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격풍 (1)
그보다 조금 이른 시각, 드워프들이 서울역 지하에 급히 만든 특수 격리실.
격리실 네 면의 벽 중 한 면은 전체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일방 투명 벽이었다.
창훈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투명 벽을 통해 방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집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몇 평 남짓한 작은 격리실은 폐허에 가까운 상태였다.
인간의 기술력으로는 흉내 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단단한 벽과 바닥에는 수 없는 균열이 생겨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격리실은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격리실 안에 있는 두 수험자의 싸움 때문이었다.
한쪽은 격리 대상 샤믹 프란시스코, 다른 한쪽은 창훈의 아내 혜경이었다.
두 눈이 새까맣게 물든 혜경이 괴성을 질렀다.
"크아아아악!"
그러자 그녀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칼날 같은 짐승의 발톱이 샤믹의 몸을 꿰뚫었다.
혜경이 중원에서 익혀온 마공 '묵영도'였다.
샤믹이 신음과 함께 피를 토했다.
"크으으윽!"
샤믹의 몸을 꿰뚫었던 그림자 발톱들이 사라지자 그녀가 털썩 쓰러졌다.
순간 단전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둔탁한 충격에 창훈은 신음을 뱉었다.
"허억!"
'묵영도'의 사용에 따른 반발력이 혜경의 마력을 제어하는 창훈에게 몰려온 것이다.
묵영도는 중원을 지배하던 흑천교의 전대 교주 구두망이 개발한 마공이었다.
그림자에서 칼날 같은 발톱을 뽑아내는 이 가공할 마공은 무공을 개발했던 구두망에게마저도 버림받았다.
왜냐하면 사용자의 마기를 폭주시켜 미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전 무림맹주 단국호는 묵영도에 발을 들인 자들이 하나같이 미쳐서 죽었다고 했다.
상원은 그걸 알고서도 혜경에게 묵영도를 익히라고 했다.
창훈이 아내의 들끓는 마력을 다잡아주기만 하면 위험 부담을 거의 지지 않고 묵영도를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역시나 상원의 판단은 정확했다.
창훈이 마력을 잡아준 덕에 혜경은 묵영도를 써서 시험 최강의 검사라는 외팔 검객과도 대등하게 겨룰 수 있었다.
그리고 위험 부담을 '거의' 지지 않을 거라는 말도 정확했다.
묵영도를 사용하는 혜경의 기를 잡을 때마다, 그 반발력 때문에 창훈은 내장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는 정확하지 않았어도 될 텐데.'
창훈이 자세를 가다듬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묵영도에 온몸을 꿰뚫린 샤믹이 좀비처럼 비틀비틀 일어났다.
"그으으으윽...."
그림자 발톱에 꿰뚫린 곳마다 새파란 비늘이 돋아나고 있었다.
생명나무 제전에서 보았던, 해원향의 몸을 뒤덮었던 것과 같은 색이었다.
말도 안 되는 재생력이었다.
안 그래도 막대한 샤믹의 재생력이, 내단을 먹은 이후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혜경이 질려버린 표정으로 신음을 뱉었다.
"아... 정말...."
창훈이 샤믹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아아...."
그녀의 몸이 점점 인간의 것에서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생명나무 제전에 다녀오고 며칠 뒤 첫 발작이 있었다.
그 뒤로 발작의 주기는 점점 짧아졌고, 동시에 새파란 비늘은 점점 샤믹의 몸을 덮어 갔다.
이제는 그녀의 원래 피부보다 비늘이 덮은 면적이 더 넓어 보일 지경이었다.
샤믹이 혜경을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샤아아아악!"
그 소리는 인간의 것이 아닌 뱀의 것에 가까웠다.
샛노란 눈동자는 뱀처럼 날카로웠고 혀도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그녀가 걸친 가운 아래로는 짤막한 꼬리가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한편, 혜경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부담스런 무공을 연속으로 쓴 탓인지 아내는 거친 숨을 내쉬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이 광기가 치솟아 오르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샤믹이 손톱을 세우고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아귀처럼 혜경에게 달려들었다.
창훈이 중얼거렸다.
"안 되겠다."
싸움을 단박에 끝내야 했다.
창훈은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마력을 끌어모았다.
수호신 '화산정의 혐오체'가 막대한 마력을 보태주었다.
창훈은 솟아오르는 마력을 그대로 손끝에 모았다가, 일순간 혜경을 향해 모조리 쏟아부었다.
혜경이 컥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와 함께 혜경의 가슴팍에서 솟아난 수십 개의 새까만 칼날들이 그대로 샤믹의 몸을 꿰뚫었다.
퍼버버벅!
사방으로 샤믹의 피가 튀었다.
창훈은 이를 꽉 물고 고개를 숙였다.
'젠장... 이건 해도 해도 익숙해지지가 않네.'
아내의 몸에서 뽑아낸 칼날을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의 몸에 꽂는 건, 정말로 못 할 짓이었다.
잠시 후 칼날들이 꾸물거리며 혜경의 타이즈로 녹아 들어갔다.
샤믹이 피거품을 뱉으며 쓰러졌다.
"끄으으윽...."
몸이 걸레짝이 돼서 쓰러진 샤믹은 조금씩 꿈틀거릴 뿐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겨우 발작하는 샤믹을 제압한 것이다.
한편 다리가 풀린 혜경이 벽에 기대 털썩 주저앉았다.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추슬러 격리실 안으로 뛰어 들어간 창훈이 혜경의 상태를 살폈다.
혜경이 가쁜 숨을 몰아쉴 때마다 그녀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혜경이 반쯤 풀린 눈으로 창훈을 올려다보았다.
"어... 여보...."
"응, 혜경아... 고생했어."
혜경이 헤싯 웃으며 말했다.
"은수... 은수 깨워야 되는데? 우리 은수...."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올라, 창훈은 입술을 꽉 깨물고 혜경을 끌어안았다.
은수, 시험을 먼저 떠난 딸.
첫 번째 시험에서 은수를 잃은 충격으로 아내는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창훈이 그래도 정신을 추스른 건 아내마저 잃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상원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나, 수호신 '검은 숲의 목자'와 계약하고 나서 아내의 정신은 맑아졌다.
하지만 상원은 아내가 제정신을 찾은 게 아니라고 했다.
단지 검은 숲의 목자가 그녀의 광증을 눌러 두고 있을 뿐이라고.
창훈은 요새 그걸 다시금 실감하고 있었다.
아나르에 다녀온 이후 한동안 나타나지 않던 광증이 최근 들어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묵영도를 자주 쓴 것과 무관하지 않겠지.'
갑자기 혜경이 멍한 표정을 짓더니, 머리를 비비 꼬며 어린애 같은 말투로 말했다.
"아빠. 나 과자 먹을래요."
울컥, 슬픔이 치솟았다.
얼마나 딸이 보고 싶었으면 딸을 연기하게 된 걸까?
창훈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그래, 가자 혜경아."
창훈은 혜경의 손을 잡아끌고 격리실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도 샤믹은 깨어나지 않았다.
* * *
잠시 후 격벽 밖의 테이블, 세 사람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추스른 혜경과 창훈, 그리고 에론 클라드였다.
에론이 말했다.
"두 분 다 고생이 많으세요. 저희가 격리실을 좀 더 튼튼하게 만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의 말에 혜경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제정신을 찾은 상태였다.
"아니에요. 며칠 만에 이런 격리실을 만든 것도 충분히 대단한걸요."
에론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저 격리실 벽... 저런 식으로 부서질 줄은 몰랐어요. 샤믹이 원체 힘이 좋은 줄은 알았지만...."
에론이 말꼬리를 흐렸다.
창원과 혜경의 표정도 어두웠다.
부부가 격리실 근처에서 대기하는 건, 저 튼튼한 격리실로도 발작하는 샤믹을 가둬둘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는 샤믹이 격리실을 부수고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여러 수험자와 기술자들이 다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그 후로는 난동을 부리는 샤믹을 제압할 수 있는 창훈 부부가 격리실 근처에서 대기 중인 것이었다.
창훈이 말했다.
"조금만 더 참읍시다. 곧 상원 씨가 '뱀이 훔친 불로초'를 가지고 돌아올 거에요."
혜경이 대답했다.
"하루빨리 와주면 좋겠어요. 요새 나... 정신을 잃는 일이 점점 잦아져요.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요."
에론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스물여섯 번째 시험, '성역 병합전'을 선포합니다.]
창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타이밍에... 시험?"
혜경이 창훈의 손을 붙잡았다.
"맙소사.... 여보... 올림포스래, 올림포스."
"염병할...."
올림포스가 어디인가?
발할라를 제치고 최강의 길드로 올라선, 길드원 중에 주신 급만 열 명이 넘어간다는 괴물들 아닌가?
그런데 이 타이밍에 그런 자들이 쳐들어온다고?
혜경의 눈빛이 걱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어떡하지 여보?"
창훈이 손을 포개 혜경의 손을 감쌌다.
"괜찮을 거야. 문혁 씨도 있고 진아 씨도 있으니까... 잘 해낼 거야."
잠깐 아득한 눈으로 창훈을 바라본 혜경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여보. 올라가. 가서 문혁 씨 도와줘."
창훈이 이를 꽉 깨물었다.
'샤믹을 제압하는 일을 너한테만 맡기고 올라가라고? 그럴 수는 없어....'
아니, 아니었다.
아내의 말이 맞았다.
샤믹을 제압하는 것보다는 문혁을 도와 올림포스에 맞서는 게 더 중요했다.
'그렇지만....'
아내를 홀로 둘 생각을 하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창훈이 손에 힘을 주었다.
"역시 안 돼, 혜경아. 너 혼자 두고는 못 가."
혜경이 피식 웃었다.
"왜 내가 혼자야? 여기 에론도 있잖아. 그렇죠 에론?"
에론이 쭈뼛쭈뼛 머리를 긁적였다.
"예? 아, 예...."
혜경이 창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빨리 가 여보. 늦기 전에."
그때였다.
순간 격리실 안에서 들려온 괴성에 세 사람은 뭔가에 얻어맞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끄아아아아악!"
샤믹의 비명이었다.
격리실 한쪽 벽이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찌그러졌다.
에론이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벌써?"
창훈이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왜, 왜 이렇게 빨리...."
혜경이 창훈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창훈이 나직이 신음을 뱉었다.
'이 여자 손 맵기로는 알아줬었지.'
얼굴을 찌푸리고 어깨를 문지르는 창훈에게 혜경이 말했다.
"남자가 그렇게 풀 죽어 있을 거야? 자, 일하러 가자. 난 준비 됐어. 샤믹 쟤 너무 이뻐서 짜증 났는데, 원 없이 짜증 낼 수 있으니 잘됐네 뭐."
창훈이 벌떡 일어서는 혜경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직 혜경의 마력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이건 위험했다.
"여보... 아직은 안 돼. 조금만... 조금만 기다렸다가...."
혜경이 창훈의 말을 끊었다.
"여보."
혜경이 창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있잖아 여보. 내가 완전히 돌아버려서... 맨날 헛소리하고, 아무거나 주워 먹고, 똥칠하고 다니게 돼도... 그래도 나 예뻐해 줄 거지?"
창훈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한 소리를 해. 넌 그래도 예뻐 혜경아."
혜경이 깔깔 웃었다.
"그래, 그래. 내가 또 한 미모 하지. 자 가자 여보 일하러."
창훈은 혜경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섰다.
혜경이 어깨를 휘휘 돌리며 말했다.
"기다려라 짜식아. 언니가 너 참교육 해주러 간다."
성큼성큼 격리실로 다가간 혜경이 대기 중인 창훈을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이고 문에 손을 댔다.
그때 잠깐 멈칫한 혜경이 창훈을 돌아보고 말했다.
"여보. 이거 끝나면, 바로 문혁 씨 도와주러 올라가."
그래, 아무리 '검은 숲의 목자'가 찌꺼기만 남았다 해도 발작하는 수험자랑 싸우느라 자기 화신을 죽일 정도로 퇴물이 된 건 아니었다.
혜경의 광증은 상원과 태성이 해결해 줄 것이다.
"그래, 알겠어."
고개를 끄덕인 창훈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혜경이 격리실 문을 닫고 들어섰다.
곧 두 맹수가 싸우는 것 같은 처절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