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타우 (1)
상원은 동쪽으로 날았다.
눅눅한 열기를 머금은 뜨거운 공기가 갈라졌다.
저 아래로는 부서진 돌로라크처럼 완전히 찢어져 버린 대지가 펼쳐졌다.
'돌로라크도 이러다가 산산조각이 나버린 거군.'
인천 앞바다는 완전히 박살이 나버린 건 마그마 기둥을 뽑아내 격풍을 찍어눌렀던 여파였다.
기계장치의 신이 준 새로운 힘 '탈신'의 위력은 그야말로 지형을 바꿔버릴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점이 그렇게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 힘에 대해 온전히 알고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생에 50번 시험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건 앞으로 시험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알고 있는 덕이 컸다.
비유하자면, 공략법을 모두 알고 있는 게임을 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그와는 달리 이번 생은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탈신은 그중 일부일 뿐이었다.
전대 절대자인 '기계장치의 신'에게서 받은 '신화의 몸'부터 해서, 이번 시험은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게다가 기관은 시험의 내용을 바꿔버렸고, 절대자 '외눈 현자'가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새하늘은 단지 별들의 꿈에 불과하다는 것도, 새하늘의 바깥에 있는 새하늘 아버지는 촉수 달린 괴물이라는 것도 알아버렸다.
이제는 별을 모으는 게 목표가 아니게 됐다.
혼란스러웠다.
'이 다음은 무엇이지?'
설정으로만 존재하는 괴물 '격풍'을 물리쳤다.
그리고 이다음엔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후우.'
그때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경고. 탈신의 유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상원은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추산치: 20초]
'20초...? 아직 서울 시내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탈신 모듈'을 사용하면서 의체의 힘을 바닥까지 끌어다 썼다.
변신이 풀리면 당분간은 마물들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게 불 보듯 뻔했다.
상원은 눈을 크게 뜨고 착륙할만한 곳을 찾았다.
마침 저 멀리 우뚝 솟아오른 건물이 보였다.
유리로 된 외벽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고 곳곳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었지만, 웬일인지 옥상은 깨끗했다.
'마물들이 저기까지 올라가진 않았나 보군.'
상원은 그 건물의 옥상 위로 사뿐히 착륙했다.
두 발이 닿자마자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저장된 마력을 모두 소진했습니다.]
[탈신을 해제합니다.]
그와 함께 바닥이 쑥 가까워졌다.
변신이 풀리며 덩치가 줄어들어서였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상원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뱃속에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우어어어억."
쓴 침이 바닥까지 늘어졌다.
눈앞이 핑핑 돌았고 귀에선 삐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나 탈진이 심한지 존재하는 것 자체가 힘들 지경이었다.
상원은 대자로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장을 게워내듯 한숨을 쉬었다.
"하아아아아."
인천 앞바다에서 올라온 새까만 연기가 여기까지 몰려오고 있는지 여름 하늘의 한 편이 어두웠다.
잠시 후 온몸이 아파지기 시작했다.
뼈가 모조리 산산조각나는 것 같은 고통에 신음이 절로 나왔다.
"끄으으으윽."
손이라도 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손가락 하나도 꼼짝할 수 없었다.
그래도 강제로 수복실 안에 들어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상원이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젠장."
구석에 몰릴 때면 으레 그랬듯 상원은 눈을 감고 깊은숨을 쉬기 시작했다.
숨이 몸 구석구석을 타고 들어가면서 몸에 활기가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숨을 쉬다 보니 그래도 몸을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는 있는 상태가 되었다.
천근만근 무거운 손을 들어, 상원은 이마를 짚었다.
그게 지금 상원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오른손.
그 오른손이 태양처럼 빛나면서 대기권 위로 치솟을 정도로 거대한 마그마 기둥을 불러냈었다.
새하늘 안에 그 정도로 강한 기술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었다.
그렇게 강한 힘이 이 손에 들어와 있었다.
'전생에 이 정도 힘이 있었다면 49번 시험까지 깨는 건 껌이었을 건데.'
물론 그렇다고 해도 새하늘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신격이 없으니까.
새하늘에 오르려면 신격을 가진 칭호 '일곱 별의 왕관'을 얻어야 한다.
아니 그런데, 일곱 별의 왕관을 얻는 게 의미는 있는가.
어차피 그렇게 해서 새하늘에 오른다고 속죄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게 아닌데.
새하늘에 있는 건 오로지 꿈일 뿐인데.
'그렇다면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때그때 주어지는 시험에 맞서서 싸우는 일?
할 수 있는 건 단지 그것뿐인가?
그렇게 해서 모두를 새하늘에 올려보내면, 남는 건 무엇이지?
아니, 소중한 사람들이 새하늘에 오를 때까지 지켜낼 수 있기는 한 걸까?
외눈 현자가, 사마에트가 무엇을 준비했을 줄 알고?
의문이 계속되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새로 얻은 기능은 어때, 불신자 선생? 쓸 만하던가?"
고개를 돌려 보니, 익숙하기 그지없는 다람쥐가 상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계장치의 신'이었다.
"어때, 쩔지?"
다람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탈신 모듈. 말 그대로야. 몸을 바꾸는 기능이지. 잠시나마 태초의 대족장에 가까워져 본 소감이 어때?"
'가까워졌다'라.
"얼마나 가까워진 겁니까?"
"얼마나? 음, 음... 글쎄, 한... 3%?"
3%?
그런 걸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는 건가?
"그것도 최대한 관대하게 잡은 거야. 잘 생각하라고. 태초의 대족장은 탄생한 것만으로 세계를 찢어버린 괴물이란 걸."
그래, 그렇지.
상원이 물었다.
"그렇다면... 얼마나 힘을 더 쓸 수 있는 겁니까?"
다람쥐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얼마나 더? 왜? 그걸로 부족해? 격풍을 한 번에 찍 눌러 죽여버렸는데, 그걸로 부족한가?"
그 말에 상원이 대답했다.
"글쎼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이제 고작 26번 시험인데, '격풍'까지 나왔습니다. 그럼 앞으로 남은 시험에서 뭐가 어떻게 될 줄 알구요."
다람쥐가 손가락을 세워 자기 턱을 쿡쿡 눌렀다.
"사실 이론상 힘을 더 끌어낼 수는 있어. 한참 더 뽑아낼 수 있지. 그래도 말이야. 거기서 힘 더 끌어낼 생각 하지 마라. 아까 정도 수준으로도 탈진하는데, 더 썼다간 너 진짜 죽어. 너 이제 시계도 없잖아. 그러니까 허튼 생각 하지 마."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 하기사, 아무리 앞날을 알았다손 치더라도... 지금은 시험이 알고 있던 내용에서 너무 벗어나고 있지. 너도 참, 곤란하겠다."
그래, 그렇다.
'어, 잠깐만?'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상원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 양반, 내가 앞날을 아는 걸 알고 있었어? 그렇다면 설마, 승천계시록에 대해서도 알고 있나?'
지금껏 상원을 얽어맸던 문제 중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새하늘교의 경전 '승천계시록'의 정체.
자그마한 실마리라도 잡고 싶었다.
"영감님."
상원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혹시, '승천계시록'이라고 들어 봤어요?"
다람쥐가 꼬리를 펄럭였다.
"승천계시록이라... 승천계시록, 처음 들어보는데?"
"진짜요?"
"진짜야."
다람쥐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뭐 대충 짐작은 된다."
상원이 눈을 크게 떴다.
"니가 봤던 예언 이름이 그거냐? 이름하고는 참."
상원이 다람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치 기계장치의 신이 상원이 지금까지 찾던 문제의 답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다람쥐를 움켜쥐면, 답을 알 수 있을 것처럼.
"말해줘요 영감님. 알고 있는 거... 다요."
다람쥐가 상원의 손을 턱 잡으며 피식 웃었다.
"뭐, 대단한 거라도 기대하고 있는 눈친데 말야. 대단한 거 아냐."
'대단한 게 아니라고? 무슨 소리지?'
"예?"
"잘 생각해봐, 불신자 선생. 니가 지금까지 시험에서 들은 예언만 몇 개냐?"
그 말에 상원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시험 속에서 들은 예언? 뭐가 있더라?'
오디나스가 들은 예언이 있었고, 해원향이 들은 예언이 있었다.
그뿐인가?
"엄청 많았죠."
"그중에 틀린 거 있었어?"
"없는 것 같은데요."
"그래, 시험에는 엄청나게 많은 예언이 있어. 그리고 그게 예언 흉내를 낸 그럴싸한 가짜가 아니라면 적중한다고. 자네가 본 것도 그중에 하나야. 근데 좀 양이 많고... 그런 거지."
다람쥐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거 알아? 시험 바깥의 우주는 시간이 엉켜 있어. 시험 안에서의 선후와 인과는 시험 바깥이라는 더 높은 차원에선 모두 헝클어지지. 결과가 원인에 앞서서 존재하기도 하고, 미래가 과거를 앞지르기도 한다고. 그리고 그렇게 헝클어진 미래가 가끔은 시험 안이나 다른 우주로 흘러 들어가기도 하지."
시험의 바깥에서 봤던 광경들이 머리를 스쳤다.
우주로부터 흘러나오는 별빛 꿈들.
'그 꿈들이 시험의 시간을 거슬러 흘러 들어가기도 한다는 건가?'
안 그래도 지끈거렸던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래서 내가 추측하는 건 그래. 그 정보들이 시험이 시작되기 전의, 너네 우주로 흘러 들어간 거지. 자네는 아주 운이 좋게도, 그게 정리된 걸 본 거고."
한 번에 받아들이기는 힘든 내용이었다.
머릿속이 잔뜩 헝클어진 상원이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우."
다람쥐가 피식 웃었다.
"무슨 말인지 도저히 모르겠지? 시험 안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어. 그냥 받아들여. 어쨌든 자네가 본 게 그렇게 특별한 건 아니라는 거. 물론 지금껏 자네가 해온 걸 볼 때 자네가 본 정보는 좀 많이 세세한 것 같기는 하다만은."
다람쥐가 상원의 이마를 토닥였다.
"승천계시록이 아니라 자네가 특별한 거야. 그 정도 정보를 모조리 외우고 다니는 놈이 누가 있겠냐고. 암기 특성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속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는 것 같았다.
'승천계시록이 그냥... 이 시험에 흔한 예언 중 하나일 뿐이라고?'
허무했다.
시험의 바깥에서 흘러들어온 수많은 정보들 중 하나일 뿐이라니.
'시험의 바깥.... 잠깐만.'
그제야 생각이 났다.
상원은 이 영감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영감님."
상원이 굳은 표정으로 다람쥐를 보았다.
다람쥐가 쯧 혀를 차고 물었다.
"왜, 또 뭐야? 뭘 또 물으려고?"
"시험의 바깥, 봤죠?"
순간 다람쥐의 얼굴도 굳었다.
그 다람쥐에게서, 연구실에서 보았던 노인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봤지."
그 두 글자에 주변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너도 봤구나?"
상원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르타로스에 흐르던 별빛과 오수, 새하늘 안에서 꿈꾸는 별들, 그리고 그 바깥에 있던 괴물의 모습이 생생했다.
"영감님, 그걸 보고도 옥좌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까?"
순간 다람쥐의 눈빛이 바뀌었다.
다람쥐의 눈에 나타난 것, 그건 확연한 절망의 빛이었다.
다람쥐가 욕지거리를 뱉었다.
"씨발...."
다람쥐가 짧은 팔로 머리를 감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