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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83화 (183/230)

제183화. 핌볼베르트 (2)

진아가 혜경의 목덜미에 손톱을 찔러 넣었다.

"추한 꼴 그만 보이고, 이제 끝내요 언니."

살벌한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는 들떠 있었고,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마치 혜경의 목숨을 끊는 게 즐거운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평소의 진아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태도였다.

아니, 애초에 진아는 절대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낙원의 수문장'이 어찌나 혹독하게 굴렸는지 인간이 아닌 것 같던 전생의 윤진아도 이렇게 인간 도살자인 것마냥 굴지는 않았다.

그녀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전적으로 악마에 씌인 탓이었다.

악마에 씌인 수험자는 난폭해지고 자제력을 잃어버리니까.

더군다나 진아에게 씌인 건 그냥 악마가 아닌 악마의 정점, 마신 중의 마신 '세상 끝의 불꽃'이었다.

조금 전 진아의 손톱에 가슴팍을 찔렸을 때, 그 순간 그 작은 손짓만으로도 상원은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진아는 상원이 제압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걸.

지금 상원이 진아를 힘으로 제압할 수 없기 때문에, 이대로라면 혜경은 반드시 진아의 손에 죽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동료를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진아는 돌이킬 수 없이 타락해버릴 것이다.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처럼만 보였다.

하지만 상원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상원은 노트를 통해 얻은 지식과 76개의 시험을 겪으며 얻은 경험들을 조합했다.

그러자 답이 도출되었다.

'후우....'

상원은 눈을 감고 콧김을 뿜었다.

'순서대로, 차근차근.'

세워둔 순서를 곱씹었다.

우선 진아에게 씌인 '세상 끝의 불꽃'을 더 끌어낼 것이다.

그러면 세상 끝의 불꽃이, 그 이름처럼 진아를 태울 것이다.

그러려면 악마의 힘을 끌어내는 주문을 외워야 한다.

기억 저편에서 상원은 주문을 찾았다.

그 주문 역시도 노트에 쓰여 있었기 때문에,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노트 한 페이지를 통째로 채울 정도로 긴 주문이, 한 글자 한 글자 빠지지 않고 모두 기억났다.

상원은 책을 읽듯 주문을 외웠다.

"암 오보로 카라오 엠...."

상원의 입속에서 만들어지는 한 어절 한 어절이 지독스레 불경한 소리가 되었다.

그 소리가 상원 자신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런 소리가 사람의 입에서 날 수 있는 것인지, 그런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혜경의 목을 그으려던 진아가 손을 내리고 상원을 보았다.

그녀는 지금 자기 몸속의 마기가 계속해서 증폭되는 걸 느끼고 있을 것이다.

진아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어머, 상원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악마를 부르는 주문을 외우다니, 미쳤어요? 상대가 안 될 것 같으니까 시험을 아예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

그녀가 어찌나 기분 나쁘게 빈정대는지,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상원은 평정심을 잃지 않으며, 오로지 주문을 외우는 데만 집중했다.

"델가라 아멜 샤롤 롬 아사오..."

상원은 진아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서 눈을 돌리면, 그녀가 그대로 혜경의 목을 그어버릴 테니까.

그럴 수는 없었다.

상원이 주문을 계속해 갈수록 그녀의 눈동자 안쪽, 탁한 회색빛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눈빛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몸 자체가 변하고 있었다.

등 뒤로 회색 불꽃처럼 생긴 날개가 툭툭 돋아났고 허리 아래로 돋아난 새까만 꼬리가 살랑거렸다.

조그맣던 그녀의 몸은 상원의 눈을 같은 높이에서 마주 볼 만큼 커져 있었다.

진아가 말했다.

"상원 씨 뭐야? 지금 나 무시하는 거예요?"

진아가 상원의 목을 움켜쥐었다.

무시무시한 악력에 목이 통 채로 뜯겨저 나갈 것 같았다.

"큭!"

일단 진아의 주의를 혜경에게서 돌렸으니, 이걸로 삼 분의 일은 성공이었다.

조금의 안도감이 들었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주문을 계속 외웠다.

"아카람 델 후도스 엘시오몬...."

주문을 외울수록 진아의 손아귀도 점점 매서워졌다.

목 안쪽 혈관이 터지기라도 했는지 씁쓸한 피 맛이 올라왔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여기서 멈춰버리면 모든 게 끝이니까.

그러면 완전한 마인이 되어버린 진아가 서울역을 통째로 쓸어버릴지도 모른다.

서울역엔 '세상 끝의 불꽃'의 마인이 되어버린 윤진아를 막을 수 있는 수험자가 없다.

"크으으윽!"

진아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상원의 머리를 후려치려 하는 그 순간, 상원은 마지막 어절을 발음했다.

"필레."

순간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분위기는 전혀 고요하지 않았다.

좁은 병실은 형언할 수 없는 불길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진아가 까드득 이를 갈며 상원을 노려보았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사람이라 할 수 없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마에 솟아난 거대한 뿔과 등 뒤로 넘실대는 여러 장의 날개, 그리고 커다란 꼬리와 발굽.

말 그대로 악마의 형상이었다.

그녀의 볼에는 새까만 줄무늬가 솟아있었고 이마로는 굵은 혈관이 돋아 꿈틀거렸다.

이목구비는 진아의 것 그대로였지만 더 이상 귀여운 테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형상으로, 진아는 오른손을 든 채 상원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주춤주춤 병실에서 물러난 혜경이 신음 소리를 흘리며 복도로 도망쳤다.

"으... 으으으...."

정신이 나가버린 혜경뿐만 멀쩡한 수험자라 해도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진아가 뿜어내는 기운이 그만큼 강했다.

그러나 상원의 마음은 고요했다.

이다음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으니까.

미래를 알고 있다면 두려움은 줄어드는 법이다.

주문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웠으니, 이제 세상 끝의 불꽃이 그녀를 태울 것이다.

상원은 속으로 숫자를 셌다.

'셋, 둘....'

진아가 고함을 질렀다.

"크아아악!"

'하나.'

마지막 숫자를 세며 상원이 피식 웃었다.

그 순간 진아의 눈 코 입 귀에서 새까만 액체가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녀의 몸 곳곳에서 터져 나온 회색 불꽃이 그녀를 태웠다.

이마에 돋은 뿔과 등에 돋은 날개, 그리고 꼬리가 재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그와 함께 그녀의 체구가 점점 쪼그라들고 있었다.

진아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악!"

그에 화답하듯 다른 병실의 마귀 들린 수험자들이 고함을 쳤다.

"으아아아악!"

"아아아악!"

비명의 불협화음이 귓전을 가득 메웠다.

그 소리를 곱씹으며 상원은 눈앞에서 타오르는 진아를 바라보았다.

'세상 끝의 불꽃',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그 불꽃은 자기 그릇마저 태워버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연소가 계속되었다.

그녀의 비명이 점차 잦아들었다.

"으아아... 아아악...."

그녀가 두 손 두 발을 내뻗은 채로 뒤로 털썩 넘어졌다.

회색 불꽃이 그녀의 몸을 태우는 동안 그녀의 사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마침내 불꽃이 꺼졌다.

악마의 몸이 불타 생긴 잿더미 한가운데, 알몸의 진아가 누워있었다.

낙인이 지워진 그녀의 이마는 깨끗했다.

낙인마저도 불타버린 것이었다.

상원이 한숨을 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후우."

이제 세상 끝의 불꽃은 한동안 그녀에게 빙의하지 못할 것이다.

빙의의 매개체로 써야 할, 진아 몸속의 악마의 씨앗이 불타버렸으니까.

이제 그녀는 다시 깨끗한 상태가 되었다.

조금 이따 '낙원의 수문장'이 다시 그녀에게 깃들면, 그녀는 이제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모든 일이 매듭지어진 건 아니었다.

세상 끝의 불꽃은 한 번 문 먹잇감은 절대로 놓치지 않으니까.

'일단은 치료가 먼저다.'

상원은 잿더미 속에서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의 몸이 힘없이 늘어졌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시칠리아섬.

상원은 섬 지하의 커다란 공동에 서 있었다.

상원의 눈앞에서 거대한 차원문이 서서히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상원이 지금껏 보아 왔던 것들 중 가장 거대한 그 차원문이 바로, '시공간의 세습자' 카일 핸드레이크가 만든 시공간의 회오리였다.

이제 이 차원문을 타고 타우 은하의 우주 도시 '핌볼베르트'로 갈 것이다.

에론이 차원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 정도 차원문을 만들다니... 엄청나네요."

그녀의 눈이 경탄으로 물들어 있었다.

샤믹이 말했다.

"여길 넘어가면 우주 도시로 간다고요?"

상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샤믹을 보았다.

에론과 같이 차원문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 곳곳에는 파란 비늘이 남아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엉덩이 위에는 파란 비늘에 덮인 굵은 꼬리가 살랑거렸다.

상원이 '깊고 깊은 물'에서 구해온 '뱀이 훔친 불로초'를 먹고 나서 정신을 차렸지만, 몸까지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었던 것이다.

반인 반사의 괴물이 되어버린 흑풍 회원들처럼 흉한 꼴이 되는 것.

웬만한 수험자라면 견디지 못할 상황이었지만, 샤믹은 자기 몸이 그렇게 변해버린 것 때문에 기분 상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가 오랫동안 서울역의 짐이 되었던 걸 미안해하며, 던전 정리며 보물 수집 같은 일들을 닥치는 대로 해냈다.

상원은 그게 고마웠다.

샤믹의 도움이 없었다면 성역 서울역을 이끄는 일은 배로 힘들었을 것이다.

"뭘 그렇게 봐요 대장?"

상원은 그녀의 물음에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꼬리 보는 거예요? 에이, 자, 많이 보세요."

그녀가 입을 삐죽 내밀고는 몸을 돌려 상원 쪽으로 꼬리를 들이밀었다.

상원이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됐습니다, 됐어요."

그 사이 땅바닥에 장비를 펼친 에론이 말했다.

"말씀드린 것처럼, 핌볼베르트로 바로 갈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차원문에 좌표를 입력하고 시공간 조정식의 잔차항들을 조정하면서 최적 계수를 찾아야 돼요. 그다음엔...."

샤믹이 주절주절 말하는 에론을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대장, 저거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요?"

"그럴 리가요."

"에론은 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저렇게 하는 걸까요? 입만 아플걸."

"버릇이죠."

상원이 샤믹과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배낭에서 꺼내 펼친 그녀의 몸뚱이만 한 키보드 위로 에론의 손이 날아다니는 벌새처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한동안 쉴 새 없이 손을 놀리며 입을 분주히 움직이던 에론이 말을 멈추었다.

딸깍

입력 키를 누르는 소리가 긴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난 에론이 말했다.

"자, 입력이 끝났습니다! 가시죠 용사님."

상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차원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이 차원문 너머로 쑥 넘어갔다.

손 저쪽에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그 냉기가, 전생의 기억을 불러왔다.

한때는 수많은 타우인들이 살았던 곳, 그리고 40번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마물들이 들끓는 던전으로 전락해버린 곳, 우주 도시 핌불베르트에서의 기억들이 머리를 스쳐 갔다.

그 복잡한 도시의 구조와, 도시의 중심부 그리고 관리실로 향하는 길들이, 그 곳곳을 오가는 마물들의 모습 하나하나가 되살아났다.

핌불베르트는 5급 마물이 득시글대는 곳이었다.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겨내야 했다.

여기를 거쳐야 '새하늘 아버지'에 맞설 방법을 찾아낼 수 있으니까.

"갑시다."

상원은 차원문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곧 살을 에는 칼바람이 상원의 볼을 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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