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타우 (2)
다람쥐가 욕지거리를 뱉었다.
"에이...시팔."
다람쥐가 조그만 팔로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머리통에 붙은 짧은 털들이 뾰족하게 솟았다.
그 동안 상원은 몸상태를 살폈다.
이제는 몸에 힘이 좀 돌아온 것 같았다.
상원은 상체를 세웠다.
"흐읍."
마력이 모조리 빠져나갔다가 이제 막 차기 시작한 몸이 시장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오징어인것만 같았다.
허리에서 우두둑하는 뼛소리가 났다.
온 등줄기가 칼로 쑤신 듯 아파왔다.
비명이 절로 났다.
"끄으으으으윽!"
코에서는 콧물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맑고 묽은 물이 뚝뚝 흘러나왔다.
순간 현기증이 극심해진 탓에 머리를 움켜쥐었다.
온 세상이 뒤집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머리를 좀 붙잡고 있으려니 어지럼증이 점점 줄어들었다.
확실히 허리를 세우니 누워있을 때보다는 덜 어지러웠다.
상원은 폐 끝까지 숨을 채웠다가 뱉었다.
"후우우우."
몸 상태가 좀 나아졌다.
상원은 고개를 돌려 다람쥐를 보았다.
상원을 빤히 올려다 보는 다람쥐에 등에 박힌 태엽이 빙글 빙글 돌았다.
"영감님."
상원은 한숨을 푹 쉬고 물었다.
"정말로, 거기로 돌아가고 싶었습니까?"
다람쥐는 상원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물었다.
"황금시대의 군주로군. 그놈이 널 거기 데려간 거야. 그렇지?"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시대의 군주가 남긴 환영이...글쎄요, 그걸 확실히 환영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그가 저한테 처음 보는 부품을 줬습니다. 그러면서 시계를 쓸 때 그걸 시계에 꽂으라더군요."
상원의 말에 다람쥐가 머리를 움켜쥐고 끙 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젠장, 시계추구나. 어쩐지 그 양반 사체를 아무리 뒤져도 안나오더라니, 꽁꽁 숨겨두고 있었군."
'아아, 그렇군.'
황금시대의 군주는 자신의 역작,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신기 '황금시대의 모래시계'의 부품 하나를 숨겨둔 것이다.
'어째서?'
어쩌면 그는 다른 승천자가 자기 작품을 훔치는 미래를 예견했던 건지도 모른다.
황금시대의 군주는 새하늘의 시간을 속일 수 있으니, 그 능력으로 시간의 선후관계가 잔뜩 헝클어진 새하늘 바깥을 넘나들며 미래를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언젠가 상원이 언젠가 황금시대의 모래시계를 얻게 될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시계추를 다른 누구도 아닌 상원에게 주었을 것이다.
불신자인 상원이 새하늘의 바깥에서 새하늘 아버지를 직면할 수 있도록 말이다.
다람쥐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던가 불신자 선생? 모두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우리 아버지를 직접 뵌 소감이?"
상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영감님, 아직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잖아요?"
으드득, 다람쥐가 이를 갈았다.
상원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단지, 꿈일 뿐이잖아요 영감님. 새하늘이라는 거, 거기 있는 승천자들은 그 속에서 단꿈을 꿀 뿐이라고요. 저도 새하늘에 오르면 누나와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꿈을 꾸겠죠."
무언가 목에 걸리는 느낌이 들어, 상원은 목청을 한 번 가다듬었다.
"그게 어떻게 구원이라고 할 수 있죠?"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인천 앞바다로부터 열기가 하늘을 태우며 몰려오는 와중에도 서늘한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다람쥐가 물었다.
"그래서?"
다람쥐가 도끼눈을 떴다.
"썅, 거기로 돌아가지 않으면 뭐가 있는데?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주 괴물하고, 그 아버지가 기르는 새끼 문어들하고, 걔들이 싸질러대는 구정물하고...씨발, 또 뭐가 있는데? 그것들 뿐이잖아? 그래서, 돌아가지 않으면? 거기서 살라고? 그 하수구에서? 그걸 견뎌? 그게 삶이야?"
다람쥐가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쏟아내고는 숨을 가다듬었다.
"헉, 허억.... 그래, 그럴 거라면 차라리 그 꿈속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아?"
'그런 건가.'
어릴 때 보았던 영화가 생각났다.
그 영화에는, 세상의 벌거벗은 진실을 알고 나서 꿈으로 돌아가기를 택한 인물이 나왔었다.
그때 그 사람이 뭐라 그랬더라.
환상 속에서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이 스테이크가 환상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싶다고 했던가.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상원은 다람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웬일인지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갔다.
샤믹, 백문혁, 윤진아, 한창훈, 송혜경, 그리고 서울역의 수많은 수험자들.
거짓 구원을 선택하면, 그들이 새하늘 아버지로부터 시시각각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은 계속될 뿐이다.
새로이 얻은 소중한 사람들을 그렇게 잃을 순 없다.
상원을 올려다보던 다람쥐가 말했다.
"야...너, 설마...?"
다람쥐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이 미친 새끼야, 너 설마 그 문어 괴물이랑 싸울 생각은 아니지?"
상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고 다람쥐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람쥐가 소리를 질렀다.
"너! 내가 뭐때문에 너를 만들었는데! 너는, 나한테 옥좌를 다시 돌려줘야 한다고! 그게 니 역할이야!"
씩씩대는 다람쥐의 털이 부풀어올랐다.
"너는 일곱 별의 왕관을 완성해서 새하늘에 오르고, 나는 다시 옥좌에 앉고! 그렇게 해야 하는 거라고!"
순간 시공이 얼어붙었다.
기계장치의 신의 강대하기 그지없는 힘이 어깨를 무겁게 내리 눌렀다.
"너 이 새끼! 허튼 생각 하지 마! 너...너, 그 육체의 통제권은 전적으로 나한테 있어!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 몸, 그대로 멈추게 할 수 있다고!"
그런데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측은했다.
옥좌가 거짓이란 걸 알았는데도, 거기로 돌아가야 한다고 마음먹은 그 사람이.
'하지만, 영감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그걸까?'
상원이 입을 뗐다.
"영감님."
다람쥐가 씩씩대며 상원을 보았다.
"그래서, 정말로 옥좌에 다시 앉으면...전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옥좌도 단지 꿈일 뿐이라는 걸,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들을 빨아먹는 괴물이 있다는 걸 아는데도요?"
"으윽...."
다람쥐의 등에 박힌 태엽이 파르르 떨렸다.
"솔직히 영감님, 확신이 없지 않나요? 그걸 모른척 하고 살 수 있는지? 영감님은, 그렇게 똑똑한 영감님 자신을 속일 수 있나요?"
"끄으으응...."
다람쥐가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의 얼굴에 그늘이 짙었다.
"그래, 아니야. 아니야. 나는 나를 잘 알아. 그럴 수는 없어. 그렇지만...그렇지만...."
중얼거리던 다람쥐가 휙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모릅니다."
상원의 말에 다람쥐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뭐?"
"모른다고요."
다람쥐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야, 뭐, 모르겠다고? 어쩌자는 건데?"
"그래도 영감님, 저는 할 수 있는 게 있어요. 불신자니까요. 그 문어괴물을 보고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죠."
황금시대의 군주와 지하의 수호자도 그렇게 말했었다.
불신자니까, 새하늘의 바깥에 있는 새하늘 아버지를 보고도 견딜 수 있는 거라고.
그렇다면 상원은 그 새하늘 아버지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지도 몰랐다.
"이제, 찾아봅시다. 앞으로 시험이 어떤 식으로 지랄맞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다행히도 영감님이 워낙 좋은 육신을 주셔서 무난하게 넘길 수는 있을 것 같네요."
말을 마친 상원이 엷은 웃음을 지었다.
다람쥐가 폭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래. 그래라."
그때 상원의 머리를 스친 생각이 있었다.
"아, 영감님. 네트워크 타나스 아시죠?"
"타나스? 타우 은하에 있는 중앙컴퓨터 인공지능 말이지? 알다마다."
"그 타나스도 예언 얘기를 하던데요?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그 말에 다람쥐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처음 들어보는데? 아니, 일단 타나스가 그런 얘기를 한다고? 그거 그냥 새하늘 시험에 오염된 괴물 아냐?"
그 말에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대 절대자 중 하나인 기계장치의 신도 그건 모르고 있었구나.
전생의 상원도 타나스는 단지 타우 은하에서 나타나는 괴물들을 움직이는 네트워크일 뿐이라고,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깊고 깊은 물'에서 타나스를 대면하지 않았다면 상원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 '깊고 깊은 물'에서 타나스를 만났거든요."
다람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래. 이제 26번 시험인데...깊고 깊은 물에 누가 벌써 갈 거라고 생각을 했겠어? 아직은 기관의 관리 범위에 들어가지 않은 곳을 간 거구나."
상원이 대답했다.
"네. 어쩌면...타나스가 가진 데이터베이스에 그 실마리가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새하늘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예언.
그 예언에 단서가 있을 지도 모른다.
다람쥐가 말했다.
"그래, 부디 그러길 바란다. 거기 또다른 미래가 있으면 좋겠군."
다람쥐가 한숨을 푹 쉬었다.
"다치지 마라. 내가 전에 말했었지? 그 몸뚱이, 네놈 영혼 모조리 팔아도 갈음 안된다고."
상원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그래. 나는 그 몸에다 뭘 더 실을 수 있는지 연구해봐야겠다. 잘 있어라."
손을 흔든 다람쥐의 등에서 태엽이 떨어졌다.
그러자 다람쥐가 털썩 쓰러졌다.
상원은 벌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우주 너머 다른 은하에 있는, 새로운 미래를 찾으러 갈 것이었다.
**
상원이 서울역에 다다른 건 며칠 뒤였다.
격풍의 공격으로 거의 무너지다시피했던 서울역은 깨끗하게 재건되어 있었다.
드워프들의 솜씨였다.
그렇게 건물은 복구할 수 있었지만, 탈락한 수험자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성역 서울역이 26번 시험에서 올림포스를 이기면서 올림포스의 생존자를 흡수했지만, 그 결과는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26번 이전의 서울역만 못했다.
그 여름 동안, 상원은 서울역의 상황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건 결코 쉽지 않았다.
지금껏 최선을 다해 상원을 도와주었더 수험자들이 더 이상 도움을 줄 수 없게 된 탓도 컸다.
상원이 '깊고 깊은 물'에서 돌아온 이후로 윤진아는 계속 잠들어 있었고, 심장에 박았던 '의령수의 심장'이 깨진 한창훈은 가사상태에 빠져 있었다.
몸 속에 남았던 '검은 숲의 목자'가 소멸해버린 바람에 정신줄을 완전히 놓아버린 혜경은 종일 남편의 옆에 붙어 버르적거렸다.
그나마 문혁, 그리고 '뱀이 훔친 불로초'를 먹고 회복한 샤믹이 상원을 도왔지만 힘에 부쳤다.
일은 끝없이 쌓여 있었고 사건은 매일 터졌다.
그렇게 여름이 갔다.
예상치 못했던 손님이 찾아온 건 새벽이면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때의 일이었다.
창밖으로 해가 저물고 있었고, 상원은 숙소 침대에 지친 몸을 뉘이고는 물끄러미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상원의 방문을 두드렸다.
상원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네."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상원의 미간이 구겨졌다.
사람의 발소리가 아니어서였다.
'뭐지?'
잔뜩 경계하면서 고개를 돌린 상원의 눈에 들어온 건 큰 개만한 크기의 '데몬즈 헤드'였다.
"그르르륵...그륵...."
데몬즈 헤드가 말했다.
"도와...다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