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81화 (181/230)

제181화. 타우 (4)

데몬즈 헤드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바닥을 긁을 때마다 드득 드득 하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상원은 놈의 발톱 끝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놈이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문자를 쓰고 있었다.

상원은 그 문자를 알았다.

그건 바로 타우 은하의 문자였다.

놈은 지금 타우의 문자로 숫자를 쓰고 있었다.

'131.38.76....'

익숙한 숫자 패턴, 바로 타우 은하로 통하는 좌표였다.

상원이 주문한 대로, 타나스는 놈의 몸을 통해 상원에게 좌표를 전하고 있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놈은 어린아이가 낙서를 하듯 어색한 발짓으로 좌표를 썼다.

숫자는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그 좌푯값이 3차원 공간뿐만 아니라 행성들 사이의 중력 작용과 시간의 왜곡, 그리고 차원 이동의 불안정성으로 인한 오차까지 모두 포함해서였다.

이윽고 발놀림을 멈춘 데몬즈 헤드가 상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핌불베르트 호."

'뭐라고?'

예상치 못한 이름이었다.

본디 핌불베르트는 우주 시대까지 발달한 타우 은하의 문명이 만든 우주 거주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시험 속의 핌불베르트는 운영 시스템이 새하늘 아버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 탓에 타우 은하의 던전들 중 하나로 변해 있었다.

시험 후반부 지역인 타우 은하의 수많은 던전들 중에서도 그 난이도는 단연 최상급.

5급 마물들이 득시글대는 곳이었다.

그 던전으로 가야 한다고?

상원이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핌불베르트? 지금 준 좌표가 핌불베르트로 향하는 좌표인가?"

데몬즈 헤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지금은... 핌불베르트가... 신들의 육체가 만들어지는 곳으로 올 수 있는...."

갑자기 데몬즈 헤드가 짙은 체액을 꿀럭 뱉어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놈은 눈을 까뒤집고 경련하고 있었다.

'아직 다 듣지 못했는데...!'

상원은 얼른 달려가 놈의 콧잔등을 두드렸다.

"이봐! 이봐!"

놈의 콧구멍에서 체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놈의 몸 상태를 나타내는 스크린은 요란한 빛과 소리를 내느라 터질 것 같았다.

태성과 우주가 달려들었다.

"이런! 백회혈을 막겠어! 우주 씨는 약초... 약초를 먹여!

"네... 네 어르신!"

오태성이 팔뚝만 한 장침을 뽑아 놈의 정수리에 꽂았고, 신우주는 테이블 위에서 타고 있던 약초 더미를 집어 그대로 놈의 아가리에 쑤셔 넣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정적이 찾아왔다.

삐 하는 소리와 함께 스크린의 숫자들은 0으로 떨어졌다.

놈의 몸이 축 늘어졌다.

타나스가 실린 걸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린 것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핌불베르트로 가야 한다. 그게 끝인가.'

그래도 신우주까지 불러와서 놈을 살렸던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다음에 향할 곳이 우주 거주지 핌불베르트라는 걸 알았고, 거기로 향하는 직통 좌표도 얻었다.

이제 저 좌표를 에론에게 주면 그녀가 핌불베르트로 향하는 차원문을 열어줄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핌불베르트라니.'

난이도 상승 폭이 너무 컸다.

이제 고작 26번 시험을 넘겼을 뿐인데, 40번대 수험자들도 쩔쩔맸던 곳에 가야 한단 말인가?

홀로 헤쳐나가기엔 핌불베르트의 마물들은 너무 강했다.

'탈신 모듈'을 통해 격풍을 단매에 물리칠 힘을 손에 넣었다곤 해도, 그걸 강신회로처럼 마음대로 쓸 수도 없었다.

강한 만큼 반발력이 큰 힘이었으니까.

게다가 일단 핌불베르트로 가면, 그 이후에 뭘 해야 할지도 확실하지 않다.

동료들의 얼굴이 스쳤다.

백문혁, 한창훈, 송혜경, 윤진아....

이들 중 셋만 데려갔어도 난이도가 쭉 떨어졌을 텐데.

하지만 이들 중 누구를 데려갈 수 있단 말인가?

다들 각자의 사정으로 움직이질 못하니 말이다.

'이럴 때 하필이면....'

한숨이 나왔다.

"후우."

'일단은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상원은 데몬즈 헤드가 타우 문자로 바닥에 새긴 좌표를 아라비아 숫자로 옮겨 적었다.

손바닥만 한 수첩 한 페이지가 숫자로 빼곡하게 찼다.

상원은 그 페이지를 북 뜯어서 에론에게 넘겼다.

에론이 말했다.

"용사님 이거... 좌표로군요?"

"맞습니다."

"공간 간 거리가... 굉장한데요? 이 정도로 긴 포탈을 열어본 적은 없는데...."

에론의 얼굴이 굳었다.

"이 정도 포탈은 여기서는 열 수 없어요."

에론은 숫자를 보는 것만으로 이 차원문을 여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역시, 시험 최고의 장인이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는 게 아니다.

다만 에론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시공간의 세습자 카일 핸드레이크가 만들어둔 포탈을 이용하면 저 먼 곳까지도 갈 수 있다는 것.

상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시칠리아 지하에 있는 차원문은 어떤가요?"

상원의 말에 에론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에...? 아, 아아! 맞아요, 맞아! 거기서라면 이 정도 차원문을 열 수 있어요!"

에론이 아이처럼 좋아하며 손뼉을 쳤다.

방금 전 데몬즈 헤드 때문에 놀랐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기술이라면 눈이 뒤집어지는 드워프 장인의 천성은 어쩔 수 없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포탈을 열어 보일 테니까."

의기양양한 에론의 말에 상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상원이 자네.... 또 어디 가나?"

"네, 어르신."

"조심하세요 상원 씨. 무리하지 말고."

"걱정 마세요."

상원은 태성과 우주에게 대답하고 나서 데몬즈 헤드의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주 거주지 핌볼베르트, 거기 가면 이놈 같은 데몬즈 헤드들이 득시글거릴 것이다.

타나스가 점차로 잠식돼가는 마당에, 이놈들이 상원을 환영해 줄 리는 만무했다.

심지어 거기는 데몬즈 헤드 따위는 동네 강아지처럼 여겨질 만큼 살벌한 마물들이 가득했다.

핌볼베르트의 난이도를 정리해본 결과, 역시 혼자 가는 건 무리였다.

'일단 다른 사람들을 좀 봐야겠군.'

상원은 병동으로 향했다.

* * *

맨 처음 향한 곳은 창훈과 혜경이 있는 병실이었다.

복도에서 상원과 마주친 간호사는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원이 하도 많이 찾아온 탓에, 무슨 말을 물을지 상원이 입을 열기도 전에 알았던 것이다.

실낱같은 희망마저 사라졌다.

병실로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상원은 두꺼운 쇠로 된 문을 열었다.

먼저 악취가 훅 풍겨와 상원은 코를 막았다.

볕이 잘 드는 병실에는 문 좌우로 나란히 침대가 놓여 있었다.

문에서 오른쪽, 혜경의 침대에는 음식물과 대소변이 잔뜩 묻어 있었다.

바닥에 갈색 발자국이 문밖으로 이어진 걸 보니 혜경은 또 어디를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병실 벽은 알아볼 수는 있지만 말을 이루지는 못하는 새까만 글씨와 눈 모양이며 촉수 모양의 그림들로 가득차 있었다.

모두 혜경이 그린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 침대에는 창훈이 누워 있었다.

죽은 듯 누워있는 창훈의 피부가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의 가슴 한가운데 박힌 의령수의 심장은 평소 같은 보라색 빛을 내뿜지 않았다.

창훈은 지금 생사의 기로에 있었다.

그래도 완전히 죽었다면 좀비가 되어 일어서야 했을 터인데 그렇지 않은 걸 보니. 그의 혼이 아직 연옥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그의 수호신 '화산정의 혐오체'가 빼어난 강령술사이니 화신의 탈락도 어느 정도는 미루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아직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창훈이 연옥에서 돌아올 방법을 찾는다면 정말로 돌아올 수도 있다.

전생에, 시험 극 후반에 정점에 다다른 강령술사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상원은 창훈의 차가운 손을 꼭 잡았다.

그가 꼭 돌아오길 바라면서.

그때 예상치 못했던 목소리가 상원의 귀를 때렸다.

"여기가 당신의 집이로군, 불신자."

'불신자라고?'

상원은 고개를 돌렸다.

문간에 혜경이 서 있었다.

온몸에 음식물과 대소변을 덕지덕지 묻힌 꼴 그대로였다.

그런데 새까맣게 물든 눈에 총기가 흘렀고, 아이 같던 말투가 높낮이 없는 딱딱한 말투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분명히 아는 말투였다.

'이 말투, 어디서 들었지?'

답은 금방 나왔다.

이건 분명, 마신 '지하의 수호자'의 사자가 된 전직 기관원 엘가였다.

"엘가?"

"오랜만이군."

엷게 웃으며 대답한 엘가가 상원에게 다가오려다 멈추었다.

"아, 꼴이 이래서 좀 그렇군. 이런 자들만 화신으로 쓰다니, 외신들도 참 취향이 고약해."

그 말에 상황이 이해가 갔다.

혜경의 수호신 '검은 숲의 목자'는 카일 핸드레이크에게 죽어버렸다.

그래서 수호신이 없어진 혜경의 몸에, 이번에는 다섯 마신의 하나인 동시에 외신 중 하나인 '지하의 수호자'가 자기 사자를 들여보낸 것이다.

외신이 쓰던 그릇을 더 강한 외신이 쓰는 건 그들 사이에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상원이 대답했다.

"괜찮다. 이젠 익숙해졌어."

혜경이 저러고 있는 걸 본 게 몇 달, 그리고 누나가 그런 꼴을 하고 있는 걸 본 게 십 년이다.

익숙하지 않을 리가.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엘가가 상원의 곁에 서서 창훈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의령수의 심장을 톡톡 두드렸다.

"혼이 연옥을 떠돌고 있군. 그래도 아직 폭군에게 잡아먹히지는 않은 모양이네."

"그렇지. 먹혔다면 벌써 좀비가 됐을 테니."

엘가가 휴지로 손을 닦고는 창훈의 머리를 매만졌다.

그릇인 혜경의 감정이 전달되는 건지, 엘가가 처연하게 웃었다.

"그런데, 이 상태가 된 지 꽤 오래된 모양인데?"

"맞아. 계절이 바뀌었지."

상원의 말에 엘가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 정도로... 오랫동안? 그렇다면...."

엘가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머리칼을 꼬며 생각을 하던 엘가가 입을 열었다.

"이제 26번 시험이 끝났어. 부활 스킬 같은 걸 배웠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오랫동안 연옥의 폭군에게 잡아먹히지 않은 건.... 연옥에 조력자가 있군. 가능성은 그것뿐이야."

"뭐? 그게 가능한가?"

상원의 물음에 엘가가 상원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어떻게 된 거지? 아는 게 있나?"

연옥에 조력자가 있다고?

'인큐버스의 아들'인가?

아니, '바위에 박힌 검'이 없으니 폭군에게서 창훈을 지킬 힘까지 있을 리가 없는데?

아니면 설마... 오디나스?

"그럴 리가."

그때였다.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듯 방이 우르릉 흔들렸다.

창훈의 머리맡에 놓여 있던 화분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지진? 갑자기?'

상원은 바위에 박힌 검을 뽑아 창훈을 향해 쓰러지는 캐비넷을 두 동강 낸 동시에 쓰러지려는 엘가를 붙잡았다.

상원의 팔에 붙들린 엘가가 신음 소리를 냈다.

"큭."

잠시 후 진동이 멎었다.

밖에서 다른 수험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엘가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세상 끝의 불꽃...!"

상원은 두 귀를 의심했다.

다섯 마신 중의 하나, 세상 끝의 불꽃?

그 이름이 갑자기 나올 이유가 있나?

엘가가 상원을 쏘아보며 말했다.

"여기 지금 귀신 들린 자가 누구냐?"

귀신 들린 자, 그러니까 마귀가 씌인 자라면 한둘이 아니다.

성역 병합전 이후 서울역을 재건하느라 어수선한 틈에 수험자들이 마귀 들리는 일이 잦았다.

그런데... 잠깐만.

그들 중, 엘가가 세상 끝의 불꽃을 들먹일 만큼 강한 수험자가 딱 한 명 있다.

'윤진아...!'

젠장.

"따라와라."

상원은 진아의 병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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