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올림포스의 침공 (5)
카일은 주위의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그녀 주위의 시공간이 일그러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머리 위의 세 겹의 고리를 보아하니 필시 기관원이었다.
그것도 세 겹이면, 집행사도 아닌 집행관급이다.
'집행관급이나 되는 자가 왜 내 앞에...?'
카일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기관원은 혼자 있는 수험자들 앞에 이런 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게다가 하는 말이 '힘이 필요한가요' 라니.
그냥 받아들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일단은 일개 수험자가 집행관에게 노골적인 적대나 의심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니, 그렇지만 명색이 최강의 승천자 중 하나라는 '번개의 왕'이 뒤를 봐주고 있는데.
수호신의 체면이 있지 넙죽 엎드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카일은 할 말을 신중하게 고른 후,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물었다.
"시험을 수호하는 기관의 집행관께서 이 먼 곳까지는 어인 일이십니까?"
집행관이 나긋나긋하게 웃었다.
"그리 멀지는 않았답니다. 우리에겐 이 땅의 거리 개념이 의미가 없지요."
집행관이 카일에게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땅에 쌓인 눈 위로는 집행관의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외눈의 집행관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제 질문의 답은 무엇인가요?"
카일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다짜고짜 와서는 '힘이 필요하냐'고 묻다니.
그것도 조상원이라는 수험자에게 아득한 격차를 느꼈던 지금 이 시점에?
무언가 수상했다.
하지만 상대는 기관의 집행관.
대놓고 의심하는 티를 풍겼다가는 괘씸죄에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카일은 잠깐 시간을 벌기로 했다.
"힘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까?"
집행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잘못 들은 게 아니군.
카일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힘이 필요하지 않은 수험자도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겠지요."
집행관이 또 한걸음 다가왔다.
"하지만, 얼만큼의 힘이 필요한지는 수험자마다 다르지 않겠습니까? 수험자 카일 핸드레이크."
카일은 또 신중하게 답을 골랐다.
"존경하는 집행관님, 제 수호신은 최강의 승천자 중 한 분이신 '번개의 왕'이십니다. 이미 제게는 너무 과분한 힘입니다만, 조금의 힘이 더 필요한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흠, 그런가요?"
집행관이 팔짱을 끼었다.
그녀의 표정이 미묘했다.
"어떻게 생각하지요 카일 핸드레이크? 정말로, 조금의 힘만 있으면 수험자 조상원을 이길 수 있나요?"
카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기관원이 직접, 한 수험자를 지목해서 그를 이길 수 있겠냐고 묻는 건 무슨 경우인가?
도대체 저 집행관과 조상원이라는 자는 어떤 관계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그러면서도 카일은 적당한 대답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수험자, 굉장히 강하더군요. 세브로 랭킹에도 이름을 못 올린 친구가 천둥망치를 그렇게 간단하게 이길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요. 수험자 조상원은 매우 강합니다."
스르륵
외눈의 집행관이 순식간에 카일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조각한 듯 섬세하고 수려한 이목구비가 어쩐지 섬뜩했다.
카일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수험자 카일 핸드레이크. 당신은 그에 비하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순간 카일의 주변으로 강렬한 스파크가 일었다.
머리로는 생각하고 있는 일이었지만, 막상 그 말을 누군가에게 들으니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들끓었다.
‘이 카일 핸드레이크가, 고작 다른 수험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존재라고?’
카일이 냉랭하게 물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집행관이 웃으며 대답했다.
"귀가 좋지 않은 모양이군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수험자 조상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대로 수험자 조상원과 겨뤘다간 수험자 군나르 인그로소가 그랬던 것보다 더 처참한 꼴을 당할 겁니다."
빛나는 창에 어깻죽지가 꿰뚫린 채로 벌레처럼 꿈틀거리던 군나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카일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용솟음쳤다.
그의 눈앞에서 새까만 스파크가 일렁거렸다.
이건 카일 핸드레이크 자신만의 감정이 아니었다.
저 하늘 위에서 이 땅을 내려다보고 있는 고고한 그의 수호신, '번개의 왕'의 분노가 카일을 통해 뻗어 나오고 있었다.
카일의 입에서 천둥처럼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수호신의 목소리가 뒤섞인 것이었다.
"이런 무엄한...!"
'번개의 왕'은 그 고고한 주신들 중에서도 최강급, 웬만한 기관원이라면 겁을 먹고 물러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눈앞의 집행관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웃는 표정 그대로였다.
"냉정하게 생각하십시오. 틀린 말입니까?"
그녀의 말에 카일이 무거운 신음을 뱉었다.
"끄응...."
사실이었다.
자존심을 빼놓고 생각해보면, 군나르 인그로소도 상대하지 못하는 마당에 그 군나르를 처참하게 짓밟아버린 조상원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역시."
집행관이 빙글 웃었다.
"카일 핸드레이크, 그대에게 힘을 드리겠습니다."
한 발짝 물러난 집행관이 카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에 주먹만 한 물방울이 떠 있었다.
카일은 영롱한 빛을 내는 물방울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카일의 머릿속에 수호신 '번개의 왕'이 보내는 이미지들이 스쳐 갔다.
새까만 우주, 그 한가운데 떠 있는 거대한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노인이었다.
'아아, 이건.'
그가 바로 이 시험의 절대자, 승천자들의 정점에 있는 자 '외눈 현자'였다.
이 물은 그가 우주의 중심에 있는 '지혜의 샘물'에서 퍼 올린 것이었다.
이 물은 마시는 자에게 끝도 없이 심오한 마력을 준다.
그래, 이걸 마시면 그 조상원을 이기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카일은 말없이 샘물 덩어리를 움켜쥐었다.
물 덩어리가 청량하게 시원했다.
집행관의 눈을 쳐다보며, 카일은 움켜쥔 샘물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목구멍을 따라 쾌청한 샘물이 흐르더니 이윽고 단전에 닿아서는 전신에 맹렬히 흐르기 시작했다.
끝도 없는 마력이 카일의 몸속을 흐르고 있었다.
그의 몸을 따라 금빛 뇌전이 흘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색깔이었고, 이전에 쓰던 검은 뇌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했다.
카일은 오른손을 휘둘러 거대한 번개 줄기를 쏟아냈다.
눈부신 섬광을 뿜어내며 날아간 번개가 굉음과 함께 침엽수림을 삼키며 짙은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잠시 후 흙먼지가 걷혔을 때, 번개가 꽂힌 자리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되어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쥐며 카일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힘.
'이 힘이 있으면 조상원도 문제없다!'
집행관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좋습니다, 카일 핸드레이크."
그때 갑자기 의문이 스쳤다.
어떻게 이 일개 집행관이 '외눈 현자'가 관리하는 지혜의 샘물을 들고 있는 거지?
왜 외눈 현자가 나에게 지혜의 샘물을 준 걸까?
카일이 의문에 가득 찬 눈으로 집행관을 보았다.
그때 카일은 보았다.
집행관이 품에서 새까만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있었다.
'선글라스? 집행관이?'
이어서 집행관이 품에서 은색 막대를 꺼냈다.
도대체 이건 또 어디에 쓰는 기구인가?
그때 은색 막대가 강한 섬광을 내뿜었다.
섬광 너머로 집행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험자 카일 핸드레이크, 지금 있었던 일은 잊습니다."
아득한 그녀의 목소리가 섬뜩했다.
* * *
카일 핸드레이크가 훈련의 방에서 돌아왔을 때, 지하도시의 분위기는 소란스러웠다.
곧 26번 시험이 공지될 거라는 소식 때문이었다.
문에 들어가기 전과는 달리 한결 편안해진 얼굴에, 길드원들이 밝게 인사를 건넸다.
"소식 들었어요 카일. 생명나무 제전에서 엄청 활약하셨다면서요?"
"역시, 우리 길마가 최고야!"
"곧 26번 시험이 있을 거래요! 너무 기대되지 않아요?"
한껏 편안한 표정으로 길드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카일은 도시 중앙에 위치한 길드의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간부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해를 달리는 말'과 '보이지 않는 죽음', 그리고 '서약의 수호자'와 '달의 명궁'.
모두 카일과 함께 제전에 다녀온 이들이었다.
여전히 그들의 표정은 심각했다.
특히 방금 칩거를 풀고 나온 대해를 달리는 말과 보이지 않는 죽음의 얼굴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카일이 말했다.
"왜들 그러시나? 다들 아주 얼굴이 죽상이야."
보이지 않는 죽음이 대답했다.
"이 상황에서 심각하지 않기를 바라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대해를 달리는 말이 물었다.
"그런데 카일, 갑자기 표정이 왜 그렇게 밝아졌어?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있지."
수련을 다녀온 이후 몸속에서 끝도 없이 강력한 에너지가 흘렀다.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고양감이었다.
이대로라면 조상원을 박살 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봐. 수련을 하고 나서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말이야."
그때였다.
갑자기 뜬 시스템 메시지가 카일의 말을 끊었다.
[스물여섯 번째 시험, '성역 병합전'을 선포합니다.]
[지금부터 24시간 내, 공격자로 지정된 성역 또는 길드는 방어자로 지정된 성역 또는 길드의 성화를 꺼야 합니다.]
[24시간 내 성화를 끄면 공격자의 승리, 끄지 못하면 방어자의 승리입니다.]
[공격자가 패배할 경우 공격자의 성화가 꺼집니다.]
[시험이 끝나는 시점에서 패배한 쪽의 수험자와 물자는 모두 승리자에게 귀속됩니다.]
[길드 '올림포스'를 공격자로 지정합니다.]
[성역 '서울역'을 '올림포스'에 맞서는 방어자로 지정합니다.]
[남은 시간: 23시간 59분]
시스템 메시지를 본 간부들이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불과 일주일 전 서울역의 수험자 조상원이 천둥망치를 벌레처럼 짓밟아버리는 걸 보고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 서울역을 상대로 전쟁을 치러야 한다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서약의 수호자'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맙소사... 그놈들을 상대로... 싸워야 된다고?"
다른 간부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런 겁쟁이들이 대길드 올림포스의 최고 간부들이라니.
카일이 책상을 쾅 두드렸다.
"무슨 소리들이야? 우리 올림포스가, 도대체 왜 그 이름도 없는 성역을 상대하는 데 겁을 먹고 있는 거지?"
'달의 명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도 봤잖아요. 조상원 그자, 괴물이에요."
그 말에 카일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흥."
카일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겁먹은 간부들을 향해 내밀었다.
무지막지한 마력이 담긴 황금색 번개가 그의 주먹을 감싸고 있었다.
아주 일부일 뿐인 그 힘을 본 간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약의 수호자'가 물었다.
"아니... 카일, 도대체 어디서 이런 힘이?"
카일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수련의 결과다."
카일이 벙찐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간부들을 향해 말했다.
"조상원 그놈은 나한테 맡겨. 그리고 나머지는 그냥, 짓밟아버리면 된다."
카일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껄껄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