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87화 (187/230)

제187화. 늑대 (1)

기억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지독한 악취, 그 감각 하나하나가 살아서 돌아오고 있었다.

솔미르의 귓전에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대... 대장...."

눈을 감았다 뜨니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폐허가 된 벙커 안, 무너진 벽을 통해 눈보라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눈앞에서 브라카다 리전의 대원 하나가 죽어갔다.

솔미르는 그의 이름을 기억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파프너."

바이저 안쪽, 선 채로 얼어붙어 가는 파프너의 얼굴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강화복을 우습게 뚫고 들어오는 냉기 때문이었다.

바이저 위로 서리가 하얗게 끼기 시작하며 그의 얼굴이 서서히 가려졌다.

파프너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도망... 쳐...."

다음 순간, 파프너는 강화복 째로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다.

"안 돼...."

솔미르의 말이 하얀 성에가 되어 바이저에 끼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혼란스러웠다.

타나스가 저런 괴물을 만들리라고 그 누가 예상했단 말인가?

어떻게 저런 놈을 상대로 싸우라는 것인가?

브라카다 리전의 항전이 한창일 때, 타나스는 핌불베르트의 생체병기 공장으로부터 지독한 냉기를 내뿜는 괴물 '야룬비드'를 만들어냈다.

그 이후 전세는 급격하게 기울었다.

타우 은하의 핵심 전력 중 하나라는 브라카다 리전도 그 괴물 앞에서는 별수 없었다.

브라카다 리전이 끈질기게 이어온 사투도 이렇게 끝나는 것 같았다.

솔미르는 이를 꽉 물었다.

"크흑."

저 멀리서 긴 울음소리가 들렸다.

놈의 울음소리였다.

아우우우우-

곧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벙커 안의 집기가 들썩였다.

야룬비드가 다가오고 있었다.

놈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놈이 내뿜는 냉기가 강해졌다.

이제 냉기가 강화복을 뚫고 들어와 살갗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몸 곳곳을 커다란 단도로 찌르는 것 같았다.

"으... 으으윽...!"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다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때였다.

거대한 짐승이 으르렁대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으르르르릉...!"

솔미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충혈된 듯 새빨간 눈 네 개가 솔미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룬비드였다.

그것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솔미르는 직감했다.

'이렇게 죽는구나.'

원초적인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솟아올랐다.

'아아, 이렇게....'

그 순간, 어떤 목소리가 주변의 풍경을 찢고 들어와 솔미르의 뇌리에 박혔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풍경이 부서졌다.

* * *

솔미르는 털썩 주저앉았다.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여기가 어디지?'

솔미르는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홍색 불빛이 비치는 작은 방, 대피소였다.

빨간 비상등이 깜빡이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좁은 대피소에 울려 퍼졌다.

조상원의 일행인 피부가 까만 여자가 솔미르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괜찮아요?"

솔미르가 입을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스런 눈으로 솔미르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맑았다.

그 맑은 얼굴, 그건 이제 핌불베르트의 생존자들 중 어느 누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조상원이 무심하게 말했다.

"트라우마가 상당하군."

이마를 짚어 보니 비 오듯 흐른 땀에 이마가 축축했다.

'내가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남은 군단을 이끌고 야룬비드를 피해 도시의 외곽인 이쪽까지 나왔다.

대부분의 대원들이 부상이 너무 심해 움직일 수 없는 탓에,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대원 한 명을 데리고 군단장인 자신이 직접 움직였다.

그러다가 운 좋게 이 대피소까지 오게 됐다.

그런데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자가 먼저 대피소에 들어와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를 인질로 잡고 있었더니, 뒤이어 그녀의 일행들이 들어왔다.

놀랍게도 그중 하나인 조상원이 솔미르의 이름을 알고 있던 것이다.

그는 이 우주를 구원하러 왔다 했다.

마치, 브라카다가 남긴 묵시록에 쓰여 있던 것처럼.

그리고 경보가 울렸다.

"후우."

한숨을 쉰 솔미르가 몸을 일으켰다.

"미안하오, 좋지 않은 기억이 되살아나서."

조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늑대라면 그럴 만하지."

그의 목소리가 책을 읽듯 무심했다.

그 괴물을 부르는 목소리엔 조금의 공포감도 묻어있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상원이 긴 집게손가락을 세워 턱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서 이 근처에 마물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군. 하기사 어떤 마물이 늑대가 곧 오는데 이 근처를 얼씬거릴 생각을 했겠어."

그때 솔미르의 머릿속에 드는 의문이 있었다.

'그나저나 저자가 늑대를 어떻게 알지?'

아니다.

솔미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타나스의 도움 요청을 받고 핌불베르트로 직통하는 좌표를 받고 왔다면, 늑대의 존재를 아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다면 저자는 이 도시의, 아니 이 우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모든 걸 무심하게 바라보는 태도로 미루어 보아서는 웬만한 건 다 알고 있는 것 같긴 했다.

그때 피부가 검은 여자가 상원에게 물었다.

"늑대라고요? 강한가요?"

상원이 대답했다.

"본래 이름은 야룬비드인데, 늑대라고들 부릅니다. 더럽게 강합니다. 정면 승부는 자살행위죠."

상원이 솔미르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브라카다 리전의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을 거요. 놈은 타나스가 브라카다 리전을 잡으려고 특별히 설계한 존재니까."

'뭐라고?'

전혀 모르던 사실이었다.

"그 늑대가... 타나스가 우리를 잡으려고 만든 존재라고요?"

"그렇소."

그때 한 번 더 방이 울렸다.

사이렌 소리가 요란했다.

솔미르가 인질로 잡았던 체구가 작은 여자가 상원에게 물었다.

"그놈이 지금 여기로 오고 있다는 거죠?"

그 말에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빨리 피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여기 있으면 모두 죽을 텐데...."

상원이 무언가 말을 하려는 찰나, 솔미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는... 여기는 괜찮소."

세 사람의 눈이 솔미르를 향했다.

"이 대피소는 우주 전쟁이 일어날 경우를 가정해서 만든 시설이오. 야룬비드의 냉기가 아무리 지독하다 해도 여기까지 파고들지는 않을 거요."

그래, 적어도 이 대피소는 야룬비드로부터 안전하다.

야룬비드가 아무리 규격 외의 괴물이라 해도 위성포격까지 대비해서 만들어진 대피소를 뚫고 들어올 순 없다.

솔미르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두 여자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작은 여자가 조상원에게 물었다.

"저... 정말인가요?"

그러자 조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여기 있으면 안전합니다."

그제야 두 여자가 한슴을 푹 쉬었다.

저 남자, 일행 안에서 저런 존재였군.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그 길이 옳다는 것을 보장하는 사람.

그래, 이 우주를 구원하려면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큰 여자가 물었다.

"그럼 우리는 그 늑대가 지나갈 때까지 여기 있으면 되는 거네요?"

그러자 조상원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까 대답을 할 때도 저렇게 생각에 잠겨 있더니.

저 입에서 이번엔 무슨 말이 나올까?

그런데, 상원의 대답은 솔미르의 예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아니요, 올라갈 겁니다."

'뭐라고?'

큰 여자가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니...."

솔미르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제정신이오? 곧 있으면 늑대가 지나갈 건데...! 올라가겠다고요? 미쳤소?"

흥분한 솔미르의 말을 들은 상원이 대답했다.

"아니, 제정신이오. 우리가 올라가야 하는 이유는, 늑대가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오."

늑대가 지나갈 것이니 올라간다고?

"무슨 소리요?"

상원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늑대가 지금 사지로 들어오고 있잖소. 늑대를 잡을 기회인데, 놓칠 거요? 이 기회를 놓치면 또 늑대를 언제 잡을 수 있는지 알 수 없는데?"

정신이 아득해졌다.

괴물의 모습이 생각났다.

지축을 부수며 다가오던 거대한 덩치와 끔찍한 몰골, 그리고 강화복을 종잇장처럼 꿰뚫는 냉기를 내뿜는 아가리까지.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다시금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고 이빨이 딱딱 부딪혔다.

도저히 맞설 수 있는 상대로 생각되지 않는 그놈을 잡는다고?

그때 큰 여자가 솔미르의 손을 잡았다.

커다란 솔미르의 손을 잡은 그녀의 조그만 손이 꽤 부드러웠다.

그제야 솔미르는 그녀를 자세히 보았다.

흑단같이 흘러내리는 머리 아래 예쁘장한 얼굴 곳곳에 파란 비늘이 돋아 있었다.

등 뒤로는 파란 비늘에 뒤덮인 굵은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이 여자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군.'

타우의 강화 인간들처럼 생체공학적 처치를 거쳐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솔미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대장의 말을 믿기 어려울 거란 거 알아요. 맞서 싸우는 게 자살행위인데 어떻게 그 괴물을 잡을 수 있나 싶겠죠. 심지어 우리 같은 이방인이 도시의 구조를 잘 알 수 있을 리도 없는데 말이에요."

솔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이 크고 깊어서 바라보고 있으니 왠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대장을 믿으세요. 대장의 작전은 틀림이 없으니까. 저도, 여기 에론도, 대장을 따라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 과정에서 지금 같은 상황은 수도 없이 겪었죠. 그러면서 알게 됐어요. 대장의 작전은 틀림이 없다는 걸. 그렇죠 대장?"

그녀가 상원을 돌아보자, 상원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다시 솔미르를 보았다.

"그러니, 대장을, 우리를 한 번 믿어 주겠어요?"

솔미르는 생각했다.

저 남자의 말이 맞아서 늑대를 잡는다면?

그 뒤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만큼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좋은 일임은 틀림없다.

반대로, 저 남자의 말이 틀린다면?

자신의 죽음도 개죽음이거니와, 솔미르 자신을 기다리며 얼어 죽어가고 있는 브라카다 리전의 남은 대원들은 그대로 죽게 된다.

그럴 수는 없다.

'아니야. 과연 그런가?'

만일 지금 위기를 넘긴다 해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이미 했던 계산이었고, 결과는 역시나 절망적이었다.

솔미르가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한번 믿어 봅시다."

상원이 다시 한번 솔미르의 손을 잡았다.

"그래요, 잘 생각했습니다."

믿기로 마음을 먹어서일까, 왠지 그의 말에서 깊은 자신감이 느껴졌다.

상원이 쓰러진 대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말씀드린 대로 올라갈 겁니다. 저분은 조금 다치시긴 했습니다만 여기 계시면 저절로 회복될 거니 안심하시고."

이어서 상원이 물었다.

"우선 그 전에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브라카다 리전의 남은 숫자는 얼마나 되지요?"

'이걸 왜 묻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나랑 저 친구 빼고 열둘. 그중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없소. 혹시 그들의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거든...."

상원이 그의 말을 잘랐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다들 어디 있지요?"

"이 근처의 다른 대피소에 있소. 거기는 남은 식량이 없어서 여기까지 왔지."

그 말을 들은 상원이 중얼거렸다.

"아, 그 대피소는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았나 보군."

"네?"

상원이 돌아서며 말했다.

"아니오, 일단 거기로 갑시다. 그들을 만나야 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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