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타르타로스 (5)
상원은 주저앉은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하늘의 우주를 탐식하는 거대한 괴수의 껍질에 사람의 입같이 생긴 수천 개의 입들이 생겨나 불경한 포효를 지르고 있었다.
황금시대의 군주가 일어서서 위쪽을 보았다.
"이제 이 사기도 안 먹히겠군."
'새하늘 아버지'를 속여 시간을 멈추는 게 끝난다는 얘기였다.
이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였다.
수천 개의 입들이 무언가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새까만 알같이 생긴 덩어리였다.
수천 개의 입들이 토해내듯 뱉어낸 검은 덩어리들은 누런색 오수 속에서 꿈틀거리며 형체를 바꾸어 나갔다.
이리저리 뻗은 수십 다발의 새까만 촉수를 휘젓는 모습이 마치 꼴뚜기 같았다.
그것들의 몸 여기저기서 새빨간 눈들이 돋아났다.
그것들이 천천히 새하늘 아버지의 주위를 헤엄치기 시작했다.
새하늘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오오오오!"
'이 소리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소리다.'
그게 언제였는지 상원은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알게 됐다.
저 소리를 들었던 건 현생을 시작할 때 '기계장치의 신'의 연구실에서였다.
기계장치의 신은 탈락한 수험자의 영혼을 잡아다 자기 기계에 넣는다는 반칙을 저질렀다.
그런 기계장치의 신을 처단하기 위해 따라붙는 존재들이 있었다.
"청소부."
새하늘 아버지의 사냥개이자, 시험의 규칙을 위반한 승천자들을 처단하는 존재.
그때는 저 포효가 청소부들이 내는 건 줄 알았는데.
그때, 상원의 머릿속에 낯선 음성이 들렸다.
- 크로노스!
'뭐라고?'
상원은 혼란스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지만 그 음성이 어디서 들려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황금시대의 군주가 불안한 얼굴로 상원을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지? 무슨 일이야?"
상원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크로노스."
군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게 방금 무슨 소리냐?"
"네?"
"방금 뭐라고...."
그때였다.
머릿속에 천둥 같은 음성이 또 한 번 울렸다.
- 타르타로스의 크로노스! 그 유해를 치워라!
그와 함께 새까만 청소부들이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상원은 알았다.
방금 머릿속의 그 음성이, 바로 새하늘 아버지의 것이었음을.
새하늘 아버지가 외쳤던 그 이름을, 상원은 다시 한번 불러 보았다.
"크로노스."
황금시대의 군주가 씩 웃었다.
"원형의 이름을 알았구나."
"원형의 이름...?"
황금시대의 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존재의 근원에 있는, 그 원형의 이름."
알쏭달쏭했다.
"무슨 말입니까?"
"전에 얘기한 적 있었지? 때로는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게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유리하다고."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시대의 모래시계에 남아있던 군주의 환영이 했던 말이었다.
"나는 여기서 오랜 시간 새하늘과 그 바깥의 우주를 지켜봤어. 그러다가 깨닫게 됐지. 새하늘은 다른 우주들과 다르다는 걸."
황금시대의 군주가 손가락을 뻗어 새하늘을 가리켰다.
별빛에 싸인 승천자들이 꿈을 꾸며 고동치는 그곳.
"저곳의 존재들은 원형이 있어. 그 삶에, 그 꿈에, 그리고 그 운명에 원형의 모습이 깃들어 있지."
존재의 원형이라.
불현듯 새하늘교의 경전인 '승천계시록'과 노트들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여기 승천자라고 하는 이들... 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거 그냥 여러 신화와 전설들 따다가 얼기설기 엮어놓은 거 아냐?'
상원은 황금시대의 군주를 올려다보았다.
새하늘 군주를 속이고 시간 사이에 틈새를 만들며, 때로는 그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기까지 하는 자.
상원은 다시 한번 그 원형의 이름을 말해보았다.
"크로노스. 제우스의 이전, 황금의 시대를 다스리던 신. 권좌에서 축출되어 타르타로스에 유폐되었다."
황금시대의 군주가 상원을 바라보며 처연하게 웃었다.
"그게 내 원형의 운명인가? 이 하수구에서 썩어가는 내 처지가 거기에 참 잘 어울리는군."
갑자기 군주의 얼굴이 나이 들어 보였다.
"당신들."
상원이 침을 삼키고 말했다.
"원형의 존재를 안다는 건, 당신 같은 승천자들에게 무슨 의미입니까?"
"존재의 고유성과 독립성을 불신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걸 믿지 못하게 된다면...."
"새하늘은 의미가 없어지지. 거기는 모두가 별처럼 홀로 반짝이는 곳이어야 하니까."
말을 마친 군주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깊은 바다 속을 헤엄치는 문어처럼, 새하늘 아버지의 청소부들이 누런 오수 속을 헤엄쳐 상원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초록색 눈동자가 알알이 박힌 새빨간 눈들이 상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황금시대의 군주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 거대하고 단단한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의 널찍한 관자놀이를 따라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이미 죽은 몸인데도, 저놈들은 무섭군."
군주가 상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의 만남은 여기서 끝인가 보다."
황금시대의 군주가 서서히 금빛 가루가 되어 스러지기 시작했다.
"불신자, 많은 것을 알게 되었겠구나. 새하늘과, 새하늘 아버지와, 원형."
금빛 가루가 샛노란 오수에 섞여 관로를 타고 저 멀리 사라져갔다.
상원은 황금시대의 군주가 그렇게 흩어져가는 걸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믿지 못하게 되더라도... 너는 견딜 수 있을 거다. 너는 원래 아무것도 믿지 않으니까."
이제는 군주의 얼굴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내 유산이 끝끝내 너에게 들어간 것도 어쩌면... 운명이겠지."
그때 거대한 형체가 관로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새하늘 아버지가 뱉어낸 청소부였다.
"꾸르르르륵."
멀리서 보았을 땐 거대한 꽃나무가 흩뿌리는 꽃가루처럼 조그맣게만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 널찍한 관로를 모조리 메울 정도로 거대했다.
갈고리처럼 생긴 흉측한 발톱이 빽빽이 들어찬 촉수들이 꿈틀거리며 관로를 따라 들어오기 시작했다.
상원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놈들과 맞서면 반드시 죽는다.
탈락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정말로, 죽는다.
군주가 말했다.
"이제 가라."
그 말을 끝으로 군주의 입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한참 동안 상원을 바라보았다.
한때 권좌에 앉아 새하늘 시험을 조율하던 존재, 그 강대한 능력으로 새하늘의 시간마저 멈출 수 있었던 자, 승천자 '황금시대의 군주'가 그렇게 완전히 사라졌다.
"꾸르르르륵."
청소부의 촉수들이 상원을 감싸기 시작했다.
갈고리발톱을 따라 존재 자체를 좀먹는 강력한 독기가 흐르고 있었다.
오수가 풍기는 지독한 악취가 강해졌다.
아아, 저 청소부 놈들에게서도 이 악취가 나고 있었다.
상원은 고개를 돌려 청소부를 바라보았다.
둥그런 머리를 빽빽하게 뒤덮은 새빨간 눈, 거기에 용과의 씨앗처럼 박힌 초록색 눈동자에서 상원은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오로지 공허뿐이었다.
그때 눈앞에 황금빛 가루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상원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황금시대의 군주가 그랬던 것처럼, 상원의 손도 옷도 몸도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황금빛 가루가 관로를 흐르는 오수를 따라 저 멀리로 흩어져갔다.
"꾸르르르륵."
갈고리발톱이 상원의 어깨를 파고들자 지독한 한기가 느껴졌다.
먹이를 삼키는 문어처럼 청소부가 촉수 사이에서 아가리를 꺼냈다.
새의 부리처럼 생긴 입속에 줄지어 늘어선 날카로운 이빨들 사이로 싯누런 타액이 끈적거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청소부의 아가리 속에 미처 다 소화되지 않은 유해들이 보였다.
청소부의 부리가 상원을 덮쳐 왔다.
날카로운 이빨이 상원의 볼에 닿았다.
상원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시계가 멈추는 소리가 났다.
철컥
관로도 오수도 청소부도 황금빛 모래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 * *
눈을 떴을 때 상원은 시스템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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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체 관리 시스템]
접근이 허가된 정보만 표시됩니다.
레벨 19 (96%)
성능: 괴력 90, 용력 100, 술력 90
스킬: 요새 수호자의 시선(3), 하늘의 불씨(3), 지하의 문(2), 동굴적 감각(3), 원혼 군주의 절규, 좀비 소환 (더 보기)
미사용 스킬포인트: 3
강신회로: 태초의 대족장
달성 업적: 네번째 문의 봉인자, 신성제국의 구원자, 생명나무 뱀 살해자
일곱 별의 왕관 진척도: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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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뱀 살해자', 일곱 별의 왕관을 이루는 세 번째 업적이 달성 업적 목록에 들어와 있었다.
그 덕에 레벨이 3이나 올랐다.
레벨업 시스템이 몸을 회복시켜준 덕에 몸은 더없이 가벼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건 전에 있었던 항목 하나가 아예 사라져버렸다는 것이었다.
바로 '모래시계 충전 시간'.
전처럼 모래시계를 모두 써서 0초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 항목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다음번이 마지막일 거라던 '기계장치의 신'의 말이 생각났다.
그렇다.
눈앞에서 '황금시대의 군주'가 남긴 환영이 사라질 때, 황금시대의 모래시계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상원은 깨달았다.
방금 전 겪었던 그 꿈같은 일이 현실이었다는 걸.
끝없는 지하에서 지하의 수호자를 만나고 엘가를 따라 타르타로스로 갔던 일.
타르타로스에서 황금시대의 군주를 만났던 일.
새하늘과, 새하늘의 우주 그리고 새하늘 아버지를 만났던 일.
새하늘에 오른 승천자들의 원형에 대해 들었던 일.
그 하나하나, 모두가 현실이었다.
의체 관리 인터페이스에 더 이상 '모래시계 충전 시간'이 나타나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상원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이제 더 이상 회귀할 수 없다.
든든한 보험 하나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상실감이 들지 않았다.
'아니야, 잃어버렸어.'
상원은 마음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깨달았다.
'일곱 별의 왕관'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걸 완성하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할 동기가 사라져버렸다.
왜냐하면, 새하늘의 구원은 거짓이라는 걸 깨달아 버렸으니까.
'박피 단검'이 상원의 손에서 힘없이 떨어졌다.
머릿속에 '원탁의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 이보게.
'아아, 이 사람이 같이 있었지.'
상원은 살짝 웃으며 그 원형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 아더.
- 뭐라고?
역시나, 아더의 혼이 어찌나 거세게 떠는지 상원의 몸까지 벌벌 떨릴 정도였다.
- 아닙니다.
힘없이 대답한 상원은 저 멀리서 발광하고 있는 거대한 괴수를 보았다.
사방을 향해 시퍼런 냉기를 내뿜으며 포효하고 있는 괴수, 이무기 해원향이었다.
'저것의 원형은 무엇이지?'
상원은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껍질을 벗고 하늘에 올라 용이 된 이무기가 어디 한둘인가?
상원은 말없이 돌아섰다.
원탁의 왕이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 아니, 어디 가는 건가?
상원은 눈을 감고 돌아섰다.
- 저대로 두어도 몇 분 뒤면 저절로 껍질이 붕괴되어 하늘에 오를 겁니다.
- 아니 그래도....
"이제 됐습니다."
상원은 바위에 박힌 검을 향해 말없이 걸어가 칼을 뽑아냈다.
머릿속에서 울리던 왕의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이제 어찌해야 하나.
저 위로 거대한 별들이 꿈틀대는 우주가 보였다.
그 사이로 어쩐지 발톱이 가득 달린 촉수를 본 것만 같아, 상원은 구역질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