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핌볼베르트 (5)
솔미르는 강화복의 투구를 열었다.
윙 하고 바이저가 올라가면서 대피소의 따뜻한 공기가 콧속에 들어왔다.
혹한이 찾아온 핌불베르트, 이 대피소는 따뜻한 공기가 아직 남아있는 몇 되지 않는 장소 중 하나였다.
바이저를 올리니 다가오는 낯선 이의 모습이 보다 선명해졌다.
솔미르가 물었다.
"이 우주를 구하러 오셨다?"
"그렇소."
순간 솔미르의 생각이 멈췄다.
'이 말...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어디더라?
그러다 솔미르의 생각이 어딘가에 닿았다.
'허어, 이런 말을 하는 자가 진짜로 나타났군.'
솔미르는 폐를 터뜨릴 것처럼 껄껄 웃었다.
"허, 허허허허허!"
너무 크게 웃은 탓에 마물을 상대하느라 다친 배가 아파왔다.
그 때문에 솔미르는 얼굴을 찡그리며 웃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끄응."
낯선 이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무엇이 그리 웃기시오?"
솔미르가 두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걸 아는데도, 어쩐지 즐거웠다.
묵시록, 그것 때문이겠지.
솔미르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하는 소리요?"
낯선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저 멀리는 두 여자들이 서로를 껴안은 채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하나, 방금 솔미르가 인질로 잡고 있던 작은 여자의 눈은 아직도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솔미르는 그 여자를 향해 사과의 의미로 고개를 숙여 보이고 나서, 낯선 이의 모습을 쭉 훑어보았다.
생긴 건 타우인과 비슷했지만, 타우인보다 키는 조금 더 컸고 골격은 훨씬 단단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가 뾰족한 타우인들과는 달리 귀 끝이 동그랬다.
셔츠와 바지에 코트 차림인 것도 로브를 즐겨 입는 타우인들과는 달랐다.
저자가 일반인이 아니라는 걸 직감한 게 바로 그 지점이었다.
'저 꼴로 핌불베르트를 돌아다닌다고?'
단련된 군인들조차도 저런 평상복 차림으로 핌불베르트를 돌아다녔다간 얼어 죽기 십상이었다.
이어서 솔미르의 시선이 그 남자가 든 무기에 닿았다.
새하얗게 빛나는 빛의 칼날이 뻗어 나와 있는 게 군용 마력검과 모양새가 비슷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렇지 않았다.
'나뭇가지?'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건 새하얀 나뭇가지, 분명 나뭇가지였다.
'어떻게 가지에서 저런 칼날을 뽑아낼 수 있지?'
단련된 초능력자들도 마력의 칼날을 뽑아내려면 마력을 정제하는 별도의 장치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냥 나뭇가지에서 저런 칼날을 뽑아낸다고?
아주 오래전의 전설적인 초능력자, 군단에 그 이름을 준 대장군 브라카다가 나무 막대기에서 마검을 뽑아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냥 과장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지금 저 남자를 보니 믿어 왔던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그 남자가 고개를 바로 세웠다.
이어서 남자가 말했다.
"타나스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소."
"뭐라고?"
타우 은하의 모든 시스템을 통솔하는 존재, 네트워크 타나스.
그 타나스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의사소통을 거부하고 타우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게 6개월 전이었다.
그 뒤로 타우인들은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싸웠다.
그런데 그 타나스가 저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단 말인가?
솔미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증거는?"
"증거?"
남자가 빙글 웃었다.
"내가 여기 있는 게 그 증거요. 여기 핌불베르트로 오는 좌표를 타나스가 가르쳐줬거든."
"그게 무슨 뜻이지?"
남자가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군. 잘 생각해보시오. 당신네 우주 공항이랑 공간이동 좌표 안정장치 진작에 박살 나서 아무도 여기 못 들어오잖아?"
아아, 그랬지.
그제야 그 사실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솔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 남자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런데 여기 올 수 있는 방법이, 타나스한테 직접 좌표를 받는 것 말고 뭐가 있겠소?"
솔미르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래, 경우의 수는 그것뿐이다.
저 남자는, 타우의 그 어떤 사람과도 소통하지 않는 타나스로부터 직접 좌표를 받은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남자가?
그때 머리를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브라카다가 남긴 묵시록에 쓰여 있던 그 사람.
'정말로 저 남자가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
솔미르의 기억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 * *
타우인들이 우주로 진출한 건 오백 년 전의 일이었다.
오백 년 동안 타우는 모성을 제외하고 일곱 개의 행성에 도시를 건설했고, 크고 작은 우주 도시를 여든두 개나 띄워 올렸다.
그리고 그 거대한 우주 영역을 포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전 우주의 네트워크를 총괄하는 '네트워크 타나스'를 만들었다.
물론 우주 개척 작업은 순탄하지 않았다.
다른 행성에는 예상치 못했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중 가장 큰 위협이 바로 외계 행성의 괴수들이었다.
타우인들은 외계 괴수에 맞서기 위해 군대를 창설했는데, 그게 지금 타우 우주의 수많은 군단의 모체가 된 '타우 우주군'의 탄생이었다.
한편 외계 괴수와의 조우는 타우의 과학기술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외계 괴수를 적극적으로 연구하면서, 생명공학이 급속도로 발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타우의 생명공학은 외계 생명체들의 유전자를 섞어 만든 생명체들을 비롯해 수많은 결과물들을 낳았다.
마력을 다루는 초능력자들도 그중 하나였다.
초창기의 초능력자들은 마력을 다루는 데 있어서나 정신적으로나 불안정한 면이 많았던 탓에, 타우 사회에 제대로 섞이지 못했다.
그때 그들을 이끌었던 사람이 대장군 브라카다였고, 그의 헌시적인 노력으로 초능력자들은 타우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브라카다 리전은 그가 직접 초능력자들을 규합해 만든 군단이었다.
여기까지가 외부에 알려진 이야기였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는 이러하다.
그 자신이 강력한 초능력자였던 브라카다가 외부에 알리지 않은 능력이 있었다.
바로 예지력이었다.
브라카다는 타우 은하가 멸망할 것을 예언했다.
그래서 브라카다는 자신이 보았던 미래를 기록해두었고, 그 기록은 브라카다의 군단장에게만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
그것이 바로 '브라카다의 묵시록'이었다.
브라카다의 군단장들은 그 예언이 현실화되지 않도록 노력해 왔다.
솔미르 이븐 왈리 바라드도 그런 군단장들 중 한 명이었다.
불행하게도, 강력한 초능력자였던 브라카다의 계시가 현실화되는 건 솔미르의 노력 정도로는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솔미르는 자신의 고향 핌불베르트를 비롯해 타우 은하 전체가 멸망해가는 걸 지켜보아야 했다.
그런데, 그때까지 실현되지 않은 예언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한 사람이 타우 은하를 멸망으로부터 구원하리라는 것.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는데.'
솔미르의 머릿속에 수 없는 고난의 세월이 스쳐 지나갔다.
특히, 끝없는 겨울이 찾아온 핌불베르트에서 그가 올 그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버텨왔던 나날들이.
'그 사람이 이 사람이라는 건가?'
솔미르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어쩌면 이 사람일지도 모른다.
솔미르가 물었다.
"그래... 알겠소. 그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이오?"
남자가 씩 웃었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브라카다 리전의 군단장 솔미르."
남자가 솔미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갑시다."
함께 가자고?
"어딜 말이오?"
"주조종실."
남자의 대답에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주조종실? 주조종실을 간다고?'
도시 중앙의 주조종실, 거기까지 가는 길엔 실험체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거길 가겠다고?
제정신인가?
남자가 덧붙였다.
"그 전에 무기고도 가야 합니다."
솔미르가 입을 떡 벌렸다.
핌불베르트의 무기고, 거기가 말처럼 쉽게 갈 수 있는 곳이었다면 브라카다 리전이 이 고생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거기엔 타우의 기술력이 집약된 최첨단 무기들이 가득했으니까.
그걸로 무장하면 저 잔혹하기 그지없는 실험체들을 몰아내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구역 하나를 점거하고 농성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지금 브라카다 리전이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건 무기고에 들어가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거기는 '그놈'이 지키고 있으니까.
남자가 솔미르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남자가 입을 열어 나직이 말했다.
"갈 수 있습니다. 브라카다 리전의 도움을 받으면요."
그러면서 남자는 오른팔을 걷어 보였다.
지진 모양의 문신이 오른팔에 가득했다.
저걸로 뭘 어쩌려는 거지?
그때 그 문신이 새빨갛게 빛나기 시작했다.
주변 풍경이 일렁여 보일 정도로 높은 열기도 함께였다.
솔미르가 중얼거렸다.
"맙소사."
지금껏 어디서도 보지 못한 마력량이었다.
솔미르는 직감했다.
이 남자는 터무니없이 강하다는 걸.
그래 어쩌면, 이 남자라면 무기고의 문을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남자가 정말로 '그 사람'일 것만도 같았다.
'혹시 아니면?'
혹시 아니면, 그러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또 누군가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버티는 것?
그러기엔 솔미르는 너무 지쳐 있었다.
식량과 연료는 점점 떨어져 갔고 군단원들도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마물들의 습격에 하나둘 쓰러져갔다.
이제 남은 군단원은 열 명 남짓.
그 사람들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면밀하게 계산해 본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그때 남자가 말했다.
"그러니, 나와 함께 갑시다 솔미르."
마음에 쐐기가 박히는 것 같았다.
솔미르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
'그래, 여기서 마물의 밥이 되거나 굶어 죽기를 기다릴 바에야 이 사람을 따라가는 게 낫지 않은가?'
설령 이 남자가 예언의 그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솔미르가 남자를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철컥철컥 하는 강화복 특유의 발소리가 좁은 대피소 안에 울려 퍼졌다.
남자가 솔미르를 올려다보았다.
백발 아래 수려한 얼굴, 거기 박힌 날카로운 눈동자가 솔미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그 입매에, 그리고 그 어깨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이 보였다.
솔미르가 강화복의 오른쪽 아래팔 부분을 해제했다.
그러자 강화복 장갑이 쩔컹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자 남들보다 두 배는 큰, 새파란 손이 드러났다.
솔미르가 남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합니다."
남자가 솔미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믿어줘서. 그리고 잘 부탁합니다."
솔미르의 반만 한 손이 꽤나 단단하고 퍽 따뜻했다.
남자가 솔미르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조상원입니다."
조상원.
솔미르는 그 이름을 한 번 곱씹었다.
'조상원, 이 자가 정말로 그 사람일까?'
저 멀리 있던 두 여자가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기에, 솔미르도 어색하게 고개를 꾸뻑 숙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방이 어두워지며, 새빨간 조명과 함께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위잉! 위잉!
대피소의 알람이 이렇게 크게 울릴 일이 있는가?
아, 그렇다.
경우의 수는 단 하나뿐이었다.
'놈이다!'
솔미르의 팔등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천장을 올려다본 조상원의 얼굴이 굳었다.
조상원이 말했다.
"늑대가 오고 있군."
꿀꺽, 솔미르가 침을 삼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