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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68화 (168/230)

제168화. 격풍 (6)

놈이 고장 난 기계 같은 소리를 냈다.

"끄으으으윽...."

5미터는 훌쩍 넘는 거구가 쿵 하고 무릎을 꿇자 금속질로 된 방바닥이 웅 하고 울렸다.

이어서 놈이 바닥을 향해 철퍼덕 쓰러졌다.

상원은 뒤로 몸을 날렸다.

가만히 서 있었다간 저 무거운 몸체에 깔려 빈대떡이 돼버렸을 것이다.

몸이 눈을 까뒤집고 부들부들 떨면서 체액을 계속 쏟아냈다.

무언가 타는 냄새와 함께 놈의 뒤통수에서 새까만 연기가 피어올랐다.

놈이 그러는 이유가 짐작이 됐다.

''타나스'를 버티지 못한 거군.'

눈앞에 있는 '우주 미노타우로스'는 타우 은하의 병기로서 '타나스'의 단말기 중 하나였다.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힘과 단단한 겉껍질 덕에 5등급이라는 고급 마물로 시험에 편입됐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잘난 5급 마물이라 해도 타나스를 통째로 담아낼 만큼 성능 좋은 기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우주 미노타우로스는 타나스가 '지나치게 많이' 강림한 여파로 고장 나버린 것이었다.

상원은 인상을 찌푸리고 침음성을 흘렸다.

"끙...."

최근 들어 상원이 알지 못하는 일이 너무 많이 발생하고 있었다.

타나스와의 만남도 그랬다.

상원이 아는 타나스는 해원향이나 오디나스와는 달랐다.

오디나스와 해원향은 처음에는 의사소통도 되고 수험자들을 마냥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반면 타우 은하의 실험체들과 생체 병기들을 관리하는 네트워크 타나스는 수험자를 무차별 공격하는 행동 외 패턴은 보이지 않는, 전술 행동을 할 줄 안다는 걸 제외하면 지성 없는 마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적어도 전생에서 만난 타나스는 그랬다.

그랬는데, 26번 시험 전에 만난 타나스는 상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상원은 타나스가 남긴 말을 곱씹었다.

'나무의 열매를 구하러 오는 자가 환란으로부터 우주를 구해줄 것이다.'

노트와 경전 그 어디에도 그런 문장은 없었다.

해원향이나 오디나스가 받은 계시는 모두 노트에 쓰여 있었고, 그게 시험을 풀어나가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되었다.

하지만 타나스의 자료는 달랐다.

상원은 머리를 굴렸다.

'지금 저 말... 미리 알았어도 시험을 풀어나가는 덴 아무런 쓸모가 없었을 거다.'

노트 어디에도 타나스 구출과 연계된 퀘스트나 아이템 같은 건 없었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노트가 그걸 빼먹었거나, 아니면 애초에 그런 퀘스트 자체가 존재하지 않거나.

상원은 후자에 무게를 두었다.

왜냐하면, 상원은 지금까지 그 노트에 존재하지 않는 퀘스트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

'일곱 별의 왕관'까지 세세히 서술돼있는 노트에 빠진 게 있을 리 없으니까.

그렇다면 이런 가설도 세워볼 수 있다.

타나스는 원래 30번대 후반에 가서야 시험의 상대방으로 등장하도록 세팅되어 있다.

그러니까 지금 만난 타나스는 아직 시험의 시스템에 완전히 종속되지는 않는 존재인 것이다.

'애매하기 짝이 없군.'

그래도 소기의 성과는 있었다.

노트에 적혀 있지 않는 예언적 정보를 발견한 것.

이 시험에 균열을 낼 실마리는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은 서울역의 일을 해결하자.'

상원은 뒤를 돌아 연구실 문을 열었다.

앞을 가로막는 데몬즈 헤드들은 '요새 수호자의 시선'으로 모조리 쓸어버릴 심산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문 너머에 있던 데몬즈 헤드들이 꼬리를 보이며 사라지고 있는 게 아닌가?

'아, 타나스가 저것도 치워준 건가?'

그런 것 같군.

상원은 복도를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나가는 길은 온 길만큼 복잡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곧 상원의 눈앞에 연구선의 출구, 그리고 해변을 둘러싼 짙은 안개가 보였다.

상원은 안개 속으로 몸을 던졌다.

* * *

축축한 안개가 폐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불쾌한 느낌에 기침이 절로 나왔다.

"쿨럭, 쿨럭."

발밑의 자갈이 쩔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때였다.

상원의 발소리가 아닌 이질적인 발소리가 들렸다.

옆에 누군가 있었다.

무언가 기다란 것들이 톡톡 자갈을 두드리는 소리가 연속해서 들려왔다.

분명 사람의 발걸음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마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느껴지는 기운이 친숙했다.

곧 상원은 옆에 있는 게 누군지 알아차렸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금방 다시 만나는군."

상원의 옆에서 걷던 엘가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말이야. 잘 있었나?"

상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본 사람한테, 잘 있었냐는 말이 나오나?"

엘가가 반문했다.

"그런 거?"

"아니다. 너는 듣지 않는 편이 나을 거야."

새하늘의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그걸 들으면 시험 안의 존재인 엘가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엘가가 말했다.

"그래, 그렇겠지."

상원을 조금 앞질러 걸어간 엘가가 상원의 앞을 막았다.

상원은 엘가를 올려다보았다.

안개 속에서 자기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이 미묘했다.

엘가가 궁둥이를 내밀며 말했다.

"인간의 걸음을 맞추는 건 답답해서 못 해 먹겠군. 타라."

"그래, 사양 않지. 고맙다."

상원은 피식 웃고서 엘가의 궁둥이 위에 올라탔다.

꺼끌꺼끌한 터럭의 느낌은 이제는 그리 낯설지 않았다.

엘가의 여섯 다리가 자갈 위를 디디는 느낌이 생각보다 퍽 안정적이었다.

엘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걸 보니 기운을 다 차린 것 같구나. 아무것도 못 하고 무너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나한텐 지켜야 할 것들이 있어."

상원의 머릿속에 서울역의 수험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들이 아니었다면 상원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엘가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새하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봤는데도 그런 생각이 들던가?"

"오히려... 새하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봐서, 지킬 게 생긴 거지."

그걸 과연 지켜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노트에 나와 있지 않은 것들도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상원은 그 말을 입속에서 굴려보았다.

노트 바깥에 있는 것들.

상원이 할 건 그것이었다.

이제 상원은 모르는 길을 가야 했다.

그게 참 마음이 무거웠다.

어쨌든.

"그런데 엘가, 당신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분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엘가가 말하는 그분이란 엘가를 보살핀 주인, 마신 '지하의 수호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뭐지?"

"불신자, 너는 '외신'에 대해 알고 있나?"

외신(外神).

모를 리가 있나?

혜경의 수호신 '검은 숲의 목자'를 위시한, 새하늘의 경계에 걸쳐 사는 족속들.

하늘에는 있으나 주신, 신령, 영령이라는 새하늘의 질서로는 묶이지 않는 존재들.

"그래. 잘 알고 있지. 새하늘의 가장자리에 존재하는 자들 아니냐?"

"음."

엘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 외신의 목록도 알고 있나?"

상원이 피식 웃었다.

외신이라면, 그 목록은 물론이요 특징까지 줄줄이 읊을 수 있었다.

하늘방에 있는 동안 가장 치열하게 공부했던 대상이 다름 아닌 외신들이었으니까.

누나에게 깃들 '검은 숲의 목자'를 이용해서 다 같이 시험에 오르는 게 새하늘교의 작전이었는데 모를 리가 있나.

상원은 숨도 쉬지 않고 그 긴 외신들의 이름을 줄줄 읊었다.

그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엘가가, 상원이 말을 마치자 입을 열었다.

"그중의 하나가 니 곁에 있지."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숲의 목자."

"그렇다."

본래 누나의 몸에 받을 예정이었던 최강급의 외신.

지금은 송혜경의 몸속에 깃들어있는, 하필이면 그 남편의 몸에 숙명의 상대인 '화산정의 혐오체'가 들어가는 바람에 찌꺼기만 남아 있는 존재.

"그런데 그 얘기를 갑자기 왜 하는 거지?"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고."

"뭐?"

"곧 그것이 폭주할지도 모른다."

"그럴 리가."

검은 숲의 목자의 숙명의 상대, 화산정의 혐오체의 화신인 한창훈이 송혜경의 곁에 붙어 있다.

한창훈이 있는 한 검은 숲의 목자가 폭주할 일은 없다.

그런데 폭주할지도 모른다고?

검은 숲의 목자가 폭주할지도 모른다는 것 외에도 궁금한 것이 있었다.

"잠깐만."

상원의 말에 엘가가 뒤를 돌아보았다.

안개 속에서도 그녀의 오똑한 콧날은 도드라졌다.

"검은 숲의 목자가 폭주할지도 모른다는 거, 지하의 수호자가 어떻게 그걸 아는 거냐?"

그 말에 엘가가 피식 웃었다.

"불신자, 역시 너도 모르는구나."

상원이 눈썹을 꿈틀했다.

또 뭘 모른다는 거지?

"아까 니가 읊었던 그 이름들... 그중에는 그분의 이름이 없군."

"무슨 말이냐?"

엘가의 고운 입꼬리가 솟았다.

"너도, 그분께서 외신의 일원이라는 걸 모르는구나."

"뭐...?"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하의 수호자가 외신이라고?'

"지하의 수호자는 새하늘 바깥에 있는 마신 아닌가? 그런데 외신이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엘가가 대답했다.

"외신이 새하늘 안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새하늘의 안과 밖에 걸쳐 있으니까 외신인 거다. 그분은 새하늘에 발을 걸치고 있지 않으시지만."

상원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 상원이 아는 모든 외신은 새하늘에 기거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것들이 외신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새하늘의 경계에 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지, 그것들 중 새하늘 바깥의 존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심지어 그중 하나가 그 유명한 '지하의 수호자'이리라고는.

엘가가 덧붙였다.

"그분께서는 동족들의 준동에 대해서는 특별히 더 잘 아시는 것이다."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상원은 앞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엘가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새까만 뒤통수가 흔들렸다.

지하의 수호자가 상원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완전히 수호자의 종복이 된 엘가가 그 주인의 이름을 팔면서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다.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그것을 거짓이라 여길 이유가 없었다.

상원이 중얼거렸다.

"요새 들어 충격적인 말을 너무 많이 듣는군."

엘가가 피식 웃었다.

"너니까 견딜 수 있는 거다 불신자."

"최근에 그 말을 아주 비슷하게 한 사람이 있었는데 말이야."

"그랬나?"

한동안 엘가가 자갈을 디디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생각을 정리한 상원이 물었다.

"그래서, 그걸 나한테 전하는 이유는 무어냐?"

"먼저 알아야 해서다. 그것이 폭주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해."

엘가가 우뚝 멈춰 섰다.

그녀의 앞으로 새파란 차원문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서울역과 이어진 차원문이었다.

엘가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걸 대비하지 않고 여기 들어갔다간, 너는 죽을 수도 있었다."

상원이 침을 꿀꺽 삼켰다.

차원문 건너편, 서울역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상원은 엘가의 궁둥이에서 내렸다.

차원문으로 향하면서, 상원은 엘가를 향해 말했다.

"고맙다. 그 말을 전하러 이 먼 곳을 와 줘서. 네 주인에게도 고맙다고 전해 다오."

엘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해라."

"그래."

상원은 차원문을 향해 발을 디뎠다.

곧 서울역 지하의 뜨거운 공기가 상원을 향해 훅 풍겨 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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