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탈신 (1)
눈부신 황금색 비늘을 두른 거대한 삼두룡이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오오오오오!"
놈의 몸을 감싼 금빛 번개가 어찌나 강한지 주변의 시공간을 찢어버린 탓에 놈의 주변 풍경이 일그러져 보일 정도였다.
놈을 중심으로 맹렬한 바람이 몰아쳤고,
거대한 날개를 펴자 일어난 매서운 폭풍이 짙은 먼지를 머금고 수험자들을 집어삼켰다.
고작 날갯짓 한 번에, 서울역 역사 외벽이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상원은 '바위에 박힌 검'을 땅에 박고 폭풍을 견뎌냈다.
검을 놓쳤다간 그대로 날아가 버릴 테니까.
"끄으으으윽!"
엄청난 풍압에 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날갯짓 한 번에 이 정도라고?'
상원은 이를 갈며 놈을 올려다보았다.
뇌전을 온몸에 두른 거체가 짙은 먼지구름 속에서 눈부신 황금빛을 내뿜었다.
새까만 하늘 아래 짙은 먼지구름 속에서 고고한 금빛 마천루처럼 서있는 그것이 바로 최강의 마수, 신화 속의 티폰의 위용이었다.
새하늘은 놈을 '격풍'이라 칭했다.
격풍이 상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르르르르릉...!"
놈의 눈에서 황금빛 광선이 폭사했다.
놈이 상원을 향해 한 발을 내디뎠다.
쿵!
땅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상원은 검에 몸을 기대고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상원은 긴 숨을 쉬었다.
"후우우우우...."
노트에서 보았던 것들이 저절로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거기에는 당연히 '격풍'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새하늘이 낳은 최강의 마수 중 하나이며, 시험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요컨대 설정으로만 존재하는 놈인 것이다.
다만 노트에는 놈을 이길 방법이 적혀 있지 않았다.
이상하다 생각은 했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애당초 시험에 등장하질 않으니, 놈을 이길 방법은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지혜의 샘물을 과주입해서 수험자를 마물로 만든다는 방법으로, 외눈 현자가 그 설정으로만 존재하는 마물을 이 땅에 불러낸 것이다.
저절로 욕지거리가 나왔다.
"이런 젠장...."
하늘을 찌를 듯 높이 뻗은 세 개의 머리와 산처럼 펼쳐진 날개, 그리고 그 주변을 감싼 미친 듯한 폭풍.
험한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위압감이었다.
저승의 새를 보면서도, 이무기가 된 해원향과 맞서면서도 굳건했던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이제껏 겪었던 것과는 상황이 달랐으니까.
적어도 그 둘은, 아니 그놈들 외에도 암흑기사 툴리오나 흑풍회장 구두망도 달랐다.
그들은 계획 속에 있었다.
그들과 언제 어떻게 조우하게 될지, 그들을 만났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꼼꼼하게 그려보고 시뮬레이션을 수십 수백 번을 돌렸다.
그래서 그들을 마주했을 때 당황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지혜의 샘물을 마신 카일이 다른 존재로 거듭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결과물이 '격풍'일 거라곤 손톱만큼도 예상하지 못했다.
격풍의 세 머리가 하늘을 보며 우짖었다.
"우우우우우."
그러자 하늘을 뒤덮은 새까만 먹구름으로부터 황금빛 번개가 격풍을 향해 내리꽂혔다.
'브레스다!'
상원이 침음성을 흘렸다.
"크으으윽...!"
격풍의 브레스는 스킬이 아니어서, 상원이 특성을 바탕으로 무효화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절망적인 사실이 있었다.
저걸 맞으면 반드시 탈락한다는 것.
'황금시대의 모래시계'마저 없어진 지금, 탈락은 확정적인 죽음을 의미했다.
"오오오오!"
격풍의 세 머리가 포효와 함께 상원을 향해 금빛 뇌전을 내뿜었다.
강렬한 섬광이 눈앞을 뒤덮었다.
"크흡!"
상원은 죽을힘을 다해 옆으로 굴렀다.
방금 전까지 상원이 서 있던 자리로 황금색 브레스가 꽂혔다.
그러자 땅바닥이 부서지는 굉음과 함께 짙은 먼지를 머금은 맹렬한 돌풍이 일었다.
고개를 들어 그곳을 보니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땅바닥에 거대한 구덩이가 패여 있었다.
이 정도면 이무기가 된 해원향과도 맞먹는 수준이었다.
다만, 해원향과 격풍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바로 상원이 격풍을 물리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
'젠장... 이거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때 갑자기 상원의 주변에서 녹색 빛이 피어올랐다.
그러면서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예상치 못했던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위업이 충분히 누적되었습니다.]
[의체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업 효과로 의체가 수복됩니다.]
억지로 열지의 말뚝을 뽑아내느라 박살 났던 오른팔에 감각이 돌아왔다.
상원은 오른팔을 쥐어 보았다.
피식 소리와 함께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상원은 의체 관리 인터페이스를 열어보았다.
--------------
[의체 관리 시스템]
접근이 허가된 정보만 표시됩니다.
레벨 20 (0%)
성능: 괴력 95, 용력 105, 술력 95
스킬: 요새 수호자의 시선(4), 하늘의 불씨(4), 지하의 문(2), 동굴적 감각(3), 원혼 군주의 절규, 좀비 소환 (더 보기)
잔여 스킬 포인트: 1
강신회로: 태초의 대족장
달성 업적: 네 번째 문의 봉인자, 신성제국의 구원자, 생명나무 뱀 살해자
일곱 별의 왕관 진척도: 3/7
-----------
'레벨업!'
드디어 레벨 20에 다다랐다.
300에 육박하는 종합 능력치와 4레벨 요새 수호자의 시선을 비롯한 각종 스킬들.
상원은 어느새 보통의 수험자들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종합 능력치가 1천쯤이나 된다면 모를까, 300이든 500이든 눈앞의 '격풍'을 상대할 수는 없었으니까.
상원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타이밍 하고는 참. 사람 놀리는 건가?'
활력이 돌아온 육체로 할 수 있는 거라곤 브레스를 간신히 피하면서 도망 다니는 것 정도뿐이었다.
그러니까, 죽음을 조금 늦췄다는 것 말고는 다른 의미가 없었다.
또다시 격풍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번개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
그때였다.
초록색 레이저가 격풍의 가슴에 박혔다.
쾅!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했는지 주춤 물러난 격풍이 고개를 돌렸다.
"그르르르릉."
상원도 고개를 돌려 레이저가 날아온 곳을 쳐다보았다.
강상중의 이동 요새, '깨어난 모노리스' 꼭대기의 구슬이 레이저와 같은 초록색 빛깔로 빛나고 있었다.
구슬 뒤 옥좌에 앉은 강상중은 힘을 있는 대로 끌어다 썼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꼭대기에는 상중 말고도 두 사람이 더 있었다.
"모두 물러서지 마라!"
"힘내세요 여러분!"
서울역의 지휘관 백문혁이 다른 수험자들에게 버프를 주고 있었고, 신우주는 쓰러진 수험자들을 일으키고 있었다.
갑자기 턱 하고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의 힘은 상원에게 한참 미치지 않는데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들에게는 시험의 순간순간이 예상치 못한 재앙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도 상원보다 의연할 수밖에.
"크아아아악!"
격풍이 괴성과 함께 커다란 날개를 앞발처럼 쓰며 모노리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격풍이 땅을 디딜 때마다 지면이 과자처럼 부서졌다.
모노리스의 에너지를 끌어내는 강상중의 얼굴이 새빨간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끄으으으윽!"
웬만한 수험자들은 단번에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레이저는, 하지만 격풍의 단단한 비늘에 맞고 맥없이 꺾여 나갔다.
레이저를 튕겨낸 격풍이 두 날개로 모노리스를 감싸 쥐었다.
그러자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한 모노리스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처박혔다.
모노리스에 탄 수험자들과 거기에 깔린 수험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악!"
"꺄아아악!"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상원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격풍을 쳐다보았다.
어찌나 주먹을 세게 쥐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안 돼!'
이대로라면 강상중과 신우주 그리고 백문혁은 반드시 죽는다.
그럴 수는 없다.
뭐라도 해야 했다.
'그런데 무엇을?'
그때였다.
예상치 못했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 잘 계셨어 불신자 선생?
경박스런 늙은이의 목소리, 바로 이 의체의 제작자 '기계장치의 신'이었다.
- 긴 세월 빙빙 돌아 드디어 레벨 20이 됐군. 축하해.
딱히 축하받을 상황은 아니었다.
눈앞에 저런 괴물을 놓고 무슨 축하는 축하인가?
기계장치의 신이 상원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말했다.
- 그래 맞아. 저 격풍 놈이... 좀 너무하지. 나도 외눈 현자가 살아있는 수험자한테 지혜의 샘물을 박아 넣으면서까지 괴물을 만들어낼 줄은 몰랐어. 외눈 현자가 너 진짜 싫어하나보다. 뭐 여하튼.
빠르게 말하던 기계장치의 신이 잠시 말을 멈췄다.
- 저번에 내가 그랬지? '신화의 몸'에 새로운 기능을 넣어주겠다고. 레벨 20되면 말이야. 그런데 짜잔, 레벨 20이 됐네?
'그래서, 지금 새로운 기능을 열어준다는 건가요?'
그 말인즉슨 수복실 안에 들어가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저 괴물을 눈앞에 두고 수복실 안에 들어가라고?
- 아 물론 그건 아냐. 지금 쓸 기능은 저번에 쓴 거랑 연계되는 거기 때문에, 수복실에 들어가지 않아도 바로 쓸 수 있어. 기존에 탑재해 둔 기능들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거지. 이름하야....
기계장치의 신이 말을 멈추고는 피식 웃었다.
- 아니다. 직접 써 봐라.
파지지직 하는 잡음과 함께 기계장치의 신의 목소리가 끊겼다.
'새로운 기능을 탑재했다고?'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탈신 모듈'을 해금합니다. 이제부터 새로운 기능 '탈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강신 회로에 저장된 '태초의 대족장'의 정보를 '탈신 모듈'에 복사합니다.]
'탈신...?'
상원은 의체 관리 인터페이스를 열어보았다.
--------------
[의체 관리 시스템]
접근이 허가된 정보만 표시됩니다.
레벨 20 (0%)
...
일곱 별의 왕관 진척도: 3/7
탈신 모듈: 태초의 대족장
-----------
의체 관리 시스템의 마지막 줄에,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가 떠 있었다.
'탈신 모듈? 뭐야 이게?'
이게 무슨 기능인지, 어떻게 쓰는 건지 최소한 힌트라도 줬어야 되는 거 아닌가?
아무런 말도 없이 덜렁 새 기능만 던져 준 기계장치의 신이 야속했다.
그때 격풍이 괴성을 질렀다.
"크아아아악!"
격풍의 왼쪽 머리가 모노리스를 물어뜯자, 단단하기 그지없는 모노리스가 두부처럼 부서졌다.
상원은 두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래, 이것저것 잴 것 없다.'
강신 회로에 담겨 있는 태초의 대족장의 정보를 옮겼다는 메시지로 미루어 보아, 탈신이라는 기능은 강신 회로와는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상원은 강신회로를 쓸 때처럼 양손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양팔에서 빠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팔 안쪽의 근육이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상원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큭!"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고통이 심했다.
하지만 고통은 찰나였다.
다음 순간, 양팔에 다시 나타난 문신들이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탈신을 시작합니다.]
[탈신 대상: 태초의 대족장]
[최적화 경로에 따라 의체를 변형합니다.]
연속된 시스템 메시지에 이어 양어깨에서 피식하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증기가 빠져나갔다.
이어서 양팔이 문신을 따라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속으로 새까만 인조 근육들이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팔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빛나는 균열은 전신으로 퍼지고 있었다.
단전으로부터 강렬한 힘이 터질 듯 솟구쳤다.
그 힘을 담아, 상원은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흐아아아아아!"
하늘이 쪼개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