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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205화 (205/230)

제205화. 신들의 황혼 (3)

그때 삐걱하고 병실 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여기 있었네요 대장."

샤믹 프란시스코, 그녀의 목소리에 약간의 물기가 묻어 있었다.

평소와도 같이 그녀의 눈동자에는 해원향이 보였던 새파란 빛이 감돌고 있었고, 검은 피부 여기저기 돋은 새파란 비늘 위로도 금속질의 반사광이 흐르고 있었다.

병실에 들어온 샤믹 프란시스코는 혜경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창훈의 침대를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어… 어? 창훈 씨?”

샤믹이 상원과 혜경의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창훈의 여윈 손을 덥석 붙잡았다.

"괜찮아요? 나 알아보겠어요?"

창훈 아니, 오디나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샤믹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누군가?”

“에, 에? 창훈 씨? 저에요, 샤믹! 모르겠어요? 아… 아, 너무 오래 누워계셔서 그런가? 괜찮은 거 맞아요?”

그녀가 부산을 떠는 꼴이 퍽 우스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네 사람이 들어찬 병실이 평소보다 유난히 비좁게 느껴졌다.

샤믹 로드리게스, 한창훈, 송혜경.

그들의 뒤에 있는 ‘오랜 땅의 이무기’, ‘연옥의 폭군’ 그리고 ‘지하의 수호신’.

‘신들의 황혼’을 풀어 갈 다섯 주역 중 이 좁은 병실 안에 넷이 모여 있었다.

이제 한 명이 남았다.

예언의 남은 장을 풀어가는 데 가장 중요한 사람이.

이제 그녀를 만나야 했다.

“여러분.”

마신의 힘을 등에 업은 세 사람이 상원을 보았다.

“‘세상 끝의 불꽃’을 만나러 갑시다.”

* * *

상원은 세 사람을 이끌고 진아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

마신 중의 마신의 이름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서인지 세 사람의 표정은 떨떠름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세상 끝의 불꽃에 씐 진아를 직접 본 일이 있던 엘가는 잔뜩 굳어 있었다.

상원의 뒤를 따르던 엘가가 말했다.

“이번에는 잘못하면 이 여자 정말로 죽을지도 몰라.”

이 여자란 혜경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지난번에는 마신에 씐 영향으로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 진아가 혜경을 죽일 뻔했었다.

엘가로서는 그렇게 혜경이 죽어버리면 이 땅에 올 그릇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상원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걱정 마라. 대비책은 충분히 세워 두었으니.”

그렇게 네 사람은 마귀 들린 수험자들이 격리된 병동으로 들어섰다.

지난번 소동의 여파인지 복도가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했다.

상원은 그 한가운데 있는 병실의 문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병실 가운데 진아가 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지난번 ‘세상 끝의 불꽃’을 강제 강신시킨 영향으로 망가져 버린 몸이 거의 회복되지 않았는지, 그녀는 미라처럼 피골이 상접했다.

“진아 씨…!”

상원은 진아를 향해 달려나가려는 샤믹을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잠깐.”

진아의 상태를 먼저 확인해야 했다.

지금 그녀가 ‘세상 끝의 불꽃’에게 잠식된 상태라면, 그녀를 건드리는 건 최상급 수험자인 샤믹에게도 지극히 위험한 일이라서였다.

상원은 진아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앞에 대고 손을 딱 튕겼다.

진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서 분홍빛 안광이 표표히 타오르고 있었다.

“하아아아.”

그녀가 뜨거운 숨을 내쉬자 헐렁한 옷 아래 드러난 그녀의 갈비뼈 사이로 그늘이 도드라졌다.

오디나스가 헛바람을 내쉬며 주춤 물러났다.

“흣.”

그녀의 숨결에 든 성스러운 기운이 견디기 어려워서 그럴 게다.

상원은 그 숨결, 그 눈빛을 보고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상원을 올려다보고 있는 이 존재는 윤진아가 아닌 그녀의 수호신 ‘낙원의 수문장’이라는 것을.

낙원의 수문장은 지금 끊어지기 직전인 그녀의 숨을 억지로 틀어쥐고 있는 것이었다.

낙원의 수문장이 말했다.

“왔군.”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낙원의 수문장이 상원의 뒤에 선 세 사람을 보고 말했다.

“삿된 대주술사의 문장을 가진 이, 그리고 그 뒤로 마신의 증표를 가진 이가 셋. 하하.”

낙원의 수문장이 힘없이 웃으며 덧붙였다.

“말세로군.”

“그렇습니다.”

낙원의 수문장이 가부좌를 풀고 천천히 일어났다.

“말세야, 말세. 불신자.”

말세, 낙원의 수문장은 그 두 글자가 가지는 무게를 알 것이다.

“그게 어떤 뜻인지, 아시지요?”

낙원의 수문장이 잠깐 눈을 감았다가, 커다란 눈을 치켜뜨고 상원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윤진아의 몸은 상원보다 훨씬 작았지만, 어쩐지 그녀에게 압도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 속에 이글거리는 성스러운 불꽃이 회오리치는 불의 폭풍처럼 보였다.

“그렇다.”

상원이 고개를 조아렸다.

“당신이 지키고 계시는 낙원, 거기에 가야 하겠습니다.”

낙원의 수문장은 이름 그대로 낙원을 지키는 자로서, 수문장이 지키고 있는 그 낙원에 윤진아를 구하고 하늘을 불태울 열쇠가 있었다.

낙원의 수문장이 얼굴을 굳혔다.

“진심인가?”

“그렇습니다.”

낙원의 수문장이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스물일곱 번째 시험도 시작하지 않았다. 그런데 종말의 때가 왔음을 어찌 증명하려고?”

그의 깊은 눈이 흔들렸다.

“증명하지 못하면 끝장이다. 아무리 자네가 강하다 해도, 그걸 견뎌낼 수는 없어.”

낙원의 수문장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상원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낙원은 종말의 때가 와야만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때가 되기 전 낙원에 접근하는 자는, 회전하는 불칼에 죽는다.'

상원의 대답은 덤덤했다.

“알고 있습니다.”

한동안 말없이 상원을 올려다보던 낙원의 수문장이 뒤로 돌아섰다.

“그래.”

낙원의 수문장이 오른손을 뻗자 그 손이 분홍색 불꽃을 발하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낙원의 수문장이 타오르는 손으로 커다란 원을 그렸다.

그러자 불꽃의 원이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가운데 부분까지 불꽃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서서히 원의 중심으로부터 불꽃이 걷히며, 또 다른 세상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파란 하늘 아래 파릇파릇한 잔디가 빽빽하게 돋은 동산이었는데, 정상에 아름드리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다.

엘가가 넋을 놓고 말했다.

“낙원.”

그녀의 부릅뜬 두 눈이 빠질 듯했다.

너무나도 유명한 곳이었지만 무슨 수를 써도 가볼 수 없었던 곳을 직접 보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저곳이 바로 낙원의 수문장이 지키는 ‘낙원’이었다.

조물주는 저 두 그루 중 하나의 열매를 따 먹은 최초의 인간들을 저 동산에서 쫓아내고, 낙원의 수문장으로 하여금 종말이 도래할 때까지 그 누구도 저 동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종말이 올 때까지, 낙원의 수문장은 그 낙원을 지킨다.

그것이 새하늘이 ‘낙원의 수문장’에게 부여한 이야기였다.

'그건 뒤집어 말하면, 종말의 때가 되면 낙원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지.'

그렇게 종말이 오면, 수문장의 화신은 저 낙원에 가서 조물주가 금지한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된다.

그 열매가 바로 ‘뱀이 훔친 불로초’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시험 최강의 아이템 중 하나인 ‘생명 나무의 열매’였다.

전생의 윤진아도 생명 나무 열매를 먹고 괴물로 거듭났다.

이번에는 상원이 그 열매를 따서 진아에게 먹일 것이었다.

그러면 그녀를 ‘세상 끝의 불꽃’을 받을 수 있을 만큼 강화시킬 수 있었으니까.

낙원의 수문장이 말했다.

“알고 있지? 저 낙원의 앞에 있는 이는 나이기도 하고 내가 아니기도 하다.”

“알고 있습니다.”

“그를 지나칠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상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언덕을 향해 발을 디뎠다.

불타는 원을 넘어서자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었다.

두 그루 나무가 선 태초의 언덕으로부터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발을 디디자 부드러운 잔디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낙원, 그곳은 모든 걸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을 만큼 평화로웠다.

'일개 승천자의 존재에 얽힌 낙원이 이 정도인데, 새하늘에서 꾸는 꿈은 도저히 깨고 싶지 않겠군.'

그러니 더더욱,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저 나무의 열매를 따 진아에게 먹여서 하늘과 땅 사이의 장막을 불태우고, 그 너머 새하늘 아버지를 꺾을 것이다.

“후우.”

숨을 깊이 내쉬고 언덕의 꼭대기를 향해 발을 디뎠다.

그때 하늘에서 천지를 찢을 듯 우렁우렁한 음성이 들려왔다.

“멈춰라, 나무의 자식이여.”

‘왔군.’

고개를 들어 보니, 푸른 하늘에 태양처럼 빛나는 존재가 떠 있었다.

그것이 점점 땅을 향해 내려오자 빛에 휩싸인 존재의 외형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고개를 잔뜩 꺾어도 얼굴을 바라보기 힘들 만큼 커다란 거인, 그의 주위로 거대한 불칼이 회전하고 있었다.

회전하는 불칼을 두른 키가 700 큐빅에 달한다는 빛나는 거인, 저것이 바로 다면적 존재인 낙원의 수문장의 진정한 형체였다.

옥좌에 다다르기 위해 시험을 치르는 자는 그 다면적인 존재의 일부이며, 진정한 형체는 낙원의 수호라는 업에 충실한 것이었다.

낙원의 수문장이 말한, ‘낙원의 앞에 있는 이는 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거인이 물었다.

“나무가 이 땅에서 추방된 이후 그 자손들은 이 땅에 오는 것이 금지되었거늘, 어찌하여 너는 그 금지를 어기고 이 땅에 왔는가?”

단지 기계적인 물음일 뿐이었지만 무릎이 절로 꺾일 것 같은 압력이 온몸을 짓눌렀다.

'저 회전하는 불칼에 맞으면 찍소리도 못하고 재가 돼버리겠지.'

46번 시험이 끝나고, 전생의 윤진아도 이 거인을 지나쳤을 것이다.

상원은 배에 잔뜩 힘을 주고 말했다.

“낙원의 수문장이시여, 종말의 때가 왔습니다.”

거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그렇습니다.”

“증명하라. 그렇지 못하면….”

회전하는 불칼이 살벌하게 타올랐다.

온몸이 녹아버릴 것 같은 열기가 상원을 덮쳐 왔다.

‘젠장, 과격한 양반이군.’

종말의 때가 왔음을 증명하는 말을 노트에서 처음 보았을 때, ‘그게 도대체 증명할 수 있는 일인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노트에는 그 해답도 쓰여 있었다.

바로 종말의 때가 왔음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을 보여주면 된다는 것.

그런데 그게 끝이었다.

그렇다면 그 물건이 무엇일지, 상원은 추리에 추리를 거듭했다.

전생의 윤진아가 낙원에 다녀온 건 46번 시험과 47번 시험 사이였다.

그렇다면 윤진아가 거인에게 보여준 아이템은 적어도 46번 시험이 끝나야만 구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종말의 때가 왔음을 보여주는 아이템이라면 입수 시기가 특정되는 것이지 특정한 아이템만 가능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상적인 진행대로라면 46번 시험이 끝나야만 구할 수 있는 아이템, 상원에겐 그런 아이템이 하나 있었다.

상원은 품에서 주먹만 한 크기의 하얀 돌을 꺼내 거인에게 내밀었다.

"수문장이시여, 종말의 때가 왔나이다."

거인이 슬며시 그 돌을 내려다보았다.

그건 바로 핌불베르트의 필드 보스 '야룬비드'를 물리쳐야만 얻을 수 있는 아이템, '겨울 늑대의 징표'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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