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올림포스의 침공 (4)
진아의 새하얀 이마 한가운데 자리 잡은 새까만 낙인을 보며 문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거 어디서 봤더라?'
문혁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아 그때였군.'
서울역에서 네 번째 시험을 치를 때, 그때 진아의 머리에 새겨졌던 '희생의 낙인'이었다.
성역의 수험자 한 명을 무조건 제물로 바쳐야 했을 때, 상원의 계획에 따라 진아가 스스로 제물이 되었었다.
그리고 상원과 함께 '지옥문'에 들어갔다가 살아서 나왔었지.
불과 몇 개월 전의 일인데도 너무나 오랜 일처럼 느껴졌다.
그 이후로 저 낙인이 나타난 일은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지금?
진아가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인데?"
"아... 응."
문혁은 다시 진아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데 웬걸, 진아의 이마에 낙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없었던 것처럼.
잘못 본 건가 싶어 문혁은 눈을 비볐다.
역시나, 진아의 이마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요새 너무 잠을 자지 못해 헛것을 본 건가 싶었다.
문혁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진아야."
진아가 문혁에게 다가와 그의 볼을 쓸었다.
그녀의 조그만 손에는 어울리지 않게 굳은살이 여기저기 박혀있었지만, 그 손길은 너무나도 부드러웠다.
"요새 고생 많지 오빠?"
진아가 짠하다는 얼굴로 문혁을 올려다보았다.
"생명나무 제전에 갔다 오고 나서 제대로 쉬지도 못했잖아. 갔다 오니까 할 일이 산더미에... 지금도 봐. 이 늦은 시간에 혼자 광화문에 갔다 와서 회의 소집하고."
그녀의 말이 맞았다.
생명나무 제전에 다녀온 후 일주일 동안 문혁은 잠을 대로 자지 못했다.
상원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실의에 빠져 있는 동안, 사당역의 사후처리를 비롯해 서울역의 행정업무들을 점검하는 건 거의 문혁의 몫이었다.
"그러게, 나 요새 고생 많이 하네."
"거기다 상원 씨는 방황하고... 지금도 혼자 떠났네. 상원 씨가 기운 차려서 참 다행이긴 해."
문혁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러고 나니까 상원 씨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겠더라고."
진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원 씨가 대단한 사람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이뤄 온 업적들, 상원 씨 혼자서만 한 건 아냐."
"맞아, 서울역의 수험자들 모두가 같이 이뤄 온 거지."
"그중에서 오빠가 한 일이 제일 많고."
진아가 조그만 두 손으로 문혁의 커다란 손을 꽉 잡았다.
"다들 그렇게 생각해. 오빠가 제일 많이 고생하는 거,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
그녀의 음절 하나하나에서 문혁을 생각하는 깊은 마음이 느껴졌다.
무언가 따뜻한 게 마음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진아는 마음이 시릴 때 포근한 이불처럼 마음을 덮어 주는 재주가 있었다.
"조금만 더 힘내자 오빠. 시험이 절반이나 지났어. 지금껏 해왔던 대로, 앞으로도 해나가면 돼."
"맞아 진아야."
그녀의 말대로였다.
스물다섯 개의 시험을 치러내는 동안 서울역은 수험자를 보호하고 육성하는 단단한 시스템을 구축해냈다.
이대로 시험이 진행된다면, 어쩌면 서울역의 모든 수험자들이 다 같이 승천하는 일도 꿈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눈 좀 붙여. 일도 잘 자야 할 수 있잖아."
진아의 말을 들으니 문득 졸음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문혁은 커다란 손으로 진아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둥그런 두상이 문혁의 마음에 안정감을 주었다.
진아가 문혁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잠 좀 자고 있어 오빠. 자고 일어나면 광화문은 깨끗해져 있을 거야."
"그래, 그래."
문혁은 아련한 눈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걱정스런 마음에 다시 한번 들여다본 그녀의 이마는 역시나 깨끗했다.
그래, 잘못 본 것일 거다.
요새 너무 잠을 못 자긴 했어.
진아가 조그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갔다 올게."
"화이팅!"
고개를 끄덕인 진아가 돌아서서 지휘본부를 나갔다.
책상에 걸쳐 앉아, 문혁은 진아가 나선 방문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 * *
그 시각, 지중해 시칠리아섬.
마그마가 빠져나가 만들어진 새까만 동굴을 따라 굽이굽이 들어간 곳에, 그런 데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규모의 지하 도시가 있었다.
영롱한 성화가 비추는 거대한 지하 도시, 그곳이 바로 시험 세계를 통틀어 최강의 길드가 된 '올림포스'의 아지트였다.
올림포스가 원래부터 최강의 자리에 있던 건 아니었다.
사실 올림포스는 자타공인 최강의 길드였던 '발할라'에 묻힌 만년 2인자 신세였다.
길드원들이 무슨 수를 써도 발할라와의 격차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마치 시험 자체가 부당하게 '발할라'의 편을 들어주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랬던 길드 간의 우열이, '생명나무 제전' 이후로 완전히 뒤집어져 버렸다.
제전에 참여했던 '발할라'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길드의 3, 4인자였던 '무지개 다리의 파수꾼'과 '드높은 발키리'는 이무기가 된 해원향에게 당해서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그리고 길드 마스터 '천둥망치' 군나르 인그로소.
세브로 랭킹이 책정되기 시작한 이후 한 번도 랭킹 1위 자리에서 내려온 적 없었던 그 괴물이, 성역 서울역에서 온 듣도 보도 못한 수험자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쓰러져 폐인이 돼버렸다.
제전에 참여했던 모두가 화면을 통해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천둥망치가 자랑하는, 시험 최강의 무기 '뇌신의 파괴자'가 그 사내의 털끝마저도 건드리지 못하는 광경을.
그리고 그 사내가 만든 빛의 창이 그 단단한 군나르 인그로소의 어깨를 스펀지처럼 꿰뚫어버리던 광경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 중 하나가, 지금껏 천둥망치의 그늘 아래서 한 번도 랭킹 1위 자리를 가져보지 못했던 수험자 - '올림포스'의 길드 마스터 '시공간의 세습자' 카일 핸드레이크였다.
이끄는 길드가 랭킹 1위가 됐지만, 카일은 손톱만큼도 기쁘지 않았다.
지금껏 존재조차도 몰랐던,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 군나르 인그로소를 벌레처럼 짓밟아버리는 광경을 두 눈으로 보았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기쁘게 받아들이라는 말인가?
고급스런 원목으로 만들어진 책상에 앉아, 카일 핸드레이크는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젠장."
강렬한 전류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서류 한 장이 잿더미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소란스런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건 그와 함께 제전을 지켜보았던 올림포스의 다른 간부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대해를 달리는 말'도 '보이지 않는 죽음'도, 제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로 칩거에 들어갔다.
카일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조상원, 그 수수께끼의 남자가 이끄는 성역 서울역을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앉아있어 봐야 답이 나오지는 않을 문제였다.
이럴 때 책상 앞에 앉아있으면 늘어나는 건 고민과 걱정밖에 없었다.
'몸이라도 좀 풀어야겠다.'
자리에서 일어선 카일이 새하얀 자켓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그러자 곧게 뻗은 근육질 상체를 단정하게 감싼, 새까만 고급 셔츠가 드러났다.
셔츠 소매를 걷자 양손에서부터 번개처럼 뻗은 팔뚝의 혈관이 도드라졌다.
마력을 불어넣자 혈관을 따라 새까만 전류가 흘렀다.
"좋아."
카일은 집무실을 나섰다.
평소 길드원들의 절대적인 인기를 받는 카일이었지만, 지금처럼 냉랭한 표정으로 걷는 그에겐 누구도 말을 걸지조차 않았다.
새하얀 요정의 불빛이 밝히는 지하도시의 골목 골목을 지나, 카일이 향한 곳은 지하도시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동굴이었다.
용이라도 드나들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거대한 동굴 앞으로 검은색과 하늘색이 뒤섞인 차원문이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이 차원문이 공간을 다루는 카일의 힘으로 만든, 길드 올림포스가 자랑하는 '훈련의 문'이었다.
훈련의 문으로 들어서며, 카일은 수많은 고급 마물들이 줄줄이 서식하고 있는 시베리아의 벌판을 생각했다.
마치 비행기를 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 같은 강렬한 중압감이 카일의 몸을 짓눌렀다.
* * *
눈을 떴을 때 카일은 새하얀 폭설이 빗물처럼 쏟아지는 설원에 있었다.
장정 셋이 손을 맞잡고 둘러서도 부족할 정도로 줄기가 굵은 침엽수들이 하늘을 향해 빽빽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이 시베리아의 동토가, 올림포스의 훈련의 문을 통해 갈 수 있는 지역 중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큰 숨을 내쉬자 공기 중으로 새하얀 입김이 퍼져 나갔다.
카일은 숲속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가지 않아 커다란 짐승들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카일의 귓전을 때렸다.
"크르릉!"
침엽수 사이로 집채만 한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깨높이만 해도 사람의 키보다 훨씬 큰, 호랑이처럼 생긴 맹수들이 카일에게 다가왔다.
4급 마물 '돌이빨 호랑이'였다.
사람 팔뚝만 한 송곳니를 따라 침이 흘렀다.
수험자 여럿이 달려들어도 상대하기 벅찬 4급 마물들이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 나타나는 게 바로 이곳 시베리아의 동토였다.
그런 놈들이 목숨을 노리고 다가오는데도, 카일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놈들이 쏜살같이 카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허엉!"
화등잔만 한 눈에서 이채가 흘렀고 예리한 이빨은 바람을 갈랐다.
자동차 같은 건 우습게 짓이겨버리는 맹수들의 앞발이 날아오는 바로 그 순간, 카일은 움직였다.
카일이 눈을 부릅뜨자 필름을 멈춘 것처럼 내리던 눈송이가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 눈송이 사이 사이로 카일은 발을 내디뎠다.
그가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시공간의 힘을 머금은 새까만 스파크가 남았다.
돌이빨 호랑이의, 사람의 머리통보다 훨씬 큰 앞발을 지나쳐 카일은 놈의 얼굴 앞에 섰다.
놈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그 눈 그대로였다.
카일은 천천히 주머니에서 손을 뽑아 놈의 콧잔등에 정권을 박았다.
말아쥔 정권의 뼈가 말랑거리는 콧등을 박살 냈다.
그러자 새까만 파동과 함께 놈의 몸이 콧잔등에서부터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흥."
콧방귀를 뀐 카일이 다른 놈들을 향해 걸어갔다.
눈송이 사이를 걸어가서, 카일은 놈들의 콧잔등에 손수 정권을 박아 넣었다.
그렇게 네 마리.
그 직후 멈췄던 눈송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허어엉!"
단말마와 함께, 집채만큼 커다란 4급 마물 네 마리가 순식간에 일그러진 피떡이 되어 버렸다.
4급 넷을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채 1초도 되지 않았다.
이게 세브로 랭킹 2위, '시공간의 세습자' 카일 핸드레이크의 힘이었다.
시험의 그 누구도 4급 마믈 넷을 이런 식으로 해치울 순 없다.
하지만 카일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상원이라는 놈과의 격차만 더 느껴질 뿐이었다.
이 힘으로도 상처 하나 낼 수 없었던 천둥망치 군나르 인그로소, 그의 어깨를 놈은 고작 투창 한 번으로 박살 내버렸다.
'그놈을 도대체 어떻게...'
그때였다.
"괴로워 보이네요. '시공간의 세습자'."
'여기 나 말고 또 누가...?'
기척을 알아채지도 못했는데?
카일은 본능적으로 양 손끝에 마력을 모으며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고리 세 개를 머리 위에 올린 채로,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토가를 걸친 여인이 침엽수 사이에 서서 카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힘이 필요한가요?"
그녀가 안대로 가리지 않은 한쪽 눈으로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