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88화 (188/230)

제188화. 늑대 (2)

솔미르가 물었다.

"그들을 만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야룬비드를 잡는데 브라카다 리전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인가?

아니, 그건 안 된다.

지금 브라카다 대원들은 움직이기조차도 힘든 상황이다.

그런데 어떻게 야룬비드를 잡는 걸 돕는단 말인가?

상원이 솔미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브라카다 리전 대원들로부터 받아야 할 게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배터리입니다."

"네?"

'배터리? 무슨 배터리?'

솔미르가 입을 열려는 찰나 상원이 그의 말을 끊었다.

"하나하나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일단 움직입시다. 솔미르, 안내를 부탁합니다. 샤믹은 식량을 좀 챙겨주세요."

상원은 그 말을 남기고 대피소 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옛썰!"

샤믹이라 불린 여자가 식량이 쌓인 진열대 하나를 통째로 뜯어냈다.

작은 여자는 계단을 올라가는 상원과 멍하게 서 있는 솔미르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상원을 따라 도도도 달려갔다.

솔미르는 멀어지는 상원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뺨을 세게 때려 보았다.

'이거, 죽기 직전이라 꿈을 꾸는 건가? 아니면 미치기라도 한 건가?'

뺨이 불이라도 난 것처럼 아파 왔지만 주변의 풍경은 여전했다.

'꿈은 아니로군.'

그래, 그러면 움직여야지.

"같이 갑시다!"

상원의 뒤에 대고 외친 솔미르는 허겁지겁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잠시 후, 같은 건물 로비.

방금 본 광경을 믿을 수 없었던 솔미르가 어안이 벙벙해져 물었다.

"그거 어떻게 한 겁니까?"

상원이 품에서 초저온 냉동 캡슐을 꺼내더니 작은 여자가 거기 들어가고, 그 캡슐을 다시 품에 집어넣은 것이다.

캡슐뿐만이 아니었다.

샤믹이 가져온 어마어마한 양의 식량도 진열대째로 상원의 품속으로 사라졌다.

'뭐지 방금? 잘못 본 건가?'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작은 여자도 진열대도 온데간데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한 것처럼, 상원이 무심하게 말했다.

"마술 같은 거라고 생각하십시오. 이제 갑시다."

마술 같은 일을 연달아 겪다 보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솔미르가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데 상원이 그의 등을 툭 쳤다.

"어서요. 시간이 없습니다. 대원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래, 얼른 가야 한다.'

솔미르는 고개를 들고 면밀하게 방위를 살폈다.

먹구름이 잔뜩 낀 탓에 거리는 어두웠고, 설상가상으로 그 위로 안개가 짙었다.

수십 년을 살아온 고향, 수천 번을 다녔던 거리였지만 폐허가 된 탓에 방위를 잡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곧 가야 할 길을 찾은 솔미르가 말했다.

"저쪽입니다."

말을 마친 솔미르가 바이저를 올렸다.

자연스럽게 그의 코와 입을 감싼 마스크에서 더운 공기가 훅 불어닥쳤다.

큰 숨을 들이쉰 후, 솔미르는 강화유리로 된 문을 밀어젖히고 무서리가 잔뜩 내린 거리로 나섰다.

기다렸다는 듯 매서운 추위가 강화복을 파고들었다.

"끄으으으윽."

살을 에는 추위를 견디며, 솔미르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건물의 잔해와 부서진 병기 그리고 사람과 마물의 시체가 널려 있었는데, 매서운 추위 때문에 시체는 썩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종말을 맞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이 거리에 사람과 활기가 넘쳤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감정마저 들지 않았다.

지금 이 시각에도 솔미르를 기다리며 굶주림에 죽어가는 대원들이 있었다.

뒤를 돌아본 솔미르는 입을 떡 벌렸다.

상원과 샤믹이 이 강추위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였다.

상원은 코트에 평상복, 심지어 샤믹은 얇디얇은 타이즈에 자켓만 걸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초인들이로군.'

그 초인들이 자신을 도와준다는 건 잘된 일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야룬비드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오십시오!"

솔미르가 앞을 향해 성큼성큼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러나 몸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얼어붙어 버린 발을 움직이는 게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때, 갑자기 솔미르의 몸이 쑥 들렸다.

"어... 어어?"

솔미르는 겨우 몸을 굽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샤믹이 그의 몸을 통째로 들어 어깨에 짊어진 것이었다.

이 여자, 진열대를 뜯어낼 때부터 힘이 엄청나다고는 생각했는데 강화복을 입은 자신을 이렇게 들어 올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상원이 말했다.

"느려서 안 되겠습니다. 방향을 말하십시오."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샤믹이 말했다.

"얼른 말해줘요. 어디로 가야 할지."

솔미르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알겠소. 일단 앞으로 쭉 갑시다."

"오케이."

샤믹이 달리자 롤러코스터를 탄 듯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이 거리를 이렇게 달리게 될 줄이야.

솔미르는 실소를 흘렸다.

"허... 허허허...."

* * *

브라카다 리전의 남은 대원들이 있는 대피소로 도착하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른 대피소가 있는 곳도 거대한 마천루의 지하 깊은 곳이었다.

샤믹의 어깨에서 내린 솔미르가 대피소의 문을 열었다.

끽소리와 함께 커다란 철문이 양옆으로 열리면서 그 위에 쌓여 있던 서리가 툭 떨어져 내렸다.

강화복 차림의 대원들이 벽에 기대 축 늘어져 있었다.

앞선 대피소와는 달리 진열장은 비어 있었고 중앙의 난로도 꺼진 채로, 창백한 조명만이 천장에서 을씨년스럽게 흔들렸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솔미르를 바라보는 대원들의 눈빛이 공허했다.

뒤따라 들어온 샤믹이 말했다.

"대장, 여기는 성화가 꺼졌어요."

상원이 중얼거렸다.

"그렇군. 그래서 여기는 대피소로 등록돼있지 않았던 건가?"

'무슨 말이지?'

솔미르가 무언가 말을 하려는데 상원이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샤믹, 받아요."

상원이 지갑에서 커다란 물건 두 개를 연이어 꺼냈다.

첫 번째는 샤믹이 앞서 대피소에서 통째로 뜯어온 식량이 담긴 진열장이었다.

샤믹은 진열장을 받아 세워둔 후 상원이 다음으로 꺼낸 캡슐을 받았다.

"샤믹, 식량을 대원들에게 나눠주세요."

"네, 대장."

샤믹이 진열장의 식량 상자를 꺼내 포장지를 뜯는 동안, 상원은 냉동 캡슐을 작동했다.

윙 하는 소리와 함께 냉동 캡슐에 불이 들어왔다.

'저거 분명히 유선일 텐데? 어떻게 작동하는 거지?'

솔미르가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냉동 캡슐에서 칙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캡슐 뚜껑이 열렸다.

거기서 작은 여자가 머리를 흔들며 나왔다.

상원이 그녀에게 말했다.

"타우 우주의 냉동 캡슐을 이용해 본 소감이 어떻습니까, 에론?"

에론이 대답했다.

"어우, 썩 유쾌하진 않네요. 냉각제가 온몸을 순환하는 느낌 어떤지 아세요?"

"그닥 알고 싶진 않습니다."

피식 웃으며 대답한 상원이 방 안 풍경을 둘러보더니 대원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열둘. 맞네. 충분하겠군."

솔미르가 물었다.

"뭐가 충분하다는 말입니까?"

"코일을 작동할 에너지 말입니다. 이 근처에 에너지 코일이 두 개 있지요?"

솔미르가 눈을 크게 떴다.

"에너지 코일요?"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너지 코일은 핌불베르트 전체를 순환하는 막대한 에너지가 중간 저장되는 장치였다.

웬만한 빌딩보다 큰 막대사탕처럼 생긴 구조물이기에, 한 번 보면 어지간해서는 잊어버릴 리가 없었다.

솔미르는 주변의 풍경을 되짚어 보았다.

역시, 이 남자의 말마따나 이 주변에 에너지 코일이 두 개 있었다.

거리는 여기서 오백 미터 남짓이었다.

"아니... 당신, 그걸 어떻게.... 도대체 이 도시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 겁니까?"

상원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웬만한 건 다 압니다."

"당신... 정체가 뭡니까?"

"거기까진 모르셔도 됩니다. 여하튼."

상원이 솔미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는 에너지 코일을 이용할 겁니다. 에너지 코일 간의 연쇄 폭발을 유도할 거예요. 어떻게 하는 건지, 그건 당신도 알지요?"

솔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너지 코일 사이를 오가는 에너지의 흐름을 인위적인 충격을 통해 불안정하게 만들면 일대를 한 번에 날려버릴 정도로 강력한 폭발을 만들 수 있다.

"그걸로 야룬비드를 잡을 생각입니까?"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말은 됐다.

코일 간 연쇄 폭발 정도라면 그 끔찍한 야룬비드라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핌불베르트의 사람들은 그만한 재앙에 대한 대비도 충분히 해두었다.

에너지 코일이 웬만한 충격에도 안정성을 유지하도록 설계해 둔 것이다.

코일 간 연쇄 폭발을 유도하려면 막대한 양의 충격을, 그것도 두 코일에 동시에 가해야 했다.

솔미르가 물었다.

"어떻게 반응을 유도하려고요?"

상원이 솔미르를 가리키며 말했다.

"두 코일에 동시에 충격을 가해야 하지요. 한쪽은 제가 할 겁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솔미르, 당신이 할 겁니다."

"네...?"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에너지 반응을 유도할 만한 충격을 만들어야 한다고? 무슨 재주로?'

상원이 솔미르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마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마력을 증폭시킬 장치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에론?"

널브러진 병사들의 강화복을 신기한 듯 살펴보던 에론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네... 네?"

상원이 그녀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강화복 가슴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가슴이 갈라지며 주먹만 한 크기의 빛나는 구슬이 나타났다.

"이건 브라카다 리전 강화복 배터리입니다. 나머지 강화복에서 배터리를 빼서 병렬 증폭 장치를 만들어주세요. 할 수 있죠?"

"어...."

잠시 망설이던 에론이 배터리를 받고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가능하고 말고요! 이 정도 배터리... 와, 이런 순도 높은 마력 결정체를 본 게 얼마 만인지.... 이게 열두 개면 정말 엄청난 걸 만들 수 있겠어요!"

그 모습을 잠시 멍하게 바라보던 솔미르가 외쳤다.

"아니... 잠깐만! 뭐 하는 거요? 강화복 배터리를 빼면 우리 대원들은...!"

"얼어 죽지 않겠냐고요?"

솔미르의 말을 자른 상원이 방 중앙의 열병합 난로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는 높이 들어 올린 오른팔에 마력을 끌어모았다.

지진 모양의 문신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시무시한 열기가 느껴졌다.

'설마....'

"이거면 충분할 겁니다."

상원이 달아오른 오른팔로 열병합 난로를 후려쳤다.

그러자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열병합 난로가 새빨갛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열병합 발전소가 보이는 분홍색 불꽃과는 분명히 다른 색이었지만, 어쨌든 대피소 전체를 훈훈하게 데울 만한 열기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상원이 솔미르에게 물었다.

"이제 배터리를 빼도 되겠습니까?"

솔미르는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에론이 뛰어다니며 대원들의 강화복 배터리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만들어 드릴 테니."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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