원의 타이탄이었다.
순간 마음속에 싹트던 절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조상원의 타이탄이라고 이 전황을 한 번에 뒤집을 정도로 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안을 가라앉히는 사람, 조상원은 그런 존재였다.
이마에는 아직도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지만, 입으로는 큰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 하하하.”
상원의 타이탄이 하늘을 가르며 놈들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잠깐 통신이 섞여서일까, 상원이 중얼거린 말이 들려왔다.
“에인하야르들을 이렇게 빨리 꺼내다니 급하기는 했나 보군.”
상원의 타이탄이 놈들의 머리 위로 날아가 우뚝 멈추었다.
‘이제 어떤 기상천외한 걸 보여줄까? 번개 폭풍? 용암 파도?’
문혁은 기대감에 가득 찬 눈으로 새하얀 타이탄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공중에 뜬 그 상태로 타이탄의 조종석이 열리면서 상원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
‘뭘 하려는 거지? 어떤 스킬을 쓰더라도 타이탄을 거치는 게 효율적일 텐데? 타이탄에 타면 쓸 수 없는 스킬을 쓰려는 건가?’
생각을 거듭해 보았지만 뾰족한 답은 없었다.
그 찰나, 상원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놈들을 향해 던졌다.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은백색 캡슐이었다.
쐐액 하고 날아간 캡슐이 놈들의 틈새에 툭 떨어졌다.
“뭐지? 신무기?”
현무의 카메라에 상원의 얼굴이 잡혔다.
그는 떨어진 캡슐을 굳은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상원의 눈동자에 작은 섬광이 비쳤다.
상원이 재빨리 조종석 안으로 들어가 전력으로 이쪽을 향해 돌아왔다.
놈들을 향해 캡슐을 떨어뜨린 상원이 다시 돌아올 물건이라면, 그게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폭탄…?”
그런데 캡슐의 정체를 추측하고 나니 오히려 의구심이 들었다.
신기급을 포함한 타이탄 수십 대의 집중포화를 맞고도 멀쩡한 놈들을 한 번에 날려버릴 폭탄이 있단 말인가?
조상원은 어디서 그런 물건을 찾아낸 건가?
그것도 조상원이 회귀자라 가능한 것인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때 어디선가 지축을 부숴버릴 것만 같은 포효가 들려왔다.
오오오오오-!
거대한 짐승의 울음소리 같았는데, 그게 진실로 짐승이라면 지금껏 보아왔던 어떤 짐승보다도 큰 놈인 게 틀림없었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방금 캡슐이 떨어진 곳이었다.
놈들의 한가운데, 캡슐이 떨어진 곳에서 회색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연기가 일반적인 연기라 하기엔 너무 짙고 어두웠다.
심지어 그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마치 커다란 뱀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마치 거대한 화산이 분출하며 뿜어낸 화산재처럼, 연기 사이로 시뻘건 화염과 함께 굵은 번개가 꿈틀거렸다.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는데도 오금이 저려왔다.
"상원씨, 도대체 이번에는 뭘 준비한 겁니까?"
타이탄 수십 대의 집중포화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하던 에인하야르들마저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연기의 주위에서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었다.
다시 한번 포효가 울려 퍼졌다.
오오오오오--!
그리고 문혁은 보았다.
"맙소사... 뭐야, 저게...."
다른 이들도 적잖이 놀랐는지, 현무의 통신 채널을 타고 수많은 술렁임이 넘어오고 있었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연기가 점차 분명한 형체를 띄어가고 있었다.
하나둘, 연기로부터 길다란 용의 머리가 나타났다.
머리 하나하나가 일전에 보았던 '격풍'을 감히 따위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무시무시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연기가 갈라지며 나타난 용의 머리가 도합 일곱이었다.
그리고 그 머리 하나하나마다 열 개의 뿔이 달려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왕관과도 같았다.
문혁이 중얼거렸다.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시뻘건 화염과 꿈틀대는 벼락을 두른, 연기로 된 칠두룡들이 하나 하나 입을 벌리며 포효했다.
"오오오오오!"
단지 포효였을 뿐인데, 그 기세에 눌린 현무가 그대로 추락해버렸다.
순간 속에서 쓴물이 올라왔다.
"끄으으으윽!"
다행히도 카메라는 무사해서, 문혁은 전장의 상황을 계속 볼 수 있었다.
머리 하나하나가 에인하야르들을 향해 쾅 쾅 소리를 내며 박히기 시작했다.
머리 하나가 박힐 때마다 무지막지한 폭발과 함께 그 단단한 에인하야르들이 수십 마리씩 재가 돼버렸다.
그렇게 일곱 머리가 땅에 모두 박히자, 원자폭탄이라도 터뜨린 것처럼 거대한 버섯 구름이 하늘을 뒤덮으며 올라왔다.
상스러운 말이 절로 나오는 광경이었다.
"미친...."
그리고 연기가 걷혔을 때, 문혁은 그 사이에 홀로 쓰러져 있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을 보았다.
혜경처럼 성숙한 몸매를 하고 있었지만, 정신을 잃은 얼굴을 보고 틀림없이 알 수 있었다.
윤진아였다.
"진아씨!"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문혁은 현무를 다시 일으켜 초토의 한가운데를 향해 날아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