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격풍 (2)
또 한 번의 발작이 끝났다.
샤믹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고, 혜경은 방구석에서 뭐라고 중얼대며 버르적거리고 있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창훈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흘러내린 땀으로 온몸이 축축했다.
그때였다.
격리실을 포함해 서울역 지하가 우르르 흔들렸다.
천장에서 후드득 흙먼지가 떨어졌다.
창훈은 머리 위로 쏟아진 흙먼지를 털었다.
"지진인가?"
그리고 창훈은 몹시 이질적인 기운을 느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불길한 마력이 이 지하까지 풍겨 오고 있었다.
기분 나쁜 전류가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조여오는 것 같았다.
동시에 창훈은 이 느낌이 처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 마력의 질감과 형태... 분명히 어디선가 겪은 적이 있다.'
창훈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이 마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올림포스의 길드장, '시공간의 세습자' 카일 핸드레이크였다.
생명나무 제전에서 상대방 수험자 다섯을 단 5분 만에 도륙 내버렸을 때, 그가 검은 전류를 뿌리며 온 경기장을 종횡무진하면서 내뿜던 마력이 바로 이 느낌이었다.
나아가 창훈은 깨달았다.
마력의 밀도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아졌다는 걸.
창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제전 끝난 지가 얼마나 됐다고, 그 단기간에 이렇게 강해질 수가 있나? 더구나 그 정도 주신 급의 강자가?'
그때 그의 머릿속에 수호신 '화산정의 혐오체'의 목소리가 들렸다.
- 조심해라.
그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 묻어 있었다.
"할머님?"
수호신이 평소에 이런 식으로 조심하라고 한 적은 없었는데.
수호신이 말을 이었다.
- 이 힘... '번개의 왕' 만의 것이 아니야.
그 말에 창훈이 고개를 기울였다.
'수호신만의 힘이 아니라고? 그럴 수가 있나?'
그때 창훈의 시선이 격리실에 닿았다.
아, 그러고 보니 저기도 수호신의 것만이 아닌 힘을 쓰는 자가 있다.
해원향의 힘까지 쓰고 있는 샤믹 프란시스코.
해원향이 모시는 흑천의 정체는 시험을 떠받치는 다섯 마신 중 하나인 '오랜 땅의 이무기'이니, 샤믹은 마신의 힘까지도 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샤믹이 그 힘으로 수험자들을 공격하고 있으니 서울역 수험자들의 입장에선 전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화산정의 혐오체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
- '지혜의 샘물'을 마신 게 틀림없어. 그걸 마셨다면 반드시 대가를 내놓아야 하거늘... 그 불쌍한 친구는 무얼 내놓았을꼬.
'지혜의 샘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이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세상의 모든 지혜가 담겨 있다는 그 샘물.
절대자 '외눈 현자'는 한쪽 눈을 바치고 그 물을 마셨다고 했다.
그 뒤로 지혜의 샘물은 외눈 현자가 관리하고 있었다.
'잠깐만, 외눈 현자?'
그렇다면 시험을 관리해야 할 절대자가 수험자 카일 핸드레이크에게 지혜의 샘물을 나눠주었다는 말인가?
'그게 가능합니까? 절대자가 샘물을 수험자에게 나눠 준다는 게.'
- 되지. 그게 외눈 현자가 할 수 있는 일들 중 하나야.
절대자는 단지 시험의 관리자일 뿐인 줄로만 알았는데.
화산정의 혐오체가 씁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 새하늘에 붙박혀 있을 땐 몰랐는데, 떨어져서 떠돌아 보니까 알겠더라고. 그래... 한 발짝 떨어져야 보이는 것들이 있는 법이지.
창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쨌든 중요한 건, 서울역을 치러 온 올림포스의 수장 카일 핸드레이크가 샘물을 마시고 잔뜩 강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창훈이 한숨을 쉬었다.
"후우... 돌아버리겠군."
창훈은 격리실로 들어가 아내 앞에 쭈그려 앉았다.
"에에... 헤헤...."
헤실헤실 웃으며 창훈을 올려다보는 혜경의 눈에 초점이 없었다.
그녀의 입가에 침이 주르륵 흘렀다.
바닥에는 졸졸 소리와 함께 웅덩이가 고였다.
창훈은 혜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혜경이 머리카락을 비비 꼬며 말했다.
"가지 마."
반쯤 쉬어버린 그녀의 목소리가 공기처럼 가벼웠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울컥 솟아올랐다.
창훈은 무릎을 꿇고 앉아 혜경을 꽉 안았다.
아내의 배설물에 옷이 다 젖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혜경이 비죽비죽 울었다.
"나... 놓고 가지 마...."
창훈이 아내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갔다 올 게 여보. 조금만 기다려."
창훈은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그때였다.
혜경이 창훈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여보...."
쥐어 짜낸 듯 정신줄을 붙잡은 것일까, 혜경의 눈이 맑아져 있었다.
"조심해."
창훈을 붙잡은 혜경의 손이 참 따뜻했다.
창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씩 웃어 보였다.
"걱정 마셔. 잘 갔다 올게."
혜경이 힘없이 웃으며 창훈의 손을 놓았다.
그 손에 아내의 온기를 남긴 채로, 창훈은 지상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 * *
창훈은 지상에 다다랐다.
그 앞에 펼쳐진 풍경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서울역의 수험자들과 올림포스의 길드원들이 한 데 뒤엉켜서 싸우고 있었다.
문혁이 싸움을 지휘했다면 필시 잘 짜여진 대오를 만들었을 텐데, 그걸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올림포스의 공세가 거센 모양이었다.
양쪽의 스킬들이 난무했고 비명과 함께 끊임없이 피가 튀었다.
서울역 한복판으로 거센 파도가 밀어닥쳐 수험자들을 집어삼켰다.
그 파도의 한복판에 장발을 휘날리는 근육질 남자가 있었다.
주신급 수험자 '대해를 달리는 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약의 수호자'가 거센 폭풍우를 일으켰고, '달의 명궁'이 달빛을 담은 화살로 서울역 수험자들의 급소를 꿰뚫었다.
그들 모두가 주신급 수험자, 하나같이 터무니없이 강했다.
그렇다고 서울역이 마냥 밀리는 건 아니었다.
신우주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자 쓰러진 수험자들 옆으로 작은 풀이 자라나더니 꿈틀꿈틀 움직여 수험자들의 상처를 치료했다.
그러자 상처가 깨끗이 나은 수험자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전투를 계속했다.
신우주, 그녀 역시도 시험 최강의 치료사 중 하나인 주신급 승천자 '최초의 수확자'의 화신이었다.
그때였다.
초록색 레이져가 굉음과 함께 광장 한가운데를 휩쓸고 지나갔다.
고오오오오
올림포스의 수험자 몇이 레이저에 맞고 그대로 가루가 돼버렸다.
레이저를 쏜 건 광장 한쪽에 떠 있는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건물 몇 층 높이에 떠올라 있는 거대한 금속질의 피라미드는 꼭대기에 초록색으로 빛나는 커다란 크리스탈을 쓰고 있었다.
강상중의 '깨어난 모노리스'였다.
그 꼭대기의 옥좌에 강상중이 앉아 모노리스를 제어했고, 그 옆에서 문혁이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문혁이 외쳤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오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 준엄한 노장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수험자 백문혁이 스킬 '지휘의 외침'을 발동하였습니다.]
[몸이 가벼워지고 결연한 의지가 샘솟습니다.]
창훈이 씩 웃으며 큰 숨을 뱉었다.
"후우."
전신을 따라 기분 좋은 긴장이 흘렀다.
좋아, 이제 싸울 차례다.
'그동안 너무 혜경이 서포트만 했지. 이제 나도 실력 발휘 좀 해 볼까.'
창훈이 팔을 벌리고 하늘을 보았다.
하늘 저 멀리로 보라색 유성이 지나갔다.
"잘 부탁드립니다 할머님."
- 오냐 이놈아.
두근
가슴 속에 들어찬 '의령수의 심장'이 사지 끝으로 마력이 담긴 불꽃을 내보냈다.
창훈은 손끝에 모인 마력을 허공에 흩뿌렸다.
[스킬 '미라 소환'을 사용합니다.]
[당신을 위해 싸울 미라 병사들을 소환합니다.]
그러자 불꽃들이 덩어리져 땅에 떨어지더니, 불꽃에서 불경한 주문이 빼곡히 적힌 보라색 붕대로 몸을 칭칭 동여맨 미라들이 기어 나왔다.
이것들은 단순한 미라가 아니었다.
최고의 강령술사라는 '화산정의 혐오체'가 비술을 통해 강화시킨 것들로, 그 능력치가 일반 미라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그런 미라의 수가 무려 50구.
그것만으로도 웬만한 성역은 가볍게 뛰어넘는 전력이었다.
창훈이 외쳤다.
"자! 우리도 가자! 우리 할머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보여드리자고!"
- 예끼 이눔이 할머님 할머님 하지 말라니까.
미라들이 음산한 울음소리를 내며 올림포스의 길드원들에게 달려들었다.
"우우우우."
미라들은 먹이의 숨통을 끊으러 달려드는 맹수처럼 기민하게 움직였다.
일반 언데드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미라들이 바람처럼 움직이자 그들이 지나간 자리로 마력이 담긴 보라색 불꽃이 남았다.
"오오오오!"
미라들이 공격할 때마다 그들의 주먹에서 보라색 불꽃이 튀었다.
곧 여기저기서 다급한 외침이 튀어 나왔다.
미라에게 당하는 올림포스 길드원들의 외침이었다.
"뭐... 뭐야 이거! 무슨 미라가 이렇게 쎄?"
"이것 좀 떼줘요! 너무 뜨거워!"
"젠장... 쓰러지질 않네."
창훈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동안 보여줄 기회가 없었지만 내 실력이 이 정도란 말이야.'
그때 누군가 말했다.
"오오. 홀로 싸울 줄도 알았군. 자네가 이토록 대단한 강령술사인지는 몰랐네 그려."
누구지?
고개를 돌리는 창훈의 눈에, 저 멀리서 창훈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이 보였다.
다른 수험자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새까만 코트 차림의 깡마른 남자였다.
특이하게도 머리에는 고대 그리스풍의 짙은 남색 투구를 쓰고 있었다.
'이런, 누가 나를 불렀나 했더니 저 자였나.'
그는 바로 주신급 수험자 '보이지 않는 죽음'이었다.
심지어 저쪽도 창훈과 같은 강령술사였다.
저놈을 상대해야 된다고?
"젠장."
보이지 않는 죽음이 다가오며 물었다.
"어여쁜 파트너는 어디 계시고 홀로 이러고 있나?"
생명나무 제전을 봤으니 묻는 것일 게다.
그때 창훈의 역할은 오로지 혜경의 서포터였으니, 혜경 없이 창훈 홀로 있는 걸 어색하게 여기는 건 당연했다.
"와이프님은 지금 큰일을 처리하느라 바쁘셔. 작은 일은 내가 처리하러 왔지."
보이지 않는 죽음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성역 쟁탈보다 큰일이 있나 보군."
"우리 같은 남정네들은 이해 못 하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죽음이 껄껄 웃으며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래그래, 알겠네. 자 그러면 우리는 우리끼리 작은 일을 해보자고."
그가 단검으로 자기의 새하얀 손바닥을 푹 찔렀다.
화산정의 혐오체가 혀를 끌끌 찼다.
- 아이고 이놈, 자기 몸 깎아서 귀신을 부르는구나!
보이지 않는 죽음의 손에서 새까맣고 끈적끈적한 피가 뚝뚝 흘러나왔다.
그가 피를 땅에 뿌리자, 땅에서 고대 그리스풍의 병기로 무장한 병력들이 땅을 파고 흘러나왔다.
피부가 푸르죽죽한 좀비였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놀랍도록 빠르고 유연했다.
그것들이 바로 올림포스가 자랑하는 언데드 병사 '용아병'이었다.
그 용아병을 다루는 게 '보이지 않는 죽음'의 전투 방식이었다.
보이지 않는 죽음이 말했다.
"자, 주신급의 강령술을 배워 보시게."
창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할머님의 가르침도 하산한 몸이라 어르신께 배울 건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보이지 않는 죽음이 껄껄 웃었다.
곧 미라들과 용아병들이 격돌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