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206화 (206/230)

제206화. 신들의 황혼 (4)

하얀 돌을 감싼 고구마 줄기처럼 생긴 야룬비드의 생체 조직이 손바닥을 감싸고 스멀스멀 꿈틀거렸다.

거인이 겨울 늑대의 징표를 내려다보았다.

"흐음."

겨울 늑대의 징표는 던전 핌불베르트의 필드 보스 '야룬비드'를 물리쳐야만 얻을 수 있는 전리품으로, 정상적인 진행으로 이 아이템을 얻으려면 46번 시험을 넘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 아이템을 본다면, 거인은 낙원 밖의 시간이 46번 시험을 넘어섰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원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걸 얻었는지는 알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거인은 적어도 46번 시험이 시작되면 '종말의 때'가 되었다고 판단할 것이다.

전생의 윤진아도 46번 시험을 넘어서 생명 나무의 열매를 얻었으니까.

'계산이 틀릴 리 없다.'

확신을 가지고, 상원은 거인과 그의 주변을 회전하는 불칼을 보았다.

징표를 내려다보던 거인이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거인이 점보 여객기의 머리만큼이나 커다란 손가락을 펴 상원을 가리켰다.

단지 손가락질 한 번일 뿐이었는데도 몸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조물주가 인간이 먹어서는 안 되는 열매를 지키기 위해 세워 둔 자이니, 그만한 존재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서서히 다가온 손가락이 겨울 늑대의 징표를 톡 건드렸다.

상원 정도는 우습게 눌러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손가락이 겨울 늑대의 징표를 건드리는 손짓은 또 섬세하기 그지없었다.

징표를 만진 거인이 온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을 흘렸다.

“우우우우.”

거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겨울 늑대의 징표. 그래, 이건 틀림없이 '겨울 우주'의 물건이다. 마침내 종말의 때가 왔구나.”

그중 한 마디가 상원의 주위를 사로잡았다.

‘겨울 우주?’

틀림없이 들어본 단어였다.

‘아, 생각났다!’

노트에서 본 그 단어, '겨울 우주'는 타우 은하의 별칭이었다.

겨울 우주의 물건을 보고 종말의 때를 말했다는 건, 거인이 수험자들이 타우 은하에 진입하는 시점을 종말의 때로 인식할 거라던 예상이 맞아떨어졌음을 의미했다.

스르르 날아오른 거인이 상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상하군. 너는 시험에 든 이의 화신이 아니구나.”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상원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시험에 든 이’라면 시험을 치르고 있는 ‘낙원의 수문장’을 의미하는 것일 게고, 그렇다는 건 상원이 ‘낙원의 수문장’의 화신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요컨대, 왜 진아가 아닌 상원이 열매를 가지러 왔냐는 말이었다.

상원이 대답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시험을 치르는 화신은 여기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닌지라.”

거인이 납득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회전하는 불칼이 흉흉한 불꽃을 뿜어냈다.

상원이 침착하게 덧붙였다.

“아시다시피, 낙원에 오는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자는 시험을 치르고 있는 낙원의 수문장밖에 없습니다. 낙원의 수문장의 인정을 받지 않은 자는 낙원에 올 수 없지요. 그러니까 저는, 낙원의 수문장의 인정을 받고 온 겁니다.”

상원의 말을 들은 거인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긴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

이어서 거인이 상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의 주변을 회전하던 불칼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직후, 땅덩이만큼 거대한 거인의 몸이 봄날 햇살에 눈이 녹듯 흔적도 없이 스르르 사라졌다.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그 어떤 전조도 없었다.

“허하노라.”

그 짧은 메아리치다 점점 멀어졌다.

상원은 낙원을 오르는 길과 그 끝에 우뚝 선 두 그루 나무를 바라보며 큰 숨을 내쉬었다.

“후우.”

사실 겨울 늑대의 징표가 있으면 낙원에 입장할 수 있을 거라고 100퍼센트 확신한 건 아니었다.

만일 그걸로 거인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면 전심전력을 다 해 거인을 꺾을 생각이었다.

'아마 탈신 모듈의 힘을 모조리 끌어냈다면 거인을 쓰러뜨릴 수는 있었겠지.'

하지만 그 여파로 몸이 무너져버릴 게 뻔했다.

어쨌든 지경까지 가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었다.

상원은 언덕 위에 우뚝 솟은 두 그루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자 나무의 압도적인 위용이 실감되었다.

포탈 바깥에서 볼 때는 평범한 나무인 줄 알았는데, 두 그루 다 말이 나무였지 그 크기가 고층 빌딩만 했다.

그들은 ‘오랜 땅의 이무기’가 지구에 심었던 피를 먹는 세계수에 비교해도 크게 꿀리지 않을 만한 위용을 보이고 있었다.

그중 한 그루는 새파란 잎사귀가 무성한 게 한눈에 보아도 풍요롭고 풍족해 보였다.

반면, 다른 한 그루는 비쩍 말라비틀어진 새까만 고목이었다.

한 그루는 선악과이고 다른 한 그루는 생명 나무였는데, 생김새와는 달리 생명 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는 말라비틀어진 쪽이었다.

언덕의 다른 부분과는 달리, 생명 나무 주변에는 풀이 한 포기도 자라지 않았고 흙도 나무와 마찬가지로 썩은 것처럼 새까맸다.

언덕을 한참 동안 올라가, 상원은 마침내 생명 나무의 주위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영역에 도착했다.

이어서 푸석푸석 부서지는 흙을 밟으며 나아가 생명 나무의 줄기 앞에 서니, 죽어가는 나무 특유의 퀴퀴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이제 이 나무의 열매를 가져가야 했다.

상원은 빌딩만큼 굵은 나무줄기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리고 우둘투둘한 나무껍질을 밟으며 줄기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낮은 나뭇가지까지도 족히 1킬로미터는 되었기에 열매가 있을 가지까지 줄기를 기어 올라가는 건 자살행위처럼 보였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이 나무의 열매는 가지가 아닌 줄기에 있으니까.

얼마 가지 않아 상원은 줄기 사이에 난 틈새에 다다랐는데, 그 틈새라는 게 어찌나 큰지 천장이 끝도 없이 높은 동굴에 가까웠다.

틈새 사이로 들어가니 꿉꿉한 공기가 상원을 훅 덮쳐 왔다.

상원은 천천히 그 틈새 속을 걸어서 나아갔다.

틈새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꿉꿉한 냄새가 거짓말처럼 향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마침내 틈새 저 안쪽에, 무언가 새빨간 빛을 은은하게 내뿜고 있는 게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얽히고설킨 가느다란 나무줄기들 사이에 주먹만 한 크기의 새빨간 사과가 있었다.

그게 생명 나무 열매였다.

상원은 가는 줄기들 사이에 손을 욱여넣어 생명 나무 열매를 손에 쥐었다.

이 세상 어디서도 맡아보지 못한 향기가 벌써부터 코를 찔렀다.

생명 나무가 다 말라 죽어가는 꼴인 것도, 그 주변에 있는 풀들이 모조리 말라 죽고 그 위로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것도 이 열매가 나무의 생명력과 지기를 빨아들인 탓이었다.

그건 이 열매 안에 낙원의 생기가 압축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이 작은 열매 안에 그토록 어마어마한 힘이 들어 있다는 말이지.'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신기 ‘생명 나무 열매’를 획득하였습니다.]

“좋아.”

상원은 브라이싱크론 지갑에 생명 나무 열매를 집어넣고 돌아섰다.

틈새를 빠져나와 절벽을 내달리는 산양처럼 나무껍질들 사이로 뛰어 땅으로 내려온 후 언덕을 걸어 내려오니, 저 멀리로 불타는 원이 조그맣게 보였다.

상원이 들어왔던, 진아의 병실로 향하는 포탈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 저 멀리로 구름이 날아가고 있었는데, 그 모양새가 꼭 날개 달린 거인이 등을 돌리고 날아가는 모양 같았다.

“고맙습니다.”

거인은 그가 할 일을 했을 뿐인데도, 어쩐지 그 말이 하고 싶었다.

그 말을 남기고 나서, 상원은 서울역으로 향하는 포탈에 들어갔다.

포탈을 이루는 성화의 온기가 온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주변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평화롭기 그지없는 낙원에 있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새하늘 시험의 포탈들을 수도 없이 드나들었는데도, 가끔은 포탈을 지나면서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는 게 적응이 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이번에는 유달리 더하군.’

직전까지 있던 곳이 낙원이라 더 그런 것 같았다.

등 뒤의 포탈이 닫히면서 방 안이 더 어두워졌다.

불쾌한 냄새가 끈적한 어둠과 함께 뭉쳐 있는 병실 안, 네 사람의 눈이 상원에게 박혔다.

샤믹, 오디나스, 엘가 그리고 낙원의 수문장.

상원은 ‘생명 나무 열매’를 꺼내 낙원의 수문장을 향해 내밀었다.

생명 나무 열매가 내뿜는 은은한 붉은 빛이 병실 안을 채운 어둠을 저 멀리 몰아내며 짙은 향기가 병실을 가득 채웠다.

그 향기 때문인지, 샤믹이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둥그렇게 뜨며 열매를 쳐다보았다.

“와.”

오디나스가 감탄했다.

“대단하다. 엄청난 생명의 기운이 깃들어 있군.”

엘가는 아예 넋을 놓고 열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생명 나무 열매’….”

상원이 피식 웃으며 엘가의 손을 쳐냈다.

“당신 게 아니야.”

그들과는 달리 낙원의 수문장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열매를 내려다보는 수문장의 얼굴이 떨떠름해 보이기까지 했다.

수문장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신 중의 마신 ‘세상 끝의 불꽃’이 깃들어 있는 이 상황에서 ‘생명 나무 열매’를 먹어 진아의 몸을 회복시킨다는 건, 그걸 먹고 강해진 진아의 몸이 버틸 수 있는 빙의의 한계가 늘어난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낙원의 수문장이 눈을 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무시무시한 용이… 이 아이의 몸에 깃들 게야….”

그 마음은 십분 이해했다.

진심을 다해 화신을 감싸는 낙원의 수문장에게 해 줄 말은 단 하나뿐이었다.

“진아 씨를 위한 일입니다.”

낙원의 수문장이 굳은 얼굴로 상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래, 그렇겠지. 그렇지만 용이 나가고 나면, 이 아이의 몸은….”

“그때는 낙원의 수문장께서 진아 씨의 몸을 붙들어 주십시오.”

낙원의 수문장이 피식 웃었다.

“염치가 없군.”

“드높으신 성령의 축복이 어린 양에게 언제나 함께하심을 진심으로 믿는 거라 보아 주십시오.”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쉰 낙원의 수문장이 대답했다.

“그래.”

수문장이 뼈 모양이 다 보일 정도로 말라버린 손으로 생명 나무 열매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열매를 입으로 가져가, 잔뜩 말라버린 입술로 생명 나무 열매를 깨물었다.

아삭하는 청량한, 그 작은 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믿지 못할 광경을 보았다.

“아아… 아아아.”

낙원의 수문장이 입을 벌리자 그 속에서 분홍빛 불꽃이 스멀스멀 튀어나왔다.

그와 함께 진아의 몸이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아니 회복되는 걸 넘어서, 일반인치고도 한참 작은 편이었던 그녀가 혜경에 맞먹을 정도로 자라고 있었다.

전생 시험의 최후반부에서 보았던 것 이상이었다.

“뒤를 맡기네.”

낙원의 수문장의 목소리가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보이는 불꽃의 색이 분홍색에서 탁한 회색으로 바뀌었다.

시꺼먼 어둠 속에서 춤추는 회색 불꽃의 모양은, 분명히 열 개의 머리 위에 일곱 뿔이 달린 왕관을 쓴 용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샤믹과 오디나스와 엘가가 신음소리와 함께 물러났다.

“으으윽!”

“크윽!”

마신 중의 마신, ‘세상 끝의 불꽃’이 이 땅에 도래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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