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올림포스의 침공 (2)
상원은 방바닥에 정좌한 채 눈을 감았다.
그러자 천장이 하늘처럼 높은 거대한 복도가 펼쳐졌다.
상원의 ‘기억의 궁전’이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끝도 없이 펼쳐져 있던 복도가 불과 20여 미터 앞에서 무너져 있었다.
새까만 촉수들이 벽을 따라 자라며 복도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촉수에 붙어 있는 날카로운 이빨들을 따라 예리한 광채가 흘렀다.
저 촉수를 어찌 잊겠는가?
새하늘 너머에서 보았던 청소부들의 촉수였다.
꿀꺽, 상원은 침을 삼켰다.
사지가 주체할 수 없이 떨려 왔다.
새하늘의 너머엔 저 괴물들이 있다.
그놈들에게 도대체 어떻게 맞서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대로 새하늘에 올라 꿈을 꾸며 사는 건 어떤가.’
그 꿈이 진정한 구원이라 믿으면 된다.
딱 한 번만 속으면 된다.
기계장치의 신도 그 꿈속에서 다시 절대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그때, 우르르릉 하는 굉음과 함께 벽의 균열이 퍼졌다.
청소부들이 기억의 궁전을 파괴하고 있었다.
상원은 궁전을 파먹는 촉수들을 절망적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대로 무너져버리는 건가…. 어떻게 해야….’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장.”
상원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상원의 눈앞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 샤믹 프란시스코가 커다란 눈으로 상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 한 켠이 저려왔다.
지금 그녀가 혼수상태로 누워 있는 것, 그리고 해원향의 내단 때문에 제정신을 잃은 것 모두 상원의 의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만일 상원이 그녀를 성장시킬 욕심으로 ‘천둥망치’ 군나르에게 맞서게 하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 같은 일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미안합니다.”
상원은 고개를 떨궜다.
그러자 상원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고개를 들어 상원의 눈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그녀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부드럽게 웃었다.
“대장이 구해줄 거잖아요, 그렇죠?”
그녀가 상원의 널따란 가슴팍을 감싸 안았다.
“아아.”
뜨거운 숨을 게워내며 상원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깜빡 눈을 감았다 뜨자, 샤믹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를 안았던 가슴엔 온기가 생생했다.
으득, 상원은 이를 갈고 복도의 맞은편을 노려보았다.
청소부가 무서운 건 여전했다.
일곱 별의 왕관을 얻는 여정을 계속해야 할지 갈피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상원은 그런 이유 때문에 망설이지는 않기로 했다.
지금 당장 그를 애타게 찾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윤진아, 백문혁, 한창훈, 송혜경, 오태성, 샤믹 프란시스코, 그리고 수많은 서울역의 수험자들.
상원은 두 주먹을 꽉 쥐고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사지가 부들부들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쉬이이익
시뻘건 눈과 단검 같은 이빨들이 줄줄이 박힌 끔찍스런 촉수들이 상원을 덮쳐 왔다.
상원은 기억하는 모든 스킬과 아이템들을 꺼냈다.
‘주지사의 샷건’과 ‘요새 수호자의 시선’과 ‘하늘불꽃 드론’과 ‘열지의 말뚝’과 ‘바위에 박힌 검’과 ‘박피 단검’과….
두서없이 펼쳐진 스킬들과 아이템들은 시시각각 조여오는 공포에 맞선 몸부림이었다.
두렵고 불안하고 슬프고 허무했다.
그렇게 요동치는 마음의 덩어리 속에,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 있었다.
두 번의 생을 살며 인연을 맺은 소중한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 오로지 그 마음만은 움직이지 않았다.
파아아앗
그 부동심이 황금색 빛이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눈 부신 빛에 닿은 촉수들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다음 순간 기억의 궁전을 뒤덮고 있던 촉수들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황금색 빛이 사라지자 기억의 궁전이 깨끗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아니, 이상하게 궁전의 모습이 더 또렷해진 것 같았다.
“가자.”
상원은 발걸음을 옮겼다.
이 궁전 어딘가에, 분명히 샤믹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 * *
상원은 눈을 떴다.
기억의 궁전을 뒤져, 상원은 샤믹을 구할 방법을 찾아냈다.
그런데 그게 녹록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지금 샤믹을 구할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상원은 브라이싱크론 지갑을 꺼내 정신을 집중했다.
- 록시, 록시. 들립니까?
그런데 웬걸, 상원의 말에는 항상 반응하던 성전 상인 록시가 이번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이럴 리가 없는데?’
- 록시?
그때였다.
무언가가 상원의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상원이 고개를 돌려 창을 보니, 창을 가득 메울 정도로 커다란 새가 창에 앉아 있었다.
전체적으로 독수리를 닮았는데, 새하얀 깃털 위로 시퍼런 기운이 흐르는 게 상당히 위엄 있어 보였다.
록시의 전서구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비둘기에 불과했던 전서구가 그렇게 커져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상원은 헛웃음을 흘렸다.
록시의 성장세가 생각보다 가팔라서였다.
물론 록시와 전속 계약한 투자자인 상원에겐 아주 좋은 일이었다.
전서구가 그 위엄 넘치는 외모에는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 투자자님. 오랜만이우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록시의 육성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잘 있었습니까 록시?”
“흐흐. 요새 뭐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업계 1위란 게 항상 그렇지 않겠습니까?”
록시가 이끄는 상단은 전통적인 대상단인 ‘골리야스’나 ‘레힌도프’를 뛰어넘을 정도로 성장한 상태였다.
물론 그것도 시험의 진행을 아는 상원이 적절하게 살펴 준 덕분이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전서구까지 직접 보내주시고요.”
“우리 투자자님이야 VVVIP신데 이 정도야 당연한 거지요. 이 록시의 상단이 여기까지 큰 게 이게 다 우리 투자자님 덕분인데. 깔깔깔깔!”
두 눈을 둥그렇게 뜬 맹금류가 부리를 벌리고 깔깔 웃는 모습이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상원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시우? 뭐가 필요하셔서?”
“'꿈의 가루'와 '일곱 징검다리의 돌'이 필요합니다."
상원의 말에 안 그래도 커다란 전서구의 눈이 더 커졌다.
"응?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비싸기만 한 것들을 어디다 쓰시려고?"
전서구가 고개를 왼쪽으로 90도 휙 꺾었다.
"아... 그것도 어디 쓰실 조합식이 있나 보지?"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뭐 그거 합치면 성물급 아이템이 나오우?"
"아니오."
상원은 고개를 젓고 말했다.
"'깊고 깊은 못'으로 갈 겁니다."
"아... 그래요, 뭐? 어디?"
전서구가 부리를 딱딱 부딪치고 상원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돌았군. 돌았어. 진짜로 돌았어. 우리 투자자님, 그게 어딘지 알고 하는 소리요?"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깊고 깊은 못.
샤믹의 몸속에서 들끓는 해원향의 독기를 가라앉힐 수 있는 유일한 아이템, '뱀이 훔친 불로초'가 있는 곳.
그리고 최소 5급인 마물들이 득시글거리는 곳.
"그래 뭐, 우리 잘나신 투자자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겠지."
전서구가 부리를 닫고 푸르르릉 하는 한숨을 쉬었다.
"늘 하던 대로, 아이템은 지갑에 채워 놓고 대금은 빼가겠수다."
"네, 고맙습니다."
상원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몸조심하쇼. 부디 잘 되길 바라우."
전서구가 몸을 돌려 뛰어내렸다.
곧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전서구가 너른 날개를 펴고 하늘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 * *
서울역의 작전지휘본부, 서울역의 정예 수험자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상원이 태성에게 물었다.
"상태는 어떻습니까 어르신?"
태성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일단 어떻게든 해원향의 기를 눌러놓고 있는데, 쉽지 않아. '가라앉은 거인'께서 살점을 계속 재구성하고 계셔서 마물화 막고 있지만... 잠식되는 속도가 엄청나더군."
옆에서 혜경이 질린 얼굴로 말했다.
"힘도 점점 세지고 있고... 무엇보다 샤믹이 한기를 뿜기 시작했어요. 해원향이 괴물이 됐을 때 뿜던 그 한기에요."
그녀의 얼굴 여기저기 멍이 들고 생채기가 나 있었다.
가끔 깨서 발작하는 샤믹을 제압하다 입은 상처였다.
창훈이 한숨을 푹 쉬며 혜경의 팔을 주물렀다.
진아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샤믹... 저대로 흑풍 회원들이나 해원향처럼 괴물이 돼버리는 건 아니겠죠?"
상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두지 않습니다."
문혁이 물었다.
"뭔가 방법이 있습니까?"
"네, 샤믹을 살릴 수 있는 아이템이 있습니다. '뱀이 훔친 불로초'라고, 그걸 먹이면 해원향의 기운을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태성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오, 청낭의 의선께서 말씀하신 약재군. 그런데 그거 사실상 구할 수 없을 거라고 하시던데...?"
상원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가능합니다.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수험자들이 일제히 상원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뢰감이 담겨 있었다.
"문혁 씨, 이번에도 부탁드립니다."
문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 오래 걸리십니까?"
"예,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문혁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맡겨두십시오."
상원은 웃으며 문혁의 어깨를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길게 끌 것 없지요. 저는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혼자 가시게요?"
상원이 진아의 물음에 여유롭게 웃으며 답했다.
"예, 혼자가 편합니다."
청낭의 의선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했던, '뱀이 훔친 불로초'를 얻는 일.
상원의 머릿속에는 그걸 얻는 방법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 * *
상원이 떠나고 사흘이 지났다.
깊은 밤, 문혁은 지휘본부에 딸린 방 한 켠의 책상에 홀로 앉아 일기를 쓰고 있었다.
[D+235일. 맑음. 지휘본부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각 성역의 관리들과 색리들이 알현하러 왔다....]
"후우."
펜을 내려놓고 한숨을 쉰 문혁이 창밖을 보았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는데도, 서울역 광장은 수험자들로 붐볐다.
도저히 멸망한 세계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활기가 서울역에 흐르고 있었다.
상원 덕분이었다.
불과 사흘 전만 해도 서울역의 분위기는 물 먹은 시레기마냥 축 늘어져 있었다.
그 또한 상원 때문이었다.
문혁은 지휘본부로 나가 전술지도를 바라보았다.
서울 시내의 거의 모든 성역들이 서울역의 지휘하에 있었다.
그 지휘 덕택에 대부분의 수험자들은 탈락하지 않고 착실하게 성장해 나갔다.
한 대도시의 성역들을 지휘하면서 수험자들의 성장까지 보장하는 성역이 시험 세계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없다.
그리고 서울역이 그런 위치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된 건 구할은 수험자 조상원의 덕택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서울역의 수백, 서울 시내의 수천 수험자들이 상원 한 명에게 의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건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상원이라 해서 결코 범인을 뛰어넘은 철인은 아니었으니까.
지금껏 자각하지 못했지만, 조상원도 결국은 인간이었다.
지난 사흘은 그걸 뼈저리게 깨달은 순간이었다.
이 상황을 개선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깊은 한숨이 나왔다.
"후우."
그때 누군가 중앙지휘본부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이 야심한 밤에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서울역의 북동쪽을 정찰하는 수험자였다.
"문혁씨, 깨 있으셨네요. 급한 일입니다."
'이 진중한 사람이 이렇게 헐레벌떡할 일이 뭐가 있지?'
"예, 무슨 일이실까요?"
"광화문 일대의 마계화 현상이 포착됐습니다."
"네?"
문혁의 얼굴이 굳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