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탈신 (3)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변형이 완료되었습니다.]
[강신회로에 담긴 마력량을 바탕으로 탈신의 남은 유지 시간을 추산합니다.]
[추산치: 7분 56초]
'강신회로에 담긴 마력을 여기다 끌어다 쓴다는 거군.'
상원은 높이 들었던 오른손을 내렸다.
하늘 높이 솟구쳤던 마그마의 파도가 후드득 땅으로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마그마 방울들이 지면을 녹이며 매캐한 연기를 내뿜었다.
상원은 찬란한 빛을 내뿜는 오른손을 들여다보았다.
마그마로 이루어진 오른손에는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마력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번에는 왼손을 들어 보았다.
소용돌이치는 새파란 번개로 이루어진 왼손에도 역시,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마력이 잠들어 있었다.
손끝 발끝까지 온 감각이 생생했다.
하늘을 꿰뚫는 벼락 한 줄기 한 줄기가, 저 깊은 땅속을 흐르는 마그마 한 방울 한 방울이 그대로 느껴졌다.
상원은 깊은숨을 내쉰다고 생각했다.
"후우우우우우."
그러자 그의 주변에서 짙은 증기가 피어올랐다.
한순간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와서일까, 때아닌 폭우가 쏟아졌다.
쏴아아아
지면을 부술 것처럼 굵은 빗방울들은 상원의 몸에 닿지 못하고 증발했다.
쏟아지는 비가 강렬한 열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안개가 되었다.
그렇게 피어난 짙은 안개가 장막처럼 서울역 광장을 둘러쌌다.
바로 옆 서울역 건물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빗방울이 바닥에 고여 웅덩이를 이루었다.
상원은 그 웅덩이에 비친 자기 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몸의 절반은 마그마로 절반은 번개로 이루어진 거인이었다.
상원은 거기서 대주술사 뮈노 메드냅의 모습을 떠올렸다.
탈신(奪身), 기존의 몸을 다른 것으로 바꾼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크로노스의 분신을 본따 만들어진 이 육신의 형태가 무엇으로 바뀐 것인가?
두 정령왕이 결합해 이루어진 막강한 에너지체, 바로 '태초의 대족장'의 모습이었다.
목소리만으로 하늘을 찢고 손짓만으로 지각을 뒤엎던 그 강대한 대주술사.
상원은 그 주술사를 닮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때였다.
쿵 소리와 함께 웅덩이가 찰랑 흔들렸다.
이어서 격풍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으으으으윽...!"
짙은 안개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어섰다.
여섯 개의 금빛 눈이 상원을 쏘아보고 있었다.
놈이 내뿜는 황금빛 번개가 안개 속에서 번쩍였다.
파직 파직하는 소리가 귓전에 가득 울렸다.
놈은 온몸에 마그마를 뒤집어썼는데도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쓰러지지 않는군.'
실로 질긴 생명력이었다.
놈이 펄럭하고 거대한 날개를 펼치자 돌풍이 일어나 짙은 안개를 멀리 날려 보냈다.
그러자 놈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장인이 황금을 조각한 듯 매끈하고 단단해 보였던 놈의 비늘이 뚝뚝 녹아내리고 있었다.
흘러내린 금빛 비늘이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격풍이 하늘을 향해 우짖었다.
"우우우우우."
그러자 하늘을 뒤덮은 새까만 먹구름으로부터 황금빛 번개가 격풍을 향해 내리꽂혔다.
지면 따위는 우습게 부숴버렸던 격풍의 브레스였다.
26번 시험의 수험자 따위가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상원의 마음속엔 어떠한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 저놈이 브레스를 준비하고 있구나.'
스크린 속의 영상을 보듯, 밋밋한 감정과 함께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
"오오오오!"
격풍의 세 머리가 포효와 함께 상원을 향해 금빛 뇌전을 내뿜었다.
강렬한 섬광에 이어 금빛 번개의 파도가 상원을 향해 몰아쳐 왔다.
그 앞에 선 마음속이 고요했다.
그게 마치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 상원은 어떠한 경계심도 없이 천천히 왼팔을 들어 올렸다.
황금빛 번개 브레스가 상원을 감쌌다.
콰지지지직!
전류가 흐르며 청량한 소리를 냈다.
그 파괴적인 전류의 파도 한가운데서, 상원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듯 바깥의 에너지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왼손이 브레스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왼손에서부터 손목, 아래팔과 팔꿈치, 위팔과 어깨를 거쳐 막대한 에너지가 몸 가운데로 고였다.
눈앞을 뒤덮었던 전기의 장막이 차츰차츰 옅어지면서 전류가 흐르는 소리도 작아졌다.
그리고 잠시 후 전기의 장막이 사라졌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번개 에너지를 흡수하였습니다.]
[탈태 유지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추산치: 7분 59초]
상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로 막대한 에너지를 흡수했는데 고작 몇 초가 늘어났을 뿐이라니.
그건 한편으론 강신회로에 담긴 마력량이 그만큼 막대하다는 뜻이었다.
상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개마저 완전히 사라져, 서울역 주변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높은 곳에서 보니 브레스의 위력이 실감되었다.
격풍이 썼던 첫 번째 브레스가 지나간 자리가 완전히 박살 나 있었던 것이다.
전쟁기념관 방향으로 직선의 크레이터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두 번째 브레스는 그 무엇도 파괴하지 못했다.
상원이 모조리 흡수해버렸으니까.
안개가 물러간 자리로 격풍의 모습이 똑똑하게 보였다.
격풍의 얼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일그러졌다.
그래, 당연히 믿을 수 없을 게다.
육 차선 도로보다 넓은 크레이터를 만든 그 브레스를 맞고도 멀쩡하다니.
놈이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우우우우...!"
'용의 얼굴이 일그러지면 저런 모습이 되는군.'
입이 있었다면, 상원의 입꼬리가 슥 올라갔을 것이다.
어쩐지 그 인상이 그 철벽같은 카일 핸드레이크가 아주 가끔 짓곤 하던 당황한 표정과 겹쳐 보여서였다.
'그나저나 정말 터무니없는 마력량이군.'
왼손을 들어 보니 밑도 끝도 없이 막대한 힘이 느껴졌다.
이 정도라면 원본인 '태초의 대족장'에게도 맞설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상원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뭐 그 정도는 아니겠지. 마신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걸 뛰어넘는 자들이니까.'
그때 심장이 뛰듯 가슴 속에서 무언가 고동쳤다.
머금은 에너지가 턱없이 많은 탓에, 그중 일부를 자기도 모르게 흘려버린 것이다.
그러자 상원의 주변으로 순간 새파란 번개의 장막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뭐야 이 말도 안 되는 힘은.'
입이 있었다면 툭 벌어졌을 것이다.
그 힘의 일부를 잠깐 놓쳤을 뿐인데, 이 정도 스파크가 일어난단 말인가?
격풍의 주변에 널린, 부서진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박살 나버린 거리와 주저앉은 마천루, 그리고 폐허가 되어버린 역사가.
바닥에 가라앉은 모노리스와, 흔들리는 성화의 불빛과, 쓰러진 수험자들의 모습이.
여기서 싸우면 안 된다.
그랬다간 서울역과 수험자들은 그대로 잿더미가 되어버릴 것이다.
'어디로...?'
고개를 돌리던 상원의 눈에 저 멀리 서쪽이 들어왔다.
저리로 가면 바다가 있다.
상원은 남은 시간을 체크했다.
[남은 시간: 7분 55초.]
'이 정도면 바다에 닿는 데 충분한 시간일까?'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놈과 여기서 싸우는 일은 피해야 했다.
상원은 왼손 끝에 조그만 번개 구슬을 만들어 격풍을 향해 튕겨냈다.
보기에는 손가락 한 마디 만큼 조그마했지만, 카일이 쓰던 아스트라페나 케라우노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마력이 응축되어 있었다.
조그만 구슬이 격풍에게 닿자 놈의 목을 덮어버릴 만큼 커다란 빛덩어리가 되었다.
고작 그 작은 구슬 하나에, 놈이 브레스를 썼을 때보다 더 큰 소리가 났다.
콰지지직!
격풍이 놀라서 물러섰다.
"끄르르릉...!"
이어서 세 개의 머리가 상원을 휙휙 쏘아보았다.
아무리 마물이라도 현격한 힘의 격차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놈이 보통의 짐승이라면, 그 격차에 꼬리를 말고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놈은 짐승이 아닌 마물이다.
마물들은 그런 이유로 물러서지 않는다.
오로지 눈앞의 상대방을 쳐부수는 것이 목적일 뿐.
격풍이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크아아아악!"
놈의 주변으로 황금빛 전류가 흘렀다.
다음 브레스를 준비하는 것이다.
상원은 그걸 쓰게 할 생각이 없었다.
상원이 외쳤다.
- 따라와라!
입이 없는 상원의 외침은 커다란 울림이 되어 주변으로 퍼졌다.
이어서 상원은, 몸을 돌려 서쪽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악!"
뒤에서 놈의 포효와 함께 날개가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고개를 돌려 보니, 놈이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르고 있었다.
날개가 퍼덕일 때마다 거센 폭풍이 일어나 주변을 집어삼켰다.
그걸 보니 확실해졌다.
'외눈 현자'는 서울역 자체를 시험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었다.
'저 놈도 그렇고 외눈 현자도 그렇고 정말... 흉악하기 그지없군.'
상원은 마력을 방출했다.
그러자 주변으로 커다란 바람이 일었다.
이어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풍경이 뒤로 휙휙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 그대로 하늘을 가르면서, 상원은 서해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격풍이 괴성을 지르며 상원을 쫓고 있었다.
놈의 뒤로 금빛 번개를 머금은 짙은 먹구름이 이어졌다.
놈은 하늘을 나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태풍을 일으켰다.
정말 강하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상원은 지금 그 수준을 훨씬 넘어선 경지에 다다른 상태였다.
''기계장치의 신', 당신은... 정말로 권좌에 다시 돌아가고 싶었군.'
타르타로스에 가고 나서도, 새하늘의 바깥을 보고 나서도, 당신은 다시 그 꿈속으로 돌아가고 싶었다는 말인가?
'황금시대의 군주'와 '지하의 수호자'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불신자이기 때문에, 시험의 바깥을 보고 나서도 견딜 수 있는 거라고.
이어서 시험의 바깥에서 보았던 그 존재 - 새하늘 아버지가 생각났다.
그 거대한 우주를 품에 안고, 징그럽기 그지없는 촉수로 그 우주에서 배어 나오는 비명과 고통, 그리고 잔인한 쾌감을 빨아먹고 살던 존재가.
수많은 수험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 나가면서, 새하늘 아버지의 식탐을 채워 주고 있는 것이었다.
소중한 사람들이 그 탐식에 죽어 나가지 않도록 할 것이다.
'어떻게?'
아직은 모른다.
일단은 발끝에 바짝 따라오는 이놈을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상원의 발밑으로 폐허가 된 수도권의 모습이 이어졌다.
곳곳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날았을까, 이윽고 너른 바다가 펼쳐졌다.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추산치: 4분 15초.]
'거기서 여기까지 3분 반 만에 날아왔다는 말이지?'
상원은 빙글 돌아 뒤따라오는 격풍을 마주했다.
상원을 향해 덮쳐오는 격풍의 황금빛 거체가 하늘을 가렸고, 그 뒤로는 먹구름이 말 그대로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놈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했다.
"크아아아악!"
상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카일 핸드레이크, 당신도 이렇게 끝나고 싶지는 않았을 텐데.'
카일은 전생에서 마지막 시험까지 같이 갔었던 수험자들 중 하나였다.
동료는 아니었고 일말의 친분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상원은 다시 한번, 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 이제 끝내자.
오른손에서 맹렬한 빛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