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늑대 (4)
코일을 향해 날아오는 야룬비드의 앞발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젠장...!'
그때였다.
솔미르의 몸이 뒤로 붕 날아갔다.
샤믹이 그를 집어던진 것이다.
샤믹이 외쳤다.
"솔미르! 빨리!"
텅하는 소리와 함께 등에 무언가가 부딪혔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 정신줄을 놓아버릴 것 같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 정신을 잃으면 저놈의 손에 죽을 테니까.
솔미르는 늘어지는 사지를 애써 부여잡으며 뒤로 돌았다.
핵이 눈앞에 있었다.
'할 수 있다!'
단전에서부터 마력을 끌어올리자 목에 맨 병렬 증폭 장치가 형광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장치를 따라 마력이 회전하면서 터무니없을 정도로 증폭되었다.
"이런... 맙소사...."
겨우 초능력자 한 명이 이 정도의 힘을 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조차 없었다.
'그 옛날의 브라카다도 이런 건 못했을 거야.'
자신과 솔미르 둘이서 에너지 코일의 안정성을 깰 수 있다던 조상원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상원은 겨우 강화복 배터리 열두 개만 가지고서 그걸 해냈다.
솔미르는 오른손 끝에 몸을 감싼 엄청난 마력을 집중했다.
생전 겪어본 적조차 없는 힘이 오른손 끝에 맺혀 사방으로 시퍼런 스파크를 내뿜었다.
"흐으으읍...!"
그 무시무시한 마력에 주변의 공기가 굉음과 함께 찢어졌다.
휘오오오오!
몸이 그대로 부서질 것 같았다.
'이대로 이 힘에 휩쓸려서 조각조각 찢겨져 버리는 건 아닐까?'
그때였다.
잔뜩 뒤틀린 포효가 들렸다.
바로 야룬비드의 울음소리였다.
"으오오오오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샤믹이 다시 한번 외쳤다.
"솔미르! 빨리요!"
야룬비드의 거대한 그림자가 코일 머리에 드리워졌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대로 끝낼 순 없다!'
솔미르는 이를 악물었다.
어찌나 이를 세게 물었는지 까드득 하고 이빨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솔미르는 부서질 것 같은 오른손을 겨우 말아쥐고, 그 엄청난 기운을 그대로 담아 핵을 내려쳤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새까만 핵의 표면에 금이 갔지만, 부족했다.
'한 번 더! 한 번 더 할 수 있다!'
의지와는 달리 몸은 더 이상 마력을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오른팔을 감싸고 있던 강화복이 퍽 하고 터져나가면서, 빠드득하고 오른팔의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오른팔이 마력에 짓눌린 탓에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솔미르는 야룬비드의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니, 얼어 죽어가던 자신을 지켜보던 그 시뻘건 네 개의 눈이 코어 머리 밖에서 솔미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저 눈, 그래 저 눈.'
솔미르의 가슴속에서 울컥 무언가 솟아올랐다.
'내 피 같은 대원들이... 너에게 죽었다.'
부서진 오른 주먹을 움켜쥐고서, 솔미르는 노도처럼 끓어오르는 감정을 담아 일갈했다.
"잘 가라 개새끼야!"
젖먹던 힘까지 끌어모아서 솔미르는 다시 한번 핵을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마력이 섬광을 내뿜으며 사방으로 폭발했다.
바람 소리가 굉음이 되어 솔미르의 귓전을 때렸다.
우우우웅!
그 바람 소리 사이로 샤믹의 새된 비명이 아득하게 들렸다.
"꺄악!"
샤믹에게 신경 쓸 정신까진 없었다.
다만 솔미르는 걸레짝이 되어버린 몸이 핵이 깨진 후폭풍에 휘말려 팔랑이는 걸 느끼고 있을 따름이었다.
폭풍을 타고 높이 솟아오르니 핌불베르트 시내가 보였다.
방금 솔미르가 핵을 깨버린 코일에서 새파란 스파크가 치솟고 있었다.
야룬비드가 코일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고, 그 너머 코일에서는 벌써 짙은 마력 기둥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코일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오는 한 남자, 조상원이 보였다.
하얀 나뭇가지에서 마력검을 뽑은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상원의 입에 엷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고생했습니다."
상원의 입 모양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 *
그보다 조금 전, 코일을 나선 상원은 마검을 뽑아 들고 야룬비드를 올려다보았다.
놈은 솔미르와 샤믹이 들어간 반대편 코일을 노려보고 있었다.
상원은 놈의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다.
"야룬비드."
타나스가 온갖 마물들을 이리저리 뒤섞어 만들어낸 이 머리 둘 달린 거대한 늑대 괴물은, 던전 핌불베르트의 숨은 보스 중 하나였다.
핌불베르트 최대 전력인 초능력자 부대 브라카다 리전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졌기에, 완전 방어에 가까운 스킬 저항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더해 끝도 없이 거대한 덩치에서 나오는 괴력과 더불어 항시 내뿜는 지독하게 차가운 안개가 놈의 무기였다.
놈을 올려다보는 상원의 눈앞에 전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힘들었지."
전생을 회상하는 상원의 목소리가 씁쓸했다.
야룬비드는 던전 핌불베르트를 공략하러 들어왔던 수험자들이 마주했던 마지막 난관이었다.
수험자들은 보상이 짭짤한 무기고와 주조종실까지 공략을 마치는 후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던전을 모두 공략했다는 안도감에 마음을 놓고 있던 수험자들 앞에 난데없이 나타난 야룬비드는 재앙에 가까운 존재였다.
대부분의 스킬을 무효화하는 통에 주신급 수험자들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수많은 수험자들이 놈에게 당해 탈락했다.
상원은 멀리서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수호신으로부터 놈에 대한 정보를 전달받은 주신급 수험자들이 힘 싸움으로 놈을 잡으려는 타이밍이 되어서 즈음에야 공략에 합류했다.
야룬비드가 아무리 대단한 괴물이라 해도 '천둥망치' 군나르, 카일 핸드레이크, 스칼렛 이베르손 등 탑급 수험자들의 총공세를 버틸 수는 없었으니까.
그때 상원은 노트에서 보았던 공략법인 코일에 대한 이야기는 입에도 담지 않았다.
그런 고급 정보가 있다는 걸 말했다면 다른 수험자들의 집중견제를 받고 진작 탈락했을 테니까.
자신이 승천 시험의 공략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는 것, 그것이 시험을 치를 때 지킨 제1의 철칙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현생, 상원은 코일을 이용한 공략법으로 야룬비드를 잡기로 마음먹었다.
야룬비드 처치는 공략법만 숙지하면 간단했으므로 거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에너지 코일을 동시에 불안정하게 만들면 코일 간 연쇄 폭발이 일어나 그 사이로 에너지 폭풍이 발생한다. 야룬비드는 스킬 저항력이 아주 높지만, 에너지 폭풍에 노출되면 스킬 저항력이 거의 없어진다.'
그게 노트에 있던 내용이었다.
문제는 샤믹과 에론만을 데리고서 어떻게 두 개의 코일을 동시에 불안정하게 만드느냐는 것.
에너지 코일을 불안정하게 만들려면 핵을 깨야 하는데, 샤믹은 핵을 깰 파워까지는 없었다.
에론을 시켜서 샤믹에게 맞는 증폭기를 만드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기로 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으니까.
그래서 야룬비드를 그냥 건너뛰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브라카다 리전의 군단장 솔미르가 떡 하고 나타난 것이다.
상원은 그때부터 솔미르의 마력을 증폭시켜 에너지 코일 연쇄 폭발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상원은 흡족한 얼굴로 야룬비드를 올려다보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이 노려보고 있던 코일에서 거대하고 시퍼런 스파크가 일어났다.
솔미르의 장기인 '연쇄 번개'였다.
수많은 수험자들을 그냥 통구이로 만들어버렸던 무시무시한 스킬이 지금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어서 쩍 소리와 함께 코일 머리 부분을 이루고 있던 투명한 구형 구조물이 산산이 부서졌다.
핵이 깨진 것이다.
'좋다!'
핵이 부서지며 일어난 거대한 후폭풍에 휘말린 솔미르가 하늘 높이 흩날렸다.
"고생했습니다."
솔미르를 향해 웃어 보인 상원은 하늘을 오가는 바람을 조종해 솔미르를 안전한 곳으로 날려 보냈다.
야룬비드는 솔미르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르르릉?"
‘멍청한 놈. 네놈이 신경 써야 할 건 거기가 아닐 텐데?’
곧 핵이 깨진 코일로부터 거대한 에너지 기둥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야룬비드의 뒤로도, 상원이 방금 핵을 깨버린 코일에서 에너지 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에너지 기둥이 안개와 구름을 걷어내며, 그 사이로 잠깐 파란 하늘이 보였다.
하늘을 향해 폭주하는 두 개의 에너지 기둥, 이제 그 사이로 에너지 연쇄 폭발이 시작될 것이다.
곧 두 기둥이 웅웅 소리와 함께 함께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에너지가 공명하는 것이었다.
‘시작됐군.’
이어서 각각의 기둥으로부터 반구형의 파란 색 막이 퍼져 나와, 야룬비드를 가운데 두고 두 막이 겹쳐졌다.
“그르르르릉!”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는지 야룬비드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놈의 피부에 돋은, 사람의 팔과 얼굴을 닮은 돌기들이 쭈뼛쭈뼛 서고 있었다.
야룬비드가 비명에 가까운 포효와 함께 냉기를 뿜어냈다.
“크아아악!”
하지만 놈의 냉기는 에너지 코일의 파장에 갇혀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반구형의 두 막이 겹치는 그 공간에서, 야룬비드가 뿜어낸 냉기는 파란색 장막을 따라 소용돌이치고 있을 뿐이었다.
야룬비드가 장막을 찢으려는 듯 팔을 휘둘렀지만, 이미 강력한 에너지가 놈의 몸을 짓누르는 탓에 허우적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야룬비드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으르렁거렸다.
“끄으으윽!”
그리고 상원이 기다리던 에너지 연쇄 폭발이 시작되었다.
노트에는 ‘에너지 폭풍이 일어난다’고만 쓰여있고 그것이 모습에 대한 묘사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상원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며 그것이 에너지 연쇄 폭발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게 에너지 연쇄 폭발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야룬비드를 감싸고 두 막이 겹쳐진 공간 속에서 조그만 빛무리가 무수한 반딧불 떼처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팡팡 소리와 함께 조그만 꽃봉오리가 터지듯 작게 폭발하는 것이었다.
그 폭발에 휩쓸린 야룬비드는 마치 무수한 안개꽃에 휩싸인 것처럼 보였다.
작은 폭발처럼 보일 뿐이었지만 사실 그 폭발 하나하나가 웬만한 수험자들을 그대로 가루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강했다.
그게 터질 때마다 막 밖으로 엄청난 진동이 그대로 전해졌으니까.
그렇게 한참 동안 이어지던 폭발이 멎었다.
폭발은 끝났지만 야룬비드를 감싼 장막은 그대로였다.
수 없는 폭발에 얻어맞은 야룬비드가 지친 개처럼 헐떡이며 상원을 내려다보았다.
무수히 돋아났던 돌기들이 모두 터져 버려서, 놈의 피부는 누런 체액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돌기들이 스킬 저항력의 원천이니, 그게 날아갔다는 건 이제 놈이 덩치 큰 과녁이 됐다는 뜻이었다.
“그으으으윽….”
놈의 입에서 피거품이 섞인 침이 상원 앞에 뚝 떨어졌다.
피거품이 땅에 부딪히며 지독한 악취를 뿜어냈다.
‘이제 마지막 한 방이면 된다.’
상원에겐 놈에게 박아 넣을 한 방, 저런 괴물을 상대하는 데는 최적의 스킬이 있었다.
상원은 하얀 검기를 씌운 가지를 땅에 박고는, 전생의 여정을 함께 했던 동료이자 스승을 불렀다.
“원탁의 왕이시여.”
그 말과 함께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상원의 눈앞에는 땅에 거꾸로 박힌 거대한 양손검이 보였다.
‘바위에 박힌 검’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상원은 양손검을 뽑아 들었다.
‘원탁의 왕’이 상원의 뒤에서 말했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입니다, 폐하.”
간결하게 대답한 상원이 양손검을 뽑아 들고 목을 늘어뜨린 늑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