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탈신 (4)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끝없는 땅의 거수'의 힘을 사출합니다.]
마그마로 이루어진 오른손에서 뿜어져 나온 강렬한 열기에 주변의 공기가 일렁였다.
우반신이 마그마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주먹을 쥔 오른손에서 퍽 하고 마그마가 터졌다.
손이 그대로 부서져 버릴 것 같은 고통에 절로 신음이 나왔다.
- 그으으으윽!
끝을 알 수 없는 마력이 성난 소 떼처럼 온몸을 헤집었다.
조금만 집중을 잃으면 몸이 통째로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힘의 크기가 강신회로를 쓰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위험성 또한 차원이 달랐다.
그야말로 높디높은 벼랑 위에서 외줄을 타는 심정이었다.
부서진 광야에서 보았던 대주술사 '뮈노 메드냅'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 양반, 육신에 잘도 이런 힘을 가둬 두고 있었군.'
새하늘 시험을 떠받치는 다섯 마신 중 하나인 태초의 대족장.
그는 하늘의 정령왕인 '깊은 하늘의 괴조'와 땅의 정령왕인 '끝없는 땅의 거수'가 금기를 깨고 한 몸에 동시에 강림하면서 탄생했다.
대주술사 뮈노 메드냅은 승천도 하지 않은 몸에 정령왕이라는 괴물을, 그것도 둘씩이나 받은 것이었다.
강신회로를 통해 그의 힘을 베껴 쓰던 시절엔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상원은 깨달아 가고 있었다.
예컨대 마신은 정말로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것.
'그러니까 마신이라는 지위를 받은 거겠지.'
그때 격풍이 커다란 날개를 펴고 상원을 향해 포효했다.
"크아아아악!"
놈의 뒤로 펼쳐진 검디검은 먹구름 사이로 황금빛 번개가 미친 듯 춤을 추었다.
먹구름으로부터 흘러나온 번개들이 놈의 비늘을 따라 흐르며 섬광을 뿜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일까?
놈이 한 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럼 나도 한 방을 보여 줘야지.'
- 후우우우우.
한숨을 내쉬자 상원의 주변으로 맹렬한 바람이 일었다.
끓어오르는 기를 최대한 가다듬으며, 상원은 노트에서 보았던 형상을 떠올렸다.
태초의 땅 돌로라크를 거닐던 수많은 정령들, 그중에서도 그들을 이끄는 세 왕의 모습이었다.
그 장이 기억의 궁전 한 켠에 사진처럼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그것이 그려져 있던 페이지 한쪽에 묻은 꼬질꼬질한 얼룩마저 그대로 기억났다.
두뇌의 결함으로 가지게 된 천부적인 암기력 덕택이었다.
'찾았다!'
상원은 노트에서 보았던 '끝없는 땅의 거수'의 모습을 피부의 균열 하나까지 세세히 떠올렸다.
[대지의 힘을 형상화합니다.]
시스템 메시지에 이어 거대한 진동이 바다를 강타했다.
쿠르르르릉!
서해의 바닷물이 끓어오르며 맹렬히 증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일어난 해일이 저 멀리 해변을 집어삼켰다.
해변을 집어삼킨 해일이 반대로 저 멀리 물러나자 죽은 짐승의 백골처럼 말라붙은 갯벌이 드러났다.
배수구를 연 욕조에서 물이 빠져나가듯 서해의 바닷물이 뒤로 물러났다.
우반신이 미친 듯 들끓은 탓에 신음이 절로 나왔다.
- 흐으으으으으!
상원은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우반신을 갖은 애를 써서 붙들었다.
주변의 공기마저 불안하게 흔들렸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놈이 비명을 지르듯 포효했다.
“크아아아아악!”
그러자 놈의 뒤로 망토처럼 빽빽한 황금빛 번개가 치며 엄청난 굉음이 서해의 하늘을 뒤흔들었다.
콰르르르릉!
그야말로 하늘을 찢어버릴 것 같은 위세였다.
하지만 그 모습은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왜냐하면 상원의 온 신경은 다른 데 쏠려 있기 때문이었다.
미친 듯 들끓고 있는 우반신과 거기에 이어져 있는, 발밑 서해의 바닥 아래서 솟아오르고 있는 마그마 덩어리에.
오른손의 붉은 빛이 짙어지며 치익 하는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서해 땅 밑의 마그마가 지면을 뚫었다.
우르릉하는 진동에 이어 퍽 하고 바닷물이 튀어 오르면서 짙은 중기와 함께 유황 냄새를 풍겼다.
상원은 오른 주먹을 부서지라 쥐었다.
- 후우우우우!
지면을 뚫은 마그마가 서해의 바닷물을 그대로 증발시키며 맹렬한 기세로 수면을 향해 치솟았다.
쿠르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다 여기저기서 새까만 용암질의 봉우리가 마치 숨을 쉬러 나오는 고래처럼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저 바다 밑에서 솟아오르는 힘은 순식간에 지형을 바꿀 정도였던 것이다.
격풍이 포효했다.
“크아아아아아악!”
놈의 뒤로 황금색 번개가 고리의 형태를 띠면서 후광처럼 놈을 감쌌다.
그 밖으로 한 겹에 그 밖으로 또 한 겹, 하여 총 세 겹의 고리가 놈의 뒤에서 천천히 회전하며 마법진을 그렸다.
이어서 놈이 세 개의 아가리를 벌리자 용의 입에 물린 여의주처럼 그 안에 황금색 번개 구슬이 생겨났다.
오만한 신들을 벌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강대한 마물의 모든 힘이 거기 모여있었다.
놈의 등 뒤로 짙은 먹구름이 태풍의 눈처럼 거대한 회오리를 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번개 구슬이 광선의 형태가 되어 놈의 앞에서 합쳐졌다가 똑바른 송곳처럼 시공간을 꿰뚫으며 상원을 향해 쇄도했다.
놈의 필살기였다.
설령 지상에 강림한 신이라도 저걸 맞고 버틸 수는 없을 것이었다.
'일반적인 신이라면 그러겠지.'
상원은 날아오는 광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 광선이 한없이 느려서, 광선이 허공을 꿰뚫는 한순간 한순간이 끊겨서 보였다.
그중 한순간, 수면으로부터 쑥 솟아오른 거대한 마그마 기둥이 상원의 앞을 가렸다.
광선이 기둥에 부딪히면서 무지막지한 폭발음을 냈다.
쾅!!!
웬만한 마천루보다도 굵고 거대한 용암 기둥이 속절없이 부서져 나갔다.
그 정도로 거대한 지형을 흔적도 없이 날려버릴 정도로 놈의 힘은 막강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부서진 마그마 기둥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솟아오르며 상원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용암 기둥은 솟아오를수록 점차로 굵어지면서, 거대한 짐승의 형태를 띠어 갔다.
상원이 노트에서 보았던, 돌로라크의 대지의 정령왕 ‘끝없는 땅의 거수’의 모습이었다.
서해의 해저에서 지면을 뚫고 솟아오른, 온몸이 마그마로 된 산만한 용각류 공룡이 앞발을 치켜들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자, 상원은 공룡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긴 목이 어찌나 높이 솟아올라 있는지 장막 같은 먹구름을 뚫고 올라간 눈에 푸른 하늘이 보였다.
작은 조각 같은 땅덩어리 저 멀리 지평선이 둥글게 보일 지경이었다.
상원은 아래를 보았다.
허리께에 깔린 짙은 먹구름 사이로 황금빛 스파크가 꼬물대고 있었다.
'저기 놈이 있다.'
상원이 육중한 앞발을 놈을 향해 내디뎠다.
상식을 넘어서는 질량의 마그마 덩어리가 말 그대로 대기권을 불태우면서 놈을 향해 떨어졌다.
하늘 자체를 찍어누르는 듯한 풍압에 먹구름이 산산이 부서져 멀리 물러났다.
그 사이로 드러난 놈의 모습은 누런 도마처럼 초라하게만 보였다.
놈이 실낱같은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악!”
놈의 비명은 거대한 다리가 하늘을 가르는 굉음에 묻혀 사라져버렸다.
후우우우웅!
하늘을 뒤덮을 듯 펼쳐졌던 놈의 장막 같은 날개도 소용없었다.
바닷물을 모조리 날려버릴 정도로 강력한 풍압에, 놈은 폭우 속의 나비처럼 흔들릴 뿐이었다.
놈의 조그만 눈 속에 절망이 짙었다.
- 잘 가라, 카일 핸드레이크.
들끓는 마그마로 된 거대한 앞발이 바닷물을 모조리 날려버리고 바닷물 아래 있던 땅바닥을 밟았다.
발아래서 번쩍하는 섬광이 일어났다.
이어서 발생한 조그만 충격파가 바닷물을 통째로 날려버리며 지면을 산산조각냈다.
잠깐, 상원은 내디딘 앞발을 내려다보았다.
저 아래 세상이 너무나도 작아서,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존재가 된 것 같다는 단절감이 느껴졌다.
'신이 된다는 건, 이런 느낌인가.'
상원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어쩐지 이 차원을 감싼 채로 꿈을 빨아먹고 사는 새하늘 아버지가 하늘 너머에 어른거리는 것도 같았다.
이 힘이라면, 그와 대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마신들에게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들이라면, 어쩌면, 새하늘 아버지에 맞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러다 한순간, 갑자기 생각이 아득해졌다.
마력으로 뽑아 올렸던 형체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랜 세월 묻혀 있다 갑자기 공기 노출된 미라처럼, 지면을 디딘 앞발부터 몸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떠받치고 있던 거대한 몸뚱이와 굵은 목이 부서지자, 머리가 땅으로 떨어지면서 급속도로 지면이 가까워졌다.
머리가 지면에 부딪히며 암전되듯 어두워졌다.
'아아....'
잠시 후, 상원은 고개를 들었다.
파란 바다 저 멀리로 커다란 버섯구름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상원은 금세 사태를 파악했다.
본체가 마그마 공룡이 앞발을 디디면서 일어난 폭풍에 휘말려 여기까지 날아온 것이었다.
남은 시각을 확인했다.
[추산치: 3분 42초]
이 정도면 서울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어서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경고: 의체의 손상이 심각합니다.]
탈신을 한 몸이 손상될 정도로 충격이 엄청났던 것이다.
충격 때문인지 몸의 빛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카일 핸드레이크는 어떻게 됐지?'
상원은 버섯구름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서해 한복판에 이때껏 보지 못했던 거대한 마그마의 섬이 솟아 있었다.
구름을 뚫을 정도로 높이 치솟았던 마그마 기둥이 바닷물에 닿아 식으며 만들어진 화산섬이었다.
상원 자신조차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엄청난 힘이었다.
'지형 자체를 바꿔버렸다. 새하늘에 이 정도 힘을 가진 자가 있기는 한가?'
상원은 화산섬 사이를 날았다.
아직도 마그마가 흐르는 화산섬 한복판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황금 연못이 있었다.
녹아버린 격풍의 몸이었다.
그 연못이 한가운데 카일 핸드레이크의 나신이 있었다.
상원은 카일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몸은 생기를 잃고 축 늘어져 있었고, 눈과 코와 입에서 아직도 금빛 액체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원은 카일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탈락했다.'
드높은 주신 '번개의 왕'의 화신, 새하늘 시험의 두 번째 강자, 대길드 올림포스를 이끌던 그 도도하고 냉철한 수험자 카일 핸드레이크가, 이렇게 죽었다.
상원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매캐한 먼지구름에 뒤덮인 불타는 하늘 한가운데, 그 어두운 구름을 뚫고서 제빛을 내보이고 있는 별 하나가 있었다.
새하늘에서 이 땅을 내려다보고 있는, 주신 '번개의 왕'이었다.
새하늘 시험에서 화신이 다른 화신에게 죽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마귀에 씌여 마인이 되는 자들처럼, 끝 간데없는 힘에 홀려 괴물이 되었다가 불명예스럽게 죽는 일도 흔했다.
하지만, '번개의 왕'은 자기의 도도한 화신이 그런 꼴을 겪고 죽을 거란 생각을 했을까?
"어떻습니까?"
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꺼져갈 뿐이었다.
이렇게 서울역은 지켜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질렀던 비명이, 마음속에 피어났던 공포와 원망이, 광기가 새하늘 바깥의 괴물을 살찌웠을 것이다.
시험은 이렇게 계속될 것이다.
'나는 서울역을 계속 지켜나갈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마침내 승천한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확답할 수 없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마물 '격풍'을 격퇴하였습니다.]
[보상 정산을 시작합니다.]
아마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보상이 들어오겠지.
그런들, 무슨 소용인가?
상원은 시스템창을 닫고 동쪽을 향해 날아올랐다.
빛처럼 나는 몸과 달리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