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97화 (197/230)

제197화. 비그리드 (2)

전생의 기억이 선했다.

무기고 안으로 들이닥치던 매서운 칼바람과 온몸을 짓누르던 마기가 생생했다.

‘그때는 여기 솔미르가 있었지.’

전생의 바로 이 자리에, 타나스에 의해 마물 수백 마리 분의 살덩어리와 융합한 괴물 된 솔미르가 타이탄 격납고의 문을 지키고 있었다.

시퍼런 거인의 상체에 뒤틀린 문어의 하체를 하고서, 솔미르는 덤벼드는 수험자들을 무시무시한 마력으로 박살 냈었다.

그때 상원은 명성에 눈이 먼 수험자들이 솔미르와 사투를 벌이는 걸 지켜보았다.

반면 지금은 ‘겨울 늑대의 징표’ 덕에 어떤 마물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로 타이탄 격납고 앞에 도달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날로 먹는 건 여전하군.’

전생에는 솔미르를 해치우자 저절로 격납고가 열렸지만 지금은 그렇게 입구를 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방법은 있었다.

상원은 피식 웃으며 격납고 입구 오른쪽에 있는 A4용지 크기의 스크린 패널로 걸어갔다.

이어서 노트에서 보았던 순서대로 스크린을 조작하자 칙 소리와 함께 타이탄 격납고의 문이 좌우로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팟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조명이 켜지며 타이탄 격납고를 비추었다.

폭 5미터 정도의 복도가 멀리 펼쳐졌는데, 바깥과는 달리 천장이 10미터는 훌쩍 넘어갈 듯했다.

복도의 좌우로 만화영화의 변신 로봇처럼 생긴 것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그것들이 바로 타우 기술력의 집약체, 파일럿의 마력으로 움직이는 인형 병기 ‘타이탄’이었다.

강력한 마력 무구와 장갑을 두른 데다 비행까지 가능한 이 병기는 최하급이라도 상급 성물이었다.

뒤따라 격납고에 들어온 샤믹이 탄성을 질렀다.

“우와! 로봇이네요!”

그녀의 반응은 전생에 여기 왔던 수험자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전생의 수험자들 또한 타이탄 격납고를 보고서 놀라긴 했지만, 그건 거대 로봇에 대한 경외라기보다는 던전의 비밀 보물창고에 들어온 게이머의 경탄에 가까웠다.

시험 후반까지 버티면서 닳고 닳아버린 수험자들의 눈에는 타이탄 역시도 아이템의 일종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샤믹의 반응은 훨씬 날 것 같았다.

상원은 아이처럼 놀라는 샤믹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신기한가요?”

“그럼요.”

여기까지 와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수험자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니, 샤믹의 반응을 보는 건 소소한 재미를 주었던 것이다.

그때 샤믹이 말릴 새도 없이 가장 가까이 있는 타이탄 앞으로 달려갔다.

이어서 타이탄 앞에 있는, 그녀의 가슴 높이에 달린 모니터를 건드리자 타이탄의 눈에 팟 하고 불이 들어왔다.

샤믹이 탄성을 지르며 살짝 물러났다.

“오오!”

모니터에서 안내음이 나왔다.

- 접속자 스캔. 수험자 샤믹 프란시스코. 타이탄 RX-1186에 등록하시겠습니까?

“어… 어….”

상원은 샤믹에게 다가가 그녀와 모니터 사이를 가로막고 등록 절차를 끊었다.

“그만.”

수험자는 동시에 하나의 타이탄만 자기 기체로 등록할 수 있고, 그 기체가 파괴되지 않는 한 등록을 취소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저런 하급 기체에 등록할 이유가 없다.

샤믹이 상원을 올려다보았다.

“에….”

“샤믹이 쓸 건 따로 있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상원은 몸을 돌려 격납고 안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격납고 가장 안쪽 중앙으로 가니, 다른 것들과는 격이 다를 정도로 강해 보이는 타이탄이 늘어선 특수 공간이 나왔다.

샤믹이 눈이 둥그레졌다.

"우와아아...! 아까 그것들이랑은 차원이 달라요!"

그중에 하나는 다른 것들과는 생김새가 확연하게 달랐다.

전체적으로 연한 파란색인 그 타이탄은 우선 키부터 다른 것들의 1.5배 이상이었고, 바디 라인은 직선적인 여느 타이탄들과는 달리 여성적으로 굴곡져 있었다.

그에 더해 네 개의 팔과 널따란 골반에서 뻗어 나온 굵은 꼬리가 특징적인 이 기체가, 바로 신기급 타이탄 중 하나인 ‘나가 퀸’이었다.

육탄전 전문인 샤믹의 스타일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기체였다.

샤믹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어… 다른 것들이랑은 많이 다르게 생겼네요. 팔도 많고….”

아무래도 생긴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체형이나 꼬리나 본인이랑 똑 닮았는데 말이야.’

이럴 때 망설임을 없앨 수 있는 마법의 말이 있다.

상원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거, 신기입니다.”

샤믹이 휘둥그런 눈으로 대답했다.

“네?”

신기, 시험 내 아이템들 중 최고 등급으로 대부분의 수험자들은 시험을 치르는 동안 사용은커녕 구경조차 하기 어려운 것들.

하늘을 쪼개고 땅을 뒤집는, 신의 도구라는 말이 마땅히 어울리는 이 괴물 같은 아이템들은 하나를 얻는 순간 시험의 난이도가 급락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기….”

샤믹이 얼빠진 표정으로 ‘나가 퀸’ 앞의 패널로 다가갔다.

“축하드립니다, 신기를 얻으신걸.”

상원은 샤믹이 나가 퀸에 등록하는 모습을 보며 돌아섰다.

상원은 주변에 늘어선 신기급 타이탄들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등록할 타이탄은 따로 있었으니까.

격납고 가장 안쪽의 벽을 따라가다 보니 어떤 조명도 비추지 않는 어두운 모퉁이가 나왔다.

타이탄은커녕 집기조차 있지 않을 것 같은 격납고 안쪽의 가장 외진 구석, 여기에 상원이 찾는 단 하나의 타이탄이 있었다.

상원은 천장 귀퉁이에서 깜빡이는 녹색 불빛을 보며, 전생에 이 자리에서 말했던 타우어 문장을 그대로 읊조렸다.

“영웅혼의 기병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어서 두 벽에서 치익 소리와 함께 증기가 빠져나오며, 모서리를 이루고 있던 두 벽이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그 어둠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이 닿는 곳이 바로 타이탄 격납고 아래 있는, 타우인들이 만든 최강의 타이탄이 있는 비밀 격납고였다.

상원은 계단을 밟아 어둠을 내려가며 전생을 기억했다.

그때 타이탄 격납고에 들어왔던 수많은 수험자들 중 이 격납고의 존재를 아는 건 노트에서 그걸 미리 본 상원뿐이었다.

상원이 그 어떤 스킬도 수호신도 없이 최후반부의 말도 안 되는 시험들을 버틸 수 있었던 건 거의 전적으로 이 타이탄을 얻어서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 타이탄이 신들의 황혼을 여는 걸 도와줄 것이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계단이 끝나고 평지에 닿자, 오래된 먼지의 냄새와 시큼한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익숙한 발걸음으로 어둠 속으로 나아가자, 어딘가에서 들어오는 희끄무레한 조명이 어두운 공간을 비추었다.

얼마쯤 갔을까, 눈앞에 거대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전생과 마찬가지로 방치된 센서가 늦게 작동한 탓에, 그 자리에 서서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야 지하 격납고의 조명이 켜졌다.

여기저기 늘어진 집기며 서류들이 여기서 타우 문명 최강의 타이탄을 만들던 사람들이 급하게 대피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최강의 타이탄이 상원 앞에 서 있었다.

나가 퀸과 마찬가지로 다른 타이탄보다 훨씬 큰 키에, 긴 팔다리를 곧게 뻗은 사람의 단단한 몸에 하얀 갑주를 걸친 듯한 모습은 날렵한 무인을 연상케 했다.

갑주의 끝 선은 보라색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양어깨에는 날개를 펼친 새처럼 생긴 타우 은하 연방의 문장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투구와 무릎 등 곳곳에 같은 황금색 장식이 달려 있었다.

다른 것들과 달리 우아함마저 느껴지는 이 기체가 바로, 타우 문명 최강의 타이탄 ‘소울 프레임’이었다.

‘바위에 박힌 검’을 얻었을 때와 같은 반가움이 밀려왔다.

아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재회한 것 같은 기분에, 상원은 소울 프레임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소울 프레임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제야 상원은 아직 소울 프레임에게 등록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반가운 마음이 너무 앞섰군.”

상원은 엷게 웃으며 타우어로 된 소울 프레임의 시동어를 읊었다.

“강철의 심장, 천둥의 날개, 결단의 칼, 복수의 이빨, 증오의 발톱.”

한 단어 한 단어를 말할수록 오랫동안 잊었던 감각, 소울 프레임과 함께 시험을 헤쳐나가던 그 감각이 다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이제 마지막 단어를 말하면 다시 프레임과 함께할 수 있게 된다.

한숨을 들이쉬고, 마지막 시동어를 말했다.

“봄.”

번쩍, 소울 프레임의 눈에 하얀 불이 들어왔다.

격납고 곳곳에 달린 스피커에서 기계음으로 된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코드 번호 ARCHANZEL - HR 1, 코드네임 소울 프레임의 기동을 시작합니다.”

놈의 눈에서 나온 초록색 레이저가 상원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했다.

이어서 격납고의 스피커로부터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파일럿… 조정, 수험자 ‘조상원’을 소울프레임의 소유자로 등록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이어졌다.

- 신기 ‘소울프레임’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래, 오랜만이다.”

상원이 다시 한번 놈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소울프레임이 상원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놈의 가슴이 좌우로 갈라지며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조종석이 나타났다.

“좋아.”

가볍게 뛰어올라 조종석 안으로 몸을 던지자 소울프레임의 흉갑이 닫히며 조종석에 조명이 들어왔다.

강화복을 입은 타우인에 맞게 설계된 조종석이 상원의 체형에 맞추어 줄어들었는데, 그렇게 많이 줄어들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상원은 지금의 몸이 본래의 몸과는 다르다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소울 프레임의 메시지가 들렸다.

“파일럿 조상원 확인. 소울프레임의 오퍼레이팅 시스템에 접속하시겠습니까?”

“좋아.”

상원이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잠시 검은색 바탕에 초록색 격자가 멀어지는 광경이 이어지더니 순식간에 격납고 안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시선이 소울프레임과 동기화된 것이다.

이어서 격납고 스피커에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소울프레임을 가동합니다. 격납고를 전개합니다.”

전생에서와 같은 풍경이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자,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이 열려며 핌불베르트의 창공을 떠도는 눈보라가 눈에 들어왔다.

뛴다는 생각도 필요 없이 소울 프레임의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그러자 소울 프레임은 지상까지 수십 미터를 단번에 뛰어올랐다.

세상이 순식간에 줄어든 것 같은 그 익숙한 감각에 상원은 미소를 지었다.

그 도약력을 그대로 담아, 상원은 등 뒤의 빛나는 날개를 꺼내 하늘로 날아올랐다.

눈보라를 머금은, 하늘에 낮게 깔린 구름이 순식간에 옆으로 지나갔다.

이어서 눈보라를 뚫고 올라온, 관제센터를 비롯한 마천루들과 별들이 총총하게 빛나는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별들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우주 도시 핌불베르트가 새하늘에 가장 가까운 별 ‘비그리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게 다시금 실감되었다.

예언을 보았고 소울프레임을 얻었으니, 핌불베르트에서 얻어야 할 건 모두 얻었다.

이제 핌불베르트가 비그리드에 도착했을 때 무엇을 할지가 문제였다.

물론 거기에 대해서도 준비해둔 것이 있었다.

상원이 가진 수단을 모두 동원해 서울역의 성화를 강화한 건, 비그리드에서 맞이하게 될 순간을 위해서였다.

‘그걸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상원은 다시 눈보라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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