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격풍 (5)
놈의 몸속을 따라 흐르던 독액이 표면으로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화염 속성을 띠기 시작한 독액이 몸을 안에서부터 태운 탓에 놈의 피부가 역한 냄새를 내며 매캐한 연기를 뿜었다.
놈이 체액을 뱉어내며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냈다.
"끄으으으윽...."
놈의 몸 끝에서부터 시뻘건 불이 붙기 시작했다.
타닥타닥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거구가 잿더미가 되어가고 있었다.
전류가 몸속을 헤집어놓은 탓에 움직이지도 못하는 채로, 놈은 그렇게 산채로 구워졌다.
상원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돌아섰다.
"돌아와라."
상원이 무심히 말하며 왼팔을 뻗자 박피 단검이 쉿쉿거리는 뱀 소리와 함께 날아와 상원의 손에 들어왔다.
등 뒤로 식물 더미가 타오르는 소리가 계속됐다.
새까만 연기는 천장의 채광창을 통해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제 '뱀이 훔친 불로초'를 채취할 차례였다.
상원은 천천히 방 가운데의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상원의 키보다 조금 큰, 연두색 이파리를 피워낸 어린나무.
이것이 바로 타우 사람들의 생명공학의 정수, '뱀이 훔친 불로초'의 나무였다.
그리고 이 나무가 키워낸 열매가, '뱀이 훔친 불로초'라는 아이템으로 승천 시험의 시스템에 흡수되었다.
상원은 가지 사이로 손을 뻗어 주먹보다 조금 큰 열매 하나를 땄다.
껍질이 새빨갛고 윤기가 흐르는, 토마토와 사과를 적당히 섞어놓은 것 같이 생긴 열매였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귀물 '뱀이 훔친 불로초'를 얻었습니다.]
상원은 열매를 내려다보았다.
열매의 매끈한 표면에 상원의 초췌한 얼굴이 비쳐 보였다.
그리고는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버린 뱀을 돌아보고는, 자연광이 들어오는 천장의 채광창을 올려다보았다.
이 나무를 기르기 위해 타우 사람들은 갖은 고생을 했다.
우주 연구선 '길가메시 호'를 만들어내면서까지, 타우 사람들은 이 열매를 얻고자 했다.
마침내 타우 사람들은 열매를 얻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타우 사람들에겐 안타깝게도, 그들이 고생해서 키워낸 열매의 책정 등급은 그렇게 높지 않았다.
고작해야 귀물급.
이 열매가 장수와 노화 방지에 탁월한 효험이 있는 만능 식품인 건 사실이었지만, 시험에는 달여 먹는 걸로도 치명적인 부상을 순식간에 낫게 해주는 아이템이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타우 사람들이 역사를 쌓으며 일궈낸 기술의 정수는 그렇게 한순간 부정당했다.
시험이란 그런 것이었다.
승천 시험 내에서 '뱀이 훔친 불로초'가 가진 위치란, 얻기는 더럽게 힘들지만 얻어 봐야 별 쓸모는 없는 귀물급 아이템일 뿐이었다.
심지어 수많은 수험자들이 그 존재와, 그것이 위치한 이 '깊고 깊은 물'이라는 곳조차도 알지 못했다.
'어쨌든.'
상원은 열매를 브라이싱크론 지갑에 집어넣었다.
그때였다.
위잉 위잉
갑자기 요란한 경고음과 함께 새빨간 비상등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상원은 흠칫 놀라며 마검을 뽑아 들었다.
"이건 뭐야?"
노트에 적힌 내용은 ''뱀이 훔친 불로초'를 얻고 온 길을 빠져나가면 된다.'고 적혀 있을 뿐이었다.
이런 장치가 작동할 거란 이야기는 적혀 있지 않았다.
'침착하자.'
상원은 심호흡을 했다.
노트에 적혀 있지 않은 상황을 맞은 게 처음은 아니었다.
시험의 진행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건이라면 반드시 노트에 적혀 있었을 것이다.
상원이 모르는 사건이라면 시험의 진행에 영향이 크지 않다는 뜻이었다.
이어서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상원이 들어왔던 문의 반대편에 있는 커다란 여닫이문이 찌그러졌다.
마치 커다란 마물이 억지로 문을 열려고 시도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이건 심상치 않은데?'
상원은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고 문을 노려보았다.
쩍
다시 한번 문이 찌그러지며 문 사이로 커다랗고 새까만 손가락이 쑥 들어왔다.
상원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응?"
저 손가락, 상원도 익히 알고 있었다.
어찌 저 손가락을 잊겠는가?
그건 5급 마물 '우주 미노타우로스'의 손가락이었다.
여닫이문의 벌어진 틈 사이로 손가락들이 우수수 들어오더니 억지로 문을 밀어젖히기 시작했다.
끼긱끼긱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철문이 쇠가 타는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벌어졌다.
그 사이로 높이가 5미터는 훌쩍 넘을 듯한 커다란 문을 가득 채우고, 거구의 마물이 문을 비집고 들어섰다.
소처럼 생긴 머리에 커다란 근육질 인간의 몸을 한, 딱정벌레같이 윤기 나는 껍데기로 몸을 잔뜩 감싼 괴물.
정말로 5급 마물 '우주 미노타우로스'였다.
놈이 낮은 소리를 냈다.
"우우우우."
"큭...!"
'도대체 여기서 왜 저놈이 갑자기?'
50번 시험까지 돌아본 몸, 거기다 '신화의 몸'을 얻은 덕택에 여느 수험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게 강한 상원에게도 5급은 부담스런 상대였다.
상원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빠르게 굴러갔다.
지금 여기서 굳이 저놈을 상대해야 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여기 온 목적인 '뱀이 훔친 불로초'는 얻은 상태였다.
그리고 세 번째 별까지 얻은 마당에 여기서 저놈을 굳이 굳이 상대해서 해치우는 건 위업이라 할 만한 일도 아니다.
감수해야 할 위험은 높았지만 그 이득은 턱없이 초라했다.
'그래, 가자.'
상원은 여차하면 돌아서서 전력으로 달릴 채비를 하면서 천천히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우주 미노타우로스가 상원을 내려다보며 우뚝 멈춰 섰다.
이어서 놈이 말했다.
"왔군...."
'말했다? 우주 미노타우로스가 말을 했어?'
그러고 보니 아까 '데몬즈 헤드'도 마찬가지였다.
'이놈들이 원래 말을 할 줄 알았나?'
그럴 리가.
전생에서 만났던 놈들 모두 말을 할 줄 몰랐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상원은 마검을 양손에 쥐고 놈에게 물었다.
"말을 한 게 너냐?"
우주 미노타우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 말을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말까지 할 줄 안다.
'특수 개체 같은 건가?'
금강족의 대주술사 '뮈노 메드냅'처럼, 동족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노트에 그 존재가 없을 리가 없는데?
놈이 말했다.
"나... 는, 타나스."
쓰지 않았던 근육을 억지로 움직이는 듯 발음은 뭉개졌지만 뜻은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 담긴 의미를, 상원은 믿을 수 없었다.
'뭐?'
상원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놈을 올려 보았다.
"타나스라면, 그 네트워크 타나스?"
"그렇... 다."
타나스가 무엇인가?
시험이 시작되고 새하늘 아버지의 통제에 들어가서 타우인들을 공격한, 타우의 마물들을 관리하는 네트워크 인공지능 아닌가?
전생에서 시험 후반부에 놈을 직접 상대했었기 때문에, 상원은 놈의 살벌함과 잔혹함을 뼛속 깊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놈이, 말을 걸었다?
"니가 타나스라고?"
"그렇다. 이 몸은... 나의 수많은 몸들 중 하나이다."
'타나스가 관리하는 수많은 마물들 중 하나에 빙의했다는 뜻이군.'
앞뒤 정황을 맞춰 보니 저놈, 정확히는 저 몸을 통해 상원과 대화하는 상대방은 타나스가 맞는 것 같았다.
놈이 말을 이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왜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상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 도움? 무슨 소리냐?"
"나를, 도와다오. 날 짓누르는 저 존재... 에게서... 해방될 수 있게."
'새하늘 아버지를 얘기하는 거군.'
네트워크 타나스는 새하늘 시험이 시작되고 나서 새하늘 아버지에게 잠식되었다.
타나스는 스스로 사고할 줄 알기에, 자신과 '새하늘 아버지'를 별개의 존재로 인식할 개연성은 충분했다.
그런데 그 타나스가, 자신의 '해방'을 얘기할 자아까지 있는 존재였나?
노트엔 거기까지 쓰여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놈에게 도움을 주는 게 이득이 될까?
그걸 판단하려면, 놈을 돕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대가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들어야 했다.
한 우주의 마물을 관리하는 네트워크의 부탁이라면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들어볼 용의는 있었다.
"내가 뭘 도와줄 수 있지?"
"모른다."
"뭐?"
놈이 말을 계속했다.
놈이 몸에 점점 익숙해져 가는지, 말이 점점 분명해졌다.
"모른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건, 이 나무의 열매를 얻으러 온 자가 나를 도와줄 거라는 것뿐이다."
상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나무의 열매, 그러니까 '뱀이 훔친 불로초'를 얻으러 온 자가 자기를 도와줄 거라고?
전생에 누군가 그걸 얻어서 저놈을 도와줬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 애초에 이걸 얻으러 여기까지 올 사람이 없었겠지.
누가 고작 귀물 하나를 얻겠다고 그 비싼 재료들을 조합해서 마물이 득시글거리는 이계의 행성까지 오는 고생을 했겠는가?
잠깐만.
"그걸 어떻게 '알지'?"
"내가 학습했던 수많은 자료들 중 그런 내용이 있었다. 나무의 열매를 얻으러 오는 자가 환란으로부터 우주를 구해줄 거라고."
'뭐 그런 자료가 있지? 아... 설마.'
설마.
상원이 물었다.
"그거 혹시... 너희 우주의 경전 같은 데 있는 내용이냐?"
놈이 반응을 멈췄다.
한동안 놈은 폭주하는 기관차같이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며 서 있을 뿐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거대한 가슴팍이 올라왔다 내려가길 반복했다.
상원은 놈의 눈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마침내 놈이 말했다.
"출처로 추측되는 자료를 찾았다. 정확하게 경전은 아니지만... 비슷하다."
미치겠군.
경전을 믿는 인공지능이라니.
내친김에 상원은 질문을 계속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경전 혹시 이름이 '승천계시록'이냐?"
이번에는 대답이 즉각 돌아왔다.
"모른다."
'아니라고는 하지 않는군.'
그래도,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었다.
시험 도중 벌어질 일이 기록된 문서가 '승천계시록'과 노트 말고도 또 있었다니.
심지어 시험 후반부의 메인 빌런 중 하나가 그 내용을 알고 있다니.
'흥미롭군.'
그 자료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승천계시록과 노트의 기원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상원의 눈에 나무가 들어왔다.
'뱀이 훔친 불로초'를 피워낸 나무.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지금도 서울역의 수험자들이 애타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은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전생의 진행이 비춰 보면, 타나스가 메인 빌런으로 등장하는 건 30번대 후반의 얘기였다.
아직은 시간이 있었다.
"그런가."
우주 미노타우로스가 우울한 눈으로 상원을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어. 그 일을 처리하면, 돌아오겠다. 그때 니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다오."
우주 미노타우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겠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 상원이 서서히 물러났다.
일단은 이 열매를 들고 서울역에 닿는 게 먼저였다.
"기다리겠다."
이어서 우주 미노타우로스가 괴성을 질렀다.
놈의 두 눈과 콧구멍에서 찐득거리는 진액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