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4화. 핌볼베르트 (3)
눈을 뜨자 차원문 건너편과는 완전히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이 곳 역시도 상원에겐 익숙했다.
우주도시 핌불베르트, 어떻게 여기를 잊겠는가?
뒤따라 들어온 샤믹이 말했다.
“와, 이번엔 미래 도시에요?”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도시 같다는 평은 핌불베르트에 꽤나 어울렸다.
타우의 발달된 기술로 만들어진 우주도시 핌불베르트는, 샤믹의 말마따나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영화에나 나올 법한 멋지고 화려한 도시였다.
멀쩡했다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새하늘 아버지가 타우 은하를 덮치고 나서 모든 것이 달라져 버렸다.
샤믹이 말했다.
"그런데...여기는, 멀쩡하지 않네요. 살아있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요?"
그러게,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까?
전생에 여기 왔을 때는 '살아있는' 사람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핌불베르트의 모습은 전생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장 먼저 회색 구름이 안개처럼 낮게 깔린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솟아오른 마천루들의 허리 위가 구름에 가려져 짙은 안개가 낀 숲처럼 보였다.
마천루 겉면에는 하얀 서리가 끼어 있었다.
이 도시를 덮친 끔찍한 한파 탓이었다.
땅 위로는 부서진 건물의 잔해와 추락한 자동차들, 그리고 타우의 병사들과 마물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그 위로도 무서리가 곰팡이처럼 쌓여 있었다.
상원은 노트에서 보았던 핌불베르트에 대한 내용을 떠올렸다.
이 도시의 이름이 '핌불베르트'인 건 전적으로 우연일 것이다.
타우 사람들이 제정신이라면 북유럽 신화의 '끝없는 겨울'을 도시 이름으로 짓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핌불베르트는 신화 속에서와 같은 끔없는 겨울을 맞이했다.
핌불베르트의 기상 조절 장치가 고장난 탓이었다.
그건 새하늘 아버지의 침략으로 타우 은하에서 벌어진 수없는 재앙들 중 하나였다.
새하늘 아버지의 영향으로 타우 은하를 총괄 조정하는 네트워크 '타나스'가 인간들을 공격했을 때, 타나스가 주로 사용한 수단은 타나스의 생명공학으로 만들어진 실험체들이었다.
실험체들은 마물이 되어 타우인들을 공격했는데, 핌불베르트도 그들의 목표 중 하나였다.
핌불베르트의 수비대는 장렬하게 맞서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마물들이 도시의 기상조절장치를 부수면서 우주의 혹한 속에 무방비로 내던져진 핌불베르트는 이름처럼 끝없는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지금 상원의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26번 시험에서 벌써 이 꼴이 났던 거군.'
그때 샤믹을 뒤따라 들어온 에론이 말했다.
"어...으으...용사님, 너무너무 추워요."
뒤를 돌아보니, 에론이 몸을 옹송그린 채로 덜덜 떨고 있었다.
'아뿔싸.'
핌불베르트의 추위는 일반인이 견딜 수 없는 수준이란 걸 생각하지 못했다.
신력을 쌓은 수험자들에겐 핌불베르트의 추위는 그저 방해물 정도였지만, 아무리 추위에 강한 드워프라 해도 신력 없는 일반인에 불과한 에론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샤믹, 에론을 안으세요."
"네...네!"
샤믹이 달려가 에론을 안았다.
상원은 마그마의 마력을 끌어내 샤믹의 몸에 불어 넣었다.
그러자 샤믹의 몸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샤믹의 품에 안긴 에론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우."
"이제 어떡하죠 대장?"
서로를 껴안은 두 여자가 상원을 올려다 보았다.
그래,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이 꼴로 있다간 핌불베르트를 떠도는 강력한 마물들의 밥이 되기 십상이었으니까.
상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의 마천루들을 훑다 보니 노트의 한 구절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핌불베르트에는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대피소가 있다. 그 위치는....'
그 옆장에 그려진 핌불베르트의 조감도와, 곳곳에 표시된 대피소의 위치까지 머릿속에 훤히 떠올랐다.
대피소에 대한 내용을 금방 떠올리지 못한 건, 전생에 핌불베르트를 공략할 때는 필요없는 정보라서였다.
그때는 대피소를 들르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인, 시험 후반에서 얻을 수 있는 방한 도구들을 줄줄이 두르고 왔었으니까.
'그때 외워둔 걸 이제야 써먹는군.'
주변의 마천루들을 통해 지금 일행의 위치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대피소 중 하나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저쪽으로 1킬로미터 정도인가.'
상원은 대피소가 있는 쪽으로 뻗은 대로를 바라보았다.
불타는 잔해가 내뿜는 연기와 짙게 깔린 안개 탓에 시야가 좁았다.
저 너머에 어떤 마물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움직여야 했다.
상원은 바위에 박힌 검을 뽑아 마력을 불어넣었다.
하얀 검기가 뿜어져 나와 주변을 밝혔다.
"따라오십시오."
상원은 대피소로 향하는 길을 뒤덮은 안개 속으로 발을 디뎠다.
곧 축축하고 매캐한 공기가 상원의 콧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 * *
대피소로 오면서 보았던 풍경 또한 전생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강화복을 입은 핌불베르트 수비대와 데몬즈 헤드를 비롯한 타우 은하의 마물들의 시체가 도로에 즐비했다.
그 외에도 공중부양 전차 같은 타우의 병기들도 잔해가 되어 널려 있었다.
다른 점이 하나 있긴 했다.
아직은 그것들이 좀비가 되어 일어서지는 않았다는 것.
일행은 그렇게 잔해가 널린 도로를 조심스레 통과하여 외곽을 뒤덮은 유리가 모조리 깨져 버려 골조가 훤히 드러난 마천루까지 올 수 있었다.
건물의 내부에도 시체가 잔뜩 널려 있었다.
무장하지 않은 시체도 많았는데, 대피하지 못하고 무방비로 당한 민간인들인 것 같았다.
움직이지 않는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몇 층을 내려가니 눈 앞을 가로막은 커다란 철문이 보였다.
철문 위에 손을 올리자 시험의 표식이 밝게 빛났다.
이어서 윙 하고 철문이 좌우로 열렸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대피소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습니다.]
따뜻한 바람이 훅 불어왔다.
'여기가 대피소로군.'
상원은 대피소를 둘러보았다.
대피소는 스무 평 남짓으로 보이는 방이었는데, 방 가운데 분홍색 성화를 내뿜는 기둥이 방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늑해 보이는 쇼파가 기둥 주변을 두르고 있었고, 벽에 놓인 선반에는 식량들이 가득차 있었다.
일반인인 에론이 마음 놓고 쉴 수 있을 것이다.
상원이 두 여자에게 말했다.
"대피소입니다. 마음 놓고 쉴 수 있습니다."
샤믹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정말요? 함정 같은 거 아니죠?"
멸망한 도시에 이렇게 아늑한 공간이 숨겨져 있으니,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법 했다.
상원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요."
상원의 말에 두 여자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다.
"하아아아."
여기까지 오는 중에 언제 습격할 지 모르는 마물을 경계하며 추위를 견디느라 적잖이 긴장했을 테다.
그런 긴장이 일순간 풀리면 주저앉는 것도 당연했다.
"음식은 아무거나 갖다 드셔도 됩니다. 잠시 쉬면서 다음에 어떡할 지 생각 좀 해보죠."
두 여자에게 말을 하고서, 상원은 기둥 옆 소파에 앉아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했다.
핌불베르트에 오기 전 세운 목표는 두가지였다.
첫번째 목표는 핌불베르트 중앙의 주조종실로 가는 것.
주조종실로 가기로 한 건 타나스가 데몬즈 헤드를 통해 남긴 말 때문이었다.
'신들의 육체가 만들어지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주조종실의 항행 장치에 설정된 목적지 중 하나가 거기일 것이다.
그래서 시험에 앞으로 등장할 거의 모든 장치를 조작할 수 있는 에론 클라드를 데려왔다.
두번째 목표는 상원이 전생에 핌불베르트에 왔던 이유인, 핌불베르트의 무기고였다.
무기고에는 타우의 모든 기술을 결집해 만들었지만 수비대가 그걸 작동시킬 새도 없이 전멸하는 바람에 그대로 남겨졌다는 고급 아이템들이 즐비했으니까.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바로 에론이 핌불베르트의 추위를 견딜 수 없다는 것.
이 상태라면 무기고를 공략하는 건 언감생심이었고, 에론을 주조종실에 데려갈 수 있는지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어떡한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딱히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샤믹이 에론을 안은 채로 주조종실까지 갈수도 없는 일이었다.
'방한복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신력이 없는 에론을, 사십번대 수험자들도 방한용품을 꽁꽁 챙겨야 하는 핌불베르트의 추위로 지켜줄 수 있는 방한복 같은 게 있을 리가....
"아."
상원이 고개를 들었다.
에론을 추위로부터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있었다.
'도대체 그걸 어디다 써먹나 했더니 이렇게 써먹겠군.'
상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테이블에서 식량을 나눠먹던 두 여자가 상원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세요?"
"가져올 게 있어서요. 샤믹, 그거 다 먹으면 저랑 같이 갑시다."
샤믹이 식량을 놓고 일어서며 대답했다.
"오케이, 대장. 빨리 가죠."
성격 참 급하기는.
"지금 당장 가자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드시던 거 다 드시고 가셔도 됩니다만."
"괜찮아요, 다 먹었어요."
피식 웃은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론이 물었다.
"에...용사님, 저는 뭘 하고 있으면 될까요?"
"쉬고 계시죠. 드시던 거 다 드시고...여기 있는 거 마음껏 드시고 계시면 됩니다. 여기로 마물이 들어오진 않을 테니 안심하시고요."
한동안은 뭐 드시지 못할 테니까요,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웃으며 배웅하는 에론을 뒤로 하고, 샤믹과 함께 대피소를 나섰다.
머릿속에 그려진 지도에 목적지를 표시했다.
'초저온 냉동 치료실.'
타우의 기술로 만들어진 냉동치료장치들이 있는 곳.
거기 있는 '급속냉동캡슐'을 얻으면 에론을 주조종실로 데려갈 수 있었다.
"갑시다."
"네."
상원은 새하얀 광선검을 뽑아들고 고장난 에스컬레이터를 오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폐허가 된 건물에 울려퍼졌다.
* * *
두 수험자가 대피소를 나가고 잠시 후, 에론은 분홍색 불꽃을 내뿜는 기둥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할일이 없는 순간이 정말로 오랜만에 찾아왔다.
에키나르타를 구원한 용사, 상원을 따라 지구에 온 이후로 에론은 정말로 쉴새 없이 움직였다.
차원문을 열고, 무구를 만들고, 서울역을 개보수하는 일들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특히 상원이 요구하는 것들은 이걸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어려웠다.
그런 생활이 오히려 그녀를 신나게 했다.
에키나르타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었던, 어려운 문제를 척척 해결해가며 스스로 발전해 나간다는 효능감이 가득했다.
그러던 찰나 잠시 멈춰서니,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슬며시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건 미안함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어도...용사님이 저렇게 고생 하시지는 않을 텐데.'
그때였다.
누군가 기계장치를 조작하는 듯 삑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쪽이었다.
'용사님이 벌써 돌아오셨나?'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뭐든 척척 해내는 용사님이라면 필요한 물건을 이렇게 빨리 구해왔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에론은 얼른 문앞으로 달려갔다.
몇 차례 소리가 이어지다가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스르르 문이 열렸다.
"용사님?"
함박웃음을 지었던 에론의 얼굴이 굳었다.
길에 널브러져 있던 것과 같은 전투복을 입은 자가 그녀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