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격풍 (11)
카일이 광소를 흘렸다.
"끄흐흐흐흐!"
오른손에는 힘의 창 '아스트라페'가 섬광을 내뿜었고, 왼손에는 권력의 도끼 '케라우노스'가 벼락을 내뱉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양감이 가슴 속에서 솟아올랐다.
이 아스트라페와 케라우노스를 동시에 뽑아내지 않았는가?
시험 전체에서 적수를 찾기 어려운 카일 자신에게도, 아스트라페와 케라우노스는 하나하나가 한 번 사용하기조차 버거운 스킬이었다.
그런데 그 아스트라페와 케라우노스가, 카일의 양손에서 동시에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카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엇도 내 앞을 막을 수 없다.'
이 힘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박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눈앞에 있는, 그 '천둥망치'를 한 합에 무릎 꿇렸던 저놈조차도.
수험자 조상원.
카일이 지면을 박차고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면서 카일은 두 가지 스킬을 동시에 사용했다.
[스킬 '시간 정지'를 사용합니다. 반경 100미터의 시간이 50배 느리게 흐릅니다.]
[스킬 '공간 압축'을 사용합니다. 공간을 1/50 수준으로 줄입니다.]
주변의 시간이 느려지고, 놈의 모습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시간 정지와 공간 압축, 카일에게 '시공간의 세습자'라는 별명을 안겨준 스킬들이었다.
각각의 스킬을 쓸 수 있는 수험자는 좀 있었지만, 카일 만큼 능숙하게 쓸 수 있는 자는 단언컨대 없었다.
더구나 두 스킬을 동시에 쓸 수 있는 자는 카일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간 정지와 공간 압축 모두, 범위와 강도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해져 있었다.
이전에는 고작해야 20미터 정도였는데 지금은 100미터에 50배라니.
순간 머릿속에 의문이 스쳤다.
'언제 이리 강해진 거지?'
도대체 어떻게?
그 생각을 하는 순간 가슴속에서 기쁨이 솟아올랐다.
그 통에 카일이 가졌던 의문은 멀리 사라져버렸다.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예전의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난데없는 즐거움과 함께 그 생각이 멀리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수호신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없었는데?'
아니다, 뭐 이쯤은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 어떤 수험자라도 벌레처럼 짓밟아버릴 수 있는 힘이 손에 들어와 있다는 것.
실제로 방금, 지상에 강림한 외우주의 신을 벌레처럼 짓밟아버리지 않았는가?
그 천둥망치마저도 이런 힘은 손에 넣지 못했었다.
다음 목표는 저 앞의 조상원 놈이었다.
카일이 광소를 내뱉었다.
"끄하하하하!"
눈앞에 조상원이 서 있었다.
머리통과 몸통 사이에 붙어 있는 새하얀 목, 카일은 그곳을 향해 케라우노스를 휘둘렀다.
권력의 도끼 케라우노스가 공간을 가르기 시작했다.
그 어떤 스킬보다도 강한, 번개로 만들어진 양날 도끼가 무시무시한 벼락을 내뿜었다.
'이제 이놈은 끝났다.'
케라우노스의 날카로운 도끼날이 놈의 목을 치려는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케라우노스가 멈췄다.
이어서 쇠와 쇠가 부딪히는 투박한 소리가 카일의 귓전에 울렸다.
챙!
'뭐야?'
믿을 수 없다는 듯, 카일의 눈이 벌어졌다.
새하얀 검기를 머금은 나뭇가지가 케라우노스를 막고 있어서였다.
고작 새하얀 나뭇가지 하나가.
"큭!"
카일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놈을 향해 아스트라페를 던졌다.
최상급 주신의 권능이 담긴 벼락의 창이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압축된 공간을 갈랐다.
후우우웅!
어느새 아스트라페의 창날이 놈의 코끝에 있었다.
시간이 100배로 느려진 상태, 이제 저 위대한 번개의 창이 놈의 머리통에 바람구멍을 낼 것이다.
그런데 웬걸.
"!!"
카일의 눈이 벌어졌다.
놈이 머리를 살짝 움직여 아스트라페를 흘려버렸기 때문이었다.
창의 형상을 한 아스트라페의 주변으로 흐르는 황금빛 번개가 놈을 덮쳤지만, 놈은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았다는 듯 무심한 눈길로 머리를 스쳐 가는 아스트라페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카일이 침음성을 흘렸다.
"크으으으윽!"
놈이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카일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놈이 아무런 감정도 싣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놀라운가? 그 무엇도 네놈의 앞을 막을 수 없을 줄 알았을 텐데 말이야."
카일의 장기를 간단하게 파훼해버린 놈의 목소리에선 그 어떤 승리감도 만족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너무나 불쾌했다.
빠드득, 카일이 이를 갈았다.
"잘난 척하지 마!"
카일이 두 눈에서 황금색 광채를 뿜어냈다.
부글, 뱃속에서 무언가가 끓어 올랐다.
뱃속에서 물이 올라와 코를 통해 울컥 빠져나와 인중을 타고 흘렀다.
그 물이 너무 차가워서 인중이 얼어버릴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이게 뭐지?'
하지만, 순간 들었던 의문은 곧 사라져버렸다.
이어서 한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끝없는 힘이 솟아올랐기 때문이었다.
카일이 소리를 질렀다.
"어디 이것도 견딜 수 있나 보자!"
이 정도 시간을 늦춰도 놈의 발목을 잡을 수 없다면, 시간을 더 늦추면 된다.
이 정도 공간을 줄여도 놈의 움직임을 잡을 수 없다면, 공간을 더 줄이면 된다.
그럴 수 있다.
카일의 몸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솟아오르면서, 그의 옷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시간 정지'의 배율을 높입니다. 반경 50미터의 시간이 100배 느리게 흐릅니다.]
['공간 압축'의 배율을 높입니다. 공간을 1/100로 압축합니다.]
이 정도면 그 대단한 천둥망치마저도 달팽이보다 느리게 만들 수 있었다.
스킬의 효과인지, 놈의 걸음이 느려졌다.
카일이 광소를 흘리며 더욱 많은 마력을 뽑아냈다.
"끄흐흐흐!"
권력의 도끼 케라우노스가 순도 높은 마력을 머금고 길게 울었다.
오오오오오!
공간마저도 그대로 일그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 강대한 마력이 케라우노스에 실려 있었다.
"이제 끝내자."
나직이 내뱉은 카일이 놈을 향해 먹잇감을 노리는 매처럼 달려들었다.
이제 끝났다.
제아무리 잘난 놈이라도 이걸 막을 수 있을 리가-
깡!
쇳소리가 났다.
'이게 무슨 소리지?'
순간, 카일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만심이 지나치구나."
놈이 입을 놀리는 게 눈앞의 풍경이 아닌 액자 속 그림처럼 멀리 느껴졌다.
놈이 케라우노스를 가볍게, 아주 가볍게 튕겨냈다.
카일이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물러나는 찰나, 놈의 칼날이 물 흐르듯, 카일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어...?"
카일이 자기 가슴에 박힌 하얀 검기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지?'
카일의 눈을 들여다보는 놈의 눈동자 너머로 깊은 공허가 보였다.
"시공간의 세습자 카일 핸드레이크. 우라노스의 공간과, 크로노스의 시간을 이어받은 제우스의 화신. 번개의 왕은... 새하늘에 비친 그 그림자일 뿐."
놈이 중얼거렸다.
"나는 그 무엇도 믿지 않아."
뭐라는 거야...?
놈이 가지를 뽑아냈다.
카일의 가슴에선, 놀랍게도 피가 튀지 않았다.
'어?'
그 대신 고장 난 기계에서 스파크가 튀듯 상처에서 금빛 전류가 번쩍였다.
'이건 또 무슨...?'
놈이 말했다.
"몸마저 변하기 시작했군. 외눈 현자... 이런, 지독한...."
그 순간 가슴속에서 갑자기 치밀어오른 분노에 모든 생각이 날아가 버렸다.
카일이 이빨을 드러내며 짐승 같은 소리를 냈다.
"크으으으윽!"
놈이 딱하다는 눈으로 카일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 그 눈빛이 너무나도 미웠다.
"네놈이 밉다!"
카일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케라우노스를 휘둘렀다.
케라우노스가 마치 작은 태양처럼 섬광을 내뿜었다.
쾅 소리와 함께 케라우노스가 놈의 몸을 때렸다.
두 번, 세 번, 상원의 몸에 도끼를 휘두른 카일이 뒤로 훌쩍 물러나며 아스트라페를 던졌다.
그리고는 두 손에서 번개를 있는 대로 뽑아내서 놈을 향해 쏘아냈다.
"죽어!"
창의 형상도 도끼의 형상도 갖추지 않은 순수한 번개가 놈의 몸을 직격했다.
시간이 멈추고 공간이 찢어졌다.
엄청난 섬광과 함께 돌바닥이 통째로 부서지며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겼고 짙은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착지한 카일이 씩씩대며 크레이터를 쏘아보았다.
이 정도까지 했으면 분명히 쓰러져야 할 터.
하지만 먼지구름이 걷히고 나서 카일이 본 건, 크레이터 한가운데 서서 표정 없이 카일을 바라보고 있는 조상원이었다.
'이럴 리가!'
카일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끄아아아악!"
도대체 저놈이 무엇이길래,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쓰러지지 않는단 말인가?
가슴팍에서 금색 번개가 줄기줄기 쏟아져 나왔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지혜를, 받아들여라."
카일이 고개를 돌렸다.
카일의 머리가 무릎에나 겨우 닿을 것 같은, 거인이 카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대로 가리지 않은 외눈이 세상의 끝까지 꿰뚫을 것처럼 형형한 빛을 내뿜었다.
'언제부터 이 자가 여기에 있었지?'
그때 조상원이 말했다.
"외눈 현자... 새하늘의 카르마가 두렵지 않소?"
거인이 대답했다.
"두렵다. 너무나도 두려워. 그러니 그러는 것이지."
거인이 기둥 같은 창의 날로 카일의 등을 쿡 찌르며 조상원에게 말했다.
"자네, 다시는 보지 않았으면 하는군."
조상원이 거인에게 가지를 겨누며 말했다.
"흥! 당신 뜻대로는 되지 않아!"
"과연."
거인의 목소리가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깜빡 눈을 감았다 떠보니 거인은 온데간데없었다.
'꿈을 꾸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거인의 창에 찔린 등이 욱신거려서였다.
거기로부터 거대한 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하늘 최강의 수험자, 이 카일 핸드레이크마저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힘이.
카일이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끄... 아아아악!"
목이 뽑혀 나가고 양쪽 등이 찢어질 것 같았다.
무지막지한 고통에 정신이 끊어져 버리는 듯했다.
카일이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그러자 황금빛 비늘을 두른 커다란 용의 머리가 보였다.
'이게 무슨...?'
카일이 팔을 내려다보았다.
양팔 모두 거대한 용의 머리로 변해 있었다.
등이 터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거대한 날개가 돋아났고 하지에서는 긴 꼬리가 생겨났다.
드넓은 세상이 그의 발 앞에 줄어들었다.
마치 세상을 두 발 앞에 무릎 꿇린 거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모습을 더 이상, 어떻게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세 개의 머리가 탄성을 질렀다.
"오... 오오오오!"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이 카일의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 *
상원은 눈앞의 광경을 보면서 욕지거리를 뱉었다.
"이런... 젠장...."
외눈 현자가 직접 나서서 변이를 촉진시킬 줄이야.
거대한 포효가 서울역 광장을 가득 채웠다.
"오오오오오!"
주변의 마천루들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거렸다.
상원은 방금 전까지는 인간의 형상이었던, 이제는 영락없는 마물이 되어버린 카일 핸드레이크를 올려다보았다.
미친 듯 꿈틀거리는 먹구름 아래로, 황금색 비늘을 가진 거대한 삼두룡이 세상을 삼켜버릴 듯 포효하고 있었다.
상원이 중얼거렸다.
"티폰...!"
창조신이 신들을 벌하기 위해 직접 빚어낸 존재, 신들마저 두려워서 몸을 숨겨야 했던 강대한 격풍의 마물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