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핌볼베르트 (4)
조금 뒤, 초저온 냉동 치료실.
치료실 역시도 핌불베르트의 다른 곳들처럼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와 달리 벽에는 멀쩡한 캡슐이 다섯 개나 붙어 있는 모양새가 이질적이었다.
파란색 반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캡슐은 사람 하나가 그대로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샤믹이 벽에 붙어 있던 커다란 캡슐을 통째로 뜯어내자 우저적 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거의 자동차만큼 크고 무거운 캡슐을 마치 가벼운 풍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루고 있었다.
"에이, 이거 손잡이가 없어서 들기가 쉽지 않네요."
샤믹이 캡슐을 들어 올리느라 손을 누르자 함께 캡슐의 외피가 우적 하는 소리를 내며 찌그러졌다.
그녀가 캡슐을 바닥에 내려놓자 쿵 하고 바닥이 울렸다.
'아니, 그거 그렇게 막 다루면 안 되는 물건인데.'
상원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조심하세요 샤믹."
"괜찮아요 대장, 이 정도는 문제없어요."
자신을 걱정하는 걸로 착각한 샤믹이 수줍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서 상원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샤믹이 캡슐을 탕탕 두드리며 물었다.
"그런데 대장, 이거 이렇게 뜯어내도 작동하는 거예요? 완전 잘못된 거 같은데..."
"그럼요. 이 캡슐도 엄연한 아이템입니다. 원래 이렇게 쓰는 게 맞아요."
캡슐에 다가간 상원이 '브라이싱크론 지갑'을 캡슐에 댔다.
그러자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캡슐이 지갑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귀물 '초저온 냉동 캡슐'을 얻었습니다.]
초저온 냉동 캡슐, 말 그대로 들어간 사람을 순식간에 얼리는 물건이었다.
타우 사람들은 몸이 아프거나 하면 이 기계 속에 들어가서 초저온 치료를 받았다.
사용법은 지구의 초저온 치료 장치와 비슷했는데 효과는 훨씬 좋았다.
그렇지만 사십 번대 후반에 다다른 수험자들에겐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숯덩이가 돼버린 몸을 순식간에 복원하는 스킬과 아이템이 널린 마당에 누가 이런 치료용 캡슐을 쓴단 말인가?
그래서 상원도 '대피소'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이 캡슐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걸 쓰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다음번에 이 캡슐을 지갑에 집어넣을 땐 캡슐 안에 에론이 들어가 있겠지.'
에론을 캡슐 속에 넣고 얼려서 지갑에 집어넣는 것, 그게 작전이었다.
그러면 에론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고 움직일 수 있으니까.
상원은 '초저온 냉동 캡슐'을 삼킨 지갑을 코트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상원은 돌아갈 길을 되짚어 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마물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다행이었지만, 돌아갈 때도 마물을 만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핌불베르트의 마물들은 만만치가 않다.
마물 떼를 만난다면 시간이 꽤 지체될 것이다.
'그러면 서울역 사람들은....'
서울역에서 상원을 기다리는 수험자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그들의 안위 또한 위험해질 것이다.
"후."
상원이 작은 숨을 내쉬고 말했다.
"갑시다 샤믹.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상원은 바위에 박힌 검을 뽑아 들고 초저온 치료실을 나섰다.
"네, 대장!"
그 뒤로 씩씩하게 대답한 샤믹이 따라붙는 소리가 들렸다.
* * *
상원은 대피소가 있는 건물로 돌아올 때도 마물을 만나지 않았다.
이쯤 되니 무언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일흔 개가 넘는 시험을 겪어온 수험자의 감각이었다.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으면서, 상원은 지하의 대피소를 향해 천천히 이동했다.
상원이 대피소 문에 다다를 때까지도 마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아무리 그렇다고... 이렇게 조용할 리가?'
상원은 미간을 찡그린 채로 대피소의 문을 열었다.
방 중앙의 성화가 뿜어내는 은은한 온기가 상원의 뺨을 스쳤다.
"아아, 좀 누워야겠어요."
상원은 손을 들어 아무런 방비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샤믹을 제지했다.
"에... 왜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샤믹을 보며, 상원은 집게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갖다 대고 속삭였다.
"쉿."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느꼈는지, 샤믹도 긴장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원은 방안을 노려보았다.
설명할 수 없는 낯선 느낌이 상원을 덮쳐 왔다.
수많은 사선을 넘어오며 발달한 상원의 감각이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물이라도 숨어 있는 건가?'
그럴 리가 없다.
여기는 대피소, 마물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뭐지?
다른 수험자들이라도 있나?
바위에 박힌 검에서 즈웅 하고 하얀 검기가 뽑혀 나왔다.
그때였다.
방 한구석, 벽 모서리 뒤에서 지잉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상원은 놓치지 않았다.
상원은 품속의 브라이싱크론 지갑에서 '박피 단검'을 뽑아 그쪽을 향해 던졌다.
"샤아아아악!"
뱀 소리와 함께 새빨간 빛을 남기며 혜성처럼 날아간 박피 단검이 벽 모서리를 따라 궤도를 꺾어 벽 뒤로 사라졌다.
이어서 비명과 함께 색다른 소리가 들렸다.
"끄아아아악!"
핑! 핑!
새하얀 불꽃 줄기가 총알처럼 튀었다.
이 핑핑거리는 소리, 틀림없이 타우의 초능력자들이 쓰는 마력탄이었다.
좀비가 되어버린 타우 초능력자들이 마력탄을 쏘는 소리는 수도 없이 들었다.
절대 헷갈릴 리 없었다.
"샤아아악!"
박피 단검이 뱀 소리와 함께 상원에게 돌아왔다.
그와 함께 보이지 않던 사각으로부터 무언가가 털썩 쓰러지며 상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새파란 강화복을 입은 타우 은하의 병사였다.
병사는 온통 흠집투성이인 강화복 차림이었는데, 박피 단검에 급소를 찔렸는지 바닥을 기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끄... 으으윽!"
강화복 어깨에 새겨진 펼쳐진 책 모양의 황금색 마크가 눈에 들어왔다.
저 마크, 분명 눈에 익었다.
잠깐 기억을 더듬어 그 마크의 정체를 찾은 상원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아... 브라카다 리전!'
그 마크를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바로 핌불베르트의 최정예 병력인 '브라카다 리전'의 문장이기 때문이었다.
브카다 리전은 상원이 전생에 핌불베르트에 왔을 때 좀비가 되어 무기고를 지키고 있었다.
특별히 단단한 강화복과 강력한 무기, 그리고 좀비가 되어서도 썼던 초능력까지, 브라카다 리전을 상대하는 건 사십 번대 후반의 수험자들로서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 브라카다 리전의 병사가 어떻게 여기 있을 수 있는 거지?
'설마, 아직 좀비가 되지 않은 건가?'
가능성은 있다.
상원은 얼른 달려가서 엎드려 쓰러진 병사의 몸을 뒤집어 보았다.
반투명한 투구 너머로 보이는 건 분명 멀쩡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짐작이 맞았다.
26번 시험이 끝난 시점에서는 브라카다 리전이 좀비가 되지는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 대피소에도 들어올 수 있었고.
그때였다.
누군가 상원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칼 내려놔."
이어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요... 용사님...!"
에론의 목소리였다.
'아, 그런 거군.'
상원과 샤믹이 대피소를 비운 사이 여기 들어온 브라카다 리전 병사들이 에론을 인질로 잡은 것이다.
샤믹이 외쳤다.
"에... 에론!"
상원은 바위에 박힌 검을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고 돌아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덩치가 쓰러진 병사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거한이었다.
한 손에는 에론을 인질로 잡고, 다른 손으로는 새하얀 마력의 칼날을 에론의 목 끝에 대고 있었다.
저 마력 칼날, 필시 브라카다 리전의 초능력자였다.
그 모습을 보고 상원이 피식 웃었다.
'저자 역시도 아직 살아있었군.'
브라카다 리전에서, 저 정도로 덩치는 단 한 명뿐이었다.
핌불베르트 무기고의 보스.
타나스의 개조로 인해 수많은 마물들과 결합해, 시험 최후반부의 수험자들마저 무참히 도륙하는 괴물이 되어 있던 자.
바로 브라카다 리전의 지도자 '솔미르 바라드'였다.
그자의 투구 아래를 자세히 바라보니, 타우 강화인간 특유의 파란 피부가 드러났다.
틀림없는 솔미르였다.
'아직 보스가 되지 않은 인물을 이렇게 만났군.'
상원이 외쳤다.
"브라카다 리전의 지도자 솔미르 이븐 왈리 바라드."
하얀 마력을 내뿜는 솔미르의 눈이 꿈틀거렸다.
"마력을 거둬라. 우리는 적이 아니다."
자신들의 구역에 갑작스레 나타난 이방인이 자기 이름을 알고 있는 게 적잖이 당황스러웠는지, 솔미르가 순간 움찔하며 주춤 물러섰다.
그 틈에 에론 클라드가 솥뚜껑 같은 솔미르의 손아귀를 벗어나 상원을 향해 쪼르르 달려왔다.
"용사님, 용사님...."
에론의 얼굴이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상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에론.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네요."
얼른 달려온 샤믹이 울먹이는 에론을 꼭 껴안고 다독였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지금껏 수많은 시험을 함께 헤쳐와서일까, 상원은 에론이 일반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종종 있었다.
부들부들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에론을 보니, 그녀는 자신을 지킬 그 어떤 초능력도 없다는 사실이 새삼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나마 초저온 냉동 캡슐이 있으니, 앞으로는 에론을 안전하게 데리고 다닐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냉동 캡슐 밖에 있는 에론은 어떻게 지키지?
스물네 시간 붙어 있을 수도 없는 일인데?
아니, 일단 눈앞의 일부터 해결하자.
"후우."
한숨을 쉰 상원이 솔미르를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머... 멈춰라!"
솔미르가 오른손 주먹의 엄지와 검지를 펴 총 모양을 만들고는 상원을 향해 검지손가락을 뻗었다.
그러자 그 손가락 끝에서 새하얀 불꽃이 이글거렸다.
수많은 수험자들의 심장과 머리를 꿰뚫었던 마력탄이었다.
물론 그 스킬은 상원에겐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상원은 걸음을 전혀 늦추지 않았다.
그 기세에 눌린 것일까, 솔미르는 자기 덩치의 반도 안 되는 상원에게 밀려 벽으로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었다.
"그... 그만!"
솔미르가 검지손가락을 돌려 에론의 머리를 가리켰다.
마력탄이 상원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하지만 에론은 마탄 한 발에 벌집이 된다는 것도 깨달은 눈치였다.
'역시, 이렇게 상황 판단이 빠르니 브라카다 리전의 지도자까지 됐겠지.'
노트에서 보았던 정보들이 떠올랐다.
솔미르 이븐 왈리 바라드.
브라카다 리전의 지도자이자 강력한 초능력자이며, 비할 데 없이 유능한 지휘관.
신의가 두텁고 강직한 성격.
기타 등등.
그런 자가 민간인에게 총구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었다.
'정신적으로 지나치게 몰린 탓일 게지.'
마물들의 습격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에 마지막 남은 생존자 중 한 명이라면 그럴 법도 했다.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하면 저자의 총구를 돌릴 수 있을까?
상원은 기억의 궁전 속에서 '브라카다 리전'의 배경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적절한 말을 찾아냈다.
바로 군단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브라카다 리전은 타우 역사의 명장군 중 하나인 브라카다의 이름을 딴 군단이었다.
대장군 브라카다는 민간인을 보호하는 걸 특별히 중요히 여겼다고 했다.
'위인의 이름을 딴 군단의 통솔자가, 그 위인의 가르침을 무시할 수는 없지.'
상원은 천천히 말했다.
"솔미르, 민간인에게 총을 겨누는 거냐? 브라카다의 가르침은 그런 게 아닐 텐데?"
그 말에 솔미르의 눈빛이 바뀌었다.
잠시 후, 그의 손끝에서 불꽃이 꺼졌다.
솔미르가 상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후우, 부끄러운 꼴을 보였소. 미안합니다."
"괜찮소."
상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솔미르가 투구를 열고 물었다.
"귀관은 누구시오?"
"나는, "
상원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이 우주를 구하러 온 사람이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