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화. 신들의 황혼 (2)
상원은 소울 프레임을 타고 날아올라 서울역 동편 광장의 넓이를 재보았다.
광장은 핌불베르트의 무기고를 놓기엔 턱도 없이 좁았다.
그렇다면 서울역 주변에 펼쳐진 우트가르드의 단단한 돌바닥을 파내야 했다.
그나마 서부광장 너머가 가장 물러 보였다.
"좋아."
오른팔에 마력을 불어넣자 쩡 하는 소리와 함께 '끝없는 땅의 검'이 펼쳐졌다.
마력을 더 불어 넣으니 새빨간 검기가 쭉 뻗어 나왔다.
상원은 봐두었던 땅 위로 쏜살같이 날아가, 정확히 무기고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땅을 잘랐다.
이어서 왼팔에서 '깊은 하늘의 대포'를 꺼내, 잘라낸 부분에 마력탄을 쏘았다.
지름이 소울 프레임의 키보다 긴 전기 덩어리가 땅에 부딪히자 굉음과 함께 엄청난 흙먼지가 흩날렸다.
잠시 후 흙먼지가 걷히자 단단하기 그지없는 우트가르드의 바닥에 깨끗한 역피라미드 모양의 구덩이가 생겨 있었다.
끝없는 땅의 검으로 잘라낸 부분이 깊은 하늘의 대포에 맞고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어느새 역사를 가로질러 달려온 수험자들이 놀란 눈으로 구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고, 무슨 일이야."
"아... 이게 갑자기...."
이 정도 위력을 가진 스킬은 본 적이 없을 테니 놀랄 수밖에 없을 거다.
"대박."
이건 분명 박정수의 목소리였다.
상원은 구덩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무기고의 면적과 모양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정확히 그만큼 땅을 잘라냈다.
그러므로 저 구덩이가 무기고 바닥에 있는 역피라미드 모양의 바윗덩어리에 맞지 않을 리가 없었다.
상원은 소울 프레임에서 내려 품에서 꺼낸 브라이싱크론 지갑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가락을 조금 움직이니 단단한 카드가 손에 닿았다.
바로 '핌불베르트의 무기고' 카드였다.
상원은 카드를 꺼내 두 손가락에 끼우고는 구덩이를 향해 카드를 날렸다.
카드가 표창처럼 핑그르르 날아가 역피라미드 모양 구덩이의 가장 깊은 꼭짓점에 박혔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핌불베르트의 무기고'를 전개할까요?]
"물론."
그러자 카드가 눈 부신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섬광에 상원은 눈을 가렸다.
잠시 후 눈을 떠 보니 구덩이가 있던 그 자리에 마술처럼 무기고가 생겨 있었다.
상원의 뒤에 선 수험자들이 웅성웅성 소리를 냈다.
"이게 뭐죠? 창고처럼 생겼는데요?"
"마트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생긴 게 영락없는 창고군.'
상원은 피식 웃음을 뱉으며 무기고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입구 앞에 서자 커다란 문이 열리며 밝은 조명이 팟팟 들어와 무기고를 밝혔다.
무기고 안으로 레이저 건이며 특수 강화복 같은, 최소 성물급인 아이템들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서울역의 수험자들을 모두 무장시키고도 남을 양이었다.
상원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마음껏 쓰십시오."
입을 떡 벌린 수험자들이 앞다투어 무기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게 다 뭐에요? 뭐야... SF 영화 같아."
"이거 봐, 이거... 이거 성물이야! 진짜 4등급 기관원도 때려잡을 수 있겠어."
서울역의 수험자들은 자기들에게 가장 잘 맞는 무기를 찾아 무기고로 흩어졌다.
그 인파 가운데서 문혁은 날카로운 눈으로 무기고를 둘러보고 있었다.
문혁이 상원에게 물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구해 오신 겁니까?"
"말씀드리자면 복잡합니다."
문혁이 허허 웃었다.
"이것도 회귀자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겁니까?"
"그렇다고 합시다."
문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제가 쓸 무기를...."
"잠깐만, 문혁 씨는 먼저 해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문혁이 살짝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무엇인가요?"
"따라오십시오."
상원이 문혁을 데리고 향한 곳은 '타이탄 격납고'의 앞이었다.
격납고의 커다란 문을 올려다보는 문혁의 눈에 의문이 가득 차 있었다.
"방 속의 방이군요. 여기는 어떤 방입니까?"
"타이탄 격납고라는 곳입니다."
"타이탄 격납고요?"
"그렇습니다."
상원은 격납고 옆 패널을 조작해 격납고에 들어있는 타이탄들의 목록을 띄웠다.
무기고가 아이템이 되었기 때문인지 패널의 내용이 시험의 언어로 변환되어 있었다.
"이 안에 있는 '타이탄'이라는 무기들은 밖에 있는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합니다. 하지만...."
상원은 한 대의 타이탄에는 한 명의 수험자만 '등록'할 수 있으며, 한 번 타이탄을 등록하고 나면 어지간해서는 등록을 취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머리가 좋은 문혁은 상원이 무엇을 원하는지 금세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저보고 타이탄을 분배하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맡겨두십시오. 각각의 수험자에게 최적인 타이탄을 매칭하겠습니다."
문혁이 상원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타이탄의 목록을 훑기 시작했다.
상원은 진지하기 그지없는 문혁의 옆모습을 잠깐 보다가 몸을 돌렸다.
다음으로 봐야 할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 * *
이어서 상원이 향한 곳은 병동이었다.
병동 안의 모습이 떠나기 전과 같았기에, 상원은 타우에서 보낸 시간이 단지 며칠에 불과함을 실감했다.
이 병동도 수백 번은 왔다.
그 병실에는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익숙한 발걸음이 닿은 곳은, 시험의 주요한 고비들을 상원과 함께 겪었던 부부의 병실 앞이었다.
문고리를 돌리고 문을 밀자 삐걱하는 소리와 함께 수도 없이 맡았던 익숙한 악취가 훅 풍겨왔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혜경의 침대였다.
침대 위에 웅크려 앉아 더러운 손으로 커다란 빵을 뜯어 먹던 혜경이 상원을 노려보며 말했다.
"뭐야? 당신 누구예요? 우리... 우리 은수 납치하러 왔죠?"
여전하구나.
"잘 있었나요, 혜경 씨?"
혜경이 침대 구석에 있던 인형을 보호하듯 감싸 안았다.
"은수야... 엄마가 지켜줄게."
이빨을 드러내는 그녀의 입가에 침이 주르륵 흘렀다.
수 없는 사선을 함께 넘어왔던 동료가 무너진 모습을 보는 건 괴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상원은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하아."
혜경의 침대 맞은편에는 혜경의 남편, 몇 달째 미동도 않고 누워 있는 창훈이 있었다.
더없이 야윈 얼굴 위로 수염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의 영혼은 지금도 저 먼 유령들의 땅 '연옥'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그때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왔군."
이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뒤를 돌아보니, 엘가가 혜경의 몸을 빌려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몹시도 일그러져 있었다.
"저번엔 워낙 급작스러워서 말은 못 했다만, 이 몸에 들어오는 건 정말... 불쾌하기 그지없는 일이야. 이 사람도 너희들의 동료이지 않은가? 씻기지도 않는 건가?"
잔뜩 더러워진 광인의 몸에 빙의하는 게 유쾌할 리가 없겠지.
"이해해라. 이곳까지 계속 신경 쓰기엔 다들 바쁜 일이 많아."
"쯧."
엘가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젖은 바지가 다리에 달라붙었는지 그녀가 소름이 잔뜩 돋은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참 대단하군. 27번 시험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자기 성역을 비그리드에 박아 넣을 생각을 하다니."
상원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칭찬으로 알겠다."
"그래. 여기가 기관 놈들의 본거지인 건 이미 알고 있을 테고. 그러면 당연히 기관에 맞설 준비도 했겠지?"
엘가는 전직 기관원이었으니, 비그리드에 관해서는 빠삭할 것이다.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상원의 곁에 선 엘가가 창훈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별 반응이 없나?"
"나도 저번에 본 후엔 처음이야."
"흠. 연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알 수가 없군."
엘가가 창훈의 가슴 한가운데 박힌 의령수의 심장을 톡 건드렸다.
그때였다.
몇 달 동안 미동조차 없던 의령수의 심장이 희미한 빛을 뿜기 시작했다.
엘가가 흠칫 놀라며 물러났다.
"어... 어? 뭐지?"
상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벼 보았지만, 의령수의 심장은 똑똑히 빛을 내뿜고 있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아아."
그런데 이상했다.
의령수의 심장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화산정의 혐오체'의 상징인 보라색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불꽃은 짙은 푸른색, 바로 연옥의 색깔이었다.
수도 없이 보았던 색깔, 결코 헷갈릴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때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창훈이 긴 숨을 내쉬었다.
"흐으으으윽."
그의 쪼그라든 흉곽이 쑥 솟았다 가라앉았다.
상원은 창훈의 야윈 손을 붙잡았다.
"창훈 씨? 정신이 드십니까?"
창훈이 서서히 눈을 뜨고 상원을 보았다.
창훈의 새까만 눈동자의 한가운데 희미한 푸른 빛이 감돌고 있었다.
표정도 장난기가 넘치던 평소와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오랜만에 깨어난 탓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지금 눈앞에 있는 창훈의 모습이 기억 속에 있는 누군가와 지나치게 닮아 있었다.
마치 창훈의 몸속에 그 사람이 있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상원은 그 이름을 불렀다.
"오디나스 바스칸딘?"
창훈이 상원을 바라보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목소리가 마음대로 나오지 않는지 그는 몇 차례 목청을 가다듬었다.
"으흠, 으흠."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다, 불신자."
창훈의 목소리였지만 말투는 창훈과 완전히 달랐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지금 창훈의 몸속에 있는 건 이계 에키나르타의 보스 오디나스 바스칸딘이었다.
그때 엘가가 말했다.
"오디나스 바스칸딘? 미스미엘의 대제사장?"
오디나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알고 있나?"
"그럼. 전직 기관원인데 당신을 모르면 이상하지."
오디나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직 기관원? '전직' 기관원이 뭐지? 그리고 전직 기관원이 어째서 나무의 자식의 몸속에 들어가 있는 건가?"
"말하려면 길다."
전직 기관원 엘가와 시험의 보스 오디나스가 창훈과 혜경 부부의 몸을 빌어 인사하는 모습은 나름 진풍경이었지만, 그걸 감상하기엔 급하게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상원이 물었다.
"그런데... 당신이 어째서 그 속에 들어가 있는 건가?"
"당신이 배에서 했던 말 때문이지."
'배에서 했던 말?'
기억을 되짚던 상원은 그 말을 기억해냈다.
연옥과 속세를 나누는 강, 그 강을 가르는 배에서 했던 말이었다.
'언젠가 속죄할 때가 올 거요. 그때까지... 당신이 했던 일을 잊지 마시오.'
그래서, 그 망각의 땅에서 자신이 했던 일을 모두 기억하며 망각에 맞서고 있던 건가?
오디나스가 덧붙였다.
"속죄.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지만, 명색이 대강령술산데 스승의 그릇을 인도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지."
"창훈 씨는?"
"그의 영혼이 아직 이 땅에 완전하게 돌아오지 못했어. 지금은 전면에 나설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창훈을 만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일 테다.
엘가가 물었다.
"잠깐, 연옥에서 스스로 돌아왔다는 건가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대강령술사가 아니고 대강령술사 할애비라도 그런 건 할 수 없어요."
맞는 말이다.
상원은 엘가를 돌아보며 물었다.
"'화산정의 혐오체'가 도와주더라도 말인가?"
"그럼."
오디나스가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 기관원이었다니까 잘 알겠지. 그런 건 연옥의 법칙에 위배돼. 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오디나스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엘가를 올려다보았다.
오디나스를 마주 보던 엘가가 헛숨을 뱉었다.
"당신 뒤에 있는 자... 설마, '연옥의 폭군'인가요?"
오디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다섯 마신 중 하나인 연옥의 폭군이 연옥의 영혼을 직접 속세에 돌려보내는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물론 '지하의 수호자'의 특사인 엘가 본인이 보일 만한 반응은 아니었다.
상원에겐 잘된 일이었다.
상원이 오디나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합니다."
내내 굳어 있던 오디나스의 입 끝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