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격풍 (7)
커다란 쇳덩이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쩔컹 쩔컹
상원은 눈을 떴다.
높고 어두운 천장이 눈에 들어왔고, 방 위를 채운 어둠 아래로 작은 불티들이 떠돌고 있었다.
달궈진 쇳덩이가 풍기는 냄새가 코를 채웠다.
'맞게 왔군.'
차원문을 열었던 그곳, 서울역의 지하층이었다.
상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언가가 어색했다.
'뭐지?'
잠깐 정신을 집중하자, 상원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너무 조용했다.
쉴 새 없이 조잘대는 드워프들이 모조리 입을 닫아버렸는지, 어떤 말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나 드워프의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그때였다.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용사님?"
상원은 뒤를 돌아보았다.
서울역의 위대한 대장장이, 에론 클라드가 울먹이며 상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흘렀다.
"돌아오셨군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상원이 돌아온 게 그렇게 감동적인 일일까?
그게 아니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두 눈에 공포가 어른거렸다.
'무슨 일이지?'
상원은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가 살짝 무릎을 굽히고 그녀를 안았다.
에론의 조그만 몸이 상원의 너른 품에 쏙 들어왔다.
상원은 에론을 안고 조용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습니다. 에론... 괜찮습니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그녀가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용사님... 용사님, 왜 이제... 왜 이렇게 늦게...."
울면서 하는 그녀의 말은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그녀가 자신의 늦은 귀환을 탓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상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에론. 늦었습니다."
그렇게 한참 울고 나서, 에론은 가만히 상원을 밀어냈다.
"죄송해요. 용사님도 가서 엄청 힘드셨을 텐데."
"아니에요."
부드럽게 대답한 상원이 에론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그게... 샤믹이랑... 혜경 씨가...."
우물쭈물하던 에론이 휙 돌아서서 상원의 손을 잡아끌었다.
"직접... 직접 보시죠 용사님."
상원은 종종걸음을 걷는 에론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녀는 상원을 지하의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내려갈수록 온기는 적어졌고 조명은 어두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닿은 곳은, 상원이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방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드워프의 기술로 만들어졌다는 걸 알 수 있는 견고한 벽이 사방을 막고 있었다.
"여기는?"
"격리실이에요."
쉰 목소리로 대답한 에론이 손가락을 뻗어 격리실을 가리켰다.
"직접 보셔요."
'격리실?'
이렇게 깊은 지하에, 저렇게 견고한 벽까지 만들어서 격리해야 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상원의 생각이 불현듯 샤믹에게 닿았다.
"설마...."
상원은 얼른 격리실 앞으로 달려갔다.
쉽게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만들어진 일방 거울을 통해 방 안의 모습이 보였다.
상원은 자기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이런 젠장...!"
방 안의 모습은 끔찍했다.
집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좁은 방, 벽과 바닥은 온통 균열이 가 있던 데다 선혈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수백 명이 집단학살이라도 당한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 방 한가운데 고깃덩어리가 있었다.
원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정도로 망가진 살덩어리에서 피와 내장이 줄줄 흘러나왔다.
"젠장."
상원이 까드득 이를 갈았다.
그리고 방 한구석에 또 다른 형체가 보였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덩어리, 그게 웅크린 사람이라는 걸 인지하는 데는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야, 상원은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혜경 씨...?"
그제야 상황이 짐작이 갔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혜경, 말도 안 되는 양의 피, 그리고 무언가를 격리시키기 위해 만든 방.
"샤믹!"
상원이 소리를 지르며 격리실 문을 부수듯 열고 들어가 방 가운데로 달려갔다.
방 한가운데 널브러진 고깃덩어리는 분명 인간에 가까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다만 칼에 수천수만 번이나 찔린 듯 벌집이 되어 있을 뿐.
이건 분명 혜경의 묵영도에 당한 상처였다.
분명 샤믹은 묵영도에 수십 번도 더 당했을 것이다.
또한, 그럴 때마다 가라앉은 거인의 힘으로 몸을 재생했겠지.
지금도 벌써 찔린 상처들이 아무는 게 보였다.
하지만 가라앉은 거인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 정도 부상을 금방 이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후우."
한숨을 내쉰 상원은 이번엔 혜경에게 다가갔다.
피와 배설물의 냄새가 뒤섞인 악취가 훅 풍겨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워낙 오랫동안 맡았던 냄새였으니까.
혜경은 두 무릎을 모은 채로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덜덜 떨렸다.
혜경 앞에 쭈그려 앉아, 상원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혜경 씨."
어깨의 떨림이 멎었다.
그리고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두 눈을 치켜뜨고 상원을 올려다보았다.
침을 줄줄 흘리며 상원을 쏘아보는 그녀의 두 눈이 완전히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이빨이 날카로웠다.
''지하의 수호자'의 말대로군.'
그녀의 말대로, '검은 숲의 목자'가 점점 혜경을 잠식해가고 있었다.
지금 그의 힘은 화산정의 혐오체에게 당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커져 있었다.
놈이 풍겨대는 기운에 상원의 온몸에 찌릿거렸다.
그녀가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불신자...."
상원이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오랜만이다. '검은 숲의 목자'."
이어서 그녀가 뭐라고 중얼중얼거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말은 알아들을 수는 있었지만 어떤 뜻도 담겨 있지 않았다.
상원이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녀가 완전히 미쳐버린 것도, 그 통에 검은 숲의 목자가 다시 힘을 찾게 된 것도, 혜경이 샤믹과 계속해서 싸우는 통에 묵영도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 부작용이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창훈씨를 붙여 둔 건데.... 창훈 씨는 어디로 간 거지?'
그때 상원의 등 뒤에서 무언가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르르릉...."
마치 좀비가 으르렁대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본 상원은 헛숨을 들이쉬었다.
"헛...."
샤믹이 비틀비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까지 벌집에 가까웠는데, 지금은 자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해원향의 갓과 비슷한 새파란 비늘이 그녀의 몸을 거의 뒤덮고 있었다.
등 뒤로는 커다란 꼬리가 꿈틀거렸다.
괴물이 되어버린 흑천교도들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저 사람이 바로 얼마 전 상원의 가슴을 안고 울었던 그 사람이 맞단 말인가?
상원이 중얼거렸다.
"샤믹...."
상원을 알아보지 못하는 듯, 샤믹이 손톱을 세우고 쉿쉿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새빨간 혀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이어서 또, 상원의 등 뒤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으으윽...."
혜경이었다.
이렇게 둘 모두 제정신을 잃어버린 채로 서로 바닥을 향해 치닫는 싸움을 계속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좀 더 일찍 정신을 차렸어야 됐는데.'
생명나무 제전에서 돌아온 이후의 방황이 조금만 더 짧았더라면 일이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중요한 건 앞으로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상원은 지갑에서 '뱀이 훔친 불로초'를 꺼내 손에 쥐었다.
단단한 과일이 상원의 손안에 딱 맞게 잡혔다.
샤믹이 상원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뱀 소리를 냈다.
"샤아아아악!"
뒤에서는 혜경이 비척거리며 일어서는 게 느껴졌다.
"그으으으윽...."
둘의 상태를 본 상원은 알 수 있었다.
이 상태로 둘이 또 부딪혔다가는 돌이킬 수 없어진다.
샤믹이 완전히 괴물이 돼버리든, 혜경이 완전히 검은 숲의 목자에게 먹혀버리든.
그 전에 조치를 취해야 했다.
태성이 완전한 약을 만들기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불완전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상원은 샤믹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샤믹이 손톱을 길게 뽑아내고 상원을 경계했다.
팔을 뻗으면 샤믹에게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 샤믹이 아가리를 벌리고 상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싸우는 법을 모두 잊어버렸는지 짐승에 가까워진 그녀의 몸짓을 피하는 건 쉬웠다.
가볍게 옆으로 몸을 날린 상원은 다리를 걸어 샤믹을 넘어뜨렸다.
샤믹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상원은 재빠르게 그녀의 뒤에 올라탔다.
샤믹이 성난 황소처럼 소리를 지르며 발광했다.
"샤아아아악!'
'먹어라.'
상원은 샤믹의 입에 '뱀이 훔친 불로초'를 쑤셔 넣었다.
몸이 뱀처럼 변했기 때문인지 그녀의 턱이 유연하게 벌어진 덕에 입속에 어렵지 않게 열매를 움켜쥔 손을 집어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샤믹이 손을 씹기 전에 재빨리 손을 빼냈다.
커다란 열매를 그대로 집어삼켜서 기도가 막힌 탓인지 샤믹이 목을 붙잡고 켁켁대는 소리를 냈다.
그 정도는 상관없다.
삼킨 열매는 몸속으로 녹아 들어갈 테니까.
그러면 열매가 해원향의 기를 누르기 시작할 것이다.
샤믹의 옆에 앉은 상원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우."
그때였다.
말 그대로 성대를 쥐어뜯는 것 같은 괴성이 들렸다.
"끄아아아악!"
흠칫 놀란 상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혜경이 소리를 지르며 쓰러질 듯 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어서 혜경이 격리실의 문을 들이받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혜경이 소리를 지르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갑자기 어딜 저렇게 가는 거지?'
혜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상원의 생각이 불길한 곳에 닿았다.
"설마... 지상?"
검은 숲의 목자가 힘을 키우고 있다는 지하의 수호자의 말이 다시금 스쳐 갔다.
어디로 간 거지?
설마, 창훈을 향해서?
"젠장!"
상원은 사라진 혜경의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 * *
보호막이 거세게 흔들렸다.
보호막을 따라 전해진 충격에 창훈은 왈칵 선지피를 쏟았다.
"커헉!"
'단검 한 자루로 이 정도 충격이라고?'
다시 생각해봐도 말도 되지 않는 위력이었다.
한 기 한 기가 4등급은 되는 것 같은 용아병들을 수십 기나 부리는 데다 시야를 차단하는 디버프까지 쓰더니, 본체의 힘이 이 정도라고?
과연 대길드 '올림포스'의 3인자, 주신 '명계의 아버지'의 화신다운 힘이었다.
그자가 상대라는 게 창훈에겐 지독하게 불행한 일이었다.
'젠장, 이거 반칙 아냐?'
- 조심해라!
머릿속에 수호신의 음성이 울렸다.
"흡!"
창훈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새까만 비수를 쥔 손이 방금 전까지 창훈이 서 있던 그 자리를 찌르고 있었다.
칼끝은 틀림없이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다간 비명횡사했겠군.'
문제는 보호막이 뚫리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마력 보호막은 한 번 뚫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 정신 차려! 끝나지 않았어!
"으악! 젠장!"
창훈은 이리저리 몸을 날려 비수를 피했다.
마력 보호막은 종이 쪼가리마냥 갈가리 찢어지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