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격풍 (8)
새까만 마력을 머금은 비수가 보호막을 찢고 들어왔다.
주저앉은 창훈이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젠장."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죽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골처럼 새하얀 얼굴에 눈 아래 새까만 음영이 대비되었다.
숨도 쉬기 힘든 압박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창훈이 피식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련 좀 열심히 할 걸 그랬네."
'혜경이한테는 그만 좀 기대고 말이야.'
입은 웃고 있었지만 다리는 부들부들 떨렸다.
두려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죽음이 창훈을 향해 다가왔다.
"아저씨, '보이지 않는 죽음'이라면서 너무 잘 보이는 거 아니에요?"
보이지 않는 죽음의 허연 입술이 뒤틀렸다.
"끌끌. 입만 살았군."
"입만 살아있으면 말 못 해요 아저씨야."
"흐흐흐. 와일드한 척은."
보이지 않는 죽음이 창훈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가 비수 끝으로 창훈의 심장을 툭툭 두드렸다.
비수가 가슴을 두드릴 때마다 거기 박힌 '의령수의 심장'이 퉁 퉁 울렸다.
'이제 죽는다.'
그 생각을 하니 왠지 온몸이 편안해졌다.
나도 연옥에 가서 망자가 되어 이 시험을 떠돌게 되려나?
거기 은수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첫 번째 시험에서 새타니에게 죽었던, 우리 딸 은수.
'은수야, 거기 있니?'
그러면 혜경이는 어떡하지?
혼자 잘할 수 있으려나?
상원 씨가 도와주겠지?
그런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보이지 않는 죽음이 말했다.
"시험에 이렇게 오랫동안 붙어있는 사람치고는 아주 편안한 얼굴이군. 다들 억울함에 두려움에... 그렇게 일그러진 얼굴로 죽었는데, 자네는 아니야."
막 사람을 죽일 참인데 그게 무슨 말이야.
편안한 얼굴, 내가 그런 얼굴인가?
아니 그럴 리가.
이렇게 무서운데.
보이지 않는 죽음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잘 가게."
보이지 않는 죽음이 움직였다.
날카로운 비수가 가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의령수의 심장이 쨍하고 깨지면서, 보라색 불꽃이 연료가 새듯 넘실넘실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죽음이 말했다.
"오호, 자네. 재밌는 걸 가지고 있었구만."
그가 단검을 삼키듯 흘러나오는 불꽃에 손가락을 대며 말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이런 걸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군. 이제 와서 아무 쓸모 없지만."
창훈은 가슴 한복판에 박힌 단검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프지 않았다.
온몸에서 온기가 빠져나갔다.
손가락 끝 발가락 끝에서부터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춥네."
수호신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멀어졌다.
- 고생했다.
창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고마웠습니다 할머님. 그리고 재밌었어요.'
'화산정의 혐오체'는 좋은 수호신이었다.
창훈에게 무리한 일을 시킨 적도 없었고, 언제나 창훈의 의사를 존중해주었다.
재능도 독기도 없는 창훈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은인인 상원, 그리고 그녀 덕이었다.
'다음번에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눈앞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지금껏 시험에서 겪어 왔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은수... 그리고, 혜경의 얼굴이 스쳤다.
'먼저 가서 미안해 여보.'
그녀의 얼굴이 너무 생생해서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창훈은 무거워진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은 그저 허공을 스칠 뿐이었다.
창훈이 한숨을 쉬었다.
"아아."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때, 머릿속에서 예상치 못했던 목소리가 들렸다.
- 용제,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만 고작 이게 끝이군?
이 목소리... 이 목소리, 누구더라?
창훈의 기억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억의 한 구석에서 창훈은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해냈다.
'오디나스?'
- 흐흐흐흐흐.
바스칸딘 황족의 마지막 후예, 용제의 애제자, 대강령술사 오디나스의 웃음소리가 창훈의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 * *
상원은 혜경을 쫓아 지상으로 올라왔다.
서울역 광장으로 통하는 문을 지났을 때, 상원의 눈앞에 드넓은 전장이 펼쳐졌다.
상원이 중얼거렸다.
"맙소사."
상원은 시스템 메시지 함을 열어보았다.
그 중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었다.
[스물여섯 번째 시험, '성역 병합전'을 선포합니다.]
[지금부터 24시간 내, 공격자로 지정된 성역 또는 길드는 방어자로 지정된 성역 또는 길드의 성화를 꺼야 합니다.]
[24시간 내 성화를 끄면 공격자의 승리, 끄지 못하면 방어자의 승리입니다.]
[공격자가 패배할 경우 공격자의 성화가 꺼집니다.]
[시험이 끝나는 시점에서 패배한 쪽의 수험자와 물자는 모두 승리자에게 귀속됩니다.]
[길드 '올림포스'를 공격자로 지정합니다.]
[성역 '서울역'을 '올림포스'에 맞서는 방어자로 지정합니다.]
...
상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스물여섯 번째 시험에, 성역 병합전이라고?
성역 병합전은 분명 40번 시험인데?
시험이 단축되고 있었다.
15번 시험에서 상원이 오디나스를 물리친 이후, 원래대로라면 훨씬 뒤에 일어났어야 할 일들이 너무 일찍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자신이 '깊고 깊은 물'로 떠난 사이 성역 병합전이 시작됐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상대가 올림포스일 줄은.
그때 새하얀 오라에 둘러싸인 화살이 상원의 미간을 향해 날아왔다.
상원은 마검을 뽑아 화살을 쳐냈다.
챙 하는 소리가 울렸다.
화살에 담긴 강한 마력에 상원의 팔이 찡하고 울렸다.
화살 한 발에 이 정도 위력, 이건 분명 올림포스 길드원 '달의 명궁'의 화살이었다.
올림포스의 12주신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의 힘이 담긴 화살이니, 이 정도 위력은 당연했다.
올림포스, 주신급만 해도 열둘이다.
서울역이 아무리 강해도 단독으로 올림포스라는 길드에 맞서는 건 무리다.
그런데도 성역 서울역은 마냥 밀리지는 않고 있었다.
상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상중의 '깨어난 모노리스'가 반물질 레이저를 내뿜고 있었다.
이 전장 어딘가에 신우주가 있는지, 그녀의 수호신 염제 신농(炎帝 神農)의 힘을 담은 풀들이 땅에서 자라나 부상자들의 몸을 감쌌다.
'아아, 이건.'
그때 저 멀리서 우렁우렁한 함성이 들렸다.
"물러서지 마라!"
불신자라 스킬이 통하지 않는 상원도, 그 목소리를 들으니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깨어난 모노리스의 꼭대기였다.
서울역의 지휘관, 충무공의 화신, 문혁이 거기서 서울역의 수험자들에게 힘을 주고 있었다.
'문혁이 이들을 모았구나.'
그나마 문혁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상원이 자리를 비운 동안 그 자리를 조금이나마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문혁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역은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전장을 내려다보는 상원의 눈에는 그게 보였다.
문혁의 눈에도 그게 보일 것이다.
문혁은 피를 토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상원이 중얼거렸다.
'고생했습니다. 문혁 씨, 그리고 모두.'
이제 할 일을 해야 했다.
"후우."
상원은 한숨을 쉬고 나서 조용히 마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 상원이 나서야 할 차례였다.
길드 올림포스가 이대로 서울역을 잠식하게 둘 수 없었다.
그때였다.
그야말로 내장을 쏟아내는 것 같은 처절한 절규가 전장을 집어삼켰다.
"끄아아아아악!"
전장의 모든 이들이 순간 싸움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 혜경이 있었다.
격리실을 뛰쳐나가 지상으로 왔던 혜경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처절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새까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등에서는 새까만 촉수가 돋아나 스멀스멀 움직이고 있었다.
상원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그녀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상원은 고개를 돌려 혜경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았다.
그리고나서, 상원은 왜 그녀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지를 깨달았다.
새까만 옷을 입은 수험자, 하데스의 화신 '보이지 않는 죽음'이 비수를 들고 서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수험자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쓰러진 수험자의 가슴팍에서 보라색 불꽃이 피식피식 솟아올랐다.
바로 창훈이었다.
남편의 죽음을 본 혜경이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수호신 '검은 숲의 목자'를 짓누르고 있던 '화산정의 혐오체'의 힘도 약해졌다.
검은 숲의 목자가 제힘을 되찾기엔 이만큼 좋은 기회도 없었다.
심지어 이 땅에 찌꺼기만 남은 채로 그 오랜 시간을 억눌려 있었으니, 그 반발력은 어떠하겠는가?
상원이 소리쳤다.
"안돼!"
'지하의 수호자'가 했던 말이 상원의 뇌리를 스쳤다.
상원의 곁에 있는 외신이 힘을 되찾고 있다는 말.
그게 상원에게 크나큰 위협이 될 거라는 말.
"이런...!"
상원이 혜경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그림자에서 새까만 촉수들이 꾸물꾸물 솟아오르고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들이 촘촘히 솟아 있는 촉수들.
'아 저 촉수들....'
상원은 그 촉수를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해냈다.
바로 새하늘의 바깥에서 보았던 '청소부'들의 것과 같은 촉수였다.
꾸물거리는 촉수들이 혜경을 감싸 갔다.
그녀의 눈, 코, 입, 귀에서 새까만 물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새까만 촉수가 그녀의 입속으로 파고 들어간 통에 그녀의 절규가 그쳤다.
모두들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수험자들은 곧 그녀에게서 신경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앞에 적이 있었으니까.
다시 수험자들의 함성과 절규가 전장을 뒤엎었다.
"으아아아아!"
"아아아아악!"
상원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창훈은 아직 완전히 죽은 게 아니다.
조금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반면 혜경 쪽은 급했다.
지금 그녀를 제압하지 못하면, 그녀는 상원이 억누를 수 있는 상태를 벗어나게 된다.
화산정의 혐오체가 상원을 도와줄 수 없으니, 검은 숲의 목자가 힘을 더 찾기 전에 그녀를 억눌러야 했다.
상원이 소리를 질렀다.
"혜경 씨!"
그녀에게 달려가려는 찰나, 갑자기 무언가가 다리를 덮치는 통에 상원은 볼썽사납게 쓰러졌다.
그건 다름 아닌 바닷물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짠물이 상원의 코와 입속으로 들어왔다.
"큽!"
중심을 잡고 일어선 상원이 바닷물을 뱉어냈다.
그때 누군가 상원을 불렀다.
"수험자 조상원!"
상원이 얼굴을 닦아내고 앞을 보았다.
근육질 몸을 새파란 토가로 감싼 거한이 상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주신 포세이돈의 화신 '대해를 달리는 말'이었다.
그가 상원에게 트라이던트를 겨누고 소리쳤다.
"네 상대는 나다! 내 창을 받아라!"
올림포스의 2인자, 대해를 달리는 말.
카일 핸드레이크와도 겨룰 수 있는 괴물이었다.
상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놈한테 낭비할 시간이 없는데...!'
아니다, 급할수록 침착하게.
상원이 두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그래."
바위에 박힌 검이 새하얀 검기를 내뿜었다.
"소원이라면."
상원의 두 다리가 지면을 박찼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