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도서관 (2)
‘저런 아이템이 있었던가?’
상원은 노트에서 보았던 정보들을 되짚어 보았다.
눈을 감고 기억의 궁전에 들어간 상원은 서가 한 켠에 꽂혀 있는 경전과 노트들을 모두 뽑아서 차례 차례 읽어보았다.
역시, 없었다.
상원의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없는 거지?’
상원은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노트에 없는 아이템이 있었던가?
아, 있었다.
신화의 몸.
‘그러고 보니 노트에 없는 승천자도 있었군.’
그 신화의 몸을 만든 ‘기계장치의 신’.
신화의 몸도 기계장치의 신도, 50번까지 이어지는 시험들을 푸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존재들이었다.
그러므로 노트에 적히지 않은 것일 게다.
하지만 그들은 상원에게 ‘일곱 별의 왕관’이라는 전혀 다른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그렇다는 건 이 ‘도서관 입장권’도 다른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일단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확인부터 해야겠다.’
쿵 하고 쓰러진 야룬비드의 몸이 피부 끝에서부터 서서히 재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잿더미 속, 야룬비드의 가슴이었던 부분에 창백하게 빛나는 덩어리가 보였다.
눈보라에 뒤섞여 흩어지는 재를 바라보며, 상원은 천천히 덩어리를 향해 나아갔다.
야룬비드의 몸과 함께 지독한 악취도 사라졌다.
그렇게 서서히 걸어서, 상원은 마침내 가슴 높이쯤 떠 있는 덩어리 앞에 다다랐다.
빛덩어리의 정체는 크기가 짐볼 정도 되는 구슬이었다.
구슬에 손을 대자 그것이 내고 있던 빛이 꺼졌다.
그리고는 구슬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질감은 꼭 유리와 같았고 크기가 상당했기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질 줄 알았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대신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박이 갈라지듯 세로로 쪼개졌다.
그 속에 아이템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고구마 줄기처럼 생긴 누런 줄기에 칭칭 감겨 있는 주먹만한 크기의 하얀 돌이었다.
상원이 익히 알고 있는 아이템, 바로 ‘겨울 늑대의 징표’였다.
상원이 징표를 줍자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성물 ‘겨울 늑대의 징표’를 획득하였습니다.]
[핌불베르트의 필드 보스 야룬비드의 냉기가 집약되어 있는 핵입니다. 야룬비드는 죽었지만 핵은 아직도 야룬비드의 기운을 내뿜고 있습니다.]
[핌불베르트의 일반 마물들은 야룬비드에 대해 한없는 공포감을 느낍니다. 겨울 늑대의 징표의 소유자는 핌불베르트의 일반 마물들로부터 공격받지 않습니다.]
상원은 징표를 주워 들고 피식 웃었다.
전생의 일이 생각나서였다.
전생에 야룬비드를 잡고 나서 징표를 가져간 건 야룬비드 사냥에 기여도가 가장 높았던 천둥망치 군나르 인그로소였다.
군나르는 징표를 얻고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럴 만도 했다.
핌불베르트의 마물을 모조리 상대해서 고생고생해서 주요 지점인 무기고와 주조종실을 클리어하고 그 이후에 예상치도 못했던 필드 보스 야룬비드를 만나 갖은 고초를 겪고 나서 아이템을 얻었는데, 기껏 준다는 효과가 ‘핌불베르트의 일반 마물로부터 공격받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 골탕 먹은 기분이 들었을 게다.
‘그래, 그 타이밍에 겨울 늑대의 징표는 하등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무기고와 주조종실을 가야 하는 상원에게, 겨울 늑대의 징표가 제공하는 일반 마물 기피 효과는 더없이 귀중한 것이었다.
상원은 브라이싱크론 지갑에 징표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음 아이템, 상원은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란색 표지에 싸인 수첩이었는데, 표지가 잔뜩 낡아 여기저기 얼룩지고 구멍이 나 있었지만 아직도 광채를 잃지 않은 걸로 보아 본디 상당히 고급진 물건임을 알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표지에는 일곱 겹의 커다란 황금색 동심원이 박혀 있었다.
수첩을 줍자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성물 ‘도서관 입장권’을 얻었습니다.]
[핌불베르트의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입니다.]
상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서관 입장권’이라는 이름의 수첩은 이상한 점 투성이였다.
우선 그 형태가 종이로 된 책이라는 것.
타우 우주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 중에는 종이책이 없었다.
왜냐하면 타우 은하는 모든 것이 전자화 된 곳이기 때문이었다.
단말기와 함께 제공되는 전자책이 있다면 있었지 종이책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리고 그 아이템의 설명.
‘도서관?’
상원은 핌불베르트의 지도를 되짚어 보았다.
역시나, 그 지도에 도서관이라는 곳은 없었다.
시험 공략법에도 핌불베르트 도서관에 관련된 건 있지 않았다.
‘전생에 이 아이템이 누구에게 돌아갔지?’
상원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 누구도 저걸 얻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핌불베르트를 클리어한 이후에는 47번 시험부터 50번 시험까지 쉴 새 없이 이어졌기 때문에 이 입장권을 든 수험자가 핌불베르트에 돌아와 도서관을 탐험할 여유 같은 게 있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전생에는 아무도 이 아이템을 얻지 않았다고 보는 게 타당했다.
‘그런데 왜 이게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한가지였다.
바로 전생에서와는 달리 이번에는 야룬비드 공략에 있어 상원의 기여도가 절대적이었다는 것.
솔미르의 도움을 많이 받기는 했지만 솔미르는 수험자가 아니었기에 보상 제공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여러 명이 클리어했을 때는 주지 않는 보상을 단독 클리어 시 주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이 ‘도서관 입장권’도 그런 부류의 아이템이라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상원은 도서관 입장권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다.
수첩이 워낙 낡은 탓에 속지에 잘못 손을 대면 그대로 바스라져버릴 것 같았다.
안에 적인 내용들은 수첩이 물이라도 먹은 듯 잔뜩 번져 있었기에 무슨 문자로 쓰여있는 지조차도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문자가 타우 문자였기에 나머지 내용들도 타우 문자로 적혀 있을 거라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다음 순서는 도서관인가?’
아니, 아직은 결정할 수 없었다.
상원이 그 존재를 알지 못하는 예언에 대해서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인 네트워크 타나스가 지금도 새하늘 아버지에 의해 잠식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타나스가 완전히 잠식되어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질 것이었다.
그걸 감안하면 핌불베르트의 무기고에 들렀다가 주조종실로 가는 동선도 시간이 빠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도서관에 들르는 게 옳은 선택일까?
그때 누군가 말했다.
“그거…브라카다의 수첩?”
고개를 돌려보니, 폭풍에 날려갔던 솔미르가 상원의 곁에 서서 수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력한 에너지 폭풍에 휩쓸린 탓에 강화복은 잔뜩 깨져 있고 얼굴은 피투성이였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이 사람, 수첩에 대해 알고 있군.’
상원이 물었다.
“이게 뭔지 알고 있습니까?”
솔미르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건 브라카다의 수첩입니다. 일곱 겹의 동심원이 표지에 박혀 있는 수첩은…브라카다의 수첩 단 하나 뿐입니다. 틀림 없어요.”
“브라카다? 브라카다 리전의 창시자, 그 예언자 브라카다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게 예언자 브라카다의 수첩이라고?’
과학 문명이 발달한 타우 은하에도 초능력자는 있었다.
솔미르가 이끄는 브라카다 리전이 초능력자 부대였고, 그 군단의 시초이자 상징인 브라카다는 위대한 예언자이기도 했다.
‘잠깐, 예언?’
상원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솔미르, 혹시 핌불베르트에 도서관이 있습니까?”
상원의 말을 들은 솔미르가 잠깐 멍한 표정을 짓더니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구세주 조상원씨, 당신도 모르는 게 있군요.”
웃음을 멈춘 솔미르가 말했다.
“있습니다. 타우 은하 어디에도 없는 도서관이, 핌불베르트엔 있지요.”
상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렇다면 거기에…예언서도 있습니까?”
그 말에 솔미르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서 한참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이럴 시간이 없는데.’
답답해진 상원이 대답을 재촉하려는 찰나, 솔미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걸 당신에게 말하는 게 맞는 일인가 싶기는 합니다만…, 나는 당신이 이 우주를 구하러 온 구세주가 맞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브라카다의 수첩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만한 징표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말씀드리지요.”
솔미르가 잠깐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도서관에는 예언서가 있습니다. 브라카다 리전의 군단장에게만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브라카다의 묵시록’이 거기 있지요.”
그래, 예언이 거기 있다.
상원이 말했다.
“당장, 거기로 갑시다.”
**
조금 후 샤믹이 합류했고, 상원은 솖미르와 샤믹을 데리고 브라카다 리전의 생존자들이 대기하는 대피소에 들렀다.
남은 대원들을 추스린 후 에론을 다시 캡슐에 집어 넣고서, 상원과 샤믹은 솔미르를 따라 핌불베르트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겨울 늑대의 징표’는 효과가 확실했다.
일행이 가는 길엔 마물 한 마리 조차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렇게 상원이 솔미르를 따라 도시 중앙의 거대한 광장을 지나 시청으로 향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시민과 군인 그리고 마물의 시체가 마구잡이로 뒤엉켜있는 시청 한가운데 엘레베이터가 있었다.
세 사람은 엘레베이터에 탔다.
엘레베이터는 지상으로는 50층에 달했고 지하로는 10층까지 이어져 있었다.
솔미르가 말했다.
“도서관은 지하 11층에 있습니다.”
샤믹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에? 지하 11층…을 어떻게 가요? 지하 10층에서 걸어 내려가나요?”
상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원의 눈은 벌써 엘레베이터의 기판 아래 있는 스캐너에 가 있었다.
승천 시험의 숨은 공간은 가는 방법이 뻔하다.
상원은 도서관 입장권을 꺼내 스캐너에 댔다.
그러자 철컥 소리와 함께 기판 아래의 철판이 열리며 숨겨진 버튼이 나타났다.
지하 11층, 도서관이었다.
솔미르가 말했다.
“똑똑하시군요.”
“별 말씀을.”
피식 웃으며 대답한 상원이 지하 11층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승강기는 빠른 속도로 내려갔고, 문이 열리자 상원을 맞은 건 어두운 복도였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파란 톤으로 된 복도엔 희뿌연 조명이 흔들리고 있었다.
솔미르가 앞장서 걸으며 말했다.
“우주로 진출하기까지 타우인들은 수많은 지식을 쌓았습니다. 그리고는 그걸 전자의 형태로 저장했지요. 타우의 문명에서 종이책은 점차로 설 자리를 잃어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종이책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브라카다는 아니었지요. 브라카다는 평생에 걸쳐 귀중한 종이책들을 수집했어요. 그리고 말년에 이 도시의 설계를 주도한 브라카다는 시청 지하에 이런 걸 만들었지요.”
복도의 끝, 커다란 여닫이문 앞에 도착한 솔미르가 문을 활짝 밀어 젖히며 말했다.
“타우 은하의 유일한 종이책 도서관입니다. 핌불베르트 도서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래된 서재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상원의 코를 찔렀다.
문 너머의 광경을 본 샤믹이 탄성을 질렀다.
“오오…세상에…! 이렇게 큰 도서관은 처음 봐요.”
그건 상원도 마찬가지였다.
상원의 눈 앞에, 평생 본 것을 다 합친 것보다도 몇십 배는 큰 도서관이 펼쳐졌다.
지하로 끝없이 끝없이 이어진 구멍의 벽면을 따라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