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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성 회귀자의 아포칼립스-154화 (154/230)

제154화. 올림포스의 침공 (1)

며칠이 흘렀다.

서울역의 숙소에서 상원은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며칠째 폭우가 이어졌다.

새하늘 시험에 접어든 이후 비가 통 내리지 않는가 싶었더니, 요새는 때아닌 소나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늘 북새통을 이루던 서울역 광장이 한산했다.

'장마철도 한참 지났는데.'

상원은 이불을 올려 썼다.

이불과 침대 사이에 꿉꿉한 습기가 끼어 있었다.

습기 찬 날씨 때문일까, 커다란 지네 한 마리가 벽에 붙어 꿈틀댔다.

새까만 갑각이 번들거리는 걸 상원은 멍하게 바라보았다.

새하늘 시험에 들어서, 수험자와 마물이 아닌 생물을 본 게 얼마 만인지 가늠이 잘되지 않았다.

시험에 접어든 이후로 몇 년이 지난 건지도 헷갈렸다.

요새 들어 상원은 여러 가지 것들이 헷갈렸다.

아이템의 조합식을 헷갈렸고 던전의 공략법을 헷갈렸다.

멍하게 서울역을 돌아다니다가 자기도 모르게 낯선 곳에서 정신을 차릴 때도 많았다.

상원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내리는 빗줄기가 성화에 닿아 사라졌다.

성화.

마기로 가득 찬 공기를 정화해주고 고기에 깃든 독을 사라지게 해주는 성스러운 불꽃.

모든 수험자의 거점인 '성역'의 중심.

이 험한 시험의 세상에서 수험자가 무조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물건.

요새 들어 상원은 도통 성화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성화의 온기 밖으로 나갈 힘이 없어서였다.

타르타로스에 다녀온 이후로 늘 그랬다.

달리 불신자이겠는가.

상원도 믿고 싶지 않았다.

그토록 믿었던 새하늘의 구원은 사실 단꿈에 불과하다는 걸.

새하늘이라는 게 사실은 문어처럼 생긴 거대한 괴물이 꿈을 빨아먹는 먹이통이었다는 걸.

새하늘교 사람들이 말했던, 구세주이신 새하늘 아버지의 정체가 그 괴물이라는 걸.

그럴 때마다 상원은 심장을 만져보았다.

그때마다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심장을 만져보았을 때 느껴지던, 모래가 흐르는 느낌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이제 이 심장 속에 '황금시대의 모래시계'는 없다는 걸.

모래시계는 타르타로스에서 썩어가던 크로노스 - 황금시대의 군주의 유해와 함께 사라져버렸다는 걸.

그러니까, 상원이 보고 겪었던 그것이 모두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는 걸.

상원은 게워내듯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제 무엇을 위해서 이 험난한 시험을 이겨내야 하는가.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상원은 힘없이 대답했다.

"네."

상원 자신도 놀랄 정도로 낮고 음울한 목소리였다.

문밖에서 단단한 목소리가 들렸다.

"상원 씨, 백문혁입니다."

"네."

문혁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커다란 뿔테안경 아래 광대뼈가 유독 도드라졌다.

문혁의 얼굴도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표정 없고 과묵한 문혁이 얼굴을 굳히자 석상처럼 보일 정도였다.

서울역에 처음 와서 만웅과 시비가 붙었을 때, 그때 문혁의 얼굴이 저런 느낌이었다.

문혁이 음울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은 상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식사하러 가시죠."

상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생각 없습니다."

"그래도,"

문혁이 답답한 듯 말을 한 번 끊었다.

"차린 성의가 있는데, 부탁드립니다."

며칠 전이었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태도였다.

그런데 상원의 우울이 계속될수록, 문혁의 태도도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상원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창훈씨랑 혜경 씨가 돌아왔습니다."

"아아, 그런가요?"

서울역의 정예 수험자들이 '생명나무 제전'을 치르러 갔다고 서울역이 멈추지는 않았다.

그 사이에도 서울역의 수험자들은 먹고 자고 사냥하고 아이템을 얻으며 성장해갔다.

그러던 차 서울역 근처에 고급 던전이 나타났는데, 서울역에 남은 수험자들로는 처리하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그래서 창훈 부부는 생명나무 제전에서 돌아오자마자 던전을 소탕하러 직접 나선 것이다.

그랬던 부부가 이제 돌아왔다.

그렇다면 가야지.

몸을 일으킨 상원이 문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시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문혁이 문을 나섰다.

상원은 문혁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금방이라도 무릎이 꺾일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 * *

흑풍회의 성채에서 구두망의 내단을 얻고 서울역에 돌아온 날 쌀국수를 먹었던 그 식당.

상원은 거기에 앉아 있었다.

둥그런 식탁에 상원과 문혁, 그리고 초췌한 얼굴을 한 창훈과 혜경이 앉아 있었다.

쌀국수를 먹으러 모였던 사람들 중 두 사람이 없었다.

샤믹 프란시스코와 오태성.

진아가 주방에서 커다란 찜솥을 통째로 꺼내 왔다.

"자 드시죠."

찜통을 열자 후끈한 증기와 함께 짭쪼름하고 고소한 냄새가 훅 풍겨 왔다.

혜경이 소리치듯 말했다.

"와 설마 이거, 갈비찜이에요?"

진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 언니."

"이야, 진아 씨한테서 갈비찜을 대접받다니, 우리가 진짜 열심히 일하긴 했나 봐요 그치?"

"그럼 그럼. 무지 어려웠지."

혜경이 너스레를 떨며 말하자 창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들, 분위기를 띄우려고 애쓰는 게 보였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그 무엇을 해도 소용이 없는데.

승천을 해도 구원은 없는데.

상원은 툭 내뱉듯 말했다.

"미안합니다. 던전 정보를 잘못 드려서."

그 말에 식당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제가 헷갈렸습니다."

혜경 부부가 소탕하는 데 꼬박 나흘이 걸렸던 그 던전은, 사실 제대로 준비하고 갔다면 그들의 실력으로 하루면 소탕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탕에 나흘이나 걸렸던 건, 상원이 그 던전을 다른 던전과 헷갈려서 완전히 틀린 조언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상원은 그걸 부부가 던전에 들어간 지 이틀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니에요 상원 씨. 사람이 어떻게 실수가 없을 수가 있어요?"

대답하는 혜경의 얼굴이 착잡했다.

창훈이 혜경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맞아, 맞아. 상원 씨가 생명나무 제전에서 내렸던 지휘는 완벽했잖아요."

진아가 찜통에서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꺼내며 자르며 말했다.

"자자, 일단 먹어요."

진아가 능숙한 솜씨로 고기를 잘라 수험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우, 배고파 빨리 먹자 여보."

"그래그래."

혜경과 창훈 부부가 게걸스레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창훈이 고기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와, 진짜 맛있다. 진아 씨 예전에 식당 했어요?"

"아뇨. 그냥 봉사활동 하면서 요리를 좀 했었어요."

그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상원은 고깃덩어리에 포크를 푹 찍어 보았다.

포크가 부드럽게 박히며 탱탱한 고기에서 육즙이 쭉 흘러나왔다.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맛있네요."

역시나 이번에도, 목소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낮고 건조했다.

상원의 말에 다른 수험자들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이러려고 말을 했던 게 아닌데.'

한동안 식기가 달각거리는 소리만이 이어졌다.

가라앉은 분위기가 어색해진 창훈이 입을 열었다.

"다들 우리 생명나무 제전에서 했던 거, 영상 봤어요?"

문혁이 대답했다.

"기관에서 배포한 영상 말씀이시지요? 여러 번 봤습니다."

"혜경 언니, 진짜 대단하던데요? 어떻게 그 유명한 '외팔 검객'을 상대로 그렇게 싸웠어요?"

진아의 말에 혜경이 쑥스럽다는 듯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다 상원 씨 덕분이지. 상원 씨가 배우라고 한 '묵영도'가 없었으면 우린 그냥 그 여자한테 토막살인 당했을 거야."

진아가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어머, 언니는 어떻게 그런 살벌한 말을 그런 표정으로 해요?"

"뭐 어때, 사실인걸."

창훈이 문혁과 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문혁 씨도 진아 씨도 호흡이 굉장하던걸요? '무지개 다리의 파수꾼'이랑 '드높은 발키리'도 세브로 랭커들이잖아요?"

진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도 상원 씨 조언 듣고 이겨냈죠. 그리고 문혁 오빠가 워낙 지휘를 잘하니까...."

말을 하던 진아가 입을 막았다.

창훈과 혜경이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보더니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오빠?"

"오빠요?"

진아의 얼굴이 새빨개졌고 문혁은 헛기침을 했다.

"아... 아니, 그게."

"어, 어흠."

혜경이 식기를 탁하고 내려놓았다.

"뭐야 뭐야 뭐야, 두 사람 언제부터 오빠동생 했대?"

"이야 상원 씨 방금 들었어요? 오빠래요 오빠."

들었다.

"네."

그래서?

상원은 말없이 고기를 씹어 삼켰다.

그 고기의 식감이, 그 육즙의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정적이 식탁을 덮쳤다.

문혁이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아니 상원 씨, 좀...."

그때였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끄아아아악!"

샤믹이었다.

생명나무 제전에서 부서지고 재생하고를 반복하며 천둥망치 군나르를 상대했던 샤믹은, 그 한계까지 다다른 끝에 혼수상태에 돌입했다.

그렇게 혼수상태에 빠진 샤믹은 시험이 끝나고 지금까지 쭉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태성이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녀를 돌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건 분명히 상원의 계산과 달랐다.

못해도 이틀이면 깨어나야 했다.

그런데 나흘이 넘도록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그녀의 비명 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샤믹!"

마음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상원은 식당 문을 박차고 나가 바람처럼 달려서, 샤믹이 누워있는 병실에 다다랐다.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리며 피투성이가 된 태성이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끄으으윽!"

"무슨 일입니까 어르신?"

"아니, 상원이 자네...."

다시 한번 비명이 들렸다.

"끄으아아악!"

열린 문 사이로 병실의 모습이 보였다.

병실은 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모든 집기가 이리저리 널브러져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상원은 보았다.

병실 한가운데서 새빨간 피를 뒤집어쓴 샤믹이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샤믹!"

병실에 들어선 상원을 향해 샤믹이 달려들었다.

상원이 미처 반응하지도 못할 정도로 날랬다.

샤믹이 단단한 손으로 상원의 목을 졸랐다.

"크... 큭!"

그리고 상원은 보았다.

샛노래져 있는 샤믹의 눈동자와, 그리고 그녀의 몸 여기저기 돋아 있는 새파란 비늘을.

'설마...!'

비늘이 돋고 눈동자가 노래지는 현상, 상원이 알기로 그 원인은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해원향의 내단을 먹은 것.

그렇다면 모든 게 설명이 되었다.

제전이 끝나고 샤믹이 며칠째 깨어나지 못했던 것도, 지금 샤믹이 짐승처럼 날뛰며 폭주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샤믹이 해원향의 내단을 먹게 된 거지?

샤믹의 무지막지한 악력에 목이 뽑혀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민은 나중, 일단은 살아야 했다.

"끄으으으윽...!"

신음을 흘리며 샤믹의 팔을 만졌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으아아아악!"

태성이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지르며 샤믹의 정수리에 금빛 침을 꽂아 넣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털썩

샤믹이 고목처럼 쓰러졌다.

"무슨 일이에요?"

그제야 다른 수험자들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거친 숨을 몰아쉰 상원이 말했다.

"샤믹을 구해야 되겠어요."

타르타로스에서 돌아온 이후로, 도통 힘이 들어가지 않던 사지에 힘이 돌아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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