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올림포스의 침공 (8)
이렇게 달콤한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진아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흣...!'
그렇게 집중이 흐트러진 찰나, 정수의 도끼가 거친 파공음과 함께 정수리를 향해 쏟아졌다.
진아는 혼신의 힘을 다해 화염검을 들어 올려 도끼를 막아냈다.
챙 하는 쇳소리가 근정전 가득 울려 퍼졌다.
무시무시한 압력에 진아는 한쪽 무릎을 털썩 꿇었다.
"끄윽!"
정수가 새까만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았다.
"끄끄끄끄... 이년, 애쓰는구나."
정수의 발이 그녀의 명치에 박혔다.
신음 소리와 함께 쓴 물이 올라왔다.
"컥!"
발길질에 채인 진아가 화염검을 놓치고 뒤로 굴러갔다.
그녀의 손을 떠난 화염검이 분홍색 불똥을 남기고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가슴팍 전체가 부서질 듯 아팠다.
폐 쪽에 이상이 생겼는지 입으로는 비린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정수가 커다란 도끼날을 사탕마냥 핥으며 저벅저벅 다가왔다.
"소용없다."
머릿속으로는 '낙원의 수문장'의 침음성이 들렸다.
- 끄으으응...!
진아가 부서질 것 같은 가슴을 싸안으며 겨우 몸을 세웠다.
그렇게 피 냄새가 섞인 거친 숨을 내쉬며, 진아는 다가오는 박정수를 바라보았다.
정수가 걸친 회색 갑옷이 철컥철컥 부딪히는 소리가 죽음의 신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눈에도 이상이 생겼는지 눈이 터질 듯 아팠고 앞이 새빨갛게 보였다.
'으윽... 겨우 여기서... 이렇게...?'
그때였다.
머릿속에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렸다.
-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순간 숨이 멎었다.
그 목소리에서 본능적인 위험을 느껴서였다.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악령에 씌인 박정수는 비교도 안 되게 위험하다고, 온몸의 감각이 부르짖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목소리는 말할 수 없이 달콤했다.
생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달콤함이었다.
입에서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아."
저벅저벅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온 박정수가 도끼를 높이 들어 올렸다.
허공에서 떠도는 불빛을 받아 빛나는 도끼날이 단두대의 칼날 같았다.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 나한테 맡겨.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 어디서 들어봤더라...?'
무언가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게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온몸에 나른한 느낌이 들었다.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어린 양이여... 정신을 차려라....
'낙원의 수문장'의 목소리가 아득했다.
그래, 더 이상은 괴로워할 필요가 없었다.
몸을 감싸는 끈적한 온기에 진아는 몸을 맡겼다.
갑자기 이마에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갑작스런 고통에 진아가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악!"
그리고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고통이 사라졌다.
사위가 고요해지면서 눈앞이 깨끗해졌다.
박정수가 휘두르는 도끼가 한없이 느려졌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한없이 즐거워지면서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낙원의 수문장'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아득히 멀리 들렸다.
- 어린 양아, 안 된다!
수호신의 목소리가 이렇게 아득하게 들렸던 적이 있었던가?
'이젠 상관없지.'
탈락의 위기에서 그녀를 구해주지 못하는 수호신의 말을 들을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진아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박정수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앞에 박정수를 쥐고 흔드는 악마가 보였다.
'고작 저딴 잡귀가 나를 괴롭혔다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순식간에 달라진 기분을 느꼈기 때문일까, 박정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물러섰다.
"뭐... 뭐냐?"
방금 전과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몸을 일으킨 진아가 박정수를 향해 다가갈수록, 박정수는 질린 얼굴로 물러설 뿐이었다.
진아가 박정수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우리 정수가... 이런 잡귀한테 씌었구나? 그러게, 평소에 수련을 좀 더 하라고 문혁 오빠가 누누이 얘기하지 않았니?"
진아가 말하는 동안 정수는 독사 앞의 생쥐마냥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정수가 한쪽 무릎을 털썩 꿇으며 말했다.
"다... 당신은?"
이제 진아가 정수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래... 이제 눈높이가 맞네."
진아가 정수의 턱을 움켜쥐고는 눈을 들여다보았다.
박정수의 두 눈에 공포가 어려 있었다.
피식 웃은 진아가 정수의 뺨을 철썩 후려쳤다.
정수의 목이 우드득 꺾이면서 그의 몸뚱이가 바닥에 우당탕 부딪혔다.
진아는 정수의 뺨을 때렸던 하얗고 조그만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어머... 나한테 이런 힘이 있었던가?'
손가락 끝에 새까만 손톱이 돋아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기분은 한없이 즐거웠다.
쓰러진 정수를 향해 다가간 진아가 그의 가슴팍을 짓밟았다.
정수가 신음과 함께 시퍼런 체액을 주르륵 뱉어냈다.
"커어억."
정수의 가슴팍을 온통 적신 체액이 진아의 발에도 튀었다.
"에잇, 더럽게."
진아가 정수의 머리카락에 발을 닦았다.
발에도 새까만 발톱이 하얀 운동화를 뚫고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칫."
나름 귀여워했던 신발인데.
그래도 내 발에는 이런 싸구려보다야 힐이 훨씬 잘 어울리지.
진아가 쓰러진 정수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른 손에 마력을 모으자, '지천사의 불씨'가 매캐한 회색 연기를 내뿜으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정수가 질린 얼굴로 말했다.
"으... 윽, 그걸로 날 공격하면... 이 꼬맹이도 무사하지 못해...."
그 말을 들은 진아가 피식 웃었다.
"그래? 내가 그런 걸 신경 써야 하니?"
정수의 눈동자에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요염하게 웃는 그녀의 이마에 뿔 두 개가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정수의 눈동자가 거울이라도 되는 양 거기에 대고 표정을 고쳐 보았다.
'예쁜데? 이 정도면 그 목석같은 군바리를 넘어뜨려서....'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 진아 씨... 어떻게 된 거요?"
진아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정수의 공격에 혼절했던 한 목사가 오성 스님을 부축하고 서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한 목사의 눈동자가 불신으로 흔들렸다.
그때서야 진아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어쩌다가 이렇게...?'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은 마기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이건 분명 네 번째 시험에서 그녀의 이마에 박혔던 '희생의 낙인'의 영향이었다.
지금껏 그녀의 속에 잠들어 있던 낙인이 탈락의 위기가 되자 표면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진아가 정수의 목을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마기에 저항했다.
"으... 으윽...!"
하지만 소용없었다.
한번 몸을 잠식한 마기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저항하려 하면 할수록 마기에 잠겼을 때 느꼈던 쾌감이 더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걸.
최선의 힘을 다해 부여잡고 있던 긴장의 끈을 놓으면서, 그녀는 한 목사에게 말했다.
"도망쳐요, 목사님."
웅크리고 있던 새가 날개를 펴듯, 인장의 강렬한 마기가 그녀의 안에서 폭발했다.
* * *
'마계화의 핵'을 제거하기 위해 서울역으로 갔던 수험자들이 돌아올 때까지, 문혁은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서울역 최강의 수험자 진아를 보냈는데도 마음이 초조했다.
아니, 어쩌면 진아가 가서 마음이 초조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새고 동이 틀 무렵, 광화문으로 갔던 수험자들이 귀환했다.
예상 밖에도 수험자의 수가 늘어나 있었다.
수험자들이 이태원의 수험자 박정수를 데려온 것이다.
수험자들 모두 몸 상태가 만신창이였는데, 특히 정신을 잃은 박정수는 말 그대로 걸레짝에 가까운 상태였다.
돌아온 수험자들 중 몸이 멀쩡한 건 진아 단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진아 또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전체적으로 문혁이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일단 문혁은 수험자들을 병실로 보내고 의료진을 깨워 간호를 붙였다.
수험자들을 대표해서 한 목사가 얘기해준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마인화된 박정수가 마계화의 핵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맞서 싸우던 진아가 마인화 반응을 보였다.
그 얘기를 들은 문혁의 머릿속에 어젯밤 보았던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
진아의 이마에 낙인이 찍혀 있던 광경이었다.
아침, 문혁은 진아의 병실 밖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숨을 쉬었다.
'진아가 마인화됐다니.... 역시 어젯밤 이마에 나타난 그 낙인을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돌아온 수험자들에게 병실을 배정하면서 윤진아와 박정수는 각각 독방에 보냈다.
마인화가 재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다른 수험자들과 같은 병실을 쓰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정신을 잃은 진아를 태성이 직접 간호하는 중이었다.
태성이 병실 문을 열고 나왔다.
문혁이 태성을 붙잡고 물었다.
"어르신... 어떻습니까?"
태성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
문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모르겠다니요... 어르신, 무슨 말씀이십니까?"
'청낭의 의선'을 수호신으로 둔, 이 사람이 모르는 증상이 있다니?
태성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마인화를 겪고 나면 몸 속에 마기가 지글지글 끓어. 뭐랄까... 가스불 위에 올려놓은 뚝배기처럼. 그럼 그 불을 다스리는 거야. 그런데 진아 씨는 달라."
태성이 자기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여기 찍혀 있던 그거. 자네도 기억나지?"
희생의 낙인을 말하는 것이었다.
문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보이지 않네만... 그거, 없어진 게 아냐. 수두균처럼 몸속에 잠복해 있다가 때가 되면 나타나는 거지. 그게 올라오고 나면 악마가 씌는 거야... 그런데."
"그런데요?"
태성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몸속으로 들어간 그 낙인을 잡을 방법이 없어. 의선께서도 모르겠다고 하시는군."
문혁이 고개를 떨궜다.
'청낭의 의선'이 모르겠다고 하는 걸 고칠 방법이 있을까?
그 방법을 알고 있을 상원은 샤믹을 고칠 아이템인 '뱀이 훔친 불로초'를 찾으러 '깊고 깊은 못'으로 떠나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때 문혁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혹시... '최초의 수확자'께서는 방법을 알고 계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말에 태성의 안색이 밝아졌다.
"호오, 그래. 그분이 계셨지. 그 이라면 아실 수도 있겠군."
'청낭의 의선'이 빼어난 의술사이긴 하지만 그 격은 영웅급에 불과했다.
반면 '최초의 수확자'는 그 격이 주신이었다.
승천 시험의 세계에선 격에 따라 정보의 양과 질이 달라지므로, 최초의 수확자라면 진아를 고칠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의 화신 신우주는 지금 강남역에 있었다.
"강남역으로 연락을 넣어야겠습니다."
"그래, 그러시게."
문혁은 빠른 걸음으로 중앙지휘본부로 향했다.
그래, 신우주가 온다면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때, 예상치 못한 시스템 메시지가 문혁의 발목을 잡았다.
[스물여섯 번째 시험, '성역 병합전'을 선포합니다.]
"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