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우트가르드 (5)
에론이 거대한 구슬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뭔가요?”
“‘삼색 무지개다리’라는 물건입니다.”
“아아.”
에론이 홀린 듯 삼색 무지개다리에 다가갔다.
매끄러운 구슬의 표면에 그녀의 넋 나간 얼굴이 비쳤다.
에론이 구슬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거, 공간 이동 장치군요.”
“그렇습니다.”
'단지 구슬을 보는 것만으로 삼색 무지개다리의 정체를 간파하다니.'
역시, 괜히 그녀가 시험 최고의 엔지니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이런 장치는 처음이에요. 시칠리아 지하에 있는 건 이것에 비하면 그냥 장난감 수준이에요. 세상에… 이 우주엔 놀라운 게 너무 많군요. ”
에론이 구슬에 손을 대자 표면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이어서 그녀의 앞에 빛나는 키보드가 나타났다.
에론이 숙달된 피아니스트처럼 키보드를 치기 시작했다.
'담당 기관원도 키보드를 저렇게 조작하지는 못했는데.'
에론의 넋 나간 목소리가 이어졌다.
“용사님, 이건 단순한 공간이동장치가 아니에요. 이건… 이 좌표, 우주 너머… 그러니까, 지구의 성화와 바로 이어져 있어요. 그 반대편에 있는 성역은… 서울역, 서울역이군요. 알고 계셨나요?”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는 에론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행히, 삼색 무지개다리가 서울역과 이어져 있을 거란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에론의 목소리가 떨렸다.
“용사님, 이 장치를 작동한다는 거… 무슨 뜻인지 알고 계시죠? 서울역을… 여기에 부를 거예요.”
“그럼요.”
에론의 눈빛이 깊었다.
“용사님, 저는 솔직히 조금 걱정이 돼요. 용사님도 샤믹도, 그리고 문혁 씨나 그런… 그런 분들은 강하니까 상관없지만… 서울역의 모든 분들이 그렇게 강한 건 아니에요. 여기 이곳의 마물들, 글쎄요… 직접 보진 않았지만, 분명 지구나 에키나르타의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하겠죠. 그래도… 하시겠어요?”
상원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에론의 짐작처럼 이곳 비그리드는 49번 시험이 펼쳐지는 장소, 서울역 수험자들의 수준에 비하면 이곳의 적인 기관원들은 말도 안 되게 강했다.
핌불베르트의 무기고를 통째로 뜯어 왔지만 그걸로는 부족할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절대자 ‘외눈 현자’가 이야기 속에만 나오는 괴수 ‘격풍’을 보내면서까지 서울역을 견제하려 한다는 건, 이미 서울역이 집중견제의 대상이 됐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서울역 수험자들은 앞으로도 지옥 같은 순간들을 헤쳐나가야 한다.
그러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시험의 끝을 선취하는 게 낫다.
그리고 서울역의 수험자들을 이 지옥 같은 행성에 부른 짐은, 상원이 짊어질 것이다.
에론이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좋아요.”
그녀가 키보드 위에 양손을 뻗자 파랗게 빛나는 반투명한 장갑이 그녀의 손 위에 씌워졌다.
그녀가 두 손을 구슬에 박아넣자 구슬의 파란 빛이 잠깐 강해지더니, 빛의 고리가 나타나 기둥을 따라 하늘로 쑥 올라갔다.
에론이 선언하듯 말했다.
“서울역을 부릅니다.”
고개를 끄덕인 상원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삼색 무지개다리가 쏘아 올리는 파란 빛의 기둥이 반대편 끝에서부터 서서히 분홍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삼색 무지개다리가 서울역의 성화와 이어진 것이었다.
이어서 하늘 저 멀리 분홍색 불꽃의 주변으로 하얀 형체가 서서히 일렁이기 시작했다.
점점 그것의 형체가 분명해졌다.
그건 거꾸로 뒤집힌 모양의 서울역이었다.
'오랜만에 보니 참 반갑군.'
이어서 하늘에 나타난 서울역이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지난여름 내내 애써 복구했던 건물들과 광장, 그리고 그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광장에 서 있던 수험자들이 놀란 눈으로 이쪽을 보았는데, 그중 몇몇은 분명히 상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트가르드와 서울역이 합쳐지는 이 광경이, 서울역에 있는 수험자들의 눈에는 하늘에 갑자기 나타난 도시가 거꾸로 하강하는 모습으로 보일 것이었다.
점점 더 많은 수험자들이 그 이적을 보기 위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서울역 수험자들 이외에도 강상중과 김만웅을 비롯한 반가운 얼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서 있는 멀대같은 사나이, 백문혁의 얼굴이 보였다.
백문혁이 말했다.
“맙소사.”
그때 에론이 외쳤다.
“상을 전이합니다!”
그녀의 외침과 함께 우트가르드의 땅에서부터 솟아오른 거센 돌풍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돌풍이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우트가르드의 탑을 감싸고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 서울역까지 삼키고 있었다.
그 엄청난 풍압에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상원은 에론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얼른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대로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거짓말처럼 바람이 멎었다.
거친 숨이 절로 나왔다.
“하아, 하아.”
에론이 조용히 말했다.
“상전이가 끝났어요.”
하늘을 올려다보니, 서울역이 똑바른 모양으로 뒤집어져 있었다.
대장간을 비롯한 지하의 시설들까지 모조리 딸려온 덕에 지면 아래가 울룩불룩했다.
잠시 후 하강이 멈추었다.
쿠구구구구!
이어서 엄청난 진동이 우트가르드의 탑을 덮쳤다.
거대한 흙먼지와 함께 우트가르드의 탑이 끝에서부터 서서히 좁아지고 있었다.
에론은 거의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탑이… 탑이 무너져요!”
“아닙니다. 탑이 좁아지고 있는 겁니다. 서울역 광장의 크기에 맞춰서요.”
전생에 우트가르드가 발할라와 합쳐질 때도 이랬었다.
쿠궁 쿠궁하며 이어지는 굉음과 함께 탑이 줄어들다가, 꼭대기의 반지름이 구슬에서부터 1미터도 안 되게 작아졌을 때쯤 수축이 멈추었다.
이어서 공중에 떠 있던 서울역이 자이로드롭처럼 후우우웅 하는 파공음을 내며 엄청난 속도로 추락했다.
“저거 설마 부서지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내려갑시다.”
상원은 냉동 캡슐에 에론을 담고 나서 소울 프레임을 타고 탑 바깥으로 뛰었다.
저 아래 우트가르드의 지면이 퍼즐처럼 변하며 서울역이 그 위로 안착하고 있었다.
거센 바람 소리가 귀를 스치는 와중에, 서울역 광장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수험자들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그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상원은 서서히 서울역 광장에 착륙했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소울 프레임의 가슴이 열렸다.
소울 프레임 바깥으로 서서히 걸어 나가는 상원의 어깨 위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광장 저편의 계단 위로 보이는 역사와 마트 건물, 이곳은 틀림없는 서울역이었다.
'소환이 성공했다.'
서울역 광장에는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상원은 그 인파의 맨 앞에서 웃음을 짓고 있는 한 남자, 백문혁을 향해 걸어갔다.
미소 짓는 문혁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번에는 로봇인가요?”
“아주 강한 놈들로 엄선했습니다.”
문혁이 상원의 손을 잡았다.
퀭한 눈이 그동안 서울역을 관리하느라 겪었을 피로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박정수와 김만웅은 상원보다는 소울 프레임에 관심이 있는 눈치였다.
“미친… 로보트에요 로보트.”
“와 이런 거 하나 몰아 보면 소원이 없겠네.”
백문혁의 옆에 있던 강상중이 물었다.
“시험이라는 게 이 늙은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는 건 알았지만… 이번 건 좀 너무하군. 하늘 아래 태양이 두 개일 순 없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태양이 두 개가 뜨다니 말이야. 좀, 설명 좀 해주시겠소?”
맞는 말이다.
두 개의 태양뿐 아니라, 이제는 앞으로 할 일을 설명해야 했다.
“문혁 씨, 오실 수 있는 분은 광장에 모셔주시겠습니까? 긴히 말씀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상원이 군중 앞에 나서서 말을 하는 일이 극도로 적다는 걸 아는 문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알겠습니다.”
문혁이 몸을 돌려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 * *
잠시 후 서울역 광장, 수많은 시선이 상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광장에 올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온 것 같았다.
뒤늦게 서울역에 도착한 샤믹도 합류한 채였다.
‘세상 끝의 불꽃’과 사투 중인 진아와, 아직 ‘연옥’을 헤매는 창훈, 그리고 제정신을 잃어버린 혜경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들은 개별적으로 찾아가야 할 것이다.
남은 일을 열어갈 열쇠가 그들에게 있다.
그들을 생각하다가, 상원은 다시 한번 사람들의 얼굴을 훑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게 얼마 만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막상 그 인파를 직면하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이야기를 해야 한다.’
눈을 감고 무거운 숨을 뱉어내자 조금은 갈피가 잡히는 것도 같았다.
상원이 입을 열었다.
“많은 분들이 궁금하실 겁니다. 여기가 어디인지. 여러분 머리 위에 떠 있는 두 개의 태양… 아시겠지요? 여기는 지구가 아닙니다. 이곳은 ‘비그리드’라는 행성입니다. ‘새하늘에 가장 가까운 행성’이라는 이명이 있지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수험자들 중 상당수가 에키나르타며 중원 같은 이 세계에 다녀온 적이 있으니, 다른 별에 왔다고 해서 놀라지는 않았다.
아니, 놀라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주신 ‘최초의 수확자’의 화신 신우주였다.
“이 별… 무언가 이상해요. 어느 곳에도 정보가 나와 있지 않아요. 여기는 어떤 곳이죠?”
그녀의 말에 수험자들이 웅성거렸다.
성역을 통째로 옮길 정도라면 적어도 중심 시험의 무대라는 뜻일 텐데, 주신인 최초의 수확자가 모르는 별이라니.
시험이 그렇게 수가 있는 건지 궁금할 게다.
'그래, 지금은 그 어떤 수호신도 이 별에 대해 모르겠지. 여기는 원래 49번 시험의 무대니까.'
앞으로 할 일이 무엇인지 이들에게 납득시키려면, 이 별의 실체를 밝혀야 했다.
“비그리드… 이 별에서, 여러분들은 4등급 기관원들과 맞서게 될 겁니다.”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1등급 기관원도 무서운 마당에 4등급 기관원들이라니, 그럴 수밖에.
먼저 입을 연 건 강상중이었다.
“뭐… 머리 셋 달린 황금용을 상대로도 싸웠는데 4등급 기관원이야 무섭지도 않구만. 그런데 말이야, 4등급 기관원’들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장소라면 평범한 곳이 아닌 것 같은데…?”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사실 이곳은… 원래대로라면 49번 시험에서 왔어야 할 곳입니다.”
사람들이 뜨악한 표정으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김만웅이 말했다.
“아니 형님… 49번?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49번요?”
“제대로 들은 게 맞다. 49번이다.”
“맙소사….”
점점 커지는 술렁임 속에서, 백문혁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원래 심각한 문혁이었지만, 저 정도로 심각한 표정을 본 일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상원 씨, 예전에도 한 번 여쭤본 적이 있는데… 그때 들었던 답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일을 보니 더 그렇네요… 49번 시험에 왔어야 할 곳에 벌써 와 있다니. 상원 씨… 상원 씨는 이걸 다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상원은 눈을 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아.’
그래, 더 이상은 숨길 수 없었다.
이제 그 말을 해야 했다.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상원은 입을 열었다.
“저는 회귀자입니다.”
그 여덟 글자가 모두를 굳게 만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