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신들의 황혼 (5)
그보다 조금 전, 타이탄 격납고 앞.
문혁은 타이탄 분배를 마쳐가고 있었다.
마지막 순서로 타이탄을 분배받은 할머니가 문혁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고맙수.”
“아닙니다 할머니.”
문혁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태성보다 나이가 조금 적은 이 할머니는 이렇다 할 특기가 없었고, 그래서 타이탄 분배에서 가장 후순위로 갈 수밖에 없었다.
신기급은 신우주나 강상중 같은 강자들에게 진작에 돌아갔고, 성물급들 중에서도 강한 것들은 그 특기에 맞는 자들에게 돌아간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격납고의 타이탄이 수험자보다 많았기에 할머니가 고를 타이탄도 여남은 대는 되었지만, 그것들 모두 초반에 분배된 것들에 비하면 타이탄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초라했다.
그러니 어정쩡한 수험자들에겐 어정쩡한 타이탄이 돌아가는 게 당연했지만, 그리 달가운 결과는 아니었다.
입맛이 씁쓸했다.
‘강자들이 좋은 아이템을 독식하면 할수록 수험자들 사이의 격차는 더 벌어지는 게 아닌가?’
승천 시험이 전체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돌아가는 건 당연했지만, 적어도 서울역 안에서 그런 식의 격차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식의 양극화가 계속되고 고착화되면 결국은 성역의 분열을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26번 시험에 이르기까지, 고착화된 양극화로 인해 분열하고 멸망한 성역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성역 서울역의 지휘관으로서 그런 결과를 낳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적진 한가운데인 외계 행성 비그리드에서
4등급 기관원이라는 괴물들과 맞서야 하는 비상 상황이었으니까.
그런 마음을 느낀 걸까, 할머니가 여유롭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 늙은이가 여기까지 온 것도 천운이지.”
그녀의 작고 주름진 손이 문혁의 손을 꼭 잡았다.
시험에 들고 나서 좀처럼 느낄 수 없던 온기가 느껴졌다.
문혁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더 고맙지. 자, 우리 문혁 대장이 골라준 기계 보러 가 볼까?”
홀홀 웃은 할머니가 문혁을 지나쳐 격납고로 들어갔다.
그때 갑자기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문혁은 고개를 돌렸다.
“대단하군. 핌불베르트의 타이탄 격납고를 여기로 옮겨 올 생각을 할 줄이야.”
어두운 무기고 가운데 갑자기 나타난 빛무리 안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새하얀 토가를 입은 그녀의 머리 위에 새하얀 고리가 세 개 떠 있었다.
고리 세 겹을 보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고리… 기관원인가? 그런데 고리가 세 겹이라고?’
고리를 한 장 올린 집행사조차도 수험자 하나의 시험은 우습게 꼬아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세 겹이라니?
"새하늘에 가장 가까운 별 비그리드, 여기에 핌불베르트에다가 타이탄 격납고까지 갖다 놓다니. 솔직히 좀 놀랐다. 이런 식으로 기관을 치고 들어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거든."
그녀가 안대로 가리지 않은 한쪽 눈으로 문혁을 매섭게 쏘아 보았다.
꿀꺽, 마른 침이 절로 넘어갔다.
“기관원인가…?”
그녀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를 아버지의 장난감 따위와 비교하지 마라.”
“아버지의 장난감? 무슨 소리지?”
그녀가 고개를 까닥 비틀고 말했다.
“알 것 없다.”
다음 순간, 순식간에 그녀가 유령처럼 코앞까지 다가온 바람에 문혁은 헛숨을 들이쉬며 주춤 물러났다.
“큿!”
그녀의 하얗고 긴 손가락 끝에 황금빛 기운이 맺혀 소용돌이쳤다.
그 황금빛 소용돌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거기 닿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문혁은 뒤로 물러났다.
텅, 물러나는 문혁의 등에 단단한 벽이 닿았다.
‘젠장!’
저벅저벅, 문혁을 향해 다가오는 그녀의 표정이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무기고 전체가 우르릉 흔들릴 정도로 거대한 포효가 들려왔다.
“오오오오오!”
귀가 터질 것 같았다.
“크윽!”
문혁은 귀를 감싸 쥐고 풀썩 무릎을 꿇었다.
외눈의 여자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짐승처럼 소리쳤다.
“크아아악! 세상 끝의 불꽃!”
소리치는 그녀의 볼에 깃털이 솟아올라 있었다.
그녀가 씹어뱉듯 말했다.
“이런 일에 협조하고도… 무사히 시험을 치를 수 있을 줄 알았나?”
까드득, 그녀가 이를 가는 소리가 무기고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등 뒤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끝에서 끝까지 4미터는 족히 될듯한 금빛 날개가 펼쳐졌다.
“그래 네놈들, 비참하게 탈락해서 벌레처럼 연옥을 기어 다니는 게 소원이라면… 그대로 해주지.”
문혁을 쏘아보는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 아래 기관원들에게선 느낄 수 없는 매서운 광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아, 그녀는 지금 문혁을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건 그 너머, 저 위에서 문혁을 보우하는 존재였다.
“‘해안선의 귀신’,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다. 네놈뿐만 아니라 그 불신자 놈과 같이 선 ‘낙원의 수문장’, ‘자칭 협객’, ‘화산정의 혐오체’… 떨거지 놈들 모두!”
다음 순간 황금빛 눈부신 섬광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윽!”
섬광에 놀라 눈을 감았다 떠보니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 황금빛 깃털 몇 개가 남아 흩날리고 있었다.
“젠장.”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나타난 이 여자는 누구이고, 또 갑자기 들린 그 포효는 뭐란 말인가?
그리고 머릿속을 관통한 그 이름.
‘세상 끝의 불꽃? 도대체 왜 그 이름이 여기서 나오는 거지?’
그때 콰앙 하는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무기고가 우르릉 울렸다.
신력의 영향으로 발달한 청력은 그 사이에서 들려오는 수험자들의 비명을 놓치지 않았다.
“뭐야?”
무기고 바깥으로 달려나간 문혁은 믿고 싶지 않은 광경을 보았다.
하늘에 무언가가 새까맣게 떠 있었던 것이다.
검은색 갑주로 무장한 기사였는데, 길쭉길쭉한 팔다리 끝에 짐승의 것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분홍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색으로 빛나는 네 쌍의 날개, 거기서 기관원들이 내뿜는 특유의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저것들이 상원 씨가 말한 4급 기관원이구나!’
놈들이 입을 쩍 벌리고 분홍색 레이저를 서울역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뿌려대는 통에 서울역 여기저기 화염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무기고의 신기로 무장한 몇몇 수험자들이 엄폐물 뒤에 숨어 응사했지만 놈들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퍽!
문혁의 바로 옆에서 하늘을 향해 레이저 건을 쏘아대던 수험자가 분홍색 레이저에 맞고 강화복째로 가루가 돼버렸다.
‘이거… 타이탄이 없으면 안 되겠구나…!’
“하아.”
문혁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기관원들과 맞서 싸울 수 있을지 그렇게 걱정했는데, 막상 4등급 기관원들을 직면하니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해안선의 귀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침착하게. 타이탄을 꺼내 맞서시게.
문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젖먹던 힘을 짜내 무기고 안쪽으로 달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격납고 입구를 지나, 격납고 가장 안쪽의 타이탄에 닿았다.
수험자들이 자기들의 타이탄을 꺼내 가 격납고가 빈 와중에도, 가장 안쪽의 타이탄이 내뿜는 단단한 위용이 그 넓은 격납고에 가득했다.
다른 것들보다 훨씬 커다란 이 타이탄은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새까만 갑옷으로 온몸을 중무장한 덕에 둥그런 거북이 같았다.
거북의 등갑을 닮은 어깨 갑옷에는 대못 같은 가시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타이탄의 앞에 서자 용을 닮은 머리에 박힌 두 눈이 빨갛게 빛났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타이탄 ‘현무’를 가동하시겠습니까?]
“가동한다!”
문혁의 대답에 신기급 타이탄 현무의 가슴 갑옷이 위로 열리며 조종석이 드러났다.
문혁이 가볍게 뛰어올라 조종석에 안착하자, 조종석 위에서 내려온 헬멧이 머리를 감쌌고 구석에서 튀어나온 장갑과 장화가 손발을 덮었다.
[수험자 백문혁, 타이탄 ‘현무’와 일체화합니다.]
눈을 감았다 뜨니 넓디넓었던 격납고가 비좁아 보였다.
현무의 시선과 일체화한 것이다.
현무의 팔다리가 원래 몸인 것처럼 자연스레 움직였다.
“간다!”
등 뒤에서 튀어나온 추진기에서 불을 뿜으며, 문혁은 총알 같은 속도로 격납고를 뛰쳐나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은 디아블로들이 괴성을 지르며 문혁에게 레이저를 쏘았다.
“크아아악!”
콰과과광!
매서운 레이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작렬했지만 어떤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설명서에 적혀 있던 현무의 장갑의 경도와 놈들의 레이저의 위력을 보고 나서, 문혁은 레이저가 현무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다는 계산을 끝냈던 것이다.
이제 반격할 차례였다.
[성물 ‘주몽의 활’을 타이탄 ‘현무’에 동기화합니다.]
[‘북극의 활’을 전개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왼팔에서 위아래로 활자루가 펼쳐졌고 그 사이로 새까만 마력 활시위가 맺혔다.
마력을 잔뜩 뽑아 오른손에 모으자 시꺼먼 냉기가 오른손에 고였고, 그걸 왼손에 대고 당기니 검은 냉기 화살이 되었다.
“이놈들!”
노호성과 함께 활시위를 놓자 마력 화살이 놈들을 향해 쇄도했다.
“크르르륵!”
마력 화살이 무리 사이에 작렬하자, 기관원 몇십 마리가 그대로 얼어붙어 땅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굉장한 위력이었다.
이어서 놈들의 무리 사이에서 폭발이 연달아 일었다.
쾅! 쾅!
타이탄에 탄 다른 수험자들이 문혁을 돕기 시작한 것이었다.
문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아.”
문혁의 장기는 전투가 아닌 지휘였다.
문혁이 외쳤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오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 준엄한 노장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스킬 ‘지휘의 외침’을 타이탄 ‘현무’에 동기화합니다.]
현무의 등이 열리며 머리 뒤로 거대한 깃발이 솟아올랐다.
펄럭, 깃발이 바람에 휘날려 나부끼자 문혁을 중심으로 새까만 기운이 퍼져나가 타이탄들을 감쌌다.
[지휘를 받는 이들의 몸이 가벼워지고 결연한 의지가 샘솟습니다.]
문혁의 낮은 읊조림이 북소리처럼 퍼졌다.
“전군, 진군.”
수험자들이 결연하게 외치며 기관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좋아! 가자!”
“하아아아!”
박정수의 ‘카우킹’이 무리 속에 뛰어들어 사방으로 전격을 내뿜었고, 강상중의 ‘종말의 팔랑크스’가 뿜어낸 녹색 광선이 놈들을 집어삼켰다.
김만웅이 탄 ‘카인그랑’의 대검이 놈들을 일도양단했고, 신우주의 ‘반고’가 손상된 타이탄들을 순식간에 회복시켰다.
“좋다.”
4등급 기관원이라고 무서울 게 없었다.
타이탄을 얻은 서울역 수험자들 한 명 한 명이 무시무시한 힘으로 기관원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렇게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었던 기관원들이 순식간에 전멸해버렸다.
수험자들이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그래, 이대로라면 49번 시험을 깨는 것도 꿈이 아니겠군.’
그때 거대한 뿔나팔 소리가 우렁우렁 울렸다.
뿌우우우.
이어서 쿵 쿵 하는 굉음이 지축을 흔들었다.
그 뿔소리 한 번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방금 전의 흥분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무거운 긴장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뭐지?”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돌아본 문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시 주변을 둘러싼 거대한 원시림을 말 그대로 짓밟으면서, 금빛 갑옷으로 중무장한 거인들이 우트가드르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흙먼지 위로 우뚝 솟은 놈들의 투구에는 사슴을 닮은 거대한 뿔 장식이 달려 있었다.
한 뿌리에서 나온 뿔 장식이 정확히 다섯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5등급…!”
꿀꺽, 문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